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지형지세에 바탕한 산과 도읍의 조화
‘북한산과 한양도성전’을 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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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영풍문고의 초대를 받아 “한국전통건축 드로잉전”을 열 때 작가의 글을 쓰면서 “내가 스케치전을 할 만큼 제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나름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어디서나 그렸기 때문”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 후로 6년이 지나 다시 서울도서관의 초대를 받아 이번 전시를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그 때 밝힌바 대로 줄곧 스케치를 한 것이 쌓여졌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산행이나 답사를 떠날 때마다 스케치북을 휴대하고 이동 중 눈에 띠는 풍경을 스케치 해 왔다. 함께 동행한 일행들은 내가 한겨울 산행 중에도 스케치를 하는 모습을 보고 열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처럼 일상적으로 스케치를 하게 되는 것은 사물에 대한 예민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늘 깨어 있는 감각으로 사물과 함께 호흡하며 내 눈앞에 펼쳐 보이는 감각적인 장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화면에 담아두고자 하는 의욕을 항상 느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상에 이끌린 나의 감각을 필치에 의해 내 기억 속에 각인하는 의미가 된다. 르 꼬르뷔제는 “빈 백지에 무엇인가 그려 넣으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인격이 된다.”고 했다. 그처럼 아무 형상도 없던 빈 백지 위에 내가 사물로부터 받은 감각이 필선을 통해 그려지고 나면 그만의 생명력을 지니고 존재하게 되고 거기에 나의 감각과 호흡이 고스란히 담겨지게 된다.
빈 종이에 무엇인가 그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시작을 하고 보면 점차 안정감 속에 필선이 쌓이고 그림도 완성되어 간다. 하지만 대자연의 무궁한 감각을 다 옮길 수는 없고 일정한 크기의 화면에 내가 본 인상을 축약 적으로 담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풍경을 보며 조심스럽게 그 감각을 옮기는 행위 가운데 사물의 기운과 표정이 담기게 되고 어느 사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백지 위에 새로운 이미지로 태어나 감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나의 그림은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내가 현장 작업만을 고집하는 이유는 내 그림이 직접 보이는 대상으로부터 받는 감동과 생명력을 농축해 옮기는 과정 속에 탄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물의 감각에 이끌려 그때그때 그리는 스케치는 현장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그림은 실경을 충실히 묘사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필자가 이번 전시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바로 북한산의 총체적인 모습을 대부분 실경으로 포착한데 있다. 어떤 사람들은 화가의 뛰어남이 실제 풍경보다 더 아름다운 이미지를 창조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진경산수로 불리는 정선의 금강산 그림이나 인왕재색도 등도 실제 모습 그대로가 아닌 화가의 사유를 통해 재탄생한데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나의 작업은 실경을 충실히 묘사하는 것 자체를 중시한다. 우리가 대하는 갖가지 풍경으로부터 각각 고유의 감각을 인식하듯이 북한산은 북한산만의 빼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나의 작업 의미는 내가 대하는 고유의 감각을 충실히 살려내려는데 두기에 마주대하는 대상을 실제 모습대로 충실히 담아내어 그 감각을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의 스케치는 대상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본능적인 몸짓으로 하게 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하지만 현장 작업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방대한 풍광을 현장에서 그리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긴장 속에 작업을 지속하다 보면 피로감이 몰려온다. 또한 여러 장을 연이어 그릴 때는 종이 이음부에서의 매끄러운 연결에 신경이 쓰이고 바람에 종이가 펄럭여 애를 먹기도 한다.
북한산은 당일 산행 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것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을 만큼 찾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매주 찾는 사람들도 많다. 북한산에 올라 어쩌다 다른 사람들과 예기를 하다 보면 이구동성으로 북한산은 올수록 좋고 정말 명산임을 실감한다고 한다. 내가 북한산을 지금처럼 좋아하게 된 것은 낙동정맥 단독종주 이후 북한산만을 집중적으로 다니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2000년대 초에 부족한 운동과 일상에서 생기는 심신의 피로를 회복하려는 생각으로 산행을 시작한 이후 백두대간 종주, 낙동정맥 단독종주, 일본 북알프스 종주, 불수사도북종주, 서울경계걷기 등을 했다. 그런데 낙동정맥 종주 후에는 멀리 오가는 시간을 내기 어려워 주로 북한산만을 찾게 되었다. 내가 살던 고향의 뒷동산을 오르듯 일상가운데 일을 하다가 잠시 시간을 내어 다녀오기도 했다. 북한산은 그처럼 삶터로부터 가까우면 산행의 묘미를 가장 크게 느낄 수 있는 산이다. 그동안 다녀 본 여러 산이나 금강산과 설악산 같은 아름다운 산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산들과 다른 특별한 아름다움에 점차 매료되었다. 북한산의 감각은 때깔 옷을 입듯 현란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중후하고 큰 느낌이다. 북한산은 웅장하게 솟은 백운대, 인수봉, 만경 대등 정상부의 웅혼한 기상과 장쾌하게 뻗은 여러 갈래의 능선과 그 능선을 이루는 각각의 봉우리 들이 모여 거대한 기운을 뿜으며 산세의 경관을 표출한다. 그리고 주봉과 능선들이 서로 중첩되고 원근의 조화를 이루며 빼어난 풍광을 이루고 있다.
