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아름다운 고장, 아름다운 전시
신문에서 반가운 전시 소식이 눈에 띠었다. 남관 선생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념전을 연다는 소식이었다. 평소 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여겨온, 미술사적 의미가 있는 분의 전시 소식이 반가웠다. 그리고 오래전 보았던 도록을 생각했다. 그런데 기사를 보고 갈등이 생겼다. 전시를 하고 있는 장소가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서 너무 멀리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9일 내가 속한 건축사 등산동호회에서 주왕산 산행 일정에 참가하기로 한 기회를 살려 산행을 일찍 마치고 들러 오려고 마음먹고 갔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아쉽게도 그냥 올라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전시장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남관 선생님의 도록이나 자료를 꼼꼼히 챙겨보는 것으로 대신해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남관 선생님 전시에 관해 알아보았다.
그러면서 이번 전시가 그야말로 놓쳐서는 안될, 꼭 가보지 않으면 안 될 전시로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작가의 작품이, 시기적으로는 초기작부터 말년의 작품까지 생애에 걸쳐 있고 작품 내용도 작가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는 드로잉부터 그의 작품 세계를 완결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작까지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분을 세계적 작가로 인정 받게 한 프랑스에서의 전시 포스터 까지 흥미로운 자료들이 다 구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6월 12일, 전시가 불과 하루 밖에 남지 않아서 서둘러 다녀올 마음을 먹고 11시 50분 동서울터미널에서 안동 가는 버스를 탔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전시가 열리는 청송군 부남면 자동차 정보 고등학교까지 가는 차편을 궁리해보니 안동-진보를 거쳐 청송으로 가서 택시를 타는 것이 가장 빠를 것 같았다. 그렇지만 혹시 도착하기도 전에 문이 닫히게 될 까봐 청송군 문화 관광과 담당자 분께 전화를 거니 평소 5시에 닫지만 멀리서 온다니 6시까지 볼 수 있게 현지 담당자에게 예기해 두겠노라고 해서 안심하고 출발했다.
남관 전시를 보러 가는 길은 청정 자연의 품으로 가는 길이었다. 올해 들어 비가 너무 적게 와서 전국적으로 가뭄 걱정이 크지만 안동에서 진보를 거쳐 청송으로 가는 길 주변에 펼쳐 보이는 임하댐 상류에는 계곡 사이에 담겨진 푸른 물길이 겹겹이 둘러선 산자락과 함께 산자수명한 정취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좋은 미술 작품을 보러 감과 아울러 고향 길처럼 푸근한 마음을 가져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버스가 이동하는 시간만 의식하여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안동과 진보에서 갈아타며 기다리는 시간이 더해지다 보니 다시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진보에서 5시 5분 차를 타고 청송에 닿아 다시 택시를 타고 도착하면 겨우 10여분 정도 밖에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진보에서 버스를 갈아타며 휴대폰을 보다 받지 않은 전화가 결려와 있었다. 번호를 걸어 확인하니 서울서 통화했던 청송군 문화관광과 담당자인 권오근씨였다. 그에게 전화를 미처 못 받았다고 하니, 시간이 너무 바듯할 것 같으니 청송 터미널에서 자가용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나는 미안해하면서 사양했지만 거듭 권하여 감사히 호의를 받았다.
나는 이번 전시 소식이 마치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처럼 마음에 다가왔다. 우선은 인구가 2,000명 밖에 되지 않는 고을인 부남면의 한 교정에서 지역민의 애정 속에 마련 된 것에 흥미가 끌렸다 .내가 현재 사는 곳과 먼 그 고장의 맑고 맑은 산천과 그 맑은 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운 심성이 느껴졌다. 청송은 재작년 마친 낙동정맥을 단독 종주할 때 황장 재 등 들머리 지점에 들어서기 위해 지났었다. 그 때 경상북도가 강원도 못지않은 광활한 자연 입지에 놓인 것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청송은 주변 산세의 해발 고도는 그리 높지 않지만 깊은 산세에 놓인 형국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순수한 지역적 풍토가 느껴졌었다.
진보에서 청송까지는 버스로 2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가는 길 주변에 산과 개울 그리고 간간히 놓인 집들이 한가롭고 평온한 풍광을 이루고 있었다. 5시 25분 청송 터미널에 도착하니 주차장에서 양복 차림의 한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심전심 다가가 인사를 건네니 권오근 씨가 바쁜 일이 있어 대신 나왔다고 했다. 명함을 교환하고 보니 권오근 씨와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심정보 계장이었다.
