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2012삼육대 전통건축답사
제1일20121024
오늘은 과 행사로 전통건축 답사를 가는 날이다. 건축답사는 전통 건축이 실제 서 있는 곳에 가서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체험적으로 느끼는 일이기 때문에 행사가 더욱 소중할 수 밖에 없다. 혹자는 건축 답사를 건축과 수업의 백미라고도 한다. 하지만 2007년 안동지역에 답사를 다녀 온 뒤로 그동안 이런저런 사정으로 답사를 가지 못했었는데 지난 학기가 끝날 무렵 류수현 학과장님께서 2학기에 답사를 시행하겠다고 하여 준비해 왔다.
내가 수업을 담당하는 한국전통건축론 과목은 우리의 전통 건축에 깃든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것에 깃든 건축적 지혜 등을 이해하여 현재 진행되는 설계 작품에 전통적 가치와 문화적 맥락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과목인데 이런 과목은 실제 대상 건축물을 돌아보면서 지역적 차이나 지형지세의 입지별 장소성 그리고 건물 기법 등을 직접 대하면서 알아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이것저것 빠트린게 없는지 챙겨보다 서둘러 학교로 향했다. 근래 몸살을 앓은 후 아직 다 완쾌되지 않아서 더 악화가 되지 않을지 염려가 되었다.
학교에 도착하니 스쿨버스 정류장에 타고 갈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교실에 들어서니 학생들이 나름대로 다 멋을 낸 모습으로 밝아 보였다. 출발 시간으로 정한 8시가 지났지만 몇 명이 조금 늦어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잠시 후 함께 이동하여 타고갈 버스를 타고보니 통로 좌석까지 꽉 차게 되었다.
급히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한 학생을 기다려 조금 늦게 출발했다. 정문을 나서 구리를 지나 중부 고속도로로 가다 판교 인터체인지로 나와 경부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날씨는 맑지만 구름이 끼어 밝은 햇살은 비추지 않았다. 안성 휴게소에 들러 쉬고 출발해 풍세에서 천안 논산간 고속도로를 가다 한 학생이 화장실을 가겠다고 해서 다시 정안 휴게소를 들러갔다. 기사분이 나름대로 빠른 길을 택해 속력을 내어 달렸다. 다시 서해안 고속도로로 나가 부안을 향해 달려갔다.
부안 격포에 사는 조각가 김오성 선생에게 정화를 걸어 내소사에 간다고 하니 대뜸 다 함께 들러 가라고 했다. 엊그제 전시초대를 했는데 인증 실사를 다녀오느라 가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바로 옆에 가면서 들르지 못하는 것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12시 10분 부안 톨게이트에 들어섰다. 첫 탐방지인 내소사를 본 다음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는데 시간이 늦어져 점심을 먼저 먹으려고 반대표가 예약한 식당으로 들어섰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조개구이집처럼 홀에 각각의 자리가 원형테이블로 되어 있었다. 백반이 나왔는데 나름대로 지역의 맛이 느껴졌고 주인도 정성껏 차려 주었다.
점심을 먹고 내소사로 향했다. 내소사는 서해 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절 줄의 하나이다. 전에 여러차례 다녀갔지만 벌써 몇 해 만의 방문이 되었다.
12시 55분 내소사에 도착해 경내로 걸어 들어갔다. 입구 상가가 조금 더 많아진 것 같았다. 재무를 맡은 혜영이가 일주문 옆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샀는데 개인당 3000원이나 되었다. 학생들이 경비를 걷으며 입장료는 제대로 예상치 못했을 것 같았다.
매표소가 있는 일주문을 지나 긴 숲길을 걸어 들어갔다. 내소사는 터널을 이루는 키 큰 전나무 숲길이 장관인데 이번에는 하늘이 듬성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지난 여름 태풍때 피해를 입어 부러지고 뿌리채 뽑힌 곳들이 보였다. 천왕문 가까이 가다보니 안쪽에 공사를 하느라 좌측으로 임시 우회로를 만들어 놓고 지나가게 해 놓았다. 지나며 보니 새로 다리를 놓고 있었다.
내소사 정문에 도착하니 지장전 불사 프렛카드가 천왕문 앞 벽에 걸려 있었다. 그 안에는 옆으로 매달은 연등이 안으로 길게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대개는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연등행사를 하다 얼마 후 그것을 떼어 내곤 하는데 여기선 그 때 이후로 그냥 놔둔 듯 했다. 그런데 그러한 시설물에 의해 이 절 특유의 넉넉하고 편안한 터의 느낌을 느끼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당산나무를 지나 학생들에게 대웅전 앞 계단에 모이게 하고 설명을 했다. 이 사찰은 당산 신앙이 사찰 안까지 적용된 특별한 곳인데 사찰 안에 있는 당산나무와 사찰 일주문 밖에 있는 당산나무가 짝을 이룬다. 그리고 절 안에 있는 나무가 할아버지 당산나무이고 밖의 것이 할머니 당산나무이다. 설명을 마치고 자유 시간을 주어 돌아보게 한 다음 1시 40분에 천왕문을 출발하라고 했다.
내소사는 절집 분위기와 함깨 대웅전에 설치된 꽃 창살이 특히 유명하다. 창살에 모란꽃송이 등, 갖가지 꽃봉우리 형태로 조각이 되어 있는데 학생들이 신기한 듯 그 것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어댔다. 그리고 주변으로 흩어져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나도 요사체 등을 돌아보다 들어온 입구로 나갔다.
예정 시간을 조금 념겨 내소사 주차장을 출발해 소쇄원으로 향했다. 지나다 고부 표지가 보여 그 곳이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한 곳이라고 아려 주었다. 그리고 부안 지역의 염전과 젓갈, 민속 신앙이 발달된 곳이라는 것도 설명했다.
기사분이 내소사에서 소쇄원까지는 1시간 30분 이상 걸릴 것 같다고 했다. 광주 고속도로로 가다 창평으로 접어들었다. 창평은 과거 큰 고을이었는데 전국에서 가장 많은 사시 합격자를 배출한 것으로 자부심이 크다. 일제 강점기 때 담양을 중심으로 더 큰 고을이 형성되었다. 담양은 대나무가 유명하다.
