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우리 서원의 정신을 찾아서'
(길 위의 인문학 안동, 봉화, 영주 지역 답사후기)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에 참가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평소 좋은 프로그램으로 생각하고 있던 차에 연락을 받고 기쁘면서도 내심 긴장도 되었다. 진행을 총괄하는 진상훈씨와 준바할 일들을 자세히 상의했다. 자료집에 수록할 원고 등을 쓰며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를 했다. 며칠 전 원고를 보내고 난 후 다시 특강을 위한 ppt 지료를 오늘 새벽 2시까지 마치고나니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출발시각보다 10분 일찍 중앙도서관에 도착했다. 날씨도 맑고 기온도 적당하여 서울 시내지만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길가에서 버스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안쪽으로 들어서니 버스 두 대가 눈에 띠어 다다가 진행자와 인사를 나누니 2호차에 타라고 했다. 진행팀 일원으로 2호차 담당인 안우상씨가 앞자리 좌석을 안내했다. 2호차에 오르면서 안쪽을 바라보니 일찍 나온 참가자들이 자료집을 넘기며 보고 잇는 모습이 진지하게 느껴졌다. 참석자들이 거의 다 도착하자 2호차 진행팀 담당자인 안우상씨가 김밥과 물을 1개씩 돌려주었다. 8시 30분 정시 출발해 행사를 시작했다. 경부고속도로로 가다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든 후 다시 중앙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중간에 치악 휴게소에 들러 휴식을 하면서 정순우 선생과 인사를 나눴다.
죽령 터널을 지나며 참가자들에게 인사를 하며 죽령에 대해 짤막하게 얘기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죽령을 가로질러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종주했던 감회가 되살아났다. 백두대간을 넘나드는 의미 깊은 시간이지만 고속도로를 건설하며 낸 터널 안을 쏜살같이 지나가게 되었다. 걸어 넘는 체험이 더 생생할 텐데 지금은 고속도로로 차에 탄 채 여느 도로처럼 지나가버린다. 그렇지만 행사 마지막 일정에 죽령을 걸어 넘는 시간이 예정되어 있어서 산체 험을 하게 될 듯 했다.
터널을 지나 인삼으로 유명한 풍기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안동으로 가다 우측 하회마을 표지를 보고 들어섰다. 조금 가다보니 좌측에 풍산들녘이 펼쳐보였다. 하회마을로 가는 길과 갈라지는 곳에서 왼편으로 강물을 보며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서원까지는 2km 남짓 된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보며 호젓하게 들어설 수 있는 길이다. 타고 가는 버스 전면 창으로 앞 차가 좁은 길을 휘돌아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냥 걸으면 좋은 곳이다. 시간이 느림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 그런 상상으로 그런 느낌을 떠올렸다. 서원 가까이 이르자 검은 건물이 보였다. 서원의 인상은 건물 자체만으로 이루저지는 것이 아니고 주변 자연의 경관 전체와 관계되는데 자연경관을 해치는 그 건물을 보고 지적한 일이 있었다.
병산서원에 도착했다. 비교적 이른 시각인데도 관광버스가 몇 대 와 있었다. 화장실이 새로 지어져 있었다. 복례문이 마치 시내 극장 통로처럼 가득했다. 오랜만에 찾는 걸음이라 다시금 설렘이 느껴졌지만 그처럼 많은 인원이 몰라는 상황에서 병산서원의 진면목을 차분히 음미하기는 어려울 듯 했다.
어디서 앉아 예기를 시작할 지 이런 행사의 성격을 잘 몰라 두리번거렸다. 기획을 담당하는 이종주 선생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 인사를 나눴다. 일행을 입교당 마루에 올라앉으라고 했다. 많은 인원이 앉아 마치 과거 강학당에서 공부하던 때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전체 참가자 앞에서 소개를 하여 인사를 하고 정순우 선생이 먼저 강의를 시작했다.
정선생님은 서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준비 과정에 참가 하고 있는 터여서 더 생생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아홉 곳의 선정 이유등을 설명자료로 정리했는데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치의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일본인 관계자는 이곳을 둘러보고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고 한다.