북한산은 대부분 화강암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어 암릉을 오를 때는 바위에서 뿜어 나오는 커다란 기운을 느끼게 된다. 북한산에 오르면 장엄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그 같은 지질조건 때문이다. 풍수가들은 봉우리는 기가 모인 것이고 능선은 기의 통로라고 한하는데 특히 바위로 이루어진 바위는 기가 매우 세다고 한다. 그리고 북한산 산행을 하면서 그러한 기를 몸으로 부딪치게 된다.
이번에 전시를 할 만큼 그림이 쌓이게 된 것은 내가 평소 그 공간에 많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장소에 머문 시간이 쌓이면서 스케치도 점차 쌓여 왔다. 북한산의 이곳저곳을 스케치하는 동안 그리고 내가 스케치하며 체험한 북한산의 빼어난 풍모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전시는 단순히 평소 습관적인 스케치만으로 된 것이 아닌 좀 더 의식적인 준비 과정이 있었다. 쌓여가는 스케치를 정리하다가 문득 북한산의 전체 모습을 다 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과정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 것은 전경에 대한 포착의 식이다. 이전까지는 눈에 바라보이는 부분들만을 한 장으로 그렸었는데 전체 풍경을 담기 위해 그림을 여러 장의 종이 위에 연이어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케치전이 시기가 특별히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있는 것을 내 보인다는 생각으로 마음 편히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 스케치전의 시기와 장소가 구체화 되고부터 점검하고 빠진 것을 그린다는 것이 북한산을 다시 분주히 찾게 되었다.
내가 쓴 필기구는, 처음에는 거의 다 오래전부터 써 오던 일제 붓펜을 써서 사용했다. 그러다 전경 묘사를 하면서 펜으로 그린 그림이 많아졌다. 그 외 연필을 사용한 스케치도 있다. 스케치를 하다보면 사용하는 필기구마다 각각의 맛이 다르다. 붓은 음영과 입체감을 표현하기 알맞다. 그런데 펜은 실제적인 형상을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하기에 편리했다. 이번 작품들 가운데 전경 스케치는 펜을 사용한 그림이 많다. 그리고 연필은 소묘의 맛을 살릴 수 있어 좋다. 그동안 사람들이 나의 필치를 칭찬 하는 일이 더러 있었다. 스스럼없는 필치에 기가 느껴진다며 개인적으로 그림을 사러온 사람도 있었다.
많은 사람이 북한산을 오르면서 각자 느끼는 인상이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북한산 경관은 백운대, 인수봉 등 주봉의 인상이나 북한산성입구 쪽에서 펼쳐 보이는 암봉의 연이어진 풍경 그리고 산에 올랐을 때 내려다보이는 광활한 시선 등을 인상으로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북산한의 인상들은 대체로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총체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북한산의 전체 풍광을 다 담아내고 싶었다. 북한산의 경관은 각양각색이어서 항상 가도 새로움을 느낀다. 그처럼 깊고 다양한 북한산의 느낌을 몇 장의 그림으로 나타낼 수 없었다. 그리고 전체를 포착하기 위해 전경, 원경, 주능선, 주봉 및 계곡, 북한산 내경, 성곽 및 성문 등 목차를 정하고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북한산은 서울과 고양시, 의정부에 걸쳐 광활한 구역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평지인 도심 안에서는 능선이 실루엣처럼 지날 뿐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 시내에서 가장 뚜렷이 보이는 것은 북한산 끝자락으로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이지만 북한산 전체로 보면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원경에서는 북한산과 주변 지세를 느낄 수 있다. 관악산에서는 거대도시로서의 서울 뒤에 북한산이 중심을 이루는 모습이다. 아차산에서는 남산부터 뒤에 놓인 도봉산 까지 길게 펼쳐 보인다. 중랑천이 배경의 산세와 산수의 조화를 느끼게 한다. 중랑천은 큰 산세 언저리로 흐르는 모습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북한산의 산세는 주능선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서울의 홍제동과 불광동 사이에 시작되는 비봉 능선은 보현봉까지 길게 펼쳐 있다. 팔각정에 오르면 우측 형제봉 능선과 대칭적으로 놓여 그 전경이 수려하게 다가오며 월드컵 경기장이 있는 성산에서도 능선의 흐름을 잘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보현봉에서 백운대로 이어지는 북한산 주능선은 칼바위 능선에서 가장 잘 느낄 수 있다. 또 평지에서 가장 잘 보이는 능선은 북한산성 입구 쪽에서 바라보이는 비봉 능선과 의상 능선이 이어 보이는 모습이다. 그리고 상장 능선은 원효봉을 오르면서 잘 볼 수 있다. 북한산의 내경은 백운대에 올라 주변을 돌아볼 때 가장 잘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원효봉에서 의상능선을 건너보거나 거꾸로 의상능선에서 원효봉과 백운대를 건너보이는 풍광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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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서관과 이번 전시 계획을 세우면서 북한산과 한양도성을 함께 다루기로 했다. 한양의 궁궐과 도성 스케치는 그동안 해온 저술이나 강의와 연관해 평소 준비가 많이 되어 있었다. 북한산과 한양도성을 함께 조망하는 것은 서울을 주제로 삼고자 하는 주최측의 의도에도 잘 부합될 뿐 아니라 북한산과 한양도성의 밀접성을 보여주는데도 의미가 크다.
