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명재고택, 돈암서원 답사기
서울건축사 건축답사및 사진동호회 첫 행차의 행선지는 논산지역에 있는 명재고택과 돈암서원이다. 출발장소인 교대역에 조금 일찍 당도하고 보니 먼저 온 회원들이 차 안에 앉아 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8시 교대역을 출발하고 나니 일산에서 온 한 회원이 늦었다며 전화가 와서 만남의 광장에 들러 기다려 태우고 명재고택을 향해 출발했다. 일기 예보에 오늘과 내일에 걸쳐 80mm정도 많은 비가 내릴 것으로 예보된대로 하늘을 보니 곧 비가 내리기 시작할 것 같았다. 답사 활동에는 지장을 주지만 오랜만에 대지를 적시는 단비여서 말 그대로 곡우라 반길만했다.
출발 한 차 안에서 서울 건축답사및 사진동호회 김선양 회장이 인사말을 했다. 그리고 모두 돌아가면서 자신을 소개 하며 인사말을 했다. 경주고속도로에서 천안-논산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내려가다 논산 톨게이트를 빠져 나가니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10시 50분 명재고택에 당도하니 고현정 논산시 문화 해설사가 마중을 나와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명재고택은 선생이 작고하기 5년전 그의 제자들이 십시일반 거출하여 지어졌다고 했다. 명재(明齋) 윤증(尹拯) 선생은 소론의 영수로써 한국사에 자리매김 되고 있는데 그는 평소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여 작은 집에서 하루 두끼 식사만을 했었다고 한다.
명재는 우암의 제자였으나 후에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묘비명 사건이 발단이 되어 우암과 사제의 의를 끊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이것이 이른바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되는 계기가 된 ‘회니시비(懷尼是非)’라 불리는데 송시열이 살던 곳이 회덕(懷德)이고 윤증이 살던 곳이 이성(尼城)이어서 그 첫 자를 따라 그리 불리게 되었다.
그 내용인즉, 명재의 부친이 작고하자 윤증이 우암에게 묘비명을 부탁하였는데 우암이 써준 글이 마음에 들지 않자 거듭 고쳐 써 줄 것을 청했으나 우암은 끝내 들어주지 않아 생긴 일이다. 우암이 그렇게 한 배경에는 우암과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 사이에 있었던 사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1653년 황산서원(黃山書院)에서 윤휴의 주자경전주해(朱子經傳註解)를 '사문난적'으로 규정한 우암과 이를 변호한 윤선거 사이에 격론을 벌였던 앙금이 남아 있었고, 우암이 윤선거가 병자호란때 강화도로 피난하여 가족을 두고 홀로 빠져 나온 일에 대한 비난의 시각도 갖고 있던터라 글을 고쳐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송시열과 윤선거 간의 이러한 감정 대립이 윤증과 송시열의 감정대립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명재는 조정에서 18번이나 관직을 하사할 때마다 모두 거절하여 한번도 관직에 나가지 않았지만 정승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출사의 명분을 중사한 명재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한번은 정말 관직에 나아갈 마음을 먹고 상경중에 박세채 선생을 만나 상의했다. 그 자리서 명재는 조정에 가면 3가지를 바로 잡을 수 있겠는가 하고 물었는데 첫때 남인의 억울함을 푸는 것, 둘째 외척의 득세를 막는 것, 그리고 공평한 인재 발탁이었다. 그 때 백세채 선생이 그런 일은 어려울거라고 하자 한양으로 가지 않고 바로 낙향하였다.
명재고택은 노성산을 등지고 평온한 들녘을 바라보고 있다. 그 터는 풍수지리상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의 명혈로 알려져 있는데 마당아래 쪽에 그를 증명하듯 이 집에서 쓰는 샘물이 있다.
이 집은 호서 지방 양반 가옥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면서도 몇가지 독특한 특징을 띠고 있다. 먼저 외삼문과 담장이 없이 바로 외부에 노출되어 있음으로써 다가가면 사랑채가 외부로 훤출하게 드러나 보이는데, 거기에는 그 집 앞에 펼쳐진 들녘에서 백성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처지를 돌아본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집은 특히 평면구성상에서 어느 고택보다 기능적인 면이 잘 고려되어 있다. 바로 안채와 사랑채의 연결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사랑채 뒷마당과 골방이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를 한몸으로 연결하면서 또한 영역을 분리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중성적인 매개 공간들로 인해 안채와 사랑채를 가까운 거리로 직접 연결하면서 영역적 독립성을 확보하고 있다.