길을 가다 좌측에 명옥헌 표지가 보여서 그곳을 먼저 들르자고 했다. 나중에 길을 찾아오는 것보다 시간이 절약될 것 같았다. 볼 곳이 많아 서둘러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명옥헌 입구인 후산마을 주차장에서 내려 앞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명옥헌으로 들어서다 전경이 바라보이는 우측언덕에 올라 사진을 찍고 정자에 올랐다. 백일홍이 만발할 때의 화려함은 없고 늦가을로 점어들어가는 계절에 추적함과 쓸쓸함이 깔려 있었다. 연못 언저리의 풀들도 누렇게 물들고 추적해진 모습에서 어딘지 쓸쓸함마저 베어났다.
명옥헌에 올라 앉게 하고 설명을 했다. 이 곳은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전 인조가 오희도를 만나기 위해 들렀던 유서 깊은 곳이다. 요새 인기리에 상영중인 영화 ‘광해’와 연관지어 설명을 하니 이해가 빨리 되는듯 했다.
다시 주차장으로 나오니 시간이 많이 흘러 있었다. 그래서 전체를 다 돌아볼 수는 없고 몇 곳을 생랙하고 돌아보아야 할 것 같았다. 명옥헌을 나와 소쇄원으로 갔다.
우측으로 보이는 광주호를 지나 소쇄원 주차장에 도착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입구 매표소에서 표를 산 다음 대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걸어 들어갔다. 마치 터널 같은 좁고 어두운 공간으로부터 별천지처럼 만나게 되어 있다. 벌써 낙옆이 많이 져서 공간이 더 투명하게 보였다. 그렇지만 구름이 끼어 햇살과 함께 빛나는 사물의 모습은 느낄 수 없었다. 가을의 투명한 햇살이 아쉬웠다.
소쇄원은 조선 중종때 양산보가 조영한 전통 원림이다.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세상을 뜨자 출세를 단념하고 처사의 삶을 택했다. 자신이 살던 지실 마을 인근 야트막한 산기슭에 터를 정하고 은거할 처소를 조성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게 현재 담장으로 둘러쳐진 안쪽만을 소쇄원 영역으로 인식하기 쉬운데 본래는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산과 계류 그리고 들어오는 좁은 대나무숲길 옆으로 빠져나가는 계류에 이르기 까지 자형과 지세에 따라 형성된 각각의 장소에 알맞게 건물을 짓거나 장소의 명칭을 정하여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전체의 영역을 순환 동선으로 연결하였다. 현재 소쇄원에는 대봉대, 광풍각, 제월당의 3개의 건물이 각각의 장소적 의미를 띠며 놓여 있다.
학생들을 대봉대에 앉게 한 다음 그 앞에서 소쇄원의 특색에 관해 설명을 했다. 대봉대는 이 곳에 찾아오는 벗들을 봉황처럼 여기며 붙인 이름이다. 그리고 함께 제월당 등으로 이동하며 돌아보며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외나무다리를 건너 제월당과 광풍각 등을 돌아보았다. 계절은 그만이지만 날씨가 흐려서 색깔과 공간이 뚜렷이 보이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소쇄원을 나와 개울을 건너 취가정에 올랐다. 그 곳은 김억령이 억울하게 옥사를 한 후 술에 취한 모습으로 권필의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하소연하여 나중에 신원이 되었는데, 지금 광주 충장동에는 김억령 장군을 기리는 충장사가 너르게 조성되어 있다. 취가정에서 바로 환벽당으로 이동했다. 환벽당 앞 유서깊은 조대 옆의 세 그루 노송도 지난 여름 태풍에 가지가 부러져 있었다.
환벽당에는 사천 김윤제와 정철에 앍힌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이야기는 환벽당에서 낯잠을 자던 사천(김윤제)이 용소에서 낚시질을 하다 용을 낚아올리는 꿈을 꾸고 깜짝 놀라 께어 내려가 보니 10살 정도 보이는 한 남사 아이가 멱을 감고 있었다. 사찬이 가가가 이야기를 나눠보니 용모가 준수하고 매우 영특한 아이였다. 사천은 그 아이를 아끼는 마음으로 환벽당으로 데리고 가서 머무르게 하며 공부를 시켰다는 이야기다 정철은 그 때 외가에 가다 잠시 멱을 감고 가려던 참이었다.
정철이 담양 창평땅에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그 전에는 한양에 살았는데 두 누이가 각각 인종의 귀인이자 계림군 유의 부인이었던 덕에 궁중에 출입하며 경원대군(나중에 명종)의 동무가 되기도 하는 등 명문가의 자제로서 유복하게 지냈다. 그러나 그의 유복한 어린 시절은 그가 열 살 되던 해 (명종 즉위년)에 을사사화가 터지면서 끝이 났다. 계림군은 죽임을 당하고 형은 매를 맞고 귀향 가던 길에 죽었으며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다시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고, 정철도 아버지를 따라 떠돌게 되었다. 그리고 6년 후 유배에서 풀린 그의 아버지는 서울 생활을 정리한 후 온 가족을 이끌고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창평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환벽당을 나와 자미탄을 건너 식영정으로 갔다. 그곳에 가까이 다가가자 식영정에서 일을 하고 내려온 사람들이 현재 식영정이 공사중이라고 했다. 서까래가 썩어 교체하느라 지붕을 다 걷어 놓았다고 했다. 지난 5월에 다녀갈때는 멀쩡해 보였는데 그 사이 그런 공사를 벌일 것으로 생각치 못했었다. 그래도 장소성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 가까이 다가가 보니 가설 닷집이 씌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을 들여다보니 지붕을 철거하고 서까래도 걷어내어 앙상한 모습이었다. 뒤의 완만한 잔디 마당으로 학생들에게 가서 그 주변 장소를 느끼게 했다. 식영정이 공사중이어서 평소 같은 맵시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 곳은 김싱원이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로서 이 곳에서 많은 선비들이 글을 지으며 교류했는데 특히 김억령, 김성원, 정철, 고경명을 식영정 사선이라 부른다. 그리고 정철이 낙향해 머무는 동안 오래 머물며 성산 별곡 등 주옥같은 가사를 지었다.식영정 뒤에는 정처의 성산별곡이 새겨져 있다.