조선이 새 도읍으로 정한 한양은 풍수상 길지로 알려져 있다. 한북정맥으로부터 뻗어온 북한산의 정기가 흘러들어오고 내사산 외사산이 감싸고 있으며 동에서 서로 흐르는 강이 흐르는 길지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풍수의 주요소는 산과 물이다. 한양은 북한산 낙산, 인왕산, 목멱산이 둘러치고 한강이 휘감아 흐르며 양지 바른 터에 맑은 기운을 담고 있다. 주산인 북한산의 지세는 백두대간의 근간과 맥이 닿아 있어, 사실상 가장 중요한 지리 조건이 되며, 그 자형지세의 바탕이 중요한 골격을 이룬다. 조선은 한양 천도 후 그 지세의 중심에 해당하는 백악 기슭에 정궁인 경복궁을 지었다. 그리고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태종이 한양으로 재천도 하면서 상서로운 산세의 기운이 감도는 터에 이궁으로 창덕궁을 조영하였다.
한양의 주산인 북한산의 지세는 백두대간의 근간과 맥이 닿아 있다. 백두산으로부터 지리산까지 뻗친 백두대간의 정기가 한북정맥을 타고 북한산의 한 봉우리인 백악으로 흘러들어온다고 본다. 북한산이 속한 한북정맥은 임진강과 북한강 사이에 발달된 지형이다. 북쪽의 백두대간으로부터 뻗쳐 내려온 형국으로서, 백두대간의 분기점인 추가령 근처 식계산을 기점으로 북한지역의 백암산 적근산을 지나 남쪽으로 군사분계선을 지나 김화 대성산, 수피령, 사창리, 복개산, 광덕산, 백운산, 도마치봉, 국망봉, 청계산, 운악산, 도봉산, 북한산, 노고산, 고봉산, 장명산으로 이어진다. 전체 225Km구간으로서 현재 산행이 가능한 구간은 150Km이다.
북한산과 한양도성은 한 몸체와 같이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한양도성은 조선왕조의 정체성을 띠며 입지에 바탕한 조선시대 도읍의 구조와 도성 건설의 유형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즉 한양도성은 풍수지리 사상에 입각한 지리적 이용과 지형과 건조물의 균형을 이루도록 되어 있고 그 자체로서 빼어난 조형감각을 지니며 도심을 제외한 대부분의 구간이 남아 있고 유네스코 등재도 추진중이다.
한양도성의 정체성은 궁궐과 성곽, 문루에서 느낄 수 있다고 본다. 필자는 그러한 도성의 감각을 전하기 위해 조선의 5대 궁궐 및 종묘사직, 성문, 성곽을 그렸다. 그리고 한양 도읍의 일반 가옥 풍경과 연관되는 북촌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한 장면들로써 총체적인 한양도성의 이미지를 전하고자 했다.
그동안 스케치를 하는 과정에서 북한산과 한양도성을 더 많이 알게 되고 더 친근해진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처럼 아름다운 북한산과 한양도성의 풍광을 좋아해주길 바라는 마음도 생겼다. 북한산의 그 특별함, 숭고하고 장엄하고 기품 있는 느낌, 그리고 자연지세의 빼어난 입지를 찾아 그와 균형을 이루게 하는 가운데 형성된 한양도성의 아름다움을 대하며 내가 느낀 감동을 필선의 힘을 빌어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2014년 12월 一梅軒에서 김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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