좋은 전시를 마련해 볼 수 있게 해 준 것만도 감사한 일인데 호의까지 베풀어 주니 담박에 청송군이 더 살기 좋은 고장으로 느껴졌다. 전시장이 있는 자동차 고등학교로 이동하는 길 주변으로 야트막한 산세 사이에 크지 않은 논과 밭이 어우러져 보였다. 건물이 조금 많아진 지점에서 우측으로 학교 대문을 들어섰다. 그 곳이 바로 부남면의 자동차 고등학교였다.
운동장에 세운 자동차에서 내리니 우측 건물에 전시 포스터와 플래카드 등이 결려 있어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이번 전시는 청송군이 기획하고 대벽선교문화재단과 환기미술관이 후원하여 120여점의 회화 작품과 자료 10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현관으로 들어서는 우측 화단 옆에 그 학교 학생 몇 명이 보여 이 고장에서 나신 남관 선생님의 옛 시절을 떠올려보게 했다. 남관 선생님은 “지금도 그림을 그리다 잠시 쉴 때 눈을 감으면 고향의 맑은 자연이 나의 머리를 가득 채웁니다.”라며 고향을 그리워했었다.
학생들이 자랑스러운 고향 선배의 전시를 보러 온 것을 반가워하는 듯, 처음 보는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 얼굴에서 자랑스러움이 느껴졌다. 인구 2,000여명의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특별한 행사이다.
남관은 1911년 청송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일본인 선생에 의하여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하면서 예술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일본 다이헤이요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구마오카 미술연구소에서 공부했으며 문부성미술관 등에 출품, 일본 후나오카 미즈이 상을 받았다. 광복과 함께 귀국한 남관은 3년간 청송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1955년 프랑스로 건너가 정착한 후 1958년 최고의 작가들을 초대해 온 「살롱 드메」에 초대 받아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후로도 연속으로 다섯 번에 걸쳐 초대 출품하였고 1966년, 피카소, 뷔페, 아르망 등 쟁쟁한 현역 작가들로 구성된 프랑스 유일의 유서 깊은 「망뚱 회화 비엔랄네」에서 영예의 대상을 차지하여 에술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구측하게 되었다.
2층 전시장으로 들어서며 시계를 보니 분 닫을 시간이 15분 정도 밖에 남아 있지 않아서 조급한 마음으로 그림들을 보았다. 전시장은 강당을 이번 행사의 특별 전시장으로 임시 마련한 것이었다. 강당은 내부에 기둥이나 벽이 없고 층고가 높아 전시장을 꾸미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전시장은 그 강당에 임시로 전시공간을 나누어 적당한 높이의 간막이 벽을 세우고 구획마다 시기와 성격이 다른 작품들을 구분해 전시하고 있었다.
들어서는 입구 좌측에 마련된 안내 카운터 앞에 서 계신 담당자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우측 앞 칸의 드로잉부터 관람하였다. 그 영역은 특별히 간막이 벽을 진한 파랑색으로 칠하여 눈이 띠었는데, 거기에는 예전에 도록에서 보지 못했던 소품과 드로잉 작품들이 많이 결려 있어 매우 반가웠다. 나는 화가들의 전시 때마다 드로잉을 만나면 항상 반가운 마음이 생긴다. 그 것은 그야말로 꾸밈없는 작가의 체취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남관 선생님의 드로잉 작품들을 보면서 우선 그분의 조형 감각이 매우 뛰어남을 느꼈다. 그리고 한국 미술의 거장으로 자리매김된 서세옥 선생 님 등의 인물 군상을 소재로 한 추상 그림 등이 이러한 남관 선생님의 영향을 받았을 것처럼 여겨졌다.
차례로 칸을 이동하며 돌아보았다. 전시된 작품의 배열은 우측부터 좌측으로 중앙 통로를 들어갔다 나오며 연대별로 볼 수 있게 배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남관 선생님의 작품 경향은 문자 추상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에도 그렇게 일컬어지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런데 남관 외에도 고암 이응로, 서세옥 등 문자 추상 작가로 불리는 작가들이 더러 있다. 특히 그로 인해 고암 선생과는 생전에 그 독자성에 관한 논란도 벌인 적이 있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두 분의 세계가 크게 보아 동양과 서양화라는 장르상의 차이와 생각의 차이를 갖고 계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남관 선생 이후 젊은 작가들의 작품 경향에서도 많이 나타나곤 했다. 그러한 미술사적 독자성 여부를 차치하고 직접 대하는 남관 선생님의 작품이 뛰어나게 느껴졌다.