5시 40분 오늘 답사지 마지막으로 면앙정을 들렀다. 벌써 어두워져 나뭇닢의 색깔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면앙정은 송순이 지은 정자이다. 명앙정의 정자 이름도 자신의 호를 따서 지었다. 송순은 창평과 고서 일대를 배경으로 펼쳐진 가사문학의 원조쯤 되는 시기에 활동한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 정철, 김안로와 함께 가사문학의 3절로 불리는데 송순은 가사보다 시조를 더 많이 지었다.
송순은 면앙정가단의 창설자이며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이다. 강호가도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자연을 예찬하고 자연에 귀의하여 생활하는 것을 소재로 한 작품의 경향을 조윤제 선생님이 강호가도라고 붙인 것이다. 성수침은 “온 세상의 선비가 모두 송순의 문하로 모여들었다.‘ 고 하였고 이황은 그를 ”하늘이 낸 완인(完人)“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인품이 뛰어났다. 면앙정가는 면앙정 주위의 아름다움과 정취를 읊었다. 유교적 충의사상에 바탕을 둔 자연 친화의식을 나타낸 강호가도의 전형으로 상춘곡과 정철의 관동별곡과 성산별곡을 이어주는 작품이다.
송순이 지은 시 가운데 일반에 많이 알려진 “10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 내니 나 한칸, 달 한칸에 청풍 한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라는 구절이 있다. 그 글에서 송순의 정신 세게가 느껴지낟. 정자 앞에는 가사 문학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면앙정가 한 구절을 새겨놓은 비가 세워져 있다.
송순의 면앙정가는 장극인의 상춘곡과 더불어 호남 가사문학의 원류가 될 뿐 아니라 내용, 형식, 가풍 등에서 정철의 성산별곡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송순의 문하 인사로 김인후, 기대승, 고경명, 정철 등이 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금새 어둑해 져 있었다. 그래도 면앙정에서 시원스레 펼쳐 보이는 너른 들녘은 느낄 수가 있었다. 들녘 너머 야트막히 구릉진 산자락에 자리 잡은 집들에서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둑했지만 다들 좋아했다. 답사를 마치고 담양 죽록원에서 식사를 했다. 죽통에 지은 밥과 갖가지 나물 반찬이 맛이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주 방향으로 호남정맥을 지나는 터널 너머에 있는 숙소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그 곳은 숙박용 팬션인데 요즘 유행하는 소위 개량 한옥으로 지어 놓았다. 주인들이 좋은 분들이어서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학생들의 과자를 사는데 운전을 해 주겠다고 했다.
특강을 하고 쉬려 하는데 창평에 사는 분이 만나러 오겠다고 했다. 몇 해전 전남지역 문화해설사 양성과정에서 강의 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수강생이던 사람이었다. 그가 와서 독수정 앞 마을에서 차를 마시고 돌아와 잠을 잤다.
제2일 20121025
5시 40분 일어나 세면을 했다. 밖이 아직 어둑했지만 학생들이 제 시간에 잘 일어나 차질 없이 일정을 진행할 수 있었다. 예기들을 하면서 늦게 잠이 든 것 같았는데 다들 건강한 모습이었다. 떠나며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으나 일찍 깨우기가 미안해 그냥 나왔다.
식사는 가다가 눈에 띠는 곳에서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른 시간에 문을 연 곳이 거의 없을 것 같았다. 기사분이 송광사 입구 식당가가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송광사 앞에 도착했다. 식당에 들러 물어보니 식사를 바로 준비해 줄 수 있다고 했다. 10여분 기다리면 밥이 다 지어질 거라고 했다. 첫 집의 효과를 보는 듯 했다. 식사를 마치고 송광사를 향해 올라갔다.
입구의 차단기 앞에 이르니 방송이 들렀다. 표를 사서 들어가라고 했다. 저 아래쪽 매표소에서 방송으로 예기할 고 있었다. 표를 끊고 통과해 들어갔다. 다실 앞에서 내리니 바로 앞에 일주문이 보였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갔다. 개울을 건너지르는 우화각 입구에서 설명을 했다.
우화각 입구에는 영혼을 목욕시킨다는 두 개의 건물 을 예기하지 특이하게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가 대웅전 앞에서 전체 배치에 대해 설명해 주고 각자 자유롭게 돌아보도록 했다.
보조국사 탑비를 찾아 뒤로 돌아가다 찾지 못해 국사전과 요사체를 둘러보다 스님에게 보조국사 탑비를 보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묻자 대웅전 앞을 지나 원통전 앞에 이르러 원통전 뒤로 올라가라고 앴다. 그리고 자신이 앞장서 알려주었다. 원통전 뒤로 돌아가니 과연 전에 올라갔던 가파른 계단이 보였다. 우측 불이문이라고 써 있는 건물 쪽으로 올라갔던 것 같은데 내가 그 길과 착각을 한 것 같았다.
보조국사 탑비가 있는 곳으로 주변에 있던 학생들과 함께 올라갔다. 긴 게단을 올라가지 탑비가 보였다. 그리고 거기서 뒤돌아보니 산세에 안긴 송광사 전경이 시원스레 내려다 보였다. 아름답게 물들기 시작하는 가을 단풍이 바탕의 진청록색이 형형색색 붉게 비단 수를 놓은채 아침해살에 맑은 단풍 색깔을 보이고 있었다. 곱게 수놓인 산세가 아늑히 감싸고 있었다.
공기가 맑아 풍경이 더 말고 깨끗하게 보였다. 학생들이 환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유서 깊은 보조국사 부도탑비를 설명하고 계단을 내려 왔다. 게단이 가파라서 여학생중에는 무서워하기도 했다. 우화각 입구로 나오니 몇몇 학생들이 보였다. 함께 우화각 정면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내려왔다.
내려오며 시간을 보니 예정시간보다 조금 지체되고 있었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학생들에게 서둘러 차에 오르게 한다음 선암사를 향해 출발했다. 기사분이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 걸릴 거라고 했다.
