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이순신의 바다, 불패의 바다' 답사기
오전 7시 중앙도서관을 출발하여 10시 육십령 터널을 지났다. 육십령은 신라가 백제를 멸하기 위해 진격하던 길목이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의 의미를 의식하게 한다. 타자에 의해 존망의 기로에 서게 되고 그 승패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일순간에 바뀌기도 한다.
이번 ‘길 위의 인문학’ 행사는 ‘이순신의 바다, 불패의 바다’ 라는 주제로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길이다. 조선의 운명이 걸렸던 당시 상황에서 충무공의 업적은 언제나 경외롭게 다가온다.
11시 50분경 첫 답사지인 옥포 전적지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당에서 바로 옥포만이 내려다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옥포해전 기념관으로 이동하여 답사를 시작했다.
옥포해전 기념관은 임진왜란 발발후 최초로 조선수군이 왜의 수군을 물리친 옥포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공원과 함께 조성해 놓은 곳이다. 주차장에 내리니 바로 뒤에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효충사가 외삼문 내삼문과 함께 일직선 축을 이루며 놓여 있고 그 우측에는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기념관이 보였다. 일행은 우측 산책로를 따라 동남쪽으로 바다가 펼쳐보이는 옥포루에 올랐다. 바다는 태고적부터 간직해온 모습 그대로일 것 같았다.
진행자가 행사 소개를 한 후 강의를 들었다. 임원빈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소장이 달변에 열강을 하였다. 그는 그동안 국민이 알고 있던 이순신에 관한 내용이 잘 못 알려진 것들이 많았다면서 사료에 입각해 실제적 측면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가장 잘 못 알려진 것이 항상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이겼다는 것이라면서 “이순신은 항상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싸웠다”고 했다. 임진왜란때 천 해전인 옥포해전은 우군 91척, 왜군 30척이이었다. 열세한 상황에서 싸운 것은 한산대첩과 명랑대첩뿐이다. 한산대첩은 58척 동원(거북선 3척 포함)을 동원해 73척과 싸웠고 명랑대첩은 13척으로 333척과 싸워 이겼다.
그리고 조선이 전쟁 준비를 도외시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당시 조선 수군은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무기 체계에서 혁신된 수군이었다. 1355~1365년 명종 때 총통을 만들었다. 그 때 판옥선도 만들고 한강에서 시험도 했다. 그에 비해 일본 수군은 배에 올라타 싸우는 백병전에 강했다. 점함이 작아 속도는 빠르지만 포를 장착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함포는 고려때부터 사용했는데 1380년 우왕 6년에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왜구 2만여 명이 500여 척의 배로 진포(현 군산)에 들어왔을 때 포격을 모두 격침한 일이 있었다.
옥포루를 내려와 후면 계단을 오르니 높다랗게 세운 옥포대전 승전 기념비와 참배단이 긴 축선상에 조성되어 있었다. 특히 참배단은 특이하게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양팔로 떠받쳐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뒤돌아 나오는 길 오른편에 옥포 대우 조선소가 보였다. 그 앞바다가 바로 역사적인 옥포해전의 장소였다. 고요한 앞바다에 유월로 접어들며 푸르러진 푸른 녹음이 반사되어 더 깊게 보였다.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끈 함대는 남해를 돌아 다가가다 선두 선단이 옥포만으로 들어서며 안에 있던 왜선 30척을 발견하고 신기전을 쏘아 밖에 있는 본대에 알렸다. 그러자 곧바로 본대가 공격하여 26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앞에 펼쳐 보이는 잔잔한 바다는 푸르른 유월의 녹음이 비춰 더 평온해 보였다. 한 동안 그 바다를 바라보면서 역사적인 그날의 장면과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겉으로만 보면 역사적 현장으로 알고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옥포 해전이 벌어진 그 날 이 바다는포화가 진동하는 가운데 생사를 가르는 전투가 펼쳐졌을 것이다. 승리와 패배에 따라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치열한 현장이었다. 그 때를 상상하니 당시 상황이 피부로 느껴질 듯 했다.
