Essay
중국전통건축답사기
한국건축역사학회 하계답사 : 2016. 6. 26 ~ 6. 30
제1일
6월 26일(월)
한국건축역사학회의 중국 전통건축 답사에 참가하기 위해 급히 전철을 탔다. 오전 7시 김포공항 집결시간에 맞춰 도착해야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2층 1번 게이트 앞에 일행으로 보이는 분들이 몇 분 서 있었다. 다가가 물어보니 가이드는 항공권을 발급받는 중이라고 했다. 여행사에서 보내온 명단을 보니 아는 분들이 많지 않았다. 잠시 후 이호열 회장이 다가와 인사를 나눴다. 조정식 교수와 남명식 전 삼성물산 상무 그리고 정세현씨는 인천공항으로 잘못 가서 이리로 오고 있다고 했다. 잠시 후 인천 공항으로 갔던 분들이 한 분씩 도착했다. 긴장된 표정으로 김포에서 출발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 시간 여유가 있었다.
이번 답사의 참석자는 한국건축역사학회 이호열 회장과 서보화 사모님, 학회 부회장인 동국대학교 조정식 교수, 학회 지역이사인 조영화 사단법인 교남문화유산 원장, 최태길 전 밀양대 총장, 경남대학교 김태중 교수, 동원대학교 이병건 교수, 북경공업대학 김준봉 교수, 인토건축사사무소 정경석 소장, 명진건축사무소 장병정 소장, 경남대 OB 김인수 총무, 남명식 전 삼성물산 상무, 강병희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강사, 여행작가인 한선영씨, 대만대학교 예술사연구소를 수료한 심명주씨, 이번 답사에서 현지 설명을 담당할 차주환 목원대강사, 서울대 박사과정을 수료한 허유진씨, 인토건축사사무소 김상철 실장, 고려대 석사과정에 있는 정세현씨, 고려대 한국사학과 4년 이강원씨, 한예종 건축과 3학년에 재학중인 정소이 학생, 그리고 나까지 모두 22명이었다. 차주환 박사는 2년전 중국 청화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공자여서 이번 답사가 더 기대되었다.
함께 출국 수속을 밟고 잠시 대기하다 비행기에 탑승해 10시 30분 북경제2공항에 도착했다. 올림픽을 위해 건설된 공항인데 인천 공항보다 3배가 크다고 했다. 지붕이 트러스로 짜인 대스판 구조인데 특이한 것은 지붕판을 보가 지지해 기둥에 힘을 전달하는 프레임 구조가 아니고 한 개의 거대한 판을 형성해 군데군데 기둥을 받쳐 지지하게 한 구조이다. 그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삼각형 천창에서 빛이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입국심사대에는 길게 늘어선 인원이 빠져 나가느라 시간이 한참 걸렸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셔틀기차 승차장으로 한 층을 내려갔다. 이 공항은 화물을 찾는 곳과 출국장까지 셔틀기차를 타고 다시 이동하는 불편이 있다.
화물 수취장에 도착해 여행 가방을 찾고 밖으로 나오니 가이드가 마중을 했다. 버스 탑승 가이드 이승훈 씨가 자기소개를 했다. 젊은 인상인데 백두산 인근 연변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살고 있고 가이드 경력 8년이라고 했다.
공항에서 이화원까지는 40분 정도가 소요되는데 이화원 가까운 곳에서 현지식으로 점심 식사를 한 후 이동한다고 했다. 요새 현지식은 한국인 입맛에 맞게 한다고 했다. 버스가 식당 가까이 도로 건너 맨 앞 건물 2층에 위치한 식당으로 올라갔다. 중국에서는 가이드와 버스 기사는 따로 식사하는 게 관례라고 했다. 일행은 11명씩 두 개의 원탁에 둘러 앉아 식사를 했다. 쌀밥과 찐빵, 그리고 7가지 정도의 요리가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차에 올라 이화원을 향해 출발했다.
○ 이화원
이화원 가까이 도착할 즈음 가이드가 갑자기, 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가 다른 일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며, 버스를 갈아타야 된다고 했다. 버스에서 내려 200m 정도 걸어 문창원으로 들어섰다. 문창원은 이화원 동쪽에 위치하는 황가원림 문물 전시관이다.
이화원은 원래 금나라의 행궁으로 조성되었던 곳이다. 그 후 청나라 때 다시 행궁과 대규모 원림이 건설되면서 황실 정원으로 사용했으나 1860년 2차 아편전쟁 때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파괴된 것을 1888년 서태후가 자신의 환갑 축하연을 하기 위해 곤명호에서 해군 훈련비용 명목으로 세금을 걷어 30만 냥을 재건 공사에 충당하고 당시 청의원의 명칭을 이화원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그 일이 청일전쟁의 굴욕적인 패배와 무관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이화원은 그 후 1890년 의화단 사건으로 파괴된 것을 1902년 서태후가 다시 재건한 모습이다.
이호열 회장이 지춘정(知春亭) 앞에서 각자 흩어져 자유롭게 보고 3시 30분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전에 한번 와 본 곳이라 길을 헤맬 염려는 없을 것 같았다.
호안을 따라 걷다 이화원의 침전영역에 있는 덕화원(德和園), 미수당(迷壽堂)을 지나 회랑을 통해 이화원의 중심인 만수산(萬壽山)으로 향했다. 만수산으로 오르는 입구 쪽에서 다시 입장권을 사서 배운문으로 들어서자 그 안쪽에 배운전(排雲展)이 화려하게 놓여 있었다. 배운전 자리에는 원래 대웅전이 있었는데 아편전쟁 때 불타 없어져서 서태후가 환갑을 맞아 생일을 축하받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정전(正殿)격인 그 건물 정면에는 만수무강(萬壽無疆)이라고 쓴 큰 현판이 걸려 있고 그 내부에는 서태후가 앉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앞 마당에는 청동으로 섬세하게 만든 봉황과 용 조형물이 좌우에 대칭으로 놓여 있었다. 그 뒤로는 덕휘전과 불향각이 높은 축대 위에 조성되어 있고 그 축대를 오르는 경사 계단이 좌우 대칭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20m 높이의 석조기단 위에 놓인 불향각은 팔각형 건물로 높이는 36.44m이다.
만수산 정상의 불전인 보운각에 올라 내부를 보고 밖으로 나와 주변을 돌아보았다. 만수산은 곤명호를 확장하면서 파낸 흙을 쌓아 만들었다고 하는데 높이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지만 정상에 오르면 곤명호 전체가 조망된다. 그리고 만수산 뒤쪽의 너른 정원과 길이 연결되어 있다. 보운각은 지금도 사찰로 쓰이고 있는데 서태후가 승려들을 한명씩 골라 하룻밤을 보내고 죽였다는 예기도 전해지고 있다. 서태후는 측천무후와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되는 인물인데 측천무후가 사악한 권력 찬탈자이면서 훌륭한 통치자로 평가되는 비해 서태후는 사악한 찬탈자이자 개인적인 사치에 더 마음을 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만수산 정상부에서 호수쪽을 조망하다 보운각과 불향각을 한 화면에 담아 스케치하고 내려와 집결장소로 가는 도중 침전 영역의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너른 원림 안에 각각의 담장을 두른 여러 가지 시설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각기 건물이 마당을 둘러싸며 질서를 갖추고 있었다.