이곳에 내려오는 차 안에서 안우상씨가 요새는 만대루를 오르지 못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순간 실망스러웠었는데 유시석 선생이 특별히 행사를 위해 배려를 해 주었다. 이곳에서 특별한 건축적 감각이 불러일으켜지는 것은 만대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것이 서원다움과 세게에서 가장 뛰어난 서정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충족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행자가 일행을 향해 서서 예기할 자리를 지정해 주었다. 병산서원의 건축적 감각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내가 이해하는 것들을 최대한 전하고자 했다. 만대루의 아름다움을 한마다로 하자면 자연과 건축의 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성리학의 원리와 같은 이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지형차와 건물간의 거리 건물들의 높낮이, 막힘과 트임, 정과 동, 산과 물, 대청과 방 등 비움과 채움의 변화 그리고 전체의 집합성과 자연이 긴밀히 조화되어 있다. 사람들은 자연 지형의 폭과 크기 건물의 크기와 형상 공간의 비례 등에 따른 감각을 종합적으로 느끼게 된다.
병산서원
20120518 김석환
병산 마주한 낙동강 가에
유구한 세월 쌓여온
서원의 향기
강산이 어우러진
수려한 정취에 끌려
스르르 다가가 앉는
넓직한 만대루
트인 기둥 사이로
바깥 풍광을 내려다볼 때
흰 백사장과 입교당 마루를
신산한 기운 일으키며
넘나드는 시원한 바람
병산서원을 보고 나와 하회마을 입구 식당으로 이동했다. 안으로 들어서기 전 마당을 둘러보니 마당 한쪽을 파서 만든 연못에 자색 연꽃잎이 햇살에 빛나며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 헛제사 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헛제사밥이란 제사를 지낼 때 올린 음식을 음복하던 풍습을 본 떠 만든 메뉴인데 무채와 콩나물 등 몇 가지 나물반찬에 식은 밥을 넣고 고추장에 비벼먹는 음식으로 유교의 풍습을 느끼게 한다. 식사를 마치고 자판기 커피를 한잔씩 들고 참가자들의 표정에 일상을 벗어난 여유로움과 답사 나들이의 즐거움이 가득해보였다.
오후 일정 첫 번째 장소인 도산 서원으로 향했다. 이동에 1시간 가령 소요되는 거리이다. 버스가 안동 시내를 벗어나 교외로 나서니 막 모내기를 시작하려고 가둬 놓은 논물에 모판의 연둣빛 색깔과 파란 하늘이 비춰 보였다. 그리고 산기슭 안쪽을 보니 제사 건물 한 채가 보였다. 제사란 문중에서 단체로 묘제를 올릴 때 제사를 준비하고 잠시 유숙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그를 통해 유교 풍습에서 제사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차지했는지 느낄 수 있다.
2시 5분 도산서원(陶山書院) 주차장에 도착했다. 도산서원은 청량산 자락이 뻗쳐와 나지막해진 산세와 산자락을 굽이굽이 휘감으며 흐르는 낙동강이 마주 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인근에 퇴계선생 종택과 묘소 등 선생의 체취가 깃든 유적들이 있는데 이 곳 예안은 유림의 고장으로 일컬어지는 안동 읍내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한적한 향촌이다.
입구 주차장에서 내려 도산서원으로 강변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추로지향 이라는 글씨를 비석으로 만들어 세워 놓은 곳에서 강 쪽을 바라보니 에둘러 흘러오는 강자락이 소나무 사이로 그윽이 보이며 풍치가 느껴졌다.
다시 서원을 행해 가다 양팔 벌리듯 도산서원을 감싸 안은 작은 산자락 끝 부분을 지나자 너른 공터가 나오고 그 안쪽에 도산서원이 펼쳐보였다. 서원 앞 너른 공터에 서 있는 큰 느티나무나 서원 곳곳에 자리 잡은 나무들이 무성한 녹음을 이루며 왕성한 생명력을 발하고 있었다. 강 너머 대(垈)를 쌓아 만든 사사단이 바라보이는 강기슭에 서서 정순우 선생이 한참 동안 도산서원에 관해 말씀을 하셨다.
잠시 후 외삼문을 통해 서원 경내로 들어섰다. 진행자인 진상훈 대표가 내게 어디서 예기하겠느냐고 물어 서당 마루가 좋겠다고 하고 우측 앞쪽의 도산서당 마당으로 들어섰다. 돌이 박힌 흙담에 낸 사립문 안쪽에 정갈한 흙마당과 담백함이 풍겨나는 단아한 서당이 청빈한 선비의 풍모처럼 느껴졌다. 내려오는 차 안에서 인사말씀을 할 때 길 위의 인문학에 참가하신 분들은 다 내공이 높으실 것 같다고 했었는데 병선서원에서도 그렇듯이 매우 진지한 모습이어서 더 진중하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예기를 하게 되었다.