지금은 그 바다에 대우 조선소가 들어서 있다. 전장의 바다가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 건조장으로 변하였다. 밖에는 방파제가 길게 건조 되어 있어 당시처럼 드나 들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현대의 해전에서는 당시와 같은 전술이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후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을 점령했다. 조선군은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옥포대첩의 승리는 조선 조정이나 백성 모두에게 적을 물리 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계기가 된 커다란 사건이었다.
연구자들은 이순신 장군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을 거라고 한다. 이후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하면서 제해권을 확보하게 되고 그에 따라 적은 해상 보급에 차질을 빗어 육지에서 제대로 거동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군민이 적을 격퇴하겠다는 의지로 뭉쳐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평소에는 때로 임진왜란 전적지 등을 지나면서도 안내판만 보고 그런 곳이구나 하고 지나치기 쉬웠는데 이번에는 주제 의식을 갖고 임하고 보니 장소와 유적 등이 훨씬 생생하게 느껴졌다. 다시 주차장 쪽으로 돌아 나오다 효충사에 들러 방명록에 서명을 했다. 효충사 주위에 심어 놓은 석류나무에 빨강색 꽃이 푸르른 초목과 대비되어 꽃술이 더 선명해 보였다.
옥포대첩 기념관을 나와 통영 한산섬에 있는 제승당으로 향했다. 2시 주차장을 출발하여 2시 57분 통영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해 한산도로 가는 여객선에 탑승했다. 일행들이 좁은 선실 출입문을 들어서다 선실 천정에 머리를 부딪치곤 했다. 안에서 들어서는 사람마다 조심하라고 해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부딪쳐 웃음이 터졌다.
3시 5분 여객선이 출발했다. 한산섬까지는 15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평평해 보이는 드라이 도크 수리선과 빨강색 칠을 한 거대한 유조선이 근해에 정박해 있었다. 일행 몇몇이 유람의 기분을 더 느끼려는 듯 갑판에 나가 시원한 바닷바람을 쏘이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 유명한 한산섬을 들어서면서 설렘이 일었다. 유람지로서가 아닌 이순신 장군이 자취를 찾아 나선 길이기 때문이었다.
배가 금세 속력을 높여 달려가기 시작했다. 배 옆으로 세찬 하얀 물살이 넓게 퍼져 나갔다. 앞 쪽을 바라보며 저 멀리 희미하게 바라보이는 섬이 한산섬이 아닐까 생각하다 궁금한 마음에 여객선 직원에게 한산도가 어디냐고 불으니 아직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가다보니 거북선 모양의 등대가 보였다. 그 옆을 지나니 안쪽에 보이는 섬이 한산섬이라고 했다. 말로만 들었던 한산섬을 직접 보게 되었다.
3시 20분 한산섬 부두에 내렸다. 우측 해안을 따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굽어진 해안 선얼 산자락이 감싸고 있고 주변 섬이 점점이 놓여 그림 같은 풍광을 이루고 있었다. 길 끝에 제승당 외삼문이 나타났다. 우측 경사진 해변 언덕을 돌아 제승당 안마당에 도착했다. 돌아드는 길의 흐름에 운치가 있었다. 정면 좌우에 조선 수군 병사의 전투 복장을 한 인물상이 창을 든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다. 다시 해안을 따라 좌로 돌아드니 계단을 오른 곳에 충무문이 있고 그 안으로 들어서니 정면에 제승당, 좌측에 충무사, 우측에 충무공의 ‘한산섬’ 시가 걸린 수루가 놓여 있었다.
제승당 앞에서 그 곳 문화관광 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다. 아직 앳된 모습으로 보이는 그녀는 마치 이순신 장군의 휘하 사병처럼 씩씩하고 큰 목소리로 이곳의 유래와 유적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제승당은 한산도 대첩 이후 1593년 8월 통제영의 본부를 여수에서 이곳으로 옮겨 삼도수
군통제영을 설치하고 그 본부 건물로 지어진 것인데 당시 이름은 운주당(運籌堂)이었다.
그 후 1597년 원균이 칠천량(漆川梁)에서 대패하며 조선 수군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왜군은 한산도를 접수하여 통제영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그 이후 터만 쓸쓸
히 남아오다가 1739년, 107대 통제사인 조경(趙儆)이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운주당의
옛 터에 다시 전각을 세워 그 이름을 제승당(制勝堂)이라 하면서 친필 현판(懸板)을 걸었
다.