휴게소로 쓰고 있는 곳을 들어서는 문 입구에 서태후 사진이 보였다. 그 인상에서 강한 권력의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현재의 이화원의 인상은 그러한 권력과 권위에 의해 표출되는 느낌이 느껴졌다. 엄청난 권력을 감내할 수 있을지, 사람들마다 다른 품성이 있을 것이다.
3시 50분 이화원을 나와 4시 17분 계현으로 출발했다. 내일 아침 볼 독락사가 있는 계현까지 2시간 거리라고 했다. 일행이 탄 버스가 북경시내를 벗어날 때까지 차가 막혔다. 북경은 차량이 많아서 추가 번호판 발급을 엄격히 제한하기 때문에 차량을 새로 보유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북경외곽으로 나와 고속도로로 접어드니 버스가 시원스레 달렸다. 너른 평야지대에 펼쳐진 초원 뒤로 멀리 나지막한 산세가 둘러쳐 보였다.
중국의 자연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 황량하기도 하고 깊고 울창하기도 하며, 평이하기도 하고 수려하기도 하다. 차내는 모두 잠에 빠져들어 조용했다. 17시 56분 차창 밖 초원사이에 드문드문 1층 붉은 벽돌 주택들이 보였다. 현대적인 도시로 변모하기 이전의 중국의 체취가 느껴졌다. 북경에 사는 사람들도 이러한 곳을 지나며 향수가 느껴질 것 같았다. 계현에 다가갈 즈음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고 예기를 시작해 일행이 깼다. 내일 아침 관람할 독락사는 화엄사와 함께 요나라 시대 남아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라고 했다.
톨게이트를 지나 도시내부로 진입했다. 마을 입구에 톨게이트가 기념물처럼 큰 조형물로 되어 있었다. 도시 내부 가로 주변을 바라보니 옛날 집과 새로 지은 집들이 복합되어 있었다. 옛 집들은 마당이 있는 연립식 1층 구조인데 구운 흙벽돌 벽에 붉은 기와를 얹었다.
6시 17분 숙소인 선양빈관에 도착했다. 가이드가 차 안에서 객실 명단을 부르며 방 키를 나누어 주었다. 정세현씨와 룸메이트가 되어 함께 80730호에 여장을 풀고 창가로 다가가니 시가지가 보였다. 정세현씨가 그 사이 샤워를 하고 나왔다. 짐을 두고 7시 30분 2층 식당으로 내려가 뷔페식 식사를 했다.
식단 음식이 짠 편이라 입에 맞는 것이 별로 없었다. 빵이 가장 무난해 보여 빵 2개와 계란 1개 그리고 과일을 접시에 담아 정세현씨와 빈 테이블에 앉았다. 심명주 선생은 과일만 담아 앞자리에 앉았다. 여행작가인 한선영씨도 그 옆 자리에 앉아 여러 가지 예기들을 했다. 옆자리에 앉은 허유진씨가 백주 한잔 하겠느냐고 하더니 배식대에 진열된 46도와 62도 고량주 작은 병 두개를 가져와 고르라고 했다. 내가 62도 술이 어떻겠느냐고 하니 모두 그러자고 했다. 그들과 함께 나눠 마시는 동안 조병화 이사, 차주환 박사 등이 차례로 합석해서 즐겁게 술을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와 핸드폰과 카메라 배터리, 노트북을 콘센트에 연결한 후 방에서 분주해 보이던 거리로 나가 조금 걷다 돌아왔다.
제 2일
6월 27일(월)
아침에 잠에서 깨어 밖을 내다보니 시가지가 온통 고요한 느낌이었다. 가까운 곳에 낮은 저층 연립주택들이 보이고 멀리 뒤편에 고층아파트가 드문드문 보였다. 그리고 멀리 도시를 감싸며 높지 않은 산들이 둘러쳐 있었다. 잠시 후 동이 트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도시가 느리고 조용한 느낌이었다. 오늘 볼 독락사가 지어진 시기에는 바라보이는 시가지 대부분이 자연 상태였을 것 같았다.
5시 50분 산책을 하러 나와서 창 밖에서 보이던 거리로 향하다 문득 어제 호텔에 도착할 때 가이드가 독락사가 1.5k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 정도 거리면 식사 전에 도보로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주 오는 사람에게 독락사를 물어 보니 호텔 앞쪽 길로 가라고 알려주었다. 아침 햇살이 점차 멀리 번져가고 있었다. 대로에서 좌측으로 꺾여 가다보니 고루(古樓)가 나왔다. 그 로터리에서 우측으로 가다보니 담장 안에 규범적으로 배치된 전통 건축물이 보였다. 한눈에 그 건물이 독락사일 것 같았다. 담장 너머로 건축의 구조형식이 드러나 보였다.
○ 독락사
독락사는 요(遼)나라 시대 건축으로,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요나라는 916년 ~ 1125년 사이에 중국을 지배했다. 독락사는 그 때 지은 목조 건물이니 천년이 넘게 지탱되어 왔다. 그 이른 시기에 지어진 건물임에도 오늘날 우리가 아는 구조 양식이 정확하게 나타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봉정사 극락전이나 부석사 무량수전 등의 목조 기술의 형성과정에 형향을 준 ‘원형성’을 의식하면서 그 존재가치가 소중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아직 문이 열리지 않아서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주변 문화재 안내도에 백탑사도 나타나 있었다. 시간을 의식해 망설이다 마음먹고 그 곳으로 향했다. 독락사 정문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로터리에서 좌측으로 가다보니 백탑이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길가 사람에게 다시 불어보고 좌측 골목으로 접어들어 돌아보니 바로 탑이 보였다. 오대산 백탑사가 유명한데 그와 비슷해 보였다. 거기도 이른 시각이라 문은 열려 있지 않았다.
아침식사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바삐 숙소로 향했다. 아까 올 때는 한가했는데 그 사이 많은 사람들과 차량이 붐비고 있었다. 보도에는 등교하는 학생들과 출근하는 어른들이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3층 식당으로 올라가니 일행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탁마다 붉은 테이블보가 깔려 있었다. 적당한 게 없어 빵과 과일을 먹고 8시 출발시간에 맞춰 로비로 나왔다. 날씨도 맑고 일행들도 다 건강하고 밝은 표정이었다.