우선 평소 전통 건축에서 중요하게 여겨온 입지 형국으로부터 예기를 시작했다. 우선 아까 본 병산서언이나 이 곳 도산서원, 그리고 이후에 돌아볼 삼계 서원 등이 모두 낙동강 줄기에 면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그동안 느껴왔던 낙동강의 특별한 감각을 예기했다. 그것은 몇 해 전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을 종주한 경험이 큰 입지의 바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는데, 낙동강이 먼 거리를 달리면서도 청명한 기운을 잃지 않는 것은 백두대간의 정기가 통하는 큰 산줄기가 좌우에서 감싸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되었다.
낙동강은 수 없이 산자락을 감싸 안듯 굽어 흐르는 곳이 많다. 그것이 마치 산과 강이 서로를 사랑하여 떨어지지 않으려 감싸 안고 서로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한 느낌을 느끼게 하는데, 동양사상에서 우주의 이치를 산과 물, 음과 양, 남과 여 등 상반된 요소가 결합하여 조화롭게 생성되어지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여기도 배산 임수이다. 그렇지만 병산 서원 입지와는 다르다. 여기서는 산자락이 터를 감싸 안는 형국이어서 강에 면한 만대루 같은 건물이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다. 지형적 차이 때문이다. 루를 둔다면 서원 경내가 아닌 그냥 낙동강 변에 따로 두는 것이 좋을 곳이다. 그만큼 입지의 의미가 각별하게 작용하게 된다.
도산서원입구 안내판에 적힌 설명을 보면 이 곳 입지에 대해 영지산을 뒤로 하고 동취병 서취병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골짜기 안에 안동호를 바라보며 자리 잡고 서 있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풍수적 관점에서는 주변 산들이 이곳을 향해 조아리듯 둘러서 있는 ‘공읍지지’라고 하는데 퇴계 선생께서도 처음 서당 터를 물색할 당시 제자가 잡아 놓은 이 터를 보고 같은 말씀을 하셨다.
전통 건축은 터의 의미가 가장 중요하다. 터를 잡는 것이 건축 행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좋은 건축이 되게 하려면 먼저 적합한 터를 잡아야 한다. 터는 궁궐터, 집터, 서원터, 절터 용도와 규모, 거주 인원에 따라 각기 그 적합한 터의 조건이 다르다. 동일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지만 터에 따라 느낌과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전통 건축에서 건축을 한다는 것이 터의 입지를 살펴 그에 알맞게 질서와 자태를 갖추는 일이다.
한국 전통건축의 느낌은 터와 건축이 일체로 작용한다. 즉 터와 조화를 이루는 건축이 아름답고 빼어난 건축으로 느껴지게 된다. 그처럼 터의 조건에 알맞게 하는 것이 곧 건축적 의미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폐사지에 가면 건물이 없는데도 건축적 힘이 느껴진다. 터 닦음이 건축적 행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 같은 닦여진 터에 의해 건축의 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복원작업 자체는 의외로 전체 작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 그러한 터의 조건에 알맞게 하는 것이 곧 건축이었다.
터는 우선 그 기운을 살펴 사나운 기운을 피하고 안온한 기운이 발하는 곳을 택했다. 풍수지리설은 그러한 안온함의 조건에 대한 것에 관해 도식적 해석을 가해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터는 집이 놓이는 것뿐만이 아닌 바라보이는 풍광도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좋은 터는 터를 감싸는 지형적 요소가 빼어난 풍광으로 드러나는 곳이 많다.
그와 연관된 의미가 소위 전면에 바라보이는 경관적 요소의 산봉우리를 뜻하는 안대이다. 그리고 그 안대의 생김새에 의해 그 터의 성격을 규정하곤 했는데 안대의 형세가 붓의 끝처럼 생긴 모양을 문필봉이라 하고 문필봉을 안대로 삼은 터에서는 수재가 난다는 말이 생겼다. 선조 들이 집을 지을 때는 풍광이 아름다운 위치에 놓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풍광이 조망되는 장소를 택해 지으려 했다. 바라보이는 풍광이 심성에 영향을 미치는 점을 고려한 결과로 여겨진다. 그처럼 근대 이전에는 터의 형국을 중시한 전통이 이어져 내려 왔다.