순천 승주 방향 고속도로로 길을 잡아 숭주쪽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가다가 기사분이 선암사 이정표를 지나쳐 급히 에기하자 우측길로 들어갔다. 그러나 중앙분리대 경게턱이 잇어 톨게이트 입구까지 건너가지 못하고 반대 차선으로 가게 되었다. 가까스로 입구로 나와 우측의 본래 가려고 한 길로 접어들었다. 도로에서 역주행을 하는 사이 뒤에 오던 트럭이 크게 경적을 울렸다.
다시 한참을 가다 선암사 입구로 접어들었다. 논에 베지 않은 벼가 노랗게 보였다. 주변 산에 물든 단풍 과 어우러져 가을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홤금 색 논과 단풍이 햇살에 빛나 더 맑고 찬란한 가을철 보습을 띠었다.
선암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곳보다 긴 산길로 접어들게 되어 있다. 길을 가다가 길 양편에 세워 놓은 석물을 보니 선교양종 대 본산이라고 쓰여진 입석이 보였다.
선암사는 입구부터 경내까지 꽤 먼거리를 걸어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특이하게 길 영 옆에 장승이 서 있기도 하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 승선교 건너편 다리에 도착했다. 승선교가 개울물에 비추고 있다. 어느 때는 완전한 원형으로 보일 때도 있다.
승선교 가까이 다가가 바리보았다. 다리 아래 저쪽 앞에 강선루가 교각 사이로 보였다. 승선교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이다. 이 다리는 거칠게 다듬은 화강석을 반원 아치로 쌓은 홍예교이다. 자세히 보면 기게적으로 완결적인 형태가 아니라 액간 어긋나기도 하고 표면은 거칠게 되어 있어서 자연스러우면서도 질박한 감각을 띤다. 그리고 그 홍예 아치는 크고 듬직하고 넉넉하고 원만해서 바라보는 마음까지 여유롭고 넉넉한 멋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어서 아무리 먼 거리를 걸어온 피곤한 발걸음이라도 이 다리 위를 지나다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상쾌한 기분이 들 것 같다. 승선교에서 교각 밑으로 바라보이던 강선루를 지났다. 강선류는 교각 하나가 개울에 발을 담구고 있는 모습이다. 그것을 풍수에서 비보의 원리로 설명하기도 한다.
굽은 길을 지나가면 좌측으로 더 맑게 느껴지는 개울이 보이고 다시 우측으로 꺽여지는 곳에 연못이 있다. 삼인당이라는 안내글이 써 있다. 삼인당은 제법무인, 제행무상, 열반적정 등 심인을 뜻한다.
다시 안으로 들아가다 보면 절벽 같은 언덕 위에 가로로 두어채의 건물이 펼쳐 보인다. 우측에 일주문이 있고 좌측에 커다랗게 보이는 건물은 박물관이다. 몇 해전 그 건물이 지어져서 인상을 바꿔 놓았다.
일주문은 새 부재로 바꿔 수리를 한 다음 단청을 하지 않은채 있다. 앞으로 들어갔다. 대웅 전 마당을 지나 뒤로 올라가 두 건물 사이 그늘로 들어서서 설명을 했다. 그 곳 뒤로 놓인 축대 위에는 원통전이 있는데 그 입구에서 보면 건물 사이가 그 건물 정명의 회랑을 이루듯한 공간감이 느껴진다. 거기서 조금 앞쪽의 산세를 바라보며 입지에 대해 이야기 했다.
선암사는 한국의 사찰 가운데 가장 고찰다운 느낌이 드는 곳이다. 그런데 그처럼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선 터가 넉넉하고 밝기 때문이다. 정오에 가까워지는 시각이어서 햇살이 중천에서 산란하여 다른 때보다 차분함이 덜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힘주어 말하는 것을 학생들이 잘 느끼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한 차분함을 느끼려면 아침 일찍 햇살이 옆에서 길게 비추며 그림자가 비춰 밝은 공간과 어두운 공간이 대비될 때이다. 그런 때는 공간이 매우 깊고 그윽하게 느껴진다. 더욱이 매화가 피는 이른 봄날에는 고목 같은 줄기에서 피어난 매화 송이가 한결 더 고결한 멋을 풍기고 이 고찰의 전체 분위기와도 어울려 그야말로 선경을 자아낸다.
이번 답사에사도 그처럼 내가 느낀 선암사의 참 모습을 모든 학생들이 제대로 볼 수 있었으면 했다. 그렇지만 장소성이나 산세에 둘러 쌓인 공간감등이 태양의 고도나 햇살의 방향 그리고 빛의 산란 정도에 따라서 시시각각 변하고 반다. 이 시각은 해가 정중으로 솟구치고 있는 중이어서 빛이 산란해 보이고 산세의 아늑함이 덜했다.
그렇지만 원래 갖추고 있는 전체 사찰의 입지와 특성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이야기 했다.원통전 우측으로 가서 조실이 머무는 각황전 영역 돌담을 보았다. 거기서도 가지가 부러져 나간 모습이 보였다. 다시 응진접 앞으로 걸음을 옮겨 매화나무 앞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다시 조사당 뒤 연못이 있는 곳에서 돌아보았다. 군데군데 머물때마다 구속 되지 않고 넉넉하게 주변 산세와 어우러진 선암사 특유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원통전을 돌라 선원이 있는 무량수각 옆 너른 공터에서 그 곳 주변 건물들을 돌아 보았다. 그리고 해우소를 보고 다시 되돌아 나왔다.
다시 입구로 걸어나오니 시간이 12시 10분이 되었다. 이동해서 식사를 하면 너무 늦어질 것 같아서 바로 인근의 식당으로 가서 입구 식사를 하고 마치고 다산초당을 향해 출발했다. 가는 도중 학생이 급하다 하여 톨게이트에서 소변을 보게 하고 갔다.
해남으로 접어 들었다. 이 고장은 언제나 따스한 느낌이 들었었다. 오늘도 주변 풍광이 수채화처럼 맑게 보여 마음이 끌렸다. 그런 풍광을 보고 있으면 오래 머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든다.