8시 10분 호텔을 출발해 독락사로 향했다. 아까 걸어갈 때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는데 길이 막혀 걷기보다 오히려 시간이 더 많이 걸리는 듯 했다. 8시 30분 독락사 앞에 도착했다. 아까와 달리 문이 열려 있어서 안쪽이 보였다. 가이드가 표를 사는 동안 가까이 다가서며 바라보았다. 산문 내부 좌우에 우리나라 사찰의 천왕문처럼 금강역사가 보였다. 그 앞에 선 근무자가 아직 입장표를 내지 않은 상황이라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다. 중국 건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건물을 실제로 접하는 마음에 어서 빨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잠시 후 표를 내고 안으로 들어서며 차박사가 입구 산문 구조를 보며 설명을 했다. 독락사 공포는 행공첨차가 없고 건물의 직각 방향으로 놓인 살미첨차만 짜여져 있었다. 그리고 첨차의 끝 부분은 쇠서 등의 장식 없이 직절(直切)되어 있고 소로에는 굽받침이 없었다. 중국 건축은 보통 지붕 기와를 얹을 때 개판과 보토를 사용하지 않아서 지붕 무게가 가볍기 때문에 지붕을 받치는 서까래의 굵기가 가느다란 편이며 지붕도 가볍게 보인다.
산문 뒤편의 관음전은 984년(요, 통화 2년)에 중건된 2층 건물인데 암층이 있어 3층처럼 보인다. 상하층 기둥이 연결되지 않고 잘려 있는데 암층에 의해 구조 보강이 되어 있었다. 관음전은 상층부가 하앙식으로 되어 있고 외주 기둥은 안쏠림이 심하게 되어 있었다.
내부에 모셔진 관음상은 높이가 매우 높아서 2층 천정까지 닿았다. 그 머리 부분에 11면 관음상이 보였다. 미술사를 전공하는 강병희 교수가 11면 관음상은 활짝 웃는 얼굴, 웃는 얼굴, 찡그린 얼굴, 아주 찡그린 얼굴이 다양하게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구원하겠다는 의미라고 했다. 관음전 후면에 작은 육각형 건물 안에는 위태천(韋駄天)상이 놓여져 있었다. 보통 신중탱(神衆幀)의 화면 중심에 갑옷과 투구를 쓰고 창이나 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분인데 전각에 모셔져 있었다. 그리고 그 후면에 놓인 대웅보전을 보고 독락사를 나와 9시 40분 일정에 없던 백탑사로 이동했다.
○ 백탑사
이곳 계현의 백탑사 탑은 오대산 백탑사와 닮은꼴인데 규모는 훨씬 작았다. 정면에서 바라보니 상부 탑이 조금 뒤틀려 있었다. 그리고 하부의 기단 형식과 재료나 가법에서 시대적 차이가 나 보였다. 그 것을 바라보며 일행들이 다양한 의견들을 예기했다. 강병희 선생과 차주환 박사가 상부 구조물은 라마교 풍이고 후대에 보수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상부 탑신의 원형 형태는 티베트 등지의 라마교 불탑과의 유사성이 느껴졌다.
앞쪽에 놓인 수조에 연꽃이 자라고 있어 기단부 연꽃무늬 조각의 의미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아까 대문 열쇠구명으로 사진을 찍었던 위치로 가서 보니 해가 솟아 더 희뿌옇게 보였다.
계현을 떠나 다시 어제 왔던 길로 북경을 향해 이동했다. 가이드가 1시 30분에 식당에 도착 예정이라고 했다. 거기서 식사를 한 다음 기차를 타고 태원까지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결국 어제 오후부터 하루 동안 독락사 한곳만을 보고 이동하는데 시간을 다 쓰게 된 셈이었다. 다시 북경에 도착해 한식당에서 된장찌게 메뉴로 점심 식사를 했다. 보글보글 끓는 찌게에서 구수한 냄새가 풍겨나 식욕을 돋구웠다. 식사를 마치고 길가에서 회원들이 한가롭게 예기를 나눴다. 모두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다.
일행은 북경2역으로 이동해 3시 6분 태원(太原)행 고속열차에 탑승했다. 태원까지 580km 거리인데 숙소까지 5시간 정도 이동해야 한다고 했다. 좌석에 앉자마자 잠을 청해 자다 깨었다. 다른 회원들도 잠에서 깨어 예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광판에 기차가 시속299km로 달리고 있었다. 창밖에 펼쳐 보이는 자연 풍경이 색다른 느낌으로 느껴졌다. 평지에 호우가 쏟아질때 연한 지반이 패여 생긴 단애협곡들도 보였다. 이 지역은 흙이 마치 밀가루처럼 보드랍게 생겨서 급류에 쉽게 패여나갈듯 했다.
5시 50분 태원역에 도착해 광장으로 나갔다. 태원은 산서성의 성도(省都)인데 도시가 크고 번화해 보였다. 역사나 그 주변 시설들도 세련된 모습이었다. 급속히 성장한 경제력에 바탕하여 도시와 건축의 모습이 나날이 발전되어가는 듯하다. 중국에 가끔 들르게 될 때마다 그 변화가 피부로 느껴진다. 역 광장으로 나와 현지서 이동할 2층 버스에 탔다. 가이드가 태원에 3대 밖에 없는 차라며 마지막 날까지 타게 될 거라고 했다. 1층에는 운전기사석과 짐칸이 있고 승객은 2층에 앉게 되어 있었다. 차에 올라서면서 운전기사와 눈인사를 했다. 체구가 크진 않지만 몸이 단단하고 선한 인상이었다. 거기서 평요까지 다시 버스로 4시간 30분을 이동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도 근래 도로가 정비되어서 그렇지 전에는 7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기차를 타고 지나온 하북성과 산서성 사이에는 길이 600km의 태항산맥이 남북으로 걸쳐 지나고 있는데 구련산, 팔리구, 동태항산, 고무당산 등은 빼어난 자연 경관을 갖추고 있어 트레킹 코스로 유명하며 태항산맥 서쪽에 위치한 산서성은 황토고원을 이루어 계단식 밭이 많고 낮은 산간지역에는 전통적인 동굴식 주거가 발달해 있다. 그리고 황하의 지류인 분화강이 흐르며 중국의 8대 명산 중 운대산, 면산, 태항산 등 3곳이 이 지역에 있다. 산서성은 황하문명의 발상지로서, 중국의 4000년 이상의 역사를 보려면 산서성에 가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오랜 중국 역사의 숨결이 깊이 숨 쉬고 있다.
가이드가 산서성은 중국에서 가장 작은 성(省)으로 칼도면, 술, 식초가 유명한데 석탄자원이 풍부해 이곳에서 채굴한 석탄을 실어 나르는 기다란 석탄열차를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관우의 고향이어서 이 고장에서는 그를 신으로 섬긴다고 한다. 산서성은 예로부터 전쟁이 많았던 지역인데 삼국지에서 18로 제후 연합군이 동탁을 격파하기 위해 모인 곳이기도 하다. 원소는 북경을 기반으로 하고 조조는 바로 이곳이 기반이었다. 그 때 의병을 모은 조조와 제후들이 힘을 합쳐 동탁을 격멸하고 승리함으로써 조조가 크게 부각되었다.
평요가 가까워질즈음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키 큰 가로수 길에 차가 막히지는 않는데 차가 아주 느리게 이동했다. 이호열 회장이 가이드에게 왜 이리 더디게 가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전망대 같은 앞좌석에 앉아 평요고성(平遥固城)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는데 이미 어두워진 상태였다.
