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길위의 인문학 ‘동해의 서정을 따라’ 탐방 후기
제 1일 (9월 21일)
국립중앙도서관과 조선일보, 교보문고가 공동 주관하는 ‘길위의 인문학’ 9월 넷째주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출발지인 국립중안도서관으로 나갔다. 하늘에 검은 먹장 구름이 끼어 있어 비가 올 듯 걱정스러웠지만 행사가 진행되는 연 이틀 맑을 거라는 일기 예보가 나와 있어 각정이 되지 않았다.
7시 20분 도서관 앞에 당도하니 명찰과 자료집 등을 나눠 주었다. 2호차에 올라 앞에서 4번째 통로측 좌석이 비어 있어 옆에 계신분께 d니사를 드리며 앉았다. 이런 행사에 참석하면 모르는 사람들과 새로 만나 일정 동안 얼굴을 익혀가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예정시간을 조금 넘겨 맨 처음 탐방지인 건봉사를 향해 두 대의 버스가 출발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속초의 이상국 시인과 함께 이번 탐방의 초청 강사인 문태준 시인이 몇일전 국립중앙도서관 대강당에서 했던 강연 녹화 테이프를 틀어 주었다. 강연을 하면서 강조한 부분을 자막으로 띄어 놓았는데 그냥 글자로 읽을 때보다 강연자의 음성을 함께 듣는 것이 훨씬 생생한 느낌을 갖게해서 목소리가 그 사람을 나타낸다.는 말에 실감을 했다.
8시 50분 홍천 휴게소에 도착해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출발했다. 한 시간쯤 더 달리다 창밖을 보니 백담사와 인근의 만해문학관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용대리를 지나 설악의 품안에 들어섰다.
버스가 진부령 길로 접어들어 있었다. 10시 9분 문득 좌측으로 백두대간 진부령 표지석을 보았다. 그 표지석을 보고 전에 이 곳에서 마쳤던 대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전율하듯 큰 감회에 사로잡혔다. 일상에서는 어느덧 그 강렬했던 체험의 기억이 희미해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부근 길가에 거진 30km, 간성, 25km 이정표가 보였다
진부령울 넘어가는 동안 파란 가을 하늘이 멀어 보였다. 황망하게 보낸 여름철이 지나고 그 때와의 세월 간격도 절벽 틈처럼 갈라지고 있다. 더위에 부대끼며 세월을 공허하게 흘려보냈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을엔 휀지 문득 공허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사람들은 그런 기분이 들때면 어디론가 따나고 싶다는 말들을 하곤 하는데 이번 탐방은 “동해의 서정' 이라는 제목대로 그런 기분을 가진 사람이 찾아가기에 딱 알맞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원도는 그 지명만으로 일상을 벗어나 쉼을 얻는 한가로움의 장소 그리고 순수한 자연의 품으로 인식된다. 마치 궁궐의 후원처럼 분주한 삶에서 겪은 세파를 씻어낼 수 있는 느낌이 드는 공간이다. 그리고 출가자들이라면 청정수행의 장소로써 안성마춤인 곳이다. 그래서인지 설악산 오대산등 강원도 지역의 큰 산에는 오래전부터 명찰들이 그 품 안에 둥지를 틀었다.
11시 15분 고성 건봉사에 도착했다. 초가을 날씨가 청명했다. 공기를 들이며시다 한쪽으로 모여 인사를 나누고 일주문을 들어서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갔다. 좌측 범종각 앞에 세워진 석주에는 특이하게 아미타 불기(2955년)가 새겨져 있었다.
극락전 터는 주춧돌만 놓인 빈터로 남아 있다. 거기서 적멸보궁으로 가면서 우측을 보니 개울 건너에 대웅전 영역이 한눈에 보였다.
건봉사는 520년(신라 법흥왕 7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758년에 발진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스님등과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되었다. 여기에 신도 1,820인이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서 120인은 의복을, 1700인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인들을 봉양하였다. 787년에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서 극락에 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한다. 이로써 아미타 도량이 되었다.
고려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서봉사로 바꾸었다. 방금 본 석주의 맨 위에는 그 것을 상징하듯 봉황이 조각되어 있었다. 1358년에는 나옹스님이 중건하고 건봉사로 개칭하여 비로소 염불과 선, 교의 수행을 갖춘 사찰이 되었다.1465년에는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했다. 이때부터 조선왕실의 원당이 되었는데, 성종은 효령대군, 한명회, 신숙주, 조흥수, 등을 파견하여 노비, 미역밭과 염전을 하사하고 사방 십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기병한 곳으로 호국의 본거지이었으며, 1605년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강화사로 갔다가 통도사에서 왜군이 약탈하여 갔던 부처님 치아사리를 되찾아와서 이 절에 봉안한 뒤 1606년에 중건하였다. 1802년에는 용허 석민스님이 제2회 염불만일회를 열었으며, 1851년에는 벽오 유총스님이 제3회 염불만일회를 열었고, 1878년 4월 3일에 산불이 일어나서 건물 3,183칸이 전소되었는데 다음 해에 대웅전, 어실각, 사성전, 명부전, 범종각, 향로전, 보안원, 낙서암, 백화암, 청련암을 중건하였다.