앞서 말한 도산서원의 동취병은 청량산으로부터 뻗어 나온 지세로서 도산서원을 감싸 안은 형국이다. 이 터를 처음 잡을 때는 후에 조성된 서원이 아닌 도산 서당을 짓고자 그 서당에 알맞은 터를 택한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배움의 장소에 찾아드는, 서당 성격에 적합한 공간으로 찾아진 곳이다.
서당과 서원의 규모와 규범적 구조가 다르듯이 그에 적합한 터의 조건도 각기 다르게 된다. 도산 서당을 지을 때는 사당이나 전면 루의 설치 등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터의 기운만을 살펴 흡족하게 여길 수 있었다. 그런데 서원을 조성할 때는 그 시설의 규모나 내용이 다르게 되고 그만의 완결적 구조를 갖추기에 입지상에 부적합한 요인도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도산서원은 애초에 있던 앞쪽의 서당 배치 구조에서 지금의 하고직사를 조금 옮겨 중앙 진입로를 축으로 설정하고 그 위쪽으로 진도문을 들어서 정면의 전교당과 동서재로 이루어진 강당 영역을 갖추었으며 그 후면 사당을 두었다. 사당은 병산서원처럼 강당 뒤쪽에 중심축에서 동쪽으로 치우쳐 있고 그 우측으로는 장서각이 놓여 있다. 그리고 강당 좌측으로는 상고직사가 있다. 또한 상고직사 아래쪽에는 유물관이 지어져 있는데 그러한 당초 서원에 없던 시설들이 놓임으로서 서원으로서의 인상에 혼선을 주는 측면이 있다. 하고직사 앞에는 도산서당으로 운영될시 제자들의 거처로 만든 농운정사가 있으며 맨 앞의 역력서재는 서원에 입교할 때 한 유생이 기부해 지은 것이다. 현재의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 생시에 운영되었던 서당 영역과 서원 역영이 결합되어 있는데 중간에 놓인 광명실은 서원 영역과 서원 영역을 하나로 자연스럽게 엮어주는 역할을 한다.
도산서원은 퇴계의 체취가 담긴 도산서당과 공존하는 구조로 조화를 이루게 한데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원다움의 구조와 공간의 분위기 측면에서는 루가 없어 강학 분위기에 여가로운 분위기가 더해지지 않고 서원으로서의 성격이 곧바로 활달하게 드러나지 않는 아쉬운 점이 있어 보인다.
도산서당 마루에 잠시 더 머물며 우리 전통 건축 가운데 가장 빼어난 곳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도산서당의 건축적 가치를 예기했다. 도산서당 건물은 3칸의 가장 단촐한 구조로서, 한 칸은 부엌, 한 칸은 완락재, 한간은 암서재라는 마루로 된 공부를 위한 건물이다. 그 건물의 규모는 전통 건축에서 가장 검박한 규모로 일컬어지는 초가삼간과 같지만 그 주변의 마당및 자연 공간과 잘 짜여져 있다. 즉 거기서 느껴지는 격조의 감각과 마당이나 조경 요소의 배치, 나아가 자연 공간과의 연계성 등, 퇴계 선생의 깊은 사유가 녹아 있는 전체 구조의 모습을 이해하고 보면 어느 곳보다 중요성이 크게 느껴진다. 예기를 마치고 서원을 자유롭게 돌아보도록 했다.
참가자들은 궁금히 여기는 것들을 정선생님과 내게 묻기도 하며 진지하게 돌아보고 있었다. 도산서원을 나와 3시 30분 봉화 닭실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길 옆을 흐르는 개울가에 '토계'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이 퇴계 선생의 호와 관계된 것이라 의미 깊게 다가왔다. 이황 선생은 이 개울을 퇴계로 고쳐 부르면서 자신의 호 로 삼았다.
닭실마을로 가는 도중 청량산을 지났다. 청량산은 낙동정맥을 형성하는 통고산으로부터 일월산을 거쳐 청량산까지 이어지는 덕산지맥 끝자락에 놓인 산인데 도산서원 산세의 근간을 이루는 곳이며 또한 소백산과 마주하면서 봉화 영주 지역의 땅기운을 북돋우기도 한다. 청량산은 사역질 암반이 마치 용암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흐르다 급히 얼려놓은 형상처럼 특이한 형상의 암봉들이 계곡을 사이에 두고 솟아 있는 모습인데 얼핏 보면 주자가 말한 무이산세와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4시 30분경 닭실 마을에 도착했다. 이 곳 행정 명칭은 경북 종화군 유곡리인데 '금계포란형'의 명당자리라 하여 닭실마을로 불리게 되었으며 하회, 양동, 내앞 마을과 더불어 삼남의 4대 길지로 꼽힌다. 그런데 이 마을이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바로 이곳에서 생산하는 한과때문이다.