그런데 문자 추상화라는 명칭은 그 그림의 성격을 자칫 외곡시킬 염려도 갖고 있다. 즉 마치 문자를 단순히 형상적으로 변형해 그린 것으로 전달되어짐으로서 그러한 그림의 가치가 낮게 인식될 수 있다. 그런데 남관 선생님의 문자 추상그림으로 볼리는 그림들을 보면 문자는 단지 화면상의 조형적 구도의 요소로써 다루어짐을 느낄 수 있다. 즉 조형상의 소재가 되고 있다. 그리고 남관 선생님의 그림들은 그러한 조형적 구도 위에 색상과 질감 등에 의 해 우주의 본질 같은 정신정을 표현하려 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깊고 격조 높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세계적 평론가 가스통 디일은 “동서양 어느 일부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둘을 통합시킬 수 있는 유일무이한 대예술가” 란 찬사를 했다.
남관 산생님은 얼룩이나, 발묵, 그리핑, 데칼코마니, 꼴라쥬, 데꼴라쥬, 네거티브 꼴라쥬 등의 다양한 기법을 사용했다. 남관 선생님의 작품은 그러한 다양한 기법에서 비롯되는 우연저이고 신비로운 형상 비취색 같은 신비와 깊이를 자아내는 색조가 어우러진 격조 높은 작품 세계를 이루었다.
그처럼 격조 높은 전시장을 둘러보다 보니 금세 마감할 시간이 되었다. 아쉬움 속에 돌아 나올 생각을 하고 방명록에 감회와 함께 이름을 썼다. 심정보 계장님이 전시 큐레이터 등 수고하시는 분들을 소개해 인사를 나눴다. 잠시 후 전시 장소를 제공하신 청송 자동차 고등학교 오인규 교장 선생님께서 오셔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곳에서 나신 대 예술가의 탄신 100주년을 맞아 교내 시설을 전시장으로 꾸며 작품과 만날 수 있게 한 마음이 귀하게 느껴졌다.
관람객 입장에서는 하루 후 전시가 끝난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이곳이 영구적인 남관 선생님 기념 미술관이라면, 그리고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이 기념관에서 소장한 작품이라면 언제든지 찾아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전시가 열린 강당 등의 임시 시설은 항온 항습 등 작품 보관에 있어 보존성을 충족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대부분의 이번 전시 작품들도 이제 소장자의 품에 다시 돌아가야 되기 때문이다.
교장 선생님께 도난 등 신경도 많이 쓰이시겠다고 하니, 마음 고생한 속내를 감추지 않고 주야로 지킨다고 했다. 그리고 전시가 끝나 아쉽겠다고 하자 “그렇지만 한편으론 시원하다” 고 했다. 그동안 작품 보전 등에 큰 부담을 갖고 계셨던 듯 했다.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그림들을 볼 수 있게 기획한 청송군청 후원기관, 장소를 마련해준 청송 자동차고등학교와 개인 소장품들을 빌려준 소장자, 그리고 개인적으로 전시 경비와 소장 작품을 찬조한 조귀례 사장 등, 모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의 직능성을 살려 미력한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번 남관 선생님의 탄생 100주년 전시는 작품의 가치와 미술사적 의미 등이 담겨진 정말 의미 깊은 반가운 전시였다. 그리고 미술인, 애호가, 언론 등의 많은 관심을 자아냈다. 전시가 열리는 동안 창송 사람들은 내내 축제를 벌이는 기분이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만큼 허전한 마음도 크게 남을 것 같았다. 앞으로 청송을 찾을 때마다 이 고장이 낳은 위대한 화가인 남관 선생님의 삶과 예술을 돌아졸 수 있는 상설 공간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왕산 등의 명산과 낙동강 푸른 물줄기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연풍광, 고향을 사랑하며 고향을 찾아주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청송군민의 아름다운 마음, 그리고 태어난 고향을 늘 그리워하며 그 산천의 성품을 닮아 진실하고 올곧게 화업에 천착하여 세계적 대작가가 된 남관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학교 강당에 특별 전시장을 마련하여 주옥같은 작품을 감상하게 해준 이 전시를 보고 나오며 '아름다운 고장, 아름다운 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20120612 김석환/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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