사랑채는 루와 방으로 되어 있는데 특이한 것은 뒤쪽에 사랑방에 딸린 부속공간 (골방)을 두고 있는 점이다. 그 사랑방과 골방 사이 출입문은 여닫이도 되고 미닫이도 되도록 되어 있다. 오늘 설명을 담당해 수고하는 고현정 문화해설사가 이리 저리 열어보이며 근래 어느 창호 업체에서 이것을 모델로 제품을 개발하였다고 했다. 그 모습을 자세히 보니 여닫이를 할 때는 문틀과 함께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또한 그 여닫이 문을 때어 사랑방을 둘로 나누어 쓸수도 있게 했다.
사랑채의 루는 방바닥보다 한자반 정도 들려져 있는데 그 안에는 차탁 등 전통 가구들이 갖춰져 있어 양반가옥의 생활상을 느낄 수 있다. 루에 올라 창문을 열어 젖히면 그 앞 평온한 들녘이 시원스레 펼쳐보인다. 그리고 안방서 사랑채 후면 골방 문을 열자 안채 뽁으로 작은 마당에 면해 쪽마루가 놓여 있고 안채와 통하는 작은 문이 보였다.
사랑채 옆으로 안채로 들어서는 문을 바라보니 회원 몇 분이 주인과 함께 서 계셨다. 명재 고택은 13대 손의 소유이나 현재는 그 집안 사위가 살고 있다. 이 고택은 이 집이 지어진 시대성과 역사성 그리고 그 후 계속해서 거주해온 삶의 체취와 진정성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평소 개방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전문가들의 청이라 들어준 것인지 주인이 허락을 해서 자연스럽게 안채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
안채로 들어서는 대문은 내외벽의 시설이 되어 있다. 내외벽은 안채로 들어설 때 외부 시선을 잠시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데 조선시대 중시했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생활 풍습이 반영되어 있다. 당시에는‘남냐 유병’ ‘남녀칠세 부동석’ 이라는 말처럼 남녀가 각기 거처를 달리해야 '예(禮)‘가 지켜진다고 생각했다. 특히 명재고택 같은 양반 가옥은 그러한 ‘예’의 질서가 그대로 가옥 구조에 반영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안채 사랑채의 분리 그리고 조상에 대한 '의례(儀禮)‘를 거행하는 사당을 둔 것이다. 그 외에도 하인들의 거처와 살림살이에 필요한 곳간 등이 신분적 위계와 기능적 효율성에 맞도록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다.
전통 가옥은 외부로 나타난 일정한 양식성으로 인하여 현대 건축에서 말하는 기능에 대한 건축 계획적 고려가 별로 없을 것처럼 생각되기 쉽지만 전통가옥을 살펴보면 건축의 양식성을 유지하면서도 면밀한 계획적 고려에 따라 가옥마다 각기 다른 공간 구조를 띠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 시대 사회상이 반영되어 격식 있게 꾸며진 양반가옥은 살림집으로서의 생활기능에 실의 수요, 공간의 영역 구분과 연계성 등에 대해 근대 기능주의 건축처럼 면밀한 공간 조직이 고려되어졌는데 명제 고택은 그러한 점이 다른 어느 고택보다 간결하고 짜임새 있게 되어 있다.
근래 친환경 건축이 세계 건축의 화두가 되어 있는 가운데 그에 관한 연구가 활발한 편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건물 자체 구조로써 기후를 조절할 수 있는 패시브 하우스가 중시되는데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전통 한옥은 매우 친환경적인 특성을 띠고 있다. 그리고 근래 한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한옥의 친환경성 등에 관해 과학적인 측정 연구도 점차 활발해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풍수지리설이 신봉되어 온 것처럼 우리 선조들은 건물을 지을 때부터 지형, 지세, 일조, 바람, 조망 등 입지의 영향을 면밀히 살펴 안온한 삶터가 되도록 했다. 다시 말해 자연에 순응하는 태도로 인공의 손길을 최소화 하고 자연 조건과 혜택을 최대한 이용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에 따라 입지에 대한 안목과 감각이 발휘되어 왔다.