‘제승당’의 명칭은 해상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승리를 만든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해방 이후 1951년 '제승당영구보존회'는 재단법인 '통영충렬사'를 설립하였으며 1976년
박정희 정권에서 제승당 유적을 성역화(聖域化) 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좌측으로 걸음을 옮겨 이충무공 사당인 충무사를 참배했다. 충무사는 배치 구조가 잘 짜여 보였다. 외삼문으로부터 3문을 통해 영정이 있는 충무사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궁궐이나 사찰의 삼문을 지나는 것과 같은 구조였다. 그리고 각 영역은 아주 정갈한 느낌을 자아냈다.
충무사에 봉안된 충무공의 영정은 1978년, 정형모 화백이 그린 것이다. 그 영정은 아산 현충사 영정의 얼굴 모습은 비슷한데 갑옷을 입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실제 모습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서애 유성룡 선생 등의 장군의 인상에 관해 쓴 기록 등을 토대로 영정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다. 서애는 그가 단아한 선비의 모습을 지녔다고 했다.
충무사를 나와 수루를 돌아보았다. 수루에 오르니 바다가 펼쳐 보였다. 안에는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한산섬 시가 편액으로 결려 있었다. 거기서 보니 마치 나직이 읊조리는 이순신 장군의 음성이 들릴 것처럼 그 분의 심회가 느껴졌다. 그리고 전장 중에 겪는 인간적 심정도 느껴졌다.
제승당 유적은 지금까지 본 이순신 장군 유적 가운데 그의 체취가 가장 크게 느껴졌다. 그것은 그 분이 임진왜란 기간의 절반 가까이 머무신데다가 특히 그 분의 대표적 시로 떠오르는 한산섬 시에 등장하는 수루에 그 시가 걸려 있어서일 것 같았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伽)는 남의 애를 끓나니.
수루 등을 돌아보고 제승당 뒤편 아래 있는 한산정으로 갔다. 그 바로 앞에는 만곡한 해안이 절구통처럼 놓여 잇고 그 건너 산기슭에는 3개의 과녘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산정은 바로 그 과녘을 향해 활을 쏘던 사대(射臺)인데 거리는 145m 정도이다.
한산정에 모여 ‘난중일기’완역본 책을 낸 노승석 순천향대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난중일기 임진년(1592)~무술년(1598)년 11월 17일까지 이순신 장군이 쓴 친필일기인데 원 본 일기에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간적 고뇌와 진솔한 면모 등이 나타나 있어서 근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노교수는 난중일기의 내용을 토대로 인간 이순신의 내면과 그의 뛰어난 인격적 면모 등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특히 그는 백의종군 정신을 이순신 장군 정신중에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했다. 이순신 장군은 원균의 모함과 간첩 요시다의 간괴에 의해 누명을 쓰고 한양으로 압송되어 3월 4일 감옥에 들어갔다가 4월 1일 감옥에서 풀려나며 도원수 권율 휘하에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 시기에 이순신 장군은 하늘 같이 여겼던 어머니를 잃었다. 하늘이 무너진 듯 슬픔을 일기에 “어서 죽지 못한 것이 한이다”라고 썼다. 난중일기는 어머니로부터 시작한다. 다산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서 난중일기를 전쟁이야기이기보다 효의 일기라고 평했다. 장군은 운구를 해남으로 옮겨온 것을 모시고 권율을 찾아갔다.
노교수의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앞쪽에 있던 몇몇 여자 분이 눈물을 흘렸다. 나라를 위해 그토록 애쓰신 분에게 가혹한 시련이 닥친데 대해 일행 모두 안타까운 심정이 된 듯 했다. 이순신 장군은 인간적으로 견디기 고뇌와 고통을 이기고 좌절하지 않고 굿굿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명랑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다시 제해권을 장악한, 그야말로 인간 승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597년 7월23일,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는 선조의 교서가 전해졌다. 교서가 바로 '기복수직교서(起復授職敎書)'다. '기복수직교서'는 모친상을 당한 이순신에게 벼슬을 내린 교서를 말한다.