잠시 후 평요로 접어들어 시내 가로를 지나다 보니 좌측에 고성의 모습이 보였다. 직선으로 된 긴 성벽 곳곳에 치가 솟아나와 있고 그 위로 맞배지붕으로 된 루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벽 전체가 전돌로 덮여 견고한 인상이었다. 버스가 식당 옆 도로가에 멈췄다. 깜깜함 밤이 되어 가로의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하게 보였다. 바로 옆에 고층 건물 2층에 식당이 있다고 했다. 1층 내부에 들어서니 공사를 하고 있어 어수선한 느낌이고 식당으로 연결된 통로는 미로처럼 한참을 돌아들어갔다. 식사를 하면서 내일 아침 일정표대로 진국사를 볼 사람과 평요고성에 남아 돌아볼 사람들의 인원파악을 하니 반반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평요고성 입구주차장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전동차에 나눠 타고 고성 내부로 진입하여 숙소로 향했다. 북문으로 들어서 이리 저리 골목을 지나가는데, 처음에는 들어온 곳이 가늠 되었으나 점차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아마도 주도로가 관광객들로 붐벼서 일부러 골목길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9시 43분 숙소인 평요회관에 도착했다. 전통식 건물에 1층과 2층 객실 앞에 매달린 붉은 등이 밝혀져 휘황찬란한 분위기였다. 209호실 방문을 여니 안쪽에도 전통식 분위기로 되어 있었다. 함께 방을 쓰는 정세현 씨가 만족스러워 하며 사진을 찍었다. 시건장치가 열쇠를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그가 방에 짐을 두고 야경을 보러 나갔다. 나는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충전을 하며 기다리다 조금 늦게 나가 혼자서 돌아보았다. 어쩔땐 핸드폰 사진이 더 잘나올 때가 있었다.
남동측 모서리 지점으로 후문을 통해 나가니 술집에서 음악이 흘러나와 흥청거리는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다시 정문으로 나와 돌아보다 이회장 가족, 정소장 일행들과 만나게 되었다. 지나면서 사진을 찍어주고 계속 걸어가다 중앙 교차로 지점에서 남문으로 나가 돌아보았다. 이중문에 옹성 부분이 사각형 구조로 되어 있고 내부 측면에는 대포도 놓여 있었다. 다시 숙소 후문을 통해 객실로 돌아왔다. 평요고성은 실제 생활이 영위되는 유적으로서 고성의 구조에 맞춰 현대 생활이 조화를 이루며 영위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역사적 삶의 공간이기보다 상업공간화 되어 있었다.
제3일
6월 28일(화)
일찍 일어나 아침식사 전에 거리를 돌아보려고 정세현 씨와 함께 숙소 정문 쪽으로 나갔다.
5시 15분인데 아직 문이 자물통으로 잠겨 있었다. 문지기에게 부탁해 문을 열고 가로로 나와 서쪽으로 조금 이동하다보니 우측에 문묘가 보였다.
○ 평요고성
문묘를 지나 성곽 안쪽을 따라 걸어가면서 성곽 위로 올라가는 길을 찾으며 걸었으나 눈에 띠지 않았다. 동서남북에 설치된 대문 사이의 작은 문 밖으로 나와 성곽의 외부를 보았다. 성곽 아래에 아침 기공체조를 하는 분들이 두어 분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무도인들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하는 그들의 삶이 건강하게 느껴졌다.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 성곽 안쪽 길을 따라 걷다보니 흙만 앙상히 노출된 곳이 보였다. 토벽을 먼저 축조한 후 전벽돌을 겉에 붙이는 방식으로 축조한 듯 했다. 길가에는 공사 중 표지가 세워져 있는 구간도 있었다. 계속 앞으로 가다보니 성루로 오르는 계단이 보였다. 하지만 그 위에 놓인 문은 잠가져 있었다. 한 여자 분이 그 계단을 반복해 오르내리며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 계단으로 여장 부분까지 오르니 시내가 넓게 조망되었다.
평요고성 동쪽 외곽을 걸어가다 모서리에서 북측 성곽 쪽으로 꺾어 걸음을 옮기니 길게 외곽 가로가 트여 보였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 드문드문 골목길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성곽 안쪽 가로를 따라 연속된 담장들이 구획을 이루고 있고 그 안에 집과 마당이 조합되어 있었다. 그 좁은 안 골목에 면한 집들은 삶의 체취가 더 배어났다. 그리고 성곽과 가로 그리고 건축의 조합에서 도시적 일체성이 느껴졌다.
잠시 후 북문에 도착해 거기서부터 각자 돌아보기로 하고 밖으로 나가 북문 정면을 바라보니 견고하고 당당한 고성의 자태가 느껴졌다. 어제 버스가 도착한 주차장은 비워져 있고 동측 해자 옆 도로에는 아침 시장이 열려서 채소 등을 펼쳐놓고 팔고 있었다. 그 곳 주변을 돌아보며 스케치를 하고 북문에서 남문으로 향하는 중심가로를 걷다 조감 풍경을 보려고 아까 성곽으로 올랐던 계단을 찾아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 길을 쭉 나가면 성곽에 다다를 줄 알았는데 골목이 미로처럼 되어 막다른 길이 나왔다.
다시 길을 찾아 내부 성 안을 내려다 본 후 성 바깥으로 나가 남동쪽 루를 지날 즈음 정세현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에게 제대로 식사할 시간이 없을 것 같으니 만두 두 개만 싸달라고 하면서 가까이 성내로 들어설 수 있는 남문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남문 앞쪽 숲 너머로 어제 일행과 저녘식사를 했던 시가지가 보였다. 남문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체조를 하고 있었다.
남문을 들어서면서 어제 밤에 잘 보지 못했던 남문의 구조를 자세히 보게 되었다. 이 곳 성문은 모두 침입에 대비해 이중문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번 여행을 신청하면서 평요고성을 방문한다는 것에 큰 흥미를 가졌었다. 하지만 사전에 알고 있던 것과 다른 모습이어서 잠시 당황스러웠는데 다시 생각하니 내가 떠올린 곳은 평요 가까이 있는 장비고성으로 그 곳과 혼동하고 있었던 듯 했다. 자료에서 본 장비고성은 그야말로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남문으로 들어서서 식당을 찾아 들어서니 일행들이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 나오고 있었다. 정세현씨가 빵과 옥수수 한 토막을 싸 두었다가 건네주었다. 거기서 진국사(鎭國寺)를 보고 올 11명과 평요고성에 남아 그 곳을 보기로 한 일행과 잠시 작별을 하게 되어 눈인사를 나누었다.
7시 40분 작은 승합차 2대에 나눠 타고 진국사로 출발했다. 너른 밭에 심은 작물과 가로수 숲 모두에서 무성해진 녹음이 투사된 아침 안개가 그윽한 느낌을 주는 교외 풍경과 마주쳤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인류의 역사 가운데 세상의 모든 곳에서 나라를 세우고 뺏고 빼앗기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초들이 고통을 겪어왔지만 세계 어디를 가든 농촌은 삶을 지탱해줄 것 같은 푸근함이 느껴진다. 농촌은 삶에 필요한 먹거리를 가꾸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뿐 권력의 힘으로 남을 지배하려는 곳이 아니다. 승합차가 긴 가로수 터널을 지나가다 끝 지점이 가까워지니 건물이 보였다.