1881년에는 만화 관준스님이 제4회 염불만일회를 설치하였고, 1906년에는 신학문과 민족교육의 산실인 봉명학교도 설립하였다. 1908년 제4회 만일회를 회향한 뒤 금암 의훈스님이 제5회 염불만일회를 설하고 옛부터 있던 돌무더기의 소신대에 31인의 부도를 세우는 한편 1921년 인천포교당과 봉림학교를 세웠으며, 한암스님을 청하여 무차선회를 여는 등 우리나라 4대 사찰의 하나요 31본산의 하나로서 명망을 떨쳤던 곳이다.
연지 가운데 가로질러 놓인 돌 다리를 건너 적멸보궁으로 갔다. 적멸보궁이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 앞에 지은 대웅전을 일컬어 부르는 명칭이다. 여느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의 불상을 모시고 있지만 이러한 적멸보궁은 불상을 모시지 않는데 그 까닭은 건물뒤에 안치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곧 부처의 진신을 상징하기 불상 같은 이미지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이 곳 말고도 금산사 등에도 적멸보궁이 있는데, 영취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중대,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 설악산 봉정암의 적멸보궁을 5대 적멸보궁으로 꼽고 있다.
적멸보궁 부근의 산신각 등을 둘러보고 개울을 건너 대웅전 마당으로 가서 이상국 시인의 설명을 들었다. 이 시인은 어렸을 때 건봉사가 “절이 하도 커서 아침에 응가하면 저녘에 떨어진다. 식구가 많아서 솥안에서 배를 타고 밥을 짓는다” 는 말들을 들었었다고 했다. “민통선 안에 있어 들어오지 못하다가 1980년 처음으로 은파교를 넘어 들어왔는데 그 때는 고목도 있고 숲이 둘러싸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후 1980년대 이 절을 복원하면서 고증을 안거치고 시간을 두고 하나 짓고 좀 있다가 또 다른 건물 하나 짓고 이렇게 하면서 제대로 되지 않은 면이 있다고 했다. 건봉사내의 봉명학교라는 사찰학교가 있었는데 이 학교 출신들이 일본에 유학을 많이 갔다. 숙부도 이 학교 출신이다. 만해스님 이 곳에서 강의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만일염불원 앙으로 들어가 부처님 치아 진신사리를 친견했다. 우리나라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갖게 된 것은 646년(선덕여왕15) 중국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받은 부처님 진신사리 100과를 가져와서 태기사, 통도사에 모신 것이 계기이다. 그런데 임진왜란때 일본에서 가져간 것을 사명당이 가서 되찾아온 다음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5대 적멸보궁에 분과했다고 한다
만일염불원 출입문 상부에 걸린 옛 건봉사 흑백사진을 보니 그야말로 대찰의 모습이었다. 건봉사는 조선시대 4대 사찰로 꼽힐만큼 대가람이었다. 하지만 6.25전쟁 때 완전히 폐허화 되어 폐사지로 있다 중창불사를 하여 옛날의 면모를 되찾으려 하고 있다. 1998년경 내가 이곳을 처음 왔을 때는 지금의 대웅전 영역도 거의다 비어 있었다.
지금은 대웅전 영역이 거의 중창되어 있는데 그래도 전체 입지로 볼 때 짜임새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 이유가 우선 대웅전 영역으로만 보면 입지 조건상 옆으로 흐르는 산세에 평행하게 면해 사방에서 감싸는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건봉사는 현재 비워 있는 극락전 영역이 함께 건물이 들어서 있어야 주변 산세에 안긴 양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렇지만, 대웅전 영역과 극락전 영역이 지형차가 제법 커서 공간적 일체감을 갖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12시 7분 건봉사를 출발했다. 들어오면서 좌측 차창밖으로 보이던 입구의 건봉사 부도군을 들르지 못하고 나온 것이 아쉬웠다.
12시 20분 거진항 염강활어식당에 도착했다. 바로 옆이 어항이어서 바다를 터전 삶아 살아가는 체취가 느껴졌다. 식당으로 들어가니 상차림이 되어 있었다. 해물찌게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앞에 앉으신 분이 찌개를 먹다가 터트린 미더덕이 갑자기 내 옷에 벼락을 쳤다. 종업원에게 물수건을 바다 닦아도 얼룩이 지워지지 않기에 화장실로 가서 세탁을 해서 수습을 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밖으로 나와 다시 항구를 바라보며 스케치 했다.
13시 20분 화진포를 향해 출발했다. 그곳은 몇해전 가을 동화등 유명한 드리마 촬영무대가 된 후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그 이전에는 멀고먼 이곳을 알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이 않아서 그 특별한 풍광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었다.