이곳 닭실마을은 조선 초기 유학자로 충재 권벌이 살았던 유서 깊은 마을로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권벌을 입행조로 소개하는 자료도 잇지만 실제로는 그의 5대조가 처음으로 이 마을에 터전을 잡았다. 권벌은 조광조 김정국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 정치에 안동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으며, 사림의 도학정치를 주장하였다. 그는 1513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할 때 당시 신윤무, 박영문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알리지 않은 정막개의 당상관계(堂上官階)를 삭탈하도록 청하여 직신(直臣)으로 이름을 떨쳤다. 1519년 11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파직당해 귀향하였고 그 후 다시 복작되었다가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처음 구례로 유배지가 결정되었으나 곧 태천(泰川)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삭주(朔州)에 이배되어 이듬해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충재유물관 주차장에 내려 바로 앞쪽에 있는 청암정에 올랐다. 청암정은 바로 충재 고택에 딸려 있는 정자인데 인공적으로 조성한 연못 위에 다리를 건너 오르게 되어 있다. 마을 전체 입지가 산수가 어우러진 좋은 경관에 면해 있는 가운데 충재 고택의 별서처럼 지은 서재와 함께 쓸 수 있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정자가 놓인 암반이 거북이 형상으로 불을 지피면 거북이가 죽기 때문에 불을 때는 아궁이를 설치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정자는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지어 주변 경관을 감상하면서 휴식을 취하거나 즐기기 위한 건축물로서 일반적으로 규모가 단촐한 편인데 청암정은 3칸x2칸 마루에 1칸x3칸이 방이 덧붙여져 잇고 쪽마루까지 둘러 규모가 큰 편이다.
정자는 궁궐, 서원,·가옥 등 주 건물의 부속 건물로 건축하는 경우와 독립된 단일 건물로 건축하는 경우가 있다.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 경복궁의 향원정 등은 궁궐에 부속된 정자이고 강릉 선교장의 활래정, 연경당의 농수정, 임청각의 군자정 등은 주택에 부속된 정자이다. 그리고 망해정, 송강정, 면앙정, 독수정 등은 독립적으로 세워져 있다. 정자는 정방형이 일반적이지만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과 활래정은 ㄱ자형, 관람정은 부채꼴 모양으로 되어 있다.
정자는 주변의 산이나 계곡 등 자연 정취를 살려 자연스럽게 조화되도록 지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입지 특성에 따라 계정(溪亭), 산정(山亭)을 지었다. 혹 연못을 파거나 나무를 심어 조원(造苑)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인공의 손길을 최소화하여 모두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있다. 청암정 마루에서 정선생님의 강연을 들은 후 각자 마을을 둘러보았다. 나는 몇 일전 개인적으로 사전 답사를 한 때 마을 전체가 보이던 곳으로 가서 사진을 찍으며 마을의 입지와 성격을 살펴본 다음 다시 일행과 함께 인근의 삼계서원으로 향했다.
삼계서원으로 가는 도중 우측에 석천정사 안내 표지가 보여 차 안에서 잠시 설명했다. 석천정사는 석천계곡의 빼어난 풍치에 면해 지어놓은 것으로 그 계곡은 이름난 경승지이다. 계곡이 그리 깊거나 길지 많고 면한 산세의 크기도 크지 않은 평몀한 지세 가운데 그러한 경승이 형성된 것이 특별하다.
5시 10분 삼계서원에 들어섰다. 서원 명칭은 삼계리라는 지명을 따라 지은 듯하다, 그 앞을 흐르는 내성천과 석천계곡이 세 갈래로 모인 곳이라 하여 삼계라는 지명이 생겼을 것 같다. 그리고 삼계서언은 뒷산에 면해 내성천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형국이다. 그 배산임수의 형국은 병산서원과 같지만 그 세부적인 지리적 차이에 의해 느낌은 많은 차이가 난다.
인으로 들어서자 봉화군청 관광계장이 나와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특히 서원 앞쪽에 지붕 한쪽이 무너져 내린 채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모습이 민망한 듯 그것은 다시 지을 계획이라고 먼저 해명하였다. 그리고 그 루의 위치도 내성천 방향으로 저 앞쪽에 놓여 있다고 가리키는데, 계곡에 가까이 가면 조망은 유리하지만 강당과 멀어져 서원으로서 배치의 규범성은 저하될 것 같았다.