그 글 가운데 '尙何言哉 尙何言哉(상하언재 상하언재)'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라고 쓰인 구절이 있다. 1597년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하고 목숨을 잃자 다섯 달 전 그를 내친 일에 대한 후회의 뜻이 담겨 있다.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하도록 하였던 것은 역시 이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그리하여 오늘 이 같이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라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이제 그대를 평복 입은 속에서 뛰어 올려 도로 옛날같이 전라좌수사 겸 충청전라경상 등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노니 그대는 도임하는 날 먼저 부하들을 불러 어루만지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다가 단결시켜 수군의 진영을 만들고 나아가 요해지를 지켜줄지어다”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내친데 대해 후회하면서 통제사로 재임명 한 것은 다행스럽지만 이미 조선 수군이 괘멸되다시피 전력을 다 잃고 난 후여서 만시지탄의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돌아가는 배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 하고 제승당을 나섰다. 돌아 나오는 일행의 모습이 많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5시 23분 배가 다시 통영항을 향해 출발했다. 하늘이 더 맑게 개이고 해가 뉘어가며 주변 풍경이 더 투명하게 바라보였다. 일행은 여전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조용히 주변을 바라보았다. 한산섬은 통영 8경의 하나로 꼽힌다.
잔잔한 물결이 마치 호수 같았다. 바다지만 인근 섬들이 사방에 놓여 있는 상황이라 물과 산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을 이루고 있어서 산수풍경을 대하는 듯 했다. 하지만 바로 그 바다가 한산 대첩 현장으로 그 당시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는 살벌한 전장이었을 것이다. 승패가 가려지기까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위치를 잘 가늠하지 못한 채 들어서던 때와 달리 돌아본 제승당이 다른 섬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주시하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여객선 터미널 가까이 도착해 있었다. 달리는 선체에는 흰 물살이 일고 하늘에는 갈매기 떼가 날아들었다.
배에서 내려 여객터미널을 대합실을 빠져나오니 건물 내부에 늘어선 가게마다 “멸치 만원” 하면서 일행이 눈길을 사로잡으려 했다. 터미널 앞으로 걸어 나오니 진행자가 바로 앞에 보이는 식당으로 안내했다. 거제 옥포해전 전적지로부터 먼 거리를 이동하며 걷고 해서 모두 시장한 듯 차려진 생선찌개를 맛있게 먹었다.
저녘을 먹고 공연과 특강이 준비되어 있는 통영 도서관으로 이동했다. 6시 40분 3층 강당으로 들어서니 일행이 모두 앉을 수 있게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국립중앙도서관의 김명희 과장이 인사말을 했다. 이 시대 피폐해진 정서를 책과 인문학을 통해 회복하고자 하는 취지로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되었다고 했다. 현재 전국에 작은 도서관 3400개, 공공도서관 960개가 있는데 도서관은 지역 주민 커뮤니티 센터 역할도 한다고 했다.
김현성 작곡가겸 가수의 진행으로 백석 시인의 시 ‘통영’ 낭송과 소설가 김훈의 ‘불멸의 이순신’ 의 한 대목을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현성씨는 앞으로 이순신 장군의 시를 갖고 노래를 만들어 보겠다고 했다.
이어 임원빈 소장의 강의를 들었다. 낯에 옥포 전적지에서 예기했던 기조에다 실제적 통계 자료 등으로 자세히 준비해 알기 쉽게 강의를 했다. 그는 ‘이순신 연구소’ 소장이라는 직분대로 이번 행사를 무척 반갑게 여기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관련하여 피상적이거나 단편적인 이야기들로 부정확하게 전해진 내용들을 바로 정라 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강의를 들은 후 김현성씨가 ‘이등병의 편지’ 를 들려주고 마무리 하였다. 밖으로 나와 버스를 기다리니 깜깜한 하늘에 별과 달이 떠 있었다. 잠시 후 숙소인 베이 호텔이 도착했다. 통영항 해안가에 위치하여 객실에서 바다가 보인 다는 말을 듣고 일행이 좋아했다. 미리 명찰 뒤에 적힌 객실로 가서 방을 함께 쓰게 된 분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명찰에 쓰인 방 열쇠를 일행 중 한 분에게 건네는 것을 보고 함께 401호로 찾아가 머물게 되었다. 4명이 쓰게 되었는데 모두 인품이 훌륭하신 모습이었다. 박종세 선생님과 최오균 산생님은 정년퇴임 후 글을 쓰며 문화유적 답사도 많이 다니시고 한분은 화가라고 하셨다. 박종세 선생님은 지난 행사 때 당첨이 되지 않아서 따로 다녀왔다고 했다. 함께 예기를 나누다 잠시 부두에 나가 산책했다.