○ 진국사
8시 진국사 앞 주차장에 도착했다. 앞 표지석에 평요고성 세계문화유산이라고 쓰여 있었다. 평요고성 문화유산은 그 인근의 문화유적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진국사는 평요고성에 사는 사람들의 왕래하던 사찰이었을 것 같았다.
7시 52분 진국사 산문으로 들어섰다. 아직 이른 시각이라 아침에 깬 새들의 지저귐이 경쾌했다. 경내는 건물과 나무가 어우러져 상쾌한 느낌을 자아냈다. 조금 안으로 들어가니 좌측에 배치도가 표지판에 그려져 있었는데 그를 보니 정연한 축이 설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앙로에서 좌측으로 꺾여 들어가니 그 배치도대로 앞쪽부터 천왕전, 만불전, 삼불루 등의 건물들이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먼저 앞에 놓인 단층 팔작지붕의 진국사 만불전을 돌아보았다. 963년(五代, 北漢 天會7년)에 건립된 중요한 건물이었다. 연등 천정이라 내부 구조가 그대로 노출 되어 부재들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 특히 하앙의 뿌리부분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구조가 튼실하게 되어 있고 내부 불상은 격조 높게 되어 있었다. 그 후면의 건물은 2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1층은 마치 2층의 기단처럼 일부가 평지붕으로 되어 있고 외부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있었다.
오래된 건물에서 오래전 사람들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비교하면서 그 이후 시대에 따른 문명의 변천을 느낄 수 있다. 10세기에 지어진 그 곳 건물들을 돌아보면서 우리 전통 건축과 구조형식적 연관성을 느낄 수 있었다. 동양의 목조 건축은 여러 부재를 잇고 짜 맞추는 방식의 전통이 이어져 왔으며 목조의 특성을 반영한 규범성과 양식성을 이루어 왔다.
진국사를 나와 평요고성에 남은 일행들과 합류하기 위해 타고 온 승합차를 타고 그 쪽으로 향했다. 8시 50분 다시 고성으로 돌아왔다. 평요고성을 보는 사람들이 조금 늦게 나와서 북문에서 기다리다 그 암문 부분까지 들어가 본 다음 성문 입구에서 팔고 있는 작은 기념품을 하나 샀다. 그리고 주차장 앞에서 잠시 기다리니 나머지 일행이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후 함께 버스에 타고 진사로 향했다.
○ 진사(晉祠)
진사는 춘추시대의 진(晉)나라(진시황이 세운 진(秦)나라와 다름) 개국공신인 당숙우와 그의 어머니이자 주무왕의 아내인 ‘읍강’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사당인데, 원래 명칭은 당숙우사였다고 한다. 진사의 주 영역은 1102년 송나라 시대에 지은 성모전을 중심으로 그 앞에 놓인 십자형 다리인 ‘어소비량’ ‘헌전’ 등이 축을 따라 배열되어 있었다.
주전(主殿)인 성모전은 정면7칸, 측면 6칸이며 다포식 구조에 2층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고 전각 전면은 회랑으로 되어 있는데 전면 기둥은 모두 기둥을 휘감은 용 조각이 부착되어 있다. 그리고 그 내부 중심에 놓인 성모(聖母)상을 중심으로 그녀를 보좌하는 43명의 시녀상이 설치되어 있는데 모두 채색한 진흙을 빗어 만든 것으로 성모전, 고목과 함께 진사 삼절(三絶)로 꼽힌다. 그리고 진사 경내에는 수령이 오래된 고목들이 많아 더욱 특이한 인상을 풍기는데 성모전 우측면의 측백나무는 주나라때 심어진 것으로 수령이 3000년이라고 한다. 성모전의 정문격인 헌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서 1168년(금나라 시대)에 지어졌다. 그리고 성모전 앞에 놓인 어소비량은 네모난 연못 위를 지날 수 있게 십(十)자 형태로 설치한 교량이다. 성모전 영역 주변에는 명대와 청나라 시대 지어진 건물들이 성모전 축과 직각 방향으로 경사지형을 따라 각각의 영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고 밖으로 나가는 쪽에도 다른 시설들이 너른 부지위에 펼쳐져 있어 광활한 영역을 이루고 있었다.
진사 관람을 마치고 나와서 입구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정소장이 약이라며 출국때 가져온 팩소주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하루하루 더해 갈수록 일행들은 자연스레 친분이 쌓여진 듯 편안한 분위기가 되었다.
○ 응현목탑(불궁사 석가탑)
진사를 출발해 응현목탑에 도착했다. 주차장 옆에서 서커스 공연을 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 구경하며 왁자지껄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목탑 쪽으로 도로를 따라 걸어갔다. 진입로 우측 상가에 관광 상품이 진열되어 관광지 분위기가 물씬 풍겨났다. 200m 정도 걸어가니 좌측 대문 너머로 우람한 목탑 모습이 보였다. 광장을 지나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가니 목탑의 전경이 보였다. 하지만 기단부를 공사용 가림막이 가리고 있어서 기단부터 온전하게 보이지 않아 조금 아쉬웠다.
세계 3대 불가사의 탑에 꼽히는 응현목탑은 1056년 세워진 5층 탑으로써 높이는 67.31m인데 옆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기단위에 1층, 수층, 2층, 3층, 4층, 5층 그리고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2층부터 5층까지는 구조적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암층을 설치했다. 기단 위로 올라서서 탑 안으로 들어서니 1층 전면에 큰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 거기서 2층위로는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혀 있었다.
목탑 뒤로 들어서니 단층 전각인 지장전(地藏殿)이 세워져 있었다. 그 주변을 이곳저곳 돌아보고 나오면서 다시 목탑 내부를 한 바퀴 돌아 나왔다. 탑 주변에 전시된 탑 내부 사진을 보니 각층에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 각층이 각각의 다른 불상을 모신 전각 구실을 하면서 모든 부처를 다 모시고자 한 듯 했다. 외부에서 볼 때도 각 층마다 다른 명칭의 현판이 걸려 있어서 탑 전체가 불국토를 상징하는 듯 느껴졌다. 입구로 되돌아 나오면서 일행의 마음이 여유로워진 듯 한가하게 주변 사람끼리 많은 사진을 찍었다.
주차장에 대기하던 버스에 오르면서 차박사가 가이드에게 5분 거리에 있는 정토사 절을 하나 더 보자고 예기했다. 응현 목탑에 오면 꼭 돌아보는 코스라고 했다. 길을 크게 한 바퀴 돌아 도로가에 정차할 동안 갑작스레 비가 내려 우산을 챙겨들고 내렸다. 큰 길 안쪽 골목으로 들어서서 두리번거리며 절을 찾았으나 절의 모습이 눈에 띠지 않았다. 그래도 맨 앞에서 계속 걸어가며 무작정 찾다보니 우측 공터 뒤로 전통 목조 건물이 보였다. 바로 그곳이 정토사일 것 같았다. 잠시 후 그 앞에 당도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발굴중이어서 외부 곳곳이 길게 굴착되어 있었다.