삼계서원을 끝으로 그날 답사 일정을 마쳤다. 내일 돌아볼 풍기로 이동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출발했다. 가는 도중 부석사가 있는 부석면과 내일 들를 소수서원 앞을 지나게 되어 일행에게 알려주었다. 그 인근을 지나면 우측 저만치 백두대간을 이루는 소백산 산세가 장엄하고 수려한 모습으로 뚜렷이 뻗쳐 보였다.
식당에 들어서 자리를 잡고 앉으니 영주 시장이 오셔서 일행을 환영해 주었다. 이종주 기획위원이 인사말을 부탁하자 길 위의 인문학 행사가 이 지역에서 열리는 것을 의미 있게 여기며 영주가 전국에서 세 번째로 국보가 많은 고장이라며 고장 자랑을 늘어놓았다. 선비의 고장이라서 그런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크게 갖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인 풍기인삼관광호텔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진행자가 공연과 특강 일정을 위해 7시 40분까지 꼭 모여 달라고 했다. 간단이 세수를 하고 9층 강당으로 가니 너른 공간에 가득 놓인 원형테이블에 많은 일행이 벌써 와 앉아 있었다. 참가자들에게 ‘사서정신’ 으로 사행시를 써서 내 달라며 메모지를 돌렸다. 나도 공연을 기다리는 동안 메모지를 받아 끄적여 보았다.
시간이 되자 작곡가 겸 가수로 활동하는 김현성 씨가 참가자들이 낭송한 시로 작곡된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즐거운 공연시간을 가졌다. 그처럼 문학과 음악이 일체되는 분위기가 참가자들의 마음에 더 큰 감동을 불어 넣는 듯 했다.
이너 내가 준비한 서원 건축에 관한 강의 시간을 가졌다. 한참 예기를 하는 도중 빨리 마쳐달라는 메모지를 받았다. 나름 책임감을 느끼며 많은 자료를 준비했는데, 마치면서 피곤한 분들 앞에서 너무 시간을 길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듯한 일정을 마친 늦은 때와 분위기에 맞춰 적절히 순발력 있게 운용하는 슬기가 필요한 것 같았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 짐을 푸는데 연락이 와서 시내로 나가 간단한 술자리를 가졌다. 미리 예약된 식당에 들어서니 문어와 옷나물전이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있었다. 옷나물전을 먹으면 옷이 타지 않느냐고 하자 한번 옷이 탔던 사람은 다시 타지 않고 처음 먹는 사람은 미리 알약을 먹으면 효과가 있다고 했다. 문어는 이 지역 토석 음식인데 바다가도 아닌 이곳이 그처럼 된 것은 과거에 동해에 면한 울진 등지에서 철도를 이용해 서울로 가는 길목이라 그리 되었다고 한다.
숙소로 돌아와 자리에 눕자마자 잠에 들어 5시 20분경 일어났다. 밖에 나가 산책을 하려다 문득 6시에 부석사로 가는 버스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세수를 하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첫 버스가 7시 반에 있다고 하여 망설이다. 택시를 타고 부석사로 갔다. 방문객이 드문 시각에 차분히 돌아보고 오늘 첫 답사 일정이 시작되는 소수서원으로 먼저 가 있으면 될 것 같았다.
30분 정도 후에 부석사에 도착했다. 햇살이 비추지 않아 산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방문객이 적은 시각이라 한가롭게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꽤 여러차례 와 보았지만 장소성에 입각한 이 곳만이 특유의 조망이나 무량수전의 건축적 맵시는 언제 보아도 좋게 느껴진다.
소수서원에서 일행을 맞을 것을 의식하여 서둘러 부석사를 나왔다. 내려오다 소수서원 가까이 잇는 금성단을 들렀다. 대문을 들어서자 앞마당에 면해 두어 채의 건물이 놓여 잇고 그 뒤로 계단을 올라 다시 태극 모양이 그려진 삼문 안으로 들어서니 가지런히 닦인 단이 보였다. 그 곳이 금성단이다. 그 뒤로는 소백 능선이 푸르게 가로 놓여 보였다. 금성단을 나와 소수서원 안으로 들어가서 일행을 기다렸다.