밤공기가 서늘했다. 두 명의 어른과 한명이 아이가 방파제 뚝 위에서 바다낚시를 하고 있었다. 좀 잡았느냐고 물으니 한 분이 그릇을 가리켰다. 뚜껑을 열어보니 그들이 잡은 장어가 세 마리 담겨 있었다. 아이가 조금 후면 물이 차오를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밤새워 잡겠다고 했다. 다시 객실로 돌아오니 모두 주무시고 계셨다. 진행 중인 일에 관한 글을 조금 쓰다 자리에 누워 금세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오균 산생님은 더 일찍 일어나 글을 쓰고 있었다. 밝아진 창밖을 보니 잔잔한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산, 바다, 등대 배, 등이 어우러진 통영항의 아름다움 풍광에 동해 스케치를 했다. 퇴실을 하고 로비에 나오니 몇 분이 계셨다. 다시 부두로 나와 보았다. 어제 밤낚시 하던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새벽까지 밤을 세우다 차에라도 들어가 잠을 자고 있을 것 같았다. 안개가 희미하게 끼어 있었다. 어제 밤 깜깜한 밤에 느꼈던 밤바다보다 느낌이 덜했다.
주차장으로 가서 한분 한분 밝은 표정으로 만나 인사를 나눴다. 부두바람이 시원하게 얼굴에 닿았다. 버스를 타고 식당에 갈 줄 알았는데 진행자가 도보로 식당으로 안내했다. 어제 저녘을 먹었던 식당이 숙소 바로 옆이었다.
미역국 백반을 먹고 통영수산 시장엘 들렸다. 이른 시각인데도 가게마다 물건을 가득 차려 놓고 지나는 손님들이 물건을 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9시 25분 남해를 향해 출발했다. 이동하는데 1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했다. 버스가 언덕을 올라서니 좌측에 충렬사가 보였다. 그리고 우측에 보이는 통영 항이 마치 비행기가 이륙할 때 멀어져 보이듯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최후의 전투였던 노량해전 전적지와 이락사로 가는 길이다.
10시 40분 남해대교를 건넜다. 남해대교는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金南面) 노량리 남해군 설천면(雪川面) 노량리(露粱里) 사이를 잇는 다리로서 1973년 6월에 개통되었으며 길이는 660미터이다. 남해섬은 이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배로만 왕래할 수 있던 곳이며 더우기 임진왜란 당시에는 육로로 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10시 47분 이락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명칭에 담긴 의미대로 충무공께서 순국한 곳이어서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11시 먼저 영상관에서 영상으로 만든 노량해전을 관람하였다. 내부로 들어서니 좌석이 마치 침대처럼 뒤로 활짝 접혀져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안내자가 의자 형상대로 편하게 기대어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상영이 시작될 때 다시 입장 할 때 나눠준 3D체험 안경을 쓰라고 했다.
영상 상양이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발발로부터 노량해전이 있기 까지 과정을 요약한 다음 충무공이 유탄에 적탄에 맞아 숙국하는 장면까지를 입체적인 영상으로 만들어 체험의 강도를 높이려는 듯 하였다. 관람 중에 영상에서 보여지는 포탄이 마치 내 몸 안으로 뚫고 지나가는 듯 한 위협감도 느껴졌다. 익히 알 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충무공이 달아나는 적을 섬멸하고자 장졸들을 독려하다 적탄에 맞아 숨지는 광경에서 다시금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영상관 1층의 전시물을 돌아보고 이락사로 향했다. 정은형 문화해설사가 안내를 했다. 입구 안내판 앞에서 예기하다 이락사로 이동해 함께 묵념을 올렸다. 이락사는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것을 큰 별이 관음포 앞바다에 진 것에 비유하여 붙인 이름인데 충무공의 8대손이 그분이 돌아가신 후 234년이 지나 이 곳 통제사 부임했을 때 지은 사당이라고 했다.