다산초당 인근에 새로 조성된 박물관 주차장에 정차했다. 차에서 내려 다산초당으로 올라갔다. 울산 지역 공무원들이 단체로 답사를 와서 감이 움직이고 있어서 번잡스러워졌다. 제대로 설명을 하기 어려웠다. 아예 천일각 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바다 풍광이 아름답게 보였다. 정자 위에 모이게 하고 설명을 했다.
설명을 마치고 백련사를 향해 걸어갔다. 숲길이 좋았다. 완만하고 기분 좋은 산길이었다. 하지만 산행을 많이 하지 않ㅇㄴ 학생들은 먼 거리로 느끼는 듯 했다. 조금 뒤처진 일행을 기다려야 했다.
산 능성이를 지나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길 우측으로 다시 바다가 트여 보였다. 평온한 산자락 끝에 바다가 호수처럼 고여 있는 듯 느껴졌다.
이 길은 다산 초당과 산책길처럼 연결되어 있다. 내가 오늘 다산 초당을 먼저 들러 이 길로 이동하도록 한 것은 다산의 소회를 느껴보기 위함이다. 다산은 초당에서 저술을 하다 이 호젓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길을 걸으며 휴식을 하고 생각을 가다드곤 했다. 그 가운데서도 백련사에 주석하는 선사를 알게 되어 말동무가 생긴것이 큰 힘이 되었다. 다산은 이 같은 풍광을 보며 지기와 만나 대화를 할 수 잇다는 것이 다행스러웠을 것 같다. 휴식을 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며 저술에 힘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백련사 가까이 이르자 큰 동백나무 숲이 나타났다. 백련사 주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울창한 동백나무 숲이 유명해서 그 것이 이 절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좌측으로 큰 산봉우리가 커다란 병풍처럼 둘러쳐있고 그에 면해 백련사 당우들이 바라보였다. 백련사에 도착했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백련사는 현재는 그렇게 큰 절은 아니지만 조선시대 대표적인 사찰로 꼽힌다. 송광사에서 지눌이 정혜결사 운동으로 불교의 참 모습을 바로 잡아가려 했듯이 이 곳에서는 호혜 선사 나름의 결사운동을 펼쳐 큰 성과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풍이 이어져서 백련사에서 고려시대 8국사를 배출했고 조선시대에도 8대사를 배출하는 등 크게 기풍을 떨쳤다.
이 곳 대웅전에도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된 편액이 걸려 있었다. 원교 이광사는 조선시대 물기의 명필로 꼽힌다. 그는 특히 우리나라 고우ㅠ의 동국진체의 맥을 이어 우리나라 서예사의 중요한 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어제 본 내소사에도 그의 글씨로 된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원교가 이 지역으로 유배를 와서 머무는 동안 그가 들른 여러 사찰들에서 그에게 글씨를 부탁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백련사를 뒤로하고 나오다 다시 올려다 보였다 .넉넉한 산세에 비해 당우가 다소 외소해 보이지만 내려오는 길 앞쪽으로 평온하고 시원스레 펼쳐보이는 터가 마음을 끌어 발길을 느리게 했다. 내려오는 길에 새로 지어 놓은 천왕문을 지났다. 아직 단청을 하지 않은데다 그 안에 조성할 사천왕도 아직 모셔지지 않아서 다소 생경한 느낌을 띠었다.
잠시 후 미리 와 잇던 버스에 올라 오늘 마지막 답사지인 대흥사를 행해 출발했다. 금강산처럼 생긴 산을 지나갔다. 가는 도중 기사분이 우측의 길 옆에 있는 산을 가르키며 ‘남도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산이라고 했다. 그 곳을 바라보니 과연 산 봉우리 하나가 금강산 산세를 그대로 빼어 닮아 보였다.
해남을 향해 가는 동안 산세와 들녘 오후 햇살이 산란하고 있었다. 사물이 뚜렸해 보이진 않지만 그로 인해 온화하고 따스한 느낌이 느껴졌다. 나는 이 지역을 지날 때마다 늘 같은 느낌을 느꼈었다.
잠시 후 산세의 품으로 안겨 들 듯 하다 대흥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입구로부터 사찰 경내까지 제법 긴 거리를 걸어 들어갔다. 어느덧 하루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어 숲 그늘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일주문 부도전 반야교 등을 잇달아 지나 천왕문에 다다랗다. 그 너머로 훤출하고 기세 있는 대둔산 특유의 산세가 장쾌하게 펼쳐보였다. 해남으로 올 때 보이던 주면 산세가 온화하고 아늑해서 이렇게 장대한 산세를 마주 대하는 것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거기서 바라보이는 정상부 중에서 좌측에 솟은 암봉이 북대암이 잇는 곳이다. 이 대흥사의 시초가 바로 그 북대암의 암자를 창건하면서 시작되었으니 매우 유서 깊은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측으로 뻗친 능선 중간중간 솟은 봉우리들은 비로나자부처님의 가슴과 머리에 해당한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 먼저 정면의 천불전을 잠시 들러 뒤에 오는 학생들에게 대웅보전 마당으로 모이도록 했다. 그 대웅보전 편액도 원교 이광사의 글씨였는데 그 곳에는 공포를 자르지 않고 다느라 편액이 둘로 나위어져 있었다. 대흥사는 크게 보아 그 대웅보전 영역을 비롯하여 천불전, 성보 박물관, 표충사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시간이 별로 옶어서 학생들과 함께 그 곳들을 잠시 돌아보고 입구로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답사지가 산에 자리 잡은 산사가 많아서 많이 걸은후여서 다들 시장할 시간이었다.
기사분이 자신이 알고 있는 기사식당으로 안내했다. 해남시 외곽도로를 빠르게 지나 해남을 벗어나는 듯 보였다. 염려가 되어 기사분께 말하니 그 곳도 해남인데 가까이 있다고 했다.
곧 기사식당에 들렀다. 용기 학생이 장염 중세가 있어서 몇몇 학생과 기사분이 역을 사러 다녀왔다. 그 사이 식사를 했다. 잠시후 돌아와 새 밥상을 차려 식사를 했다. 숙소로 향했다. 녹우당 앞에 있었다. 혼자 내려 독우당을 둘러보다 내려왔다.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가 괸찮아 보였다.