○ 정토사(淨土寺)
경내는 중심에 위치한 대웅보전과 그 전면 좌우측의 지장·관음전, 요사체 등 단출했다. 대웅보전은 보물급으로 중국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다. 주심포와 더불어 주간포가 2개 놓여 있는데 소로, 첨차가 교차로 짜여진 공포가 튼실해 보이며 그 내부에는 금동불상이 모셔져 있고 벽 쪽에는 나한상이 존치되어 있었다. 또한 불상 위 닷집 천정에는 화려한 조각이 되어 있었다. 이 건물은 이른 시기에 지어졌지만 여러 차례 수리를 한 듯 느껴졌다.
정토사를 나와 버스를 타고 대동으로 향했다. 가이드가 대동까지 3시간여가 소요되는데 이동중 5000m의 긴 터널을 지나게 되고 횽노족의 침입에 대비해 흙으로 쌓은 만리장성도 보일 거라고 했다. 만리장성이 쌓인 그 곳 지역은 “기러기 한 마리 넘지 못한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었다.
대동은 고대로부터 미녀가 많은 고장으로 알려졌는데 중국 역사에서 황후 13명, 귀빈 27명이 대동에서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 4대미녀로 꼽히는 양귀비, 왕소군, 초선, 서시 가운데 삼국지에 등장하는 초선이 이 곳 출신이라고 했다.
다시 전원적인 교외 풍경을 바라보며 갔다. 앞좌석에 앉으니 전망이 좋았다. 옆 좌석에 앉은 최총장과 대화를 나누며 갔다. 그 분은 농업경제학 전공인데 이호열 회장과 같은 학교에서 재직하였고 대학 선배이기도 해서 평소 막역하게 지내는 사이라고 했다. 그가 자기에게 이번에 왜 참가했는지 물어보라고 했다. 내가 잠시 침묵하자 “같이 안가면 죽인다고 해서 메가지 끌려서 왔다”고 해서 크게 웃었다. 그동안 그렇게 많은 곳을 함께 여행했다고 했다. 가면서 길 좌우의 식생 상태 등을 유심히 보고 있다고 했다. 가로수로 심어진 포플러는 물을 품는 수종이어서 이런 지역에 알맞다고 했다.
중간에 작은 휴게소에 들러 잠시 쉬고 다시 출발해 한여름 긴 해가 점차 누그러질 즈음 대동으로 들어섰다. 가이드가 내일 일정이 빡빡하다고 하자 이회장이 내일 아침 5시 30분 기상, 6시 30분 식사, 7시 30분 출발하자고 했다.
대동옥부지존호텔에 도착해 2539호실에 들어섰다. 가이드가 객실에 짐만 두고 7시 30까지 바로 식당으로 오라고 했다. 핸드폰을 플러그에 꼽아두고 2층 식당에 모여 식사를 했다. 일행이 22명인데 한 테이블에 11명씩 앉았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두 팀으로 나뉘는 멤버가 거의 고정적이 되었다. 몇 분의 애주가가 계셔서 식사 때마다 맥주, 백주 등으로 반주를 곁들였다.그 날은 식사를 하면서 노백 분주 (산서지역의 유명한 술)를 마셨다. 식사 후 객실로 올라가니 밖에 나갈 사람은 로비로 오라는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가이드가 이 지역에서 유명하다고 한 양꼬치 집에 가자는 것이었다. 로비로 나가 먼저 나와 있던 분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 한 개로 다 갈 수 없어 심명주 선생과 이강원씨만 가기로 하고 둘이 함께 길을 건너갔다. 정세현씨와 나는 건물 모퉁이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그들과 함께 호텔로 돌아갈 생각으로 기다리는 동안 갑자기 번개가 번쩍이더니 천둥소리가 크게 울렸다.
꼬치가게가 멀지 않은 것 같은데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잠시 후 비가 잦아들어서 정세현씨와 함께 꼬치 집으로 가보기로 했다. 꼬치집 분위기도 궁금했다. 꼬치집은 길 건너 모퉁이 바로 옆에 있었다. 사가지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이회장 부부 등이 이리로 오겠다고 했다. 잠시 후 이회장 일행이 도착해 함께 자리를 잡았다. 비닐봉지에 싸주었던 꼬치와 맥주를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잠시 후 최태길 총장과 정병정 소장 일행이 합류해서 분위기가 더 활기롭게 되었다. 함께 양꼬치를 안주로 함께 맥주를 마시는 동안 남명식 상무와 차주환 박사도 도착해 일행이 함께 파티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제4일
6월 29일(수)
잠에서 깨어 세면을 하고 잠시 더 누워있다 06시 30분 식당으로 갔다. 이회장 부부 등 몇 분의 일행이 먼저 와 있었다. 한 테이블에 웃옷을 두고 음식을 담아 그 자리에 앉았다. 뒤에 내려온 분들이 차례로 앉아 함께 즐겁게 식사했다. 야채, 빵, 밥, 계란 후라이, 콘 푸레이크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메뉴가 준비되어 있었다. 7시 30분 출발하기로 하고 버스에 올라탔는데 가이드가 로비에서 체크아웃 하는 시간이 지연되어 8시 10분 출발하게 되었다.
○ 선화사
8시 30분 버스가 선화사 앞에 도착해 내려주었다. 선화사는 산문, 삼성전, 대웅보전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고 그 좌우로 보현각 등이 마주 보도록 놓여 있었다.
사찰의 정문격으로 앞에 놓인 산문은 1123~1148년(금 천회~황통년간)에 지은 건물로 정면5칸, 측면2칸에 우진각지붕이며 산문 내부에는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었다.
그리고 삼성전은 1128년(금 천회6년)에 지은 건물로 정면5칸, 측면4칸의 우진각지붕인데 주간포에 사용된 사공(斜栱)이 특이해 보였다. 사공은 공포 부분에서 첨차가 행공, 살미 첨차 외에 45° 방향으로 추가로 놓인 부재인데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삼성전 내부에는 화엄삼성(비로자나불, 보현보살, 문수보살)을 모시고 있는데 전각 이름도 그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구조가 모두 노출되어 있다.
삼성전 뒤의 선화사 대웅보전은 요대에 지은 것으로 정면7칸, 측면5칸이며 내부에는 34존상이 있다. 그 존상들은 모두 금나라 때 점토로 만든 것인데 대전 중앙에 오방불과 제자 가섭과 나한상이 있고 동서 양측에 모두 25존의 천왕상이 있다. 그리고 대전 내 벽면에는 청나라 강휘년간에 그린 벽화가 있다.
중심 축선의 좌측에 위치한 2층규모의 보현각은 요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1층은 정면3칸, 측면 2칸, 그리고 2층은 정면3칸, 측면3칸으로 되어 있다.
경내는 전체적으로 수목과 잔디가 잘 다듬어져 있는데 보현각 후면에는 너른 연못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 연못 주변에 군데군데 정자가 놓여 있었다. 중국 전통 건축은 대부분 기둥이 벽체 안에 묻혀 있고 외벽이 밀실한 토벽으로 되어 있어서, 기둥 등 구조체가 노출되게 한 한국 전통에 비해 건물의 외관이 두터워 보이는 편이다. 그리고 벽체는 대부분 붉은 채색이 되어 있었다. 9시 30분 선화사를 나와 같은 성내에 있는 화엄사로 향했다.