14시 화진포에 도착했다. 화진포에는 이승만 대통령 별장과 북한의 김일성 별장이 이웃하듯 지어져 있어 더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화진포의 이승만 별장은 1954년 완성 1955년~1958년 이승만 대통령 이용했고 그 뒤 사용하지 않아서 무너진 j것을 1999년 복원했다. 계단을 올라 이승만 초대 대통령 별장 내부를 돌아보았다. 거실에는 이대통령 내외가 의자에 마주 앉아 한가롭게 쉬고 있는 모습을 조형물로 만들어 놓았는데 사진등으로 보았던 그 분의 인상이 잘 나타나 있었다. 방과 집무실에는 평소 입던 의복이나 책상 등이 소박한 체취를 띠었다.
이승만 별장은 1900년대 초 선교사 별장으로 지어졌는데 6.25 전쟁 후 우리 영토가 되고 그 곳에 1954년 이승만 별장을 지어 1958년까지 사용했다. 대통령 별장이라는 선입관과 달리 건물은 단층에 외부를 돌로 마감한 평범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화진포를 앞에 둔 입지 조건은 빼어났다. 별장 뒤 계단을 오른 곳에 역사관이 있어 돌아보고 김일성 별장으로 걸어서 이동했다.
조금전 들렀던 이승만 별장에서 내려다보인 호수의 언저리 길을 걷다보니 길가에 느즈막히 마지막으로 핀 해당화가 어쩌다 한송이씩 곱게 피어 있었다. 그리고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맑고 잔잔한 호수가 상큼한 기분을 자아냈다.
화진포는 둘레 16km, 수심 15m, 면적 2.36㎢로 후빙기 해면상승으로 해안이 침수됨에 따라 하곡을 중심한 낮은 곳이 만입으로 변하고 그 입구가 중평천과 월안천의 토사공급으로 이루어진 석호이다.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으며, 겨울에는 백조(천연기념물 제201호)가 도래하고, 여름에는 해안을 따라 해당화가 피어 운치를 더해준다.
주차장을 지나 해안선 길을 조금 가다보니 바다에 면한 산자락에 김일성 별장이 걸터 앉은 듯 보였다. 계단을 올라 가까이 가니 외부를 굵은 강자갈로 마감한 3층 건물이 마치 작은 성처럼 보였다. 그 곳은 화진포의 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 내부를 살펴보니 2층, 3층이 전시실로 꾸며져 있고 3층의 바다에 면한 방에 들어서니 그 창문으로 바다 풍경이 펼쳐보였다. 맑은 가을 날씨에 연초록 빛깔을 띤 맑은 바닷물과 가없이 멀어진 파란 하늘 빛, 그리고 앞에 보이는 소나무의 솔잎 빛깔이 빛나게 어울려 보였다.
건물을 나와 바닷가로 내려오니 일행이 편안한 표정으로 스스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동해안의 서정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마음이 저절로 맑아질 것 같은 깨끗하고 서정적인 공간에 잠시나마 머무는 시간이 퍽 귀하게 느껴졌다. 강원도 산세를 배경으로 펼쳐진 동해바다의 한적한 체취를 접하면 쓸쓸하고 고독한 느낌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입지의 바탕에 깔린 그러한 느낌이 사람들의 본바탕의 순수한 정서를 불러일으키게 될 것 같다.
3시 10분 화진포를 출발해 청간정으로 갔다. 청간정은 관동 팔경의 하나이다. 관동은 대관령의 동쪽을 의미한다. 일찍이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곳의 아홉 고을을 ‘경치가 나라 안에서 실상 제일’이라고 했다. 그는 누대와 정자 등 훌륭한 경치가 많은 이곳을 칭송하면서, 흡곡(통천) 시중대, 통천 총석정, 고성 삼일포, 간성 청간정,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을 사람들이 관동팔경이라 부른다고 했다. 흡곡의 시중대 대신 평해의 월송정을 넣기도 한다.
관동의 명칭은 고려 성종때 오늘날의 서울 경기 일원을 관내도(關內道)라 하고, 그 동쪽을 관동(關東)이라 칭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면 행정구역상으로 강원도 일원이 다 해당되지만, 흔히 대관령의 동쪽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두 개의 관동별곡이 지어져 전해져 왔는데 그로부터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앞서 나온 것은 고려말 문인 안축(安軸1212~1348)이 강원도에서 졸부사라는 벼슬을 보내고 돌아가는 길에 관동지방의 정자와 유적 특산물 등에 감흥 하여 지은 경기체가를 말하고, 그 후대 것은, 조선 선조때 문인 정철(鄭澈 1536~1593)이 1580년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로 근무하면서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을 두루 거쳐 유람하면서 남긴 시가 관동별곡이다. 정철이 남긴 글의 내용 중에는 전란에 시달린 백성들의 생활도 살피고, 의로운 풍속을 일으켜 왕의 덕화가 일게 하려는 것도 있다.