전통 건축에 발휘된 친환경적 의미를 꼽자면 자연으로 회귀하는 흙과 나무 등 자연 재료의 이용, 온돌과 마루의 겸비, 바람길과 일조의 이용, 두터운 지붕에 의한 차열성과 축열성, 처마 그늘의 서늘함과 풍화방지 효과, 안마당과 대청 개구부의 순환 기류의 고려 등이다. 여름철에 대청에 앉아 있으면 누구나 시원함을 느끼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일사에 고온으로 데워진 안마당의 기류가 상승할 때 뒷산으로 열린 대청마루 창문을 통해 서늘한 숲 바람이 들어오기 때문인데 이 고택에서는 그러한 효과를 더 뚜렷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좌측에 놓인 부속채는 강한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까지 고려되어 있다.
명재고택 주위의 나른 터에는 넓게 장독대가 놓여 있는데 된장 간장 등 전통 음식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그 모습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명재고택을 나와 종학당으로 갔다. 1640년경 윤증의 큰아버지인 윤순거(尹舜擧)가 세운 파평윤씨 가문 학교로서 1910년 이전까지 종학당 또는 종학원 으로 운영되었다. 서원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고등 교육기관이었지만 그 공부하는 이유가 자기수양의 목적이 커서 과거 합격자 수가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가문학교에서는 일반 서원이나 서당과는 다르게 교육목표와 교육과정을 두고 학칙도 정하고 시험도 치르며 치열하게 교육시켜서 많은 합격자가 배출되었다. 실제로 이 종학당 줄신으로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무려 42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성과는 결국 현실에서 그 가문의 세(勢)로 나타난 결과가 되었다. 이 건물은 공부 공간과 루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곳은 경사로와 루및 강학당의 배치와 구조가 인상적이다. 근대건축의 거장 르 꼬르뷔제가 사보아 저택에서 구사하여 건축적 지평을 넓힌 것으로 평가되는 건축적 산책로가 형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복원되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구조적 맵시는 느껴지지 않지만 터와 일체된 건축적 구성은 평가할만 했다.
루에 오르면 앞쪽 병사리 호수와 들녘이 펼쳐 보이고 그 너머 아트막한 야산에는 조상묘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 곳에서 공부하는 후손들이 선조의 교화를 느낄 수 있게 자리 잡았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헐어지고 없던 것을 1970년 윤정규가 다시 지은 것이다.
종학당을 보고 돈암서원 근처의 식당을 찾아가서 점심을 먹었다. 된장찌개와 상추 등 신선한 야채가 곁들여져 모두 맛있다며 맛있게 먹었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왕곡주가 유명한데 주인에게 그 막걸리를 청하니 “손님들이 찾지 않아서 갖다 놓지 않는다”고 했다. 막걸리대신 소주를 시켰는데, 김기훈 재무가 이동막걸리를 사 왔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홀에 삶은 국수가 찐빵크기로 한사람씩 담아 갈 수 있게 놓여 있었다. 그 것을 본 회원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다 다시 한 그릇씩 국물에 말아 앉았던 자리로 가서 다들 먹고 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돈암서원으로 갔다. 돈암서원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예학자로 꼽히는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34년(인조 12) 창건된 호서지방의 대표적인서원으로서 1660년(현종1)에 사액(賜額)서원이 되었다.
이 서원은 원래 현재의 연산면 임리(숲말)에 소재 하였는데 서원 동북쪽애 ‘돈암’아란 큰 바위가 있어 서원 이름을 돈암이라 했다고 한다. 1881년 (고종18)에 이르러 숲말의 서원이 지대가 낮아 홍수로 인하여 뜰 앞까지 물이 차므로 조금 높은 지대인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1871년(고종8) 흥선대원군의 전국적인 서원 철페령때에도 철페되지 않고 보존된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유서 깊은 서원이다.
돈암서원은 맨 뒤에 사당을 두고 그 앞에 좌측으로부터 정회당, 장서각, 양성당, 전사청이 있고 중앙에 위치한 양성당 앞에 좌우로 서위에서 제자들의 생활 공간인 동서재가 대칭으로 놓여 있으며 좌측 앞쪽 독립된 위치에 응도당 그리고 우측에 후에 지은 관리사 건물로 쓰이고 있는 경회당이 있다. 그리고 전면 입구에 세워진 외삼문에는 1660년(현종1)에 사액받은 '遯巖書院' 현판 등이 있으며 외삼문 앞에 산영루가 있는데, 산영루는 원래 전사청 옆에 있던 건물이어서 전체적으로 이전하기 전 본래의 돈암서원 배치와 다르게 된 부분들이 생겼다.