방을 배전하고 나서 잡시 남학생 방에 모여 발표회를 가졌다. 총무를 맡고 있는 혜영이에게 사회를 보게 했다. 멀을 꺼내고 먼저 할 사람 있으면 하라고 하니 하는 사람이 었었다. 사진을 많이 찍은 윤주에게 어떤 구도를 포착햇는지, 그리고 어느 곳이 좋았는지 말을 하게 했다.
먼저 말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을 지명하며 에기를 자연스럽게 이어갔다. 각자 느낀 점들을 진솔하게 에기 했다. 각자 자신만의 느낌을 진솔하게 예기했다. 건성건성 다니지나 않아 염려 했는데 다 느끼고 각자 좋아하는 것 관심 있게 본 것 같았다. 학생들이 속대가 있어 보여 좋게 느껴졌다. 마무리를 하고 각자 방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바깥 날씨가 선선해 밖에 앉아 잇기 좋았다. 마루가 시원했다. 어제 묵었던 곳보다 봄 더 한옥다운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이 교수님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겨기 있는게 좋겠다고 했다. 잠시 켜진 TV를 보니 한국은 나 자신이자 내가 비롯된 곳이다 미국 한국인 2세들이 미국 중심부를 향해 도약하고 있다. 고 인터뷰하는 모습이 좋았다.
20121026 제3일
아침 5시 20분 기상 이불을 개고세면을 했다. 밖에 나가 하늘을 보니 별이 총총했다. 중앙에 오리온 좌측 하늘에 북두칠성이 보였다. 하늘을 보는 사이 별동별이 우측하늘로 쏜살같이 흐르다 사라졌다. 서울서 출발할 때는 비가 오는 것으로 예보되어 걱정스러웠는데 다행이 맑을 것으로 나타났다. 오후에느 점차 흐려진다고 하지만 차를 타고 올라갈 시간이어서 별로 염려 될 것이 없었다.
오늘도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7시 40분 보길도행 배를 타기 전에 숙소 앞에 있는 윤선도 고택을 들러가려면 시간이 없었다.
6시 학생들 방을 다니며 기상을 시켰다. 처음에는 기척이 없다. 다시 기상 노크를 하며 예기를 하니 응답이 왔다. 여학생들은 바로 응답이 왔다. 다행히 부지런히 움직여주어서 6시 35분 예정대로 출발 할 수 있었다.
6시 40분 바로 앞에 있는 윤선도 고택에 도착했다. 출발 전에 마지막 날 비가 올 것으로 에보 되어 있었는데 다행히 날씨가 좋았다. 이 고택은 고산 윤선도의 4대 선조인 어초은이 지은 것이다.
훤출해 보이지는 않았다. 산그림자가 드리워져 어둑해 보였다. 7시도 되기전 안d[ 계신 주인들이 잠을 설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이 고택은 규모가 커서 아흔 아홉칸 집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민가로서 조정에서 허락한 최대 규모를 갖추고 있다. 규모도 크지만 너르게 경사진 터에 담장과 함께 드러나게 되어 있어서 규모가 더 커 보였다. 마치 황실 왕손들이 살던 궁집을 연상케 한다.
녹우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달한 터에 자리잡고 있다. 덕산을 배산으로 앉았는데 앞쪽이 나지막한 언덕처럼 넓고 시훤스레 열려져 있다. 또한 집 앞에는 수백년 묵은 은행나무가 있어 그곳의 인상을 더 고색창연하게 느껴지게 한다. 그리고 이 집안은 대대로 이 일대의 너른 농토를 배경으로 넉넉한 살림을 이루어 왔다. 고산이 보길도에 원림을 조영하고 이 집과 보길도를 오가면 생활할 수 있엇던 것도 그러한 넉넉한 형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 형태로 결합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사랑채는 윤선도가 봉림대군의 스승이었던 인연으로 효종이 수원에 집을 하사했었는데, 효종이 승하한후 윤선도가 낙행하면서 이 곳으로 배로 옮겨와 사랑채로 썼다.
안채 공사를 진행중인데 당초 7월 20일까지로 되어 있던 공기가 지났는데도 아직 끝나지 않아서 볼 수 없게 되어 아쉬웠다. 그래도 훤출하게 드러나는 편이어서 밖에서나마 대가집 양반가옥의 면모를 살펴 볼 수 있었다.
집 주변에는 유뮬관 등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그런데 한고택의 유물을 관리하기 위헤 그렇게 많은 시설이 들어서서 앞을 가리는 것이 당초 고택의 분위기에 영향을 주고 있다.
보길도로 들어가는 배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로 땅끝 선착장으로 향했다. 가다 보니 좌측으로 아침 바다가 잔잔하게 바라보였다. 오래전 한 해를 마감하고 새 해를 맞이할 때 일출을 보러 온적이 잇는데 그 때는 땉끝으로 가는 길가에 승용차 등이 길게 늘어서기도 햇었다.
7시 40분 땅끝 선착장에 도착했다. 미리 예약이 되어 바로 표를 사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입구에서 차에서 내려 땅끝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바다쪽으로 가장 멀리 뻗쳐나온 ‘땅끝’ 부분이 약간 허물어진 듯 벼랑져 잇었다. 귻이 우리나라 육지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실제적인 느낌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날씨는 구름이 끼어 누그러진 햇살이 은은하게 비추었다. 잔잔한 아침 바다가 그윽하게 느껴졌다.
토말비를 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어 바로 배를 탓다. 보길도까지는 25분 정도 소요 된다고 했다. 정박한채 손님을 태우고 있는 배에 올라 2층과 3층 갑판을 오르락거리며 주변을 돌아 보았다.
배는 바지선처럼 1층이 넓게 되어 있었다. 2층에 객실 주위로 갑판이 있어 밖에 나가 조망할 수 있게 되어 있고 그 위 지붕에도 갑판이 있어 좀 더 시원스레 바라다 볼 수 있었다. 출발전까지 갑판에서 해안과 바다 이곳저곳을 보라보며 사진을 찍었다.