소수서원 안으로 들어가는 길 왼편엔 나지막한 산기슭에 많은 노송이 거목의 자태를 풍기며 어우러져 있고 길 오른편에는 이곳이 숙수사 절터였음을 증명하는 당간 지주가 서 있다. 그리고 서원 출입문 앞 오른편에는 죽계천에 면해 쉴수 있게 지어 놓은 경렴정이(景濂亭) 놓여 있다.
한가로이 마루에 앉아 있다 보니 소백산 산세와 죽계천이 어우러진 이 곳 입지의 빼어남이 전보다 크게 다가왔다. 이곳은 1443년 당시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 산생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지어진 서원으로서 이 지역 사람으로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를 왕래하며 직접 주자서(朱子書)를 베껴오고,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는 등 성리학의 도입과 보급에 공이 큰 안향을 배향하며 백운동서원의 이름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7년후 퇴계 이황 선생이 조정에 사액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지고 명종 임금이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내림으로서 사액서원이 되어 안정정적인 운영 기반을 갖게 되었다.
소수서원은, 처음에는 사당인 ‘문성굥묘’만 세웠다가 다시 이듬해 강학당과 장서각, 직방제 등을 지어 서원으로서 시설을 갖췄다. 하지만 전체 시설에 대한 배치계획을 미리 세우지 않았던 관계로 소수서원 이후로 나타나는 서원건축의 배치상의 규볌성은 갖춰지지 않은 채 자유롭게 나열된 모습이지만 사당, 강당, 장서각, 동서재, 루, 고직사 등 서언 기능에 필요한 시설은 모두 갖추고 있다.
전에는 규범성이 갖춰지지 않은 모습에서 서원으로서의 기능성도 부족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었는데 오늘은 전체 시설이 수학을 위한 전체 시설이 잘 갖추져 있다는 느낌이 들며 참다운 서원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이루어졌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훗날 크게 이름을 떨친 큰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조선조말까지 300여년간 4,000명이나 되는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고 전한다.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자유롭게 돌아보고 10시 30분 무섬 마을로 향해 출발했다. 무섬마을은 영주시에서 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다. 이 마을의 행정지명은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인데 수도리란 하회마을처럼 물길이 회돌아가는 형국에 따라 지어진 이름이다. 그리고 무섬은 물섬에서 파생된 명칭이다. 마을 뒷산 너머에서 내성천과 서천이 합류한 물길이 마을을 한바퀴 빙 둘러 내려가는 형국이다.
마을에 당도하니 이 마을 주민으로서 영주시 문화관광 해설사를 맡고 계신 김광호 선생님께서 마을 유래에 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입구에서 마을 지명과 유래를 설명하신 다음 일행을 기다린 마을 입구에서 안쪽으로 내성천 뚝방길을 따라 이동하다 앞쪽에 있는 해우당을 들러 설명을 해주셨다. 이 가옥이 마을에서 가장 큰 가옥이다.
해우당은 180년전에 지어졌는데 1879년 현재 규모로 증축되었다. 집 이름 해우당은 바닷가의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늙은이라는 뜻으로 그 현판 글씨는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원래 민가에서는 둥근 기둥 못쓰게 하는데 이 집은 둥근 기둥을 사용했다. 사랑방과 안방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고 측간에는 부엌을 배치했는데 특이한 점은 안채 지붕이 맛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종도리에 첨차가 쓰인 점이다.
해우당을 나와 다시 뚝방길을 걸으며 김광호 선생이 이 동네와 조지훈 선생에 얽힌 이야기와 그가 쓴 시를 낭송해 주었다. 영양 주실 마을 태생인 조지훈 선생(본명 조동탁)이 이곳 무섬마을에 장가들었는데, 장가든 하룻만에 색시를 두고 이별하는 기막한 사연이 담긴 시이다.
별리(別離)
조지훈
푸른기와 이끼 낀 지붕너머로
나즉히 힌 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 자락에
말없는 슬픔이 쌓여오느니......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 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가고
방울소리만 아련히
끊길듯 끊길듯 고운 메아리......
발 돋우고 운 들어 아득한 연봉 바라보나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
꺽어서 채찍삼고 기옵신 님아......
기와와 초가지붕이 어우러진 마을 구조를 살피며 안쪽으로 가다 콘크리트 다리(수도교) 앞에서 다시설명을 들었다. 그 다리는 1985년 대홍수로 다리가 쓸려 간 후 1989년 놓은 것이라고 했다. 그 전에는 현재의 뚝방이 없어서 각각의 집 마르에서 바로 내성천이 바라보였는데 지금처럼 제방을 쌓은 후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성천의 금빛모래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모래로 꼽혀 수출 했었다고 한다.