바다는 첩첩, 산은 만 겹인 관동의 별다른 지경
푸른 장막, 붉은 장막을 친 병마영의 성주가 되어
옥띠 띠고, 일산 기울고, 검은 창, 묽은 깃발로 명사길은
아 순 칠하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떤가!
북방 백성 제물로 의로운 본받는 기풍 일으키며
아, 왕의 덕화를 중흥시키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떤가!
- 정철의 관동별곡중에서 -
3시 37분 청간정 주차장에 도착했다. 청간정은 그 주차장에서 해안쪽으로 오르는 야트막한 산자락에서 동해가 훤출하게 트여 보이는 곳에 서 있다. 그리고 우측 측면에는 설악산으로부터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청간천이 흐른다.
청간정은 조선 중종 15년 (1520)에 고쳐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지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1844년 불타버린 것을 1928년에 다시 지었다가 1981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양사언과 정철의 글씨 숙종의 어제시 이승만 대통령의 현판 글씨가 있고 최규하 대통령도 친필을 남겼다.
청간정은 청간천과 바다가 합쳐지며 다양한 정취를 자아낸다. 관동팔경 가운데서도 장소마다 각기 느낌이 다른데 망양정과 월송정은 조금 안온하고 낭만적 느낌이 드는데 비해 청간정은 고절한 느낌이 든다. 번잡함을 벗어난 큰 산세의 언저리에서 망망대해가 펼쳐 보이는 해안의 장소성 자체가 마치 속세를 떠나 법계에 들어서는 느낌과 비슷하다. 현재는 하천에 농토가 일궈져 있고, 인근 어항을 드나드는 배들과 항구의 모습에 삶의 체취가 드리워져 본래의 원초적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기 어렵다.
일행이 청간정에 올라 주변을 하념없이 바라보는 사이 이상국 시인이 예기를 했다. 그 분은 이 곳에서는 북한지역 냄새가 난다고 했다. 이 곳은 과거 삼팔선 이북 지역으로서 6.25후 우리 영토가 되었다. 이어 문태준 시인이 준비해온 시를 읽어주었다.
화진포에 이어 다시 아름다운 공간과 서정이 어우러진 귀한 공간의 느낌이 다가왔다. 나는 고절한 바다와 바다로 흘러드는 청간천, 정자를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소나무 숲을 번갈아 바라보며 이 곳의 장소적 특징을 압축적으로 느끼려 애를 썼다. 바다 또는 세상의 끝으로 보이는 태고로부터 침묵해온 동애의 수평선이 그 심연한 깊이만큼이나 많은 사연들이 두터운 이불장처럼 쌓여 있을 것 같았다.
4시 15분 청간정을 출발해 속초의 영금정으로 향했다. 온전히 자연과 대면한 청건정과 달리 질박한 속세로 들어서는 기분이 들었다. 4시 32분 영금정에 도착해 다시 이상국 시인의 설명을 들었다.
“속초시 인구는 8만 정도인데 인구가 10만이 안되었지만 상징적으로 양양시에서 분리해 시로 승격시켰다. 영금정은 원래 정자가 없었고 기암 괴석 사이로 바닷물 들어왔다 나갔다 할 때 거문고 타는 소리가 난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해는 섬도 별로 없고 툭 트인 바다에 아무 것도 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면 절망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동해바다의 섬 이름은 3가지이다. 새가 살면 조도, 대나무가 자라면 죽도, 풀이 많이 나면 초도로 불린다. 영금정 앞 초도는 새 분비물 때문에 소나무가 고사되고 있다. 더욱이 몇 해전 겨울에 많은 눈이 내려 동해도 입어 위험에 처해 있다.” 고 했다.
그리고 “여름에는 인구가 1만 정도 올라간다. 강원도 인구 과거 200만, 현재 150만명으로 줄었다. 원래 이 곳에는 울산바위만한 바위가 있었다. 해안 방파재 공사 하면서 깨서 쓰느라 없어지고 말았다” 고 했다.
이 시인의 속초항 안의 배에 꾸며진 회집가운데 63호집이 고등학교 여자 동창생이 운영한다고 했다. 거기서 자우 시간이 주어져 몇 분과 함께 그리로 가니 질작하고 순박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시원시원한 음성으로 맞았다. 시인의 친구를 보고 회를 주문해 일행들과 함께 조촐한 자리를 가졌다.
영금정을 출발해 5시 45분 숙소에 도착했다. 440호에 여장을 풀고 식당으로 내려가 저녘식사를 했다. 7시 대강당에 모여 김현성 가수의 진행으로 저녘 공연과 특강 시간을 가졌다.
진행자가 미리 부탁한 김애란씨에게 문태준 시인의 시의 낭송을 부탁했다. 그녀가 시낭송이 처음이라며 머뭇거리다 시를 읽어 내려갔다.