학생들은 벌써 바다 풍광에 매료되어 얼굴에 즐거움이 가득해 보였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배경으로 연신 사진을 찍고 있었다. 머리 위로 하트 모양을 그리며 돈독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윤주가 사진 작가처럼 열심히 찍어 주었다.
잠시 후 배가 출발했다. 육지가 멀어지며 땅끝 주변 풍광이 점차 더 너르게 펼쳐보였다. 바다로 나가면서 펼쳐 보이는 국토의 끝 풍경이 느껴져 스케치를 했다. 배가 좌측에 있는 섬을 하나 스쳐지나갔다. 그 섬을 지나니 멀어진 땅끝이 그 섬 뒤로 중첩되어 보였다. 저 멀리 출발 지점이 바라다 보였다. 땅끝과 보길도는 눈으로 건어 보이는 가까운 거리였다.
보길도에 가까이 다가가자 배가 속도를 느추며 정박 채비를 했다. 좌측으로 화강석을 채석하는 시설이 보였다. 그 시설dl 상상한 보길도의 인상을 혼란스럽게 했다. 바다 위를 따 갈 때는 자유자재해 보이지만 배가 닿거나 할 때는 그 커다란 배도 출렁기리지 않게 밧줄로 붓들어 매곤 한다 .
8시 30분 배가 선착장에 닿아 다시 버스에 탄채 출발했다. 보길도는 노화도와 보길도의 2개의 섬으로 되어 있다. 선착장이 있는 곳은 도화도이다. 그 곳에서 육로로 가자 보길도를 건널때는 새로 놓은 보길대교를 건너가게 되어 있다. 가다보니 다리가 나타났다. 그 다리가 놓여 보길도 문화 유적지를 돌아보기가 한결 수뤙해졌다. 하지만 고산이 반겼던 풍광의 편암함은 많이 잃어버리게 되엇다.
8시 35분 세연정에 도착했다. 버스가 멈춘 주차장 옆으로 이 곳 할머니들이 어물 등을 갖고 나와 팔고 있었다. 11시 배를 예액해 놓아서 서둘러야 했다. 그 시각에 출발해도 서울에 6시 안에 도착하기가 빠듯할 것 같았다.
유명한 세연정에 도착햇지만 잠시 분간하기 어려웠다. 전에 들어갔던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앞에 학교가 새로 들어서서 길을 가늠하기 어렵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장소적 느낌도 달라져 있었다.
도로가에 새로 지어 놓은 관리용 건물안으로 들어가서 개울 옆 뚝길을 걸어 들어갔다. 조금 들어가다 보니 바로 새연정의 노습이 보였다. 이 곳은 한국의 3대 원림의 하나로 꼽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개울말 막아 못을 만들고 섬과 대를 쌓고 정자를 세워 놓앗다.
윤선도 선생은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다는 소식을 듣고 식솔을 이끌고 서해를 거슬러 도우러 올라갔으나 강화에 다다를즈음 임금이 이미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은거할 결심을 하고 제주도로 가다 이 섬에 잠시 들렀는데 그 때 접한 풍광에 반해 아예 머무르기로 한 것이다.
이 연못은 자연 하천에 판석보를 쌓아 물을 가두어 만들어졌다. 그리고 뚝을 형성한 판석보는 상자보를 만들 듯 표면에 판석을 설치하고 그 안에 강회 다짐을 했다. 연못가에는 흑약암 등 여러 가지 원림 요소들에 대해 설명해 놓은 안내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일행을 세연정에 오르게 한 후 맞은편 바위 위에서 설명을 한다음 10분 정도 여유를 두고 9시 20분 차에 타라고 했다. 늦어져서 9시 30분 세연정을 출발해 동천석실을 가는 도중 9시 35분 낙서재 인근에 도착했다. 두 곳을 다 들르기에는 강의 자료로 사진만 얼른 찍어 오겠다고 하고 달려가 찍고 나왔다.
다시 차f를 타고 동천 석실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 도책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모든 사람이 다 다녀 오다가는 지체될 염려가 있었다. 류수현 교수님이 낙서재 갈사람과 동천 석실 갈 사람이 걸음에 따라 나누어 돌아보자고 해서 그리 하기로 했다.
10시 10분까지 다시 차가 선 자리서 모이기로 하고 동천석실로 앞서 갔다. 뒤에 오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조금 가다보니 뒤에서 몇 사람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경사가 급하고 거리도 제법 멀게 느껴졌다. 빽빽한 숲에 길에는 자연석을 계단처럼 다듬어 놓은 곳도 있었다. 경사가 급한 길을 한동안 올라가다 보니 우측에 숲 터널 끝이 액간 환해 보였다. 그리로 나가니 바우ㅢ 절벽 위에 작은 정자가 하나 보이고 그 아랬쪽에도 같은 규모의 장자가 하다 보였다. 그 아래쪽 정자는 전에 왔을 때 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 동천 석실은 고산 윤선도가 신선이 사는 곳을 동천복짛라고 부르는데서 따 온 것인데 그가 이 곳을 신선의 세계로 묘사한 생각이 담겨 있다. 고산은 이 곳에 도르레를 설치하고 물건을 운반했다고 한다.
동천석실에 갈 사람과 낙서재로 갈 사람 두 편으로 나누어 다녀오기로 하고 앞장서 동천석실로 올라갔다. 바로 뒤에서 임규삼 학생이 따라 오는 것 같았다. 13분 후 10시 53분 동천 석실에 도착했다. 올라오는데 13분이 걸렸는데 내려가는 시간은 더 적게 걸릴 것이니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잠시 후 뒤에서 많은 학생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교수님 두 분도 올라오고 계셨다. 다 모이니 11명 정도가 되었다. 뒤따라 온 일행이 힘들게 숨을 몰아쉬며 올라와 명랑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맑은 모습을 대하니 보기 졸았다. 그 곳을 탐방한 모습을 기념으로 남기기 위해 단체 사진을 찍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11시 배를 타려면 서둘러 내려가야 해서 설명을 할 시간을 갖기 어려웠다.