조금 더 가다보니 우측에 그 유명한 외나무 다리가 보였다. 김광호 선생이 이 다리는 원래 3월3일 철거하고 9월에 다시 놓았었는데 관광지화 되면서 다리가 걷힌 때 찾아드는 사람들이 아쉬워해서 일 년 내내 철거하지 않고 두기로 했다고 한다. 김광호 선생이 우리 일행에게 외나무다리를 한번 걸어보라고 했다. 다리로 올라서다 반대편에서 내성천을 건너갔다 오는 사람들 때문에 다시 뒤돌아 나왔다. 그처럼 다리를 건너다 마주칠 때 비켜 갈 수 있도록 다리 한 토막을 나란히 놓은 곳도 있다. 마을 끝까지 갔다 물길이 휘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돌아 나왔다.
진행자가 사행시 당선자 발표를 한다며 어귀 언덕에 모여달라고 했다. 모두 일곱 분이 꼽혔는데 한 분은 이름을 적지 않아서 누군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앞에서 호명을 하자 순서대로 앞에 나와 시를 낭송하고 상품을 받아갔다. 이름을 적지 않은 분은 시를 읽자 자신의 시라며 나와 직접 낭송을 했다. 이 행사 주최 측인 국립중앙도서관의 박경숙 사무관은 자기가 사행시로 받은 선물을 그 여자분에게 주었다.
무섬마을을 나와 풍기 시내에서 점심을 먹었다. 바로 옆에 유명한 풍기 인견 직매장이 있어 식사 후 자연스레 들러보는 분들도 있었다. 대구 부산 등지에서 오신 분들이 거기서 내려간다면서 인사를 했다.
일행은 마지막 일정인 죽령 옛길을 걷기 위해 출발지인 소백산 역으로 갔다. 전에 희방사 역명을 지금은 그렇게 바꿔 놓았다. 출발지로 가는 차 안에서 2호차 진행을 맡은 안우상씨가, 거리가 2km 정도 되는데 평지나 다름없어 힘들이지 않고 갈 수 있다고 용기를 붇돋아 주었다.
소백산 역에 내려 죽령 옛길을 걸었다. 대간을 걸을 때 보니 새재와 죽령 등 죽령을 넘는 고갯길이 난 곳은 대간 줄기가 지그재그로 되어 있었다. 옛길이 상대적으로 완만한 것은 그와 같이 대간이 에두르게 나 있기 때문이다.
죽령은 대간 길을 넘나드는 길 가운데 가장 오래전에 난 길이다. 그처럼 대간을 넘는 길로는 새재, 이화령, 추풍령 등이 있는데 현재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는 추풍령이 가장 왕래가 많은 길이 되었다. 우리 국토에서 가장 큰 산줄기 능성이를 넘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이다. 과거 선비들이 한양으로 갈 때는 갈아 신을 짚신을 몇 켤레씩 괴나리봇짐에 매어단채 큰마음 먹고 넘었을 것이다.
나는 2008년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 지났던 추억이 있어 이번에 죽령 옛길을 걷는 감회가 남달랐다. 평소 산행을 좀 하는 편이라 산행거리도 부담은 없었다. 그리고 버스가 통과하는 5번 국도로 오르는 막바지 경사 구간 말고는 경사도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죽령 고개에 맨 먼저 도착해 대간 종주 때 이어 걸었던 날머리 들머리를 확인하고 주막에 들러 정순우 선셍님 등과 막걸리를 한잔씩 마셨다.
후미 일행이 다 올라와 서울을 행해 출발했다. 고개를 넘은 버스가 올라올 때 고생이 끝났다는 듯 내달리는 차창 밖으로 전에 오가던 대간 능선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 당시 장하게 먹었던 마음도 이제 희미한 기억이 되었다. 아마도 짚신을 신고 죽령을 넘었던 선비들의 발걸음도 그러했을 것 같다.
6시 30분 서울 서초역에 도착했다. 1호차에 타고 계신 정순우 선생님과 진행에 수고하신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가려 전화를 했으나 거리가 떨어져 있으니 그냥 가라고 했다. 1박 2일 동안 함께 문화유산을 탐방하는 길 위에서 교감한 시간이 돌아서는 마음 한켠에 아쉬움을 불러 일으켰다.
(20120519 김석환/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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