이락사를 나와 뒤 첨망대를 향해 산길을 걸어갔다. 이순신 장군이 최후를 맞은 바다를 찾아가는 마음이 무거웠다. 첨망대에 올랐다. 충무공의 바다가 바라보였다. 그가 순국한 곳이었다.
전쟁이 끝나가는 때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다. 노량해전이었다. “나의 목숨은 하늘에 달렸다. 이 나라를 위해 적을 없앨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겠나이다. “ 그가 쓴 난중일기에 나타난 글을 보면 비장함이 묻어난다.
노량해전은 순천 왜성에 고립되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하기 위해 출전한 왜적을 무찌르는 전투였다. 그 이전 명나라 유정의 군대와 권율장군의 연합군이 감행한 사로병진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1598년 8월 18일 한양에서 출발한 서로병은 8월말 전주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도원수 권율, 우의정 이덕형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합류하였다. 그 곳에서 서로군 총사령관 유정은 조선군은조선군은 명나라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며 명군의 모든 행동과 명령에 있어서는 항명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한편 이순신과 명 수군 도독 진린의 수로군은 1598년 9월 15일 고금도에서 출항하여 9월 20일 순천 왜교성 앞바다의 유도에 도착하여 합세하였다. 그러나 유정의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한 유인 전술 등이 실패로 돌아가고 유정의 소극적인 공격으로 결국 왜성 함락에 실패하고 말았다. 수군은 적을 몰아쳤으나 유정은 소극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왜군의 퇴각 정보를 접한 명으로선 더 이상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고 여긴 듯하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퇴로를 열어달라고 진린에게 뇌물을 주었다. 그리고 진린의 묵인하에 한 척의 연락선이 빠져나가 교신하였다. 이순신은 고니시가 이 통신선을 이용하여 사천, 남해, 부산 등지에 있는 왜군에 연락하여 조·명 연합수군을 협동공격하면서 퇴각하려는 것을 알아채고 11월 18일 500여 척의 왜선이 노량수로와 왜교 등지에 집결하여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마침내 노량 앞바다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출전하면서 조선을 도륙한 왜군을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 고 독려했다. 스스로 선봉에 서서 퇴로를 막고 섬멸하기 위해 진력을 다했다. 18일 하루 종일 전투가 치러지고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은 200여 척이 격파되고 패잔선 50여 척만이 관음포 방면으로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도주하는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격파하면서 포위되었던 진린을 구했다. 이어 남해 방면으로 계속 도주하던 적을 추격하다가 왼쪽 가슴에 유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전쟁이 한창 다급하니 부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前方急 愼勿言我死)”유언하고 숨을 거뒀다. 첨망대에서 관음포 앞바다를 내려다보며 그 비장의 마음을 생각했다.
남해 바다는 자연 경관이 수려해 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 날의 바다는 생사를 다투는 전쟁의 공간이었다. 함성, 포격소리, 총소리, 활이 시위를 떠나는 소리 그리고 피 땀이 뒤엉키는 상황이었다. 거기서 유탄이 장군을 절명케 했다. 마지막 전투에서의 절명, 그것은 너무도 극적인 운명이었다. 난중일기에 나타난 고뇌의 순간들을 떠올리니 안타까움이 사무치게 느껴졌다. 7년간의 긴 전쟁 기간 동안 겪었던 갖가지 인간적 고뇌를 이겨내고 분골쇄신하여 나라를 지킨 거룩한 생애였다.
전쟁이 끝났다. 7년간의 긴 전쟁이 끝났다. 전장에 임해 분골쇄신, 기력을 다 해 싸웠다. 인간적인 고통을 감내하면서 충의로 싸워 이겼다. 이제 편히 쉬어야 했다.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마지막 전쟁과 함께 이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제 편히 쉴 수 있었다. 모든 고투를 견디고 이제 더 이상 생과 사가 교차하는 전선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이제 한숨 돌리고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고달픔을 달래고 함께 위로하고 공을 치하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없었다. 모두에게 깊은 슬픔을 남기고 떠났다. 공이 크기에 슬픔도 크고, 역사의 존망의 순간을 넘겼기에 긴 역사의 시간을 넘어 추모 하게 되었다.