운문사 뒤뜰 은행나무
비구니 스님들 사는 청도 운문사 뒤뜰 천년을 살았을 법한 은행나무 있어라
그늘이 내려 앉을 그늘 자리에 노란 은행닢들이 쌓이고 있어라
은행닢들이 지극히 느리게 느리게 내려
제 몸 그늘에 쌓이고 있더라
오직 한 한 움직임/ 나무는 잎들을 내려 놓고 있더라
흘러 내린다는 것은 저런 것이더라 흘러내려도 저리 고와서
나무가 황금사원 같더라 나무 아래가 황금 연목 같더라
황금빛 잉어 비늘이 물속으로 떨어져 바닥에 쌓이고 있더라
바람 타지 않고 죽어도 위가 순결하게 제 몸 안에
다 부려놓고 가고 싶더라
내 죽을 때 눈 먼저 감고
몸이 무너지는 소릴 다 듣다 가고 싶더라
마치 음성이 여고생 같았다. 읽다가 금새라도 눈물을 뚝뚝 흘를 것만 같아 걱정이 되기도 했다. 매우 감성적인 목소리로 한자 한자 낭송할 때마다 언어가 다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진행자가 문시인을 초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시집이 나올 때 기분이 어떠냐고 하니 6개월 정도 앓는다고 했다. 시인다운 감성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이정화씨가 나와 이상국 시인의 시“국수가 먹고 싶다.”를 읽었다.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시집<집은 따뜻하다>중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어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지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끌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은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녘/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 따뜻한 국수가 먹고 있다.
이번에는 조금 호흡이 빠르고 담담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런 톤이 이 시와 더 어울리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어 전부터 길 위의 인문학 공연을 진행해온 김현성 가수와 새로 나온 신재창 가수가 번갈아 음악 이야기와 함께 번갈아 노래를 들려주었다. 신재창 가수의 이등병 편지가 새로운 울림을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사색이 담긴 노래도 인상적이었다. 참가자 들 모두 그 생생한 삶의 울림에 공감하고 있을 것 같았다. 공연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며 오늘 돌아본 곳들을 잠시 정리하다 잠이 들었다.
제 2일 (9월 22일)
이튿날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세면을 하고 잠시 주변 산책을 했다. 로비 한 켠에 마련된 PC방에 들러 메일을 확인하다 보니 아침이 밝아왔다. 밖으로 나가 앞에 펼쳐진 울산 바위 등, 설악산 풍광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범 없이 깨끗한 하늘이 점차 파란 색이 돋아났다. 아궁이에서 아침밥을 짓기 위해 불을 지핀 듯 띠구름 같은 연기가 나직하게 옆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설악산과 이번에 묵은 숙소 사이의 공간은 비워진 듯 평온한 가운데 그 설악산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입지 조건에 의해 이곳저곳 숙박 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속초 시내 등에 있는 관광객을 위한 숙소 등을 다 합치면 정말 만은 숫자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은 숙소가 있다는 것이 설악산의 영향력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 들른 청간정이나 영금정 그리고 오늘 들를 낙산사, 진전사지 등이 다 설악산 풍광과 어우러진 장소성을 띠는 곳이다. 이번에 묵은 속초는 작은 어촌으로부터 현대에 변모된 삶의 패턴에 의해, 그 풍광의 요소를 중시하면서 도시로 커지게 된 곳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일대에는 수 많은 관광 숙박시설들이 들어서 있는데 그 숙박시설이 이 풍광의 가치와 현대인들이 처한 삶이 갈증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7시 30분 어제 저녁을 먹은 숙소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8시 30분 낙산사를 향해 출발했다. 버스가 숙소에서 앞쪽에 구릉처럼 놓여 보이던 능선을 넘어 설악동 쪽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 곳에 양양과 속초 사이 도로공사중로 세워진 교각이 투박하게 놓여 보였다.
구릉을 넘어서니 목우재 삼거리에 우측으로 신흥사 설악파크 호텔 표지가 보였다. 내가 사회에서 처음 한 일이 설악파크호텔 설계에 참여한 일이라 감회가 일었다. 버스가 설악동 입구의 동해안 7번 도로로 나와 낙산사를 향해 달렸다. 좌측 앞에 차창너머로 낙산사가 잇는 지형이 바다 쪽으로 뻗쳐나간 모습이 보였다.
8시 57분 낙산사에 도착했다. 화재를 입은 후 처음 방문이라 어떻게 변해있을지 몹시 궁금했다. 2005년 4월 4일23시 53분 경 강원도양양군 양양읍 화일리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4월 5일 아침 산림청과 군 당국은 헬기 10여 대를 긴급 투입해 진화 작업에 나섰다.
산불은 아침 7시 경 바람을 타고 낙산해수욕장까지 번졌고 오전 11시 20분경 큰 불이 거의 잡힌 듯 보여 주민들은 속속 집으로 돌아와 가재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진화 작업을 위해 투입됐던 헬기는 고성 산불 진화를 위해 기수를 돌렸다. 하지만 잦아지던 불길은 오후 1시경 강풍을 타고 되살아났다.