○ 화엄사
큰 길을 돌아 잠시 후 화엄사에 도착했다. 너른 도로를 따라 이동해 정문에 당도할 때까지 우측에 긴 화엄사 담장이 둘러쳐 있었다. 그 곳은 선화사 주변보다 훨씬 많은 관광객이 북적거렸다. 화엄사 앞 광장에서 전경을 둘러보며 기념사진을 찍는 동안 가이드가 표를 사서 함께 상화엄사 쪽으로 들어갔다. 이 곳 화엄사는 크게 상화엄사와 하화엄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앞에 놓인 보광명전을 지나쳐 먼저 상화엄사의 중심 전각인 대웅보전을 찾아갔다. 상화엄사 편액이 걸린 문을 들어서니 앞에 향로가 놓인 마당이 정면에 단층 건물이 놓여 있었다. 그 건물 좌우로 나 있는 사각형 문으로 들어서니 안쪽에 너른 마당이 있고 그 뒤로 대웅전으로 오르는 높다란 계단이 놓여 있었다. 대웅보전은 1140년 금나라 때 지은 건물로 정면7칸, 측면5칸 규모로 주심포와 주간포가 각각 1개씩 놓여 있는데 양쪽 측칸만 주간포가 3개씩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그런 형식을 다포식이라고 분류하는데 중국에서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했다. 내부의 불단에는 모두 5분의 부처가 보셔져 있고 벽면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중앙부만 우물천정이고 외벽쪽으로는 연등천정으로 되어 있으며 벽면에는 채색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건물의 규모에 비해 불상이 조금 왜소한 느낌이 들었다.
대웅전을 보고 하화엄사의 중심 전각인 박가교장전(薄伽敎藏殿)을 찾아갔다. 박가교장전은 1038년 요나라 시대(중희 7년)에 지은 건물로 정면5칸, 측면4칸 규모인데 그 내부의 사방 벽면에는 장경궤(藏經櫃)라고 하는 경전을 수장하는 벽장이 설치되어 있다. “‘박가(薄伽)’는 범어의 ‘BHAGAVAT'로서 부처님의 열가지 칭호 중 하나인 ’세존(世尊)‘을 가리키는 것으로 박가교장(薄伽敎藏)은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불교경장을 뜻한다.”고 하는데 그 것 또한 요대에 제작되어 그 시대 가구제작 기술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박가교장전을 나와 뒤에 3층 목탑으로 갔다. 그 탑은 내부 상층부까지 올라갈 수 있게 개방되어 있어서 목탑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었다. 기단 위로 3층 높이의 탑신이 구성되어 있고 외벽 안쪽에 다시 기둥 열이 있는데, 그 기둥사이에 벽을 막아 실을 형성한 다음 불상을 안치시켰다. 그리고 1,2층 사이에 놓인 암층은 층고가 낮아 공간을 이용할 수 없게 되어 있는데 구조적 보강을 위해 설치한 것처럼 보였다. 탑의 맨 위층으로 올라가니 화암사 경내뿐 아니라 그 너머 시가지까지 훤출히 바라보였다.
화엄사는 도시내 평지가람으로 질서 정연한 배치와 잘 단장된 조경시설이 인상적이었다. 현대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여서 종교의 의미가 과거와 다를 수 있을 것이지만 현재 중국은 전통문화를 존중하는 의식이 커 보였다. 중국 경제 성장 후 문화 정책에 관심을 기울이는 듯 느껴진다. 화엄사를 나와 버스에서 내린 곳으로 걸어 나오니 아까보다 더 많은 관광객이 붐비고 길 가에는 택시들이 길게 서 있었다.
10시 45분 버스를 타고 윈강석굴로 향했다. 가이드가 그 곳까지 1시간 30분 정도 걸릴 거라고 했다. 점심 식사는 그 후에 하기로 되어 있는데 20여 곳이 넘는 석굴을 돌아보고 나면 허기가 질 것 같았다. 버스가 시내를 빠져 나가자 교외 풍경이 한가롭게 보였다.
○ 윈강석굴
잠시 눈을 부치고 가다보니 윈강석굴 입구의 시설이 나타났다. 이곳은 산서성(山西省)의 북쪽 언저리와 만리장성의 접경 부근이다. 버스가 너른 주차장에서 도착했다. 말로만 듣던 곳을 실제 방문하게 된 것이 감개무량하게 느껴졌다. 윈강석굴은 연질 사암으로 된 급경사면에 전면에서 굴착해 들어가며 굴을 형성하면서 원래의 암반을 음각하듯 도려내어 불상을 조성했다. 대체로 중앙에 커다란 불상이 놓이고 사방벽면도 크고 작은 존상들을 부조식으로 촘촘히 조각해 놓았는데, 기원전 1세기경부터 약 1세기 동안 형성된 인도의 아잔타 전기(前期) 석굴의 영향을 받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잔타 석굴보다 불상이 더 크고 벽면 전체에 촘촘히 조각해 놓은 것이 차이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인도 불교예술의 영향이 나타나는 전기 석굴의 석불에 비해 후기에 조성된 석불에는 점차 중국 고유의 ‘중국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표를 사서 옆문으로 나가니 석굴로 오르는 길가에 길게 열주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각각의 기둥마다 부처상이 빼곡히 조각되어 있었다. 그 열주를 지나 우측 계단을 올라서니 마침내 석굴이 나타났다. 맨 앞의 제 1굴은 상대적으로 조각이 빈약한 편인데도 처음 대하는 감격스런 마음에 자세히 둘러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 이동하면서 자연 절벽 안에 조영된 석굴과 불상들을 차례차례 보면서 지나갔다. 초기의 5개 석굴은 460년 무렵 당시의 종교장관에 해당하는 사문통(沙門統)직을 맡은 담요가 주관하여 건립한 것이다. 이것은 이민족인 탁발씨(拓拔氏)가 세운 북위(386~534)의 황제들이 446~452년의 불교탄압에 대한 속죄의 뜻으로 행한 조치들 가운데 첫번째 사업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중국 불교예술의 첫번째 개화기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유적이다. 5개 석굴마다 들어선 거대한 불상은 북위 초기의 다섯 황제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는데 그로 미루어 국가사업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북위는 398년에 이 석굴과 가까운 대동(大同 : 당시 평성(平城))을 수도로 삼았었는데 494년 수도를 하남성 낙양(洛陽)으로 옮긴 후에는 새로이 용문석굴을 조성하였다.