그리고 원래는 응도당이 돈암서원의 강학당으로서 동서재 중앙 위쪽에 있었는데 고종때 기술로는 그렇게 큰 건물을 옮길 수 없다 하여 그대로 두었다가 197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는데 그 때는 이미 양성당이 원래 응도당이 있던 자리를 차지 하고 있어서 할 수 없이 현재대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로써 서원의 본래 격식과 위계적 짜임새가 깨진 결과가 되고 말아서 지금이라도 제대로 복원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전통건축에서 배치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했다.
그래도 현재의 배치를 두고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은 양성당이 사계가 직접 가르치던 건물이라는 점을 들어 무방하다는 견해를 갖기도 하고 그 좌측에 놓인 정회당이 사계의 아버지인 황강(黃岡) 김계휘가 쓰던 건물이고 장서각이 사계의 아들 김집의 문집이 보관되어 있어 그 가문의 학통을 모두 느낄 수 있게 된 점을 부각하려 하기도 한다.
응도당(凝道堂)은 마치 수증기가 물방울이 되어 맺히듯이 도(道)가 맺히는 집이란 뜻이 담겨 있는데 건물의 규모도 당당하고 치목된 솜씨도 빼어난 모습이다. 건물 내부에는 학문을 닦는 전당으로서 유생들의 마음에 새길만한 글귀들이 편액으로 여기저기 결려 있었는데 그 중 우측에 보이는 지부해함 (地負海涵)은 땅이 온갖 것을 다 실어주고, 바다가 모든 물을 다 받아주듯이 그렇게 모든 것을 다 포용하라는 뜻 (사계 선생의 인품이 나타남)이 담겨 있고, 중앙의 박문약례(博學約禮)는 공자가 《논어(論語)》 <옹야(雍也)> 편에서 말한 '[君子는 博學於文이오 約之以禮면 亦可以弗畔矣夫인저.]'---"군자는 글을 널리 배우되 예로써 그것을 조이고 단속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의 뜻이며 왼편의 서일화풍(瑞日和風)은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때를 잘 맞추어 알맞게 내리는 단비와 같이 웃음으로 대하고 남을 편안하게 해 주라는 뜻으로서 이 서원의 이념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건물에서 특이한 점은 다른 서원에 지어진 건물들과 달리 주 건물인 응도당이 주심포식 포작 건물로 되어 있고 연꽃 대공처럼 조각된 소로와 첨차 등이 사치스럽게 느껴질 만큼 유려하게 되어 있는 점인데, 검박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 했던 당시 서원 건축 풍토와 퍽 다른 분위기로 느껴졌다. 그리고 또 다른 특이점은 박공지붕 형태의 건물 측면에 쪽 지붕을 달아내고 그것을 바치도록 기둥을 세워 회랑을 형성하고 있는 점이다. 그 모습으로 보아 박공지붕에서 풍판 쪽이 풍우에 노출되어 침식되기 쉬운 점을 보완하려 한 것으로 보였다.
'숭례사(崇禮祠)' 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은 정면3칸 측면3칸으로 전면열은 퇴칸으로 되어 회랑 기능을 하고 후면은 내부로 꾸며졌는데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 서인계 거유(巨儒)들이 모셔져 있다.
점심 전 종학당을 서둘러 본 탓인지 시간이 조금 남아 가까이 있는 백제군사박물관을 하나 더 보고 가기로 하고 그리로 향했다.
그 곳에 당도하니 입구에 주차장과 매표소를 두고 너른 영역을 공원처럼 꾸민 가운데 박물관은 전통 건축 양식의 외관을 석조와 콘크리트조로 지어 놓았다. 그리고 그 내부에는 백제의 영토 변화 성곽 무기시설, 마지막 호아선 벌 전투에 관한 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다. 신라군에게 패하여 결국 나라를 읽고 만 황산벌 전투의 현장과 계백 장군 묘가 그 유물관 영역내에 있어 당시의 역사가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더우기 한 나라의 최후의 현장이라는 슬픈 역사의 느낌을 씁쓰레하게 느끼며 귀경의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 서울건축사 건축답사및 사진 동호회 첫 행사는 우천에도 불구하고 회원들의 진지함과 열의 속에 알찬 보람을 얻게 된 것 같았다.
(201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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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춘해
쑤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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