오후 2시 30분 양양군은 재난 경보를 발령했지만 15시 30분 낙산사까지 산불이 확산되어 방화선이 무너졌고 산불이 일어 난지 불과 1시간 만에 낙산사 대부분의 전각이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이 화재로 21채의 건물이 불타고 보물 479호로 지정되어 있던 낙산사 동종이 소실되면서 보물에서 지정 해제된다. 산불 이후 동종은 복원되었지만 다시 보물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보물 제479호는 결번으로 남아 있다. 그 후 단원 김홍도가 그린 낙산사도를 참고하여 복원했다. 2009년 10월 12일 복구를 완료하고 회향식을 거행했다.
일주문에서 들어서는 쪽으로 능선을 올라 들어갔다. 소나무 숲을 지났다. 화재가 나기 전 울창한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유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깝게도 소실되고 없다. 템플스테이 건물이 마치 사찰 밖 일반 건물처럼 경내에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주출입구로 들어가다 보면 마치 성곽 안으로 들어서듯 홍예문을 지나게 된다. 이러한 홍예문은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 홍예문은 1467년 36개 고을에서 돌을 모아 지었다고 한다.
낙산사는 관음 도량이다.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관음 3대 도량으로 꼽히며, 세계 8대 관음 성지로 아려져 있다. 의상이 관음보살을 만나 그 출발은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삼국유사』「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조에 전하는 낙산사 창건 연기설화는 다음과 같다.
예전에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서 대비진신(大悲眞身)이 이 해변의 굴 속에 계시기 때문에 낙산(洛山)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대개 서역에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이 있는데, 여기서는 소백화(小白華)라고 하고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무는 곳이기에 이를 빌려서 이름한 것이다.
의상은 재계(齋戒)한 지 7일 만에 좌구(座具)를 물 위에 띄웠는데,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시종이 그를 굴 속으로 인도하여 들어가서 참례함에 공중에서 수정염주(水精念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동해룡(東海龍)이 또한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서 이에 진용(眞容)을 뵈고, "이 자리위의 꼭대기에 대나무가 쌍(雙)으로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 이에 금당을 짓고 소상(塑像)을 봉안하니, 그 원만한 모습과 아름다운 자질이 엄연히 하늘에서 난듯했다. 대나무는 다시 없어졌음으로 바로 진신이 거주함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그 절을 낙산사라 하고서 법사는 그가 받은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나갔다
낙산사에는 원효대사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설화도 전해온다.
원효가 낙산사의 남쪽 교외에 이르렀을 때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가 장난삼아 그 벼를 얻고자 청했다. 여인 역시 '벼가 없다.'고 장난으로 대답했다.
원효가 다시 길을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렀을 때 한 여인이 월수백(月水帛)을 빨고 있었다. 원효가 물을 청함에 연인은 그것을 빨던 물을 떠서 주었다. 원효는 그 물을 쏟아버리고 손수 깨끗한 물을 떠서 마셨다. 그 때 들판에 있던 소나무 위에서 한 마리 파랑새가, "제호를 마다한 화상(和尙)아!"라고 하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 소나무 아래에는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원효는 비로소 앞에서 만났던 여인이 곧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임을 깨달았다. 이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고 불렀다. 원효는 관음성굴에 들어가 그 진용(眞容)을 보려했지만 파도가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떠났다.
관음 보살은 중생과 가장 친근한 보살이다. 『화엄경』에는 「보살주처품(普薩住處品)」이 별도로 있어서 금강산에는 법기(法起)보살, 오대산에는 문수보살, 천관산에는 천관(天冠)보살이 상주설법(常住說法)한다고 설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이름 그대로 세상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다 들으시고 부르는 이의 바람대로 언제 어디서나 모습을 나투어서 구원해 주시는 자비의 화신으로, 줄여서 관음보살이라고도 한다. 관음보살은 과거 구원겁 전에 이미 성불한 정법명여래(正法明如來)로 계시다가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중생제도의 대비원력을 세워 보살의 형상으로 나투어 중생을 제도하시는 자비보살이다. 이와 같이 중생제도를 위해 부처님께서 보살의 모습으로 나투어 보살사상을 실천하신다고 한다.
낙산사는 크게 몇 개 영역으로 구분 할 수 있다. 원통 보전 영역은 사찰로서의 중심 영역이고, 관음보살상이 시각적 장소성을 갖는다. 그리고 홍련암은 의상과 관음 보살의 친견을 상징하는 곳이다. 그리고 의상대는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자 기도를 올린 곳으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원통보전은 낙산사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관음보살을 주불로 보신 전각이다. 원통보전은 낙산사의 창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전각이다. 관음보살이 여이주와 수정 염주를 부면서 나의 진신은 볼 수 없으나 산으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있을 터이니 그 곳에 절을 세우라는 말을 듣고 사라졌는데, 그곳이 바로 이 원통보전의 자리라고 한다.