동천석실은 한칸 x 한칸 규모의 작은 정자인데 지난 여름 태풍에 피해를 입었는지 기와장이 허물어져 있었다. 안에도 부스러진 건물 조각이 있고 문도 함부로 열려진 모습이어서 학생들이 문화 유적지다운 느낌을 갖기 어려울 것 같아 염려되었다. 그래도 학생들은 툭 트여 보이는 시원한 전망과 거기까지 올라온 보람과 환호를 하며 즐거워 했다. 밝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시간을 의식에 단체 사진을 찍고 그만 내려가자고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내려오면서 동천석실을 보며 스케치를 하고 왔다. 스케치를 하는 동안 앞장서 내려간 일행이 금새 보이지 않아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숲 터널을 지나다 맨 뒤에 가는 학생을 만났다. 숲 터널 끝이 환해지면서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나타났다. 그 다리는 회향교인데 복희 황제가 지나던 다리 이름이라고 한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학생들에게 동천 석실에 대해 설명했다. 날씨가 점차 밝아져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세연정을 지날 즘 밝은 학생들에게 잘 나온 사진을 보여주고자 잠시 내려 사진을 찍고 만대편 입구로 나가 버스에 탔다.
이제 예정했던 담사를 마치게 되었다. 다시 땅끝으로 나가 식사를 하고 서울로 돌아갈 일정만 남게 되었다. 다른 선착장 코스로 가고 있는 것을 이 교수가 급히 알려주어 길을 바로 들어 다행히 선착장에 늦지 않게 도착해서 다시 버스를 탄채 배에 올라탔다.
다음 장소로 정해진 일정에 따라 움직일 때와 달리 마음이 느긋해져서 출벌전까지 여유롭게 주변 풍광을 바라 보게 되었다. 다시 갑판위에서 다시 들어올때 보이던 채석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이 고산이 찾았던 보길도의 인상을 크게 변모시키고 잇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스케치 했다.
배가 출발했다. 날씨가 더 맑아지고 있었다. 답사 일정을 마친 후라 마음이 아주 여유로워졌다. 교수님들과 커피를 마시며 잠시 환담했다. 그런데 학생들은 많이 보이지 않앗다. 잠시 쇄석기 쪽 풍경을 스케치를 하는 사이 배가 출발했다. 다시 뱃전 이곳 저곳을 돌아보았다. 몇몇 학생들이 사지을 찍고 잇었다.
바다 위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섬들이 너른 호수를 둘러치고 있는 산처럼 보엿다. 그리고 그 풍경이 마치 산수화처럼 느껴져 스케치를 했다. 다시 들어갈 때 보았던 섬을 지나 나오니 시야가 더 널게 펼쳐보였다. 배를 타고 가는 동안 바다위에 떠서 평소 대하기 어려운 시원스런 풍광을 바라보게 되었다. 배를 타고 떠가는 이 같은 순간이 아니면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너르게 시야가 펼쳐진 바다위에 있다 보니 가슴속까지 시원해짐을 느꼈다.
평소 일상의 공간을 분주히 오가며 살다 보면 나를 돌아보지 못한채 그냥 휩쓸려 가고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평소 대하는 일상적인 풍경 이외의 이런 색다른 모습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지날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여행이란 정말 좋은 의미를 갖는 시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배가 도착할 때까지 그리 길지 않은 그 시간이 너무도 귀하게 느껴졌다. 가슴이 시원해지고 도회지에 아등바둥 거리며 막힌 그 무엇도 다 풀어 헤쳐 나갈 것처럼 시원해짐이 느껴졌다. 새로운 느낌으로 세상이 바라보이는 듯 했다. 그리고 온 몸으로 소중히 느끼려고 나름 애를 썼다.
스케치북을 펼치다 갈피에 끼워둔 메모지가 허공으로 날아가 바다에 떨어지고 말았다. 출발때부터 장소별로 도착과 출발시간을 메모한 것이어서 그것을 잃은 것이 나의 일부가 바다에 빠진 듯 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배가 다시 땅끝에 도착했다. 아침대신 빵만 먹고 난터라 다들 시장한 상태였다. 올라가면서 식당을 찾아 식사를 하기로 했다. 기사분이 마침 아는 기사 식당이 있다고 안내하여 그 곳으로 가서 갈치조림으로 식사를 했다. 모두 방금 지은 밥이 맛있다며 추가 밥과 반찬을 많이 시켜 먹었다. 시장하던 터라 밥이면 반찬이며 곱절이나 시켜 먹는 듯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바로 옆에 바다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조금전 바다를 지나와서인지 본둥만둥 하는 듯 했다.
식사를 미치고 서울로 향했다. 목포 방향으로 가다가 서해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차 안을 돌아보니 일행이 모두 잠에 빠져 있었다. 기사분이 이제 갈 일만 남았다는 둥 서둘러 달리고 있었다. 부안까지 빠르게 올라왓다. 지나온 해남과 보길 도 등을 생각하며 글을 썼다. 서해 고속도로에서 경부고속도로로 점어든 다음 안성 휴게소에서 한번 더 쉬고 구리를 거쳐 6시 30분 학교에 도착했다. 무사히 일정을 마친 것을 함께 자축하며 귀가했다.
(20122026 김석환)
보길도
20121026
은거할 땅 찾아나서
배에 올라 건너온 땅
격자봉서 흘러온 물길따라 오르다
살가운 산 기슭 한 켠에
무거운 마음 내려 놓았네
궁성의 영화보다 더 흡족해 뵈는
바닷가 어부들의
온화한 낯빛이 부러워
개울 막아 연못 이루고
섬하나 놓아 정자를 짓고
대에 오른 무희에게
학의 날개짓 같은
품사레를 보이라 했네
해 남
20121026
한 겨울 삭풍도
달마산이 바라보는
해남 들녘을 지날때는
춘삼월 훈풍처럼 따스해진다.
잔잔해진 바닷 물살이
대지품이 그리운 듯
깊게 밀려들어오고
산허리서 내려온 개울 물살은
에둘러 몸을 섞는다.
한양서 고관대작을 지낸 선비가
타박한 세상 등진채 돌아오고
그리 너르지도 않은 들녘에서
땀흘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덕덕한 마음으로
나그네에 정을 베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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