그의 일기가 추가로 발견되고 그의 인간적 아픔이 알려지게 되었다. 다시 새롭게 그의 생의 의미를 생각하고 다사 그 날의 슬픔을 느끼게 한다. 후대의 수많은 사람들, 왕 들 현대의 국가 지도자들이 추앙했다. 그러한 추모와 기리는 사업에도 불구하고, 그 끝은 언제나 아픔으로 남는다. 전쟁을 끝내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락사를 나와 남해대교 입구에서 점심을 먹고 마지막 답사지인 남해 충렬사로 갔다. 남해 충렬사는 경상남도 통영시 명정동에 있다. 조선 시대의 건물로 이충무공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셔 두었다. 1606년(선조39) 왕명을 받아 이운룡(李雲龍)이 건립하였고, 1663년(현종 4) 사액(賜額) 되었다. 정조어제기판(正祖御製記板)과 명나라에서 이충무공에게 내린 8가지의 하사품이 보관되어 있고, 정문 밖에는 타루비(墮淚碑) 등이 세워져 있다.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 등이 전국 21개소가 된다.
임원빈 소장과 노승석 소장이 마무리 강의에 앞서 여섯분의 사행시 당선작을 꼽아 낭송하고 상품을 받았다. 이번 시제는‘난중일기’였다. 당선작 모두 훌륭하여 박수를 받았다. 이어 두 분이 그 분의 뜻을 새기는 말로 마무리를 했다.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다시 이순신 장군에 관해 제작된 한국사 3편을 보았다. 무술년 일기에 쓰인 내용을 바탕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다루었다. 그 인간적이라는 것이 모두 아픔에 관한 내용이었다. 겨우 풀려나 백의종군하는 처지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나 제대로 모실 처지가 못 되었다. 그 후 명랑해전의 보복으로 습격을 감행해 마을을 유린한 왜군에 의해 아들을 잃었다. 그 영상물을 보면서 이순신 장군에 관해 전에 잘 알지 못했던 인간적 아픔이 크게 다가왔다.
긴 전쟁은 모든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전쟁은 말할 수 없는 참상을 낳고 그에 따른 분노와 원한이 커지게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퇴각 하는 적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을 결심을 하게 되었을 것 같았다. 왜적의 손에 무참히 죽은 백성과 아들을 생각하면서 그런 단호한 결심을 했을 것 같다. 선봉에 나서 적과 너무 근거리로 대치한 것이 조총을 쓰는 적의 유탄을 맞게 된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평소 이순신 장군의 냉정한 평상심과 조금 다른 면모였을지 모른다.
마지막 순국의 장면을 떠올리면서 옥포해전에 나가면서 장졸들에게 “태산처럼 무겁게 하라” 고 하신 대로 스스로를 자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그분이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 분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게 된 것이 안타깝기에 드는 생각이다.
누릭된 일기 등 새로운 기록들이 발견될 때마다 그분의 생애에 관해 새로운 조명을 하게 되고 죽음에 얽힌 논란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처럼 사후에 논란을 하는 것이 고인을 편히 쉬게 해드리는데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도 든다.
이번에 답사를 신청한 것은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실제 전장 상황을 생생히 느끼며 알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답사하면서 실제 전장이 벌어진 지세, 피아간의 대치 형세, 전장으로 선택한 이유 등을 좀 더 이해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여느 때 그냥 역사의 현장으로만 알고 지났던 곳들이 주제의식을 갖고 대하다보니 당시의 전쟁 상황에서 대치하였던 생생한 현장으로, 이순신 장군이 위태해진 나라를 걱정하는 고뇌의 현장으로 크게 다가왔다.
'이순신의 바다, 불패의 바다' 그 곳의 자연 지형, 입지, 지리, 수로, 바람길 까지도 400여 년 전 그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뇌하며 승리하기 위해 세심히 살피던 마음이 닿아 있다. 그리고 그의 자취가 서린 곳마다 사당 등 그를 기리는 유적이 설치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에 관한 안타까움은 그치지 않는다.
(20120602 김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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