이 안에는 보물1362호인 건칠관세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원통보전 앞의 칠층석탑(보물499호)은 원래 3층인데 1467년(세조13) 7층으로 만들어 낙산사의 보물인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봉안했다고 전해진다. 그 전면으로 좌우 행각과 정면 앞쪽에 빈일루가 영역을 반듯하게 구성하고 있다. 범종루는 십자각 형태로 다시 지어 놓은 것이다.
빈일루 앞에는 사천왕문이 놓여 있는데 낙산사에는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에 이르는 과정이 없고 천왕문만 있다.
천왕문에는 수미(須彌)산의 4주(洲)를 수호하는 신(神)인 사천왕상을 안치하여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불도를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 세워졌다. 사천왕문에는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고 수행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문천왕 등의 사천왕상이 있는데 각각 불국정토의 동, 서, 남, 북을 지키는 신들이다.
뒷 길로 관음 보살상으로 갔다. 이 것은 동양 최대의 관음상이다. 그 관음상 정면 경사 기슭에는 관음전이 있는데 그 안에는 적멸보궁처럼 관음보살상 이보이도록 창만 내어 놓았다.
거기서 의상대로 내려가는 길 좌측에 있는 공중 사리탑을 들렀다. 여기서 불기 2550년(2006년) 4월 28일 오전 9시 30분경 공중사리탑을 보수하던중 탑신석 상면 중앙의 직경 23cm 깊이 17cm 의 원형 사리공에서 부처님 진신사리가 출현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의상대를 지나 홍련암으로 갔다.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 중 하나인 낙산사는 해변에 자리잡은 특이한 구조를 갖춘 절이다. 낙산사 옆쪽에 있는 이 불전은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세웠고 광해군 12년(1619)에 고쳐 세운 기록이 남아 있으나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6년(1869)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이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어 문을 옆면에 달아 앞면으로 사용하고 있다. 법당 안에는 조그만 관음보살좌상을 모시고 있다. 해안선 홍련암 어귀에 놓인 의상대는 낙산사를 지은 의상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만해 한용운이 머물던 1925년에 만든 정자이다.
낙산사를 돌아보면서 산 전체에 관음보살과 관련된 시설들이 반복적으로 조성되이진 듯 보였다. 그래서 전체가 다 하나의 성지처럼 느껴졌다.
의상대를 앞을 지나 남쪽 출입문으로 낙산사를 나왔다. 그 입구에 낙산 비치 호텔이 보였다. 1970년대 후반 가장 유명한 관광 호텔중 하나였다. 낙산사가 세계 3대 관음 성지로 꼽히는 이유는 수려한 자연 풍광의 조건과 관음보살의 친견 이야기가 특별한 장소성을 띠게 된 까닭일 것이다. 그러한 수려한 장소성의 이점을 살려 숙박호텔이 입구를 가리고 들어서 있는 것이 본래의 관음도량으로서의 의미를 가리고 있는 인상이다.
그 호텔 앞을 지나니 바닷가에 긴 상가 가로가 마치 도시처럼 형성된 모습이 보였다. 대부분 낙산사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의 씀씀이로 유지될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전국 유명 사찰들 앞에 형성된 상가 시설의 규모는 그 곳에 찾아드는 방문객수와 비례할 것 같았다.
원래 10시 55분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나오다 보니 예정 시간이 지나 있었지만 이리저리 둘러본 거리가 기어서인지 진행자가 재촉을 하지 않았다.
11시 20분 마지막 탐방 장소인 진전사지를 향해 출발했다. 평소 특별하게 여기고 있는 진전사지를 찾아가는 마음이 다시 새로워졌다. 그 특별함은 관광객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설악산 안쪽품 깊숙한 곳에 한가로운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선종을 들여온 도의선사가 그 깊은 산중에 홀로 찾아와 절을 창건한 역사가 서려 있기 때문이다.
11시 45분 진전사지에 도착했다. 그 곳엔 잔디가 가지런히 깔린 평평한 터에 3층 석탑만 하나 서 있을 뿐 텅 비어 있는 ‘폐사지’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상사적인 일대 전환기의 변화를 몰고 온 현장으로써 그 만큼 의미가 크다.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가장 먼저 남종선의 심인(心印)을 받고 돌아온 사람이 도의(道義)선사였다. 그는 속성이 왕씨이고 북한군, 즉 지금 서울 부근에서 났는데 어려서 출가하여 선덕왕 원년(784)에 사신 감양공 일행을 따라 당으로 건너가 개원사(開元寺)에서 육조 혜능의 법증손인 서당 지장(西堂 智藏)에게 인가를 받았다. 그 후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하여 선법을 전하려 했으나 교종에만 익숙하던 신라 사회에서는 그의 가르침을 악마의 말이니 허황된 소리니 하며 배척했다.