윈강석굴에서 중앙부분의 외부를 목조 건물로 만들어 놓은 굴이 특히 중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그 석굴들은 규모도 크고 굴의 형식도 전실을 갖추고 그 안쪽 굴에 모셔 놓은 본존불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상 등이 조성되어 있었고 대부분 채색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유물 보호와 사진 촬영을 막기 위해 많은 공안들이 지키고 있는데 사진 촬영 때문에 실랑이를 하게 되었다. 쉽게 오기 어려운 곳이라 사진 자료를 확보하려고 감시 소홀한 틈을 타서 촬영을 하면서 공안들과 숨바꼭질을 하듯 했다. 나의 사진 촬영을 목격한 공안이 빙그레 웃기도 했다. 그런데 석굴 관람을 시작할 때부터 비가 내려서 이동도 불편하고 밝은 사진을 얻기 어려웠다.
20굴의 대불은 사진으로 많이 본 모습이었다. 이 불상은 경주 석굴암 본존불과 함께 세계3대 불상중 하나로 꼽힌다. 자료 사진 등은 많이 보아 왔지만 거대한 규모의 실제 스케일감을 체험하면서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종교의 힘을 다시 한 번 의식하게 되었다. 그 거대한 불상들을 천연의 자연 암반에 굴을 파서 조성한 것이 불가사의할 정도이다. 그 위로도 계속 탑이 들어서 있는 곳도 있었는데 마지막 쇠퇴기에 조성된 것은 조형성이 빈약해졌다고 한다.
윈강석굴 주차장으로 나와 식당으로 이동했다. 윈강석굴에서 한참 벗어나 가까운 시내의 2층 식당에 도착했다. 시장한 터여서 식사가 더 당겼다. 이제 문화유적을 돌아보는 실질적인 답사 일정은 다 마친 상태였다. 남은 일정은 북경으로 가서 잠을 자고 내일 아침에 공항으로 가서 귀국하는 일 뿐이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2시 50분 북경을 향해 출발했다. 가이드가 5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 얼추 8시가 되어야 도착할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지난 몇 일간 보았던 것들을 되돌아보았다.
이번 답사에서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전에 세워진 전통 건축물들을 돌아본 것이 큰 의미가 있었다. 동양 문명에서 고대로부터 발전해온 건축양상과 궤적을 이해하는데 한층 도움이 되었다. 중국에서 역사시대로 접어든 하은주시대의 고대 유물에 이미 부재의 맞춤 기술이 나타나는데 그 것이 하나의 건축물로서 전체적인 형식적 완결성을 갖추도록 발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를 정확히 알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돌아본 고건축들을 보면서 새삼 전통 건축에서 구조의 중요성이 느껴졌다. 결국 전통 목조 건축의 건축적 완성도는 목조 건축 기술의 뒷받침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이번에 돌아본 중국 전통건축 가운데 규모가 큰 건물들은 구조가 복잡해진 가운데서도 형식적 완성도가 느껴졌으며 그러한 완결성 뒤에 치밀성도 갖춰져 있었다.
북경으로 가는 길 좌측에 길게 늘어선 산맥이 보였다. 좀 더 가다보니 1층 연립 주택이 군집된 가운데 동굴 같은 시설이 눈에 띄었다. 이호열 회장이 토굴식 주거라고 했다. 몇 년 전 북경 고건축 박물관에서 전시된 자료를 보았었다. 가이드가 가는 동안 석탄 열차와 만리장성이 보일 거라고 했으나 아직 나타나지 않아서 보지 못하고 가려나보다 하고 생각하던 차에 갑자기 좌측에 검은 기차가 길게 늘어서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가이드가 말하던 석탄 기차 행렬이었다. 길게는 350칸까지 연결한다고 하는데 옆에 지나가는 기차는 100여칸 정도 되어 보였다. 이번 건축 여행에서는 중국 북부지역의 자연과 풍토를 체험하게 된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계속 북경을 향해 가다보니 선화 평원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조림 사업의 결실인지 도로 옆 가로수가 무성해지고 있었다.
8시 북경의 식당에 도착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 같았는데 뷔페식 식당인 점만 다르지 한국의 불고기 식당 분위기였다. 테이블마다 불판이 놓여 있고 자유롭게 음식을 스스로 갖다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먼 거리를 이동하고 식사가 늦었던 차여서 시장기가 동한데다 답사를 마친 후여서 모두 느긋한 마음이 되어서인지 한가히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긴 시간 동안 식사를 했다. 식사 후 호텔로 이동하며 가이드가 오늘 숙소가 오성급 호텔이라고 했다. 온천이 있는데 수영복이 없을 테니 각 방마다 있으니 방에서 하는 게 나을 거라고 했다. 312호실에 묵으며 숙소에 딸린 온천욕을 했다.
제5일
6월 30일(목)
아침에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저층에 옆으로 펼쳐진 평면구조로 너른 부지에 세운 교외형 호텔인데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위치여서 자연에 파묻힌 환경이었다. 바로 옆에는 고급 저층 주거 단지가 있었다. 그리고 온천이 나와서 별도의 온천욕실을 운영하고 있다. 호텔 현관을 나와 주변으로 연결된 길을 따라가다 보니 잘 가꾸어진 정원이 나왔다. 돌아보다 시간에 맞춰 조금 떨어진 식당을 찾아 갔다. 어젯밤 이 곳으로 올 때 지나쳤던 곳으로 시설이 좋고 식단도 좋았다. 식사 후 자료 사진을 찍기 위해 노천 온천을 찾아갔다. 하지만 1층의 온천문은 닫혀 있어서 보지 못했다. 2층에는 휴게 시설 등이 아주 잘 갖춰져 있었다.
8시 40분 호텔을 출발했다. 교외 지역이어서 쾌적한 느낌이었다. 가는 길 주변에 하천과 숲이 보이고 조금 후에는 전통마을 가로가 보였다. 그 곳에는 북경의 전통적 체취가 배어 있을 것 같았다.
이동하는 동안 이호열 회장이 답사를 마무리하는 인사말을 하며 앞으로 나와 예기할 말 있는 사람은 예기를 하라고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이회장이 나와 정세현씨, 이회장의 아들인 이강원씨, 총무를 맡은 김인수 씨, 이 답사를 기획한 조병화 교수, 하반기 발해 답사 계획을 세우고 있는 이병건 교수 등에게 차례로 예기를 청했다.
북경 시내를 지나 외곽 도로를 달려 북경 공항에 도착했다. 다행히 차가 막히지 않아서 일찍 도착했다. 가이드와 작별 인사를 하고 비행기에 오르니 기내 방송에서 30분 정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다행히 잠시 후 비행기가 활주로로 이동하고 있었다. 통로 건너 옆 좌석에 앉은 허유진씨에게 가장 좋았던 곳이 어디였느냐고 물으니 평요고성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 옆자리에 앉은 장병정 소장은 비오는 날 저녁에 양코치 집에 모두 모여 함께 술을 마신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기내식을 먹고 나니 김포공항에 부쩍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비행기 창밖이 구름이 많이 끼어서 파란 하늘은 볼 수 없었다. 잠시 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옆에 걷던 정소이 학생에게 소감을 물으니 중국이 넓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짐을 찾고 출국장을 빠져 나와 로비에 모였다. 몇 분이 저 쪽에 떨어져 있다 일행에게 다가왔다. 함께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지며 답사 일정을 마쳤다.
(20160630 김석환)
게시물수정
게시물 수정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삭제게시물삭제
게시물 삭제를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