그러자 도의는 경주를 떠나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양양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가서 40년 동안 선정을 닦으며 염거(廉居) 화상에게 법을 전해주고 열반에 들었다. 염거 화상은 설악산 억성사에 주석하면서 다시 체징(보조선사)에게 법을 전해 주었고 그 체징이 나중에 장흥 가지산사로 옮겨 비로소 가지산문을 개설한 것이다. 장흥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 비문에는 “…이 때문에 달마가 중국의 1조가되고 우리나라에서는 도의선사가 1조, 염거화상이 2조, 우리스님(보조 체징)이 3조가 된다.” 고 쓰여 있다.
또한 최치원이 쓴 지증대사 비문에는 당시 시대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도의 스님이 서장(중국)으로 건너가 서당지장으로부터 심인(心印): 즉 자심즉불(自心卽佛)을 익혀 처음으로 선법(禪法)을 말하면서 원숭이처럼 조급한 마음에 사로잡혀 북쪽으로 치닫는 단점(교종의 단점)을 감싸 주었지만, 메추라기가 제 날개를 자랑하며 붕(鵬)새가 남쪽 바다로 떠나는 높은 뜻을 비난하듯 하였다. 그들은 인습적인 염불에 흠뻑 젖어 있어서 도의스님의 말을 마귀의 말(魔語)이라고 비웃었다. 이에 스님은 진리의 빛을 행랑채 아래에 거두고 자취를 항아리 속에 감추며, 동해의 동쪽(중국에서 본 동해의 동쪽, 즉 서라벌)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북산(설악산)에 은둔하였다. … 그러나 겨울 산봉우리에 빼어나고 정림(定林)에서도 꽃다우매 그 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사람이 산에 가득하고, 매로 변화하듯 뛰어난 인물이 되어 깊은 골짜기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팔부신중을 위 기단에 잘 새기는 이유는 기단 돌 가운데에 탱주 하나를 새김으로써 자연스레 사면이 각각 둘로 분할되어 생기는 8면의 공간을 활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팔부신중은 9세기 초에 건립된 경주 남산리 서삼층석탑의 상층 기단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후, 일반형 석탑의 대표적인 장엄이 되었다고 한다.
삼국시대의 사방불은 모두 불력(佛力)에 의존해 사방으로 확장해 가는 초기의 영토 관념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는데 이곳 진전사지의 탑에 새겨진 사방불이 그 시초라고들 생각한다. 이렇게 새겨놓은 사방불은 궁극적으로 탑 내에 안치된 사리에 대한 수호불(守護佛)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다른 경우들도 있지만 대개 방위에 따라 새겨 넣는 부처님의 모습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보통 동쪽에는 약사여래불, 서쪽에는 서방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을 조각한다. 이곳의 불상은 마모가 심하여 그 구분이 어렵다.
이곳에 오면 다른 변화가 생기지 않은 것에 안도한다. 섣부른 복원이나 주변에 번잡스러운 시설이 보이지 않는 것도 안도가 된다. 마냥 바람결을 느끼고 해가 지나며 시시각각 다르게 그려내는 그림자 풍경을 느끼고 아따금 들리는 새소리를 듣고 하염없이 머물고 싶어지는 곳이다.
그런데 조금 떨어진 주변은 크게 변모되고 있다. 영양, 속초 간 고속도로가 놓이고 있다. 도의 선사가 이곳에 수행처를 정한 시대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다행이 이곳에서 둘러친 산세에 가려져 있어서 도로가 바로 보일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것으로 보는 도의 선사 부도를 보러 걸어 올라갔다. 조금 오르다 보니 좌측에 진전사 저수지가 보였다. 우측으로 돌아들어 조금 오르다 우측 산자락에 놓인 부도 앞에 당도했다. 그 곳에 도의 선사 부도로 확실시 되는 부도가 있다.
그 부도 옆에는 새로 현재의 진전사를 지어 놓았다. 그 곳 대웅전 뒤뜰에서 삼행시 시상과 이번 행사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상자로 꼽힌 다섯 분이 상품을 받으며 일행이 띠워주는 운을 따라 자신이 쓴 시를 낭송했다. 어느 새 지었는지 모두 다 훌륭한 글들이었다.
답사를 마치고 인근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대기가 여전히 투명했다. 이상국 선생님 등과 식사를 하면서 막걸리를 몇 잔 마셨다. 맛이 특이했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솔잎을 넣어 빗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마시면서 그 향기를 느꼈던 듯 했다.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차에 오르며 보니 도로 옆에 논에 벼가 누렇게 익어 있었다. 얼마 전 지나간 태풍때문인지 비스듬히 스러진 채 빛을 발하고 있었다.
차에 오르며 다시 뒤돌아 설악산을 바라보았다. 그 빼어난 산세 사이로 가을이 맑게 익어가고 진전사 역사의 숨결이 펄떡이고 있었다.
(20120923 김석환/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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