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낙동정맥 종주를 마치고
얼마전 낙동정맥 종주를 마쳤다. 실제 거리 450km가 넘는 먼 거리를 혼자 걸어서 이동했다. 정맥 종주는 시작지점부터 정맥이 끝나는 마지막 지점까지 하염없이 걸어가는 과정이다. 해발 1300m인 태백의 매봉산에서 출발하여 태백-삼척- 양양- 창송- 포항- 경주- 포항- 양산을 지나 부산의 몰운대까지 차례로 접어들어 몰운대 앞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마쳤다.
산맥 종주는 시작한 곳에서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정맥의 마루금을 따라 걸어가는 일이다. 그런데 낙동정맥은 백두대간 못 않은 심원하고 큰 산줄기였다. 특히 강원도와 경상북도 북부 지역은 하루 종일 걸어도 마을은 커녕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할 때가 있을 만큼 깊은 산중이었다. 그런 곳을 지나면서 태초의 침묵과 같은 첩첩하고 높고 큰 지형의 산지에 홀로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평소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과 단절된 채 오롯이 산세의 품에 놓여 원초적 자연이 발하는 생명력을 대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처럼 높고 험준한 마루금을 타고 걷는 과정은 길 찾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체력도 많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큰 각오를 하고 임했다. 진행은 대게 2주 간격으로 13회에 걸쳐 한 구간씩 이어 걸었는데 하루에 40km를 넘게 걸은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 국토의 산세와 그에 바탕해 형성된 고을들의 주변 입지를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정맥 종주의 여정은 결국 산길을 이어 가는 과정이고 길을 제대로 들어서야 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종주에서 가장 신경쓰이는 일은 바로 길을 제대로 찾아드는 일이다.
산중은 인간이 도시와 마을을 이루며 살기 이전의 상태와 같다. 원초의 상태에서 자연을 느끼게 된다. 그 시원의 품이 좋아 찾아들지만 내가 그 곳에 계속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산행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전제로 향하는 발길이다. 나는 종주를 마칠 곳까지 찾아드는 것일 뿐 다시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온다. 길을 잘 못 들고 나설 길을 찾지 못하면 산속의 미아가 되고 말 것이다.
산길이란 도시의 도로처럼 닦아서 생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걸어간 흔적에 불과하고 그 폭도 단지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넓이이다. 그런데 발자국이 남지 않는 암릉이나 새로 떨어진 낙엽이 수북이 싸이거나 비가 내려 길이 뭉개져서 때로는 그 흔적마저 잘 식별되지 않을 때도 있다. 수풀에 가려 있기도 했다. 낙동정맥의 산줄기는 인간이 자연의 품에 깃들기 이전부터 존재하며 태초부터 지금까지 큰 변화가 없는 시원의 품이다. 하지만 임도나 풍력발전기의 설치, 그리고 밭을 일구어 안타깝게 파헤쳐진 곳도 간혹 있었다.
종주 산행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이른 새벽 졸린 상황에서 깜깜한 밤길을 들어설 때였다. 버스가 운행되는 시각이 아니기 때문에 들머리까지 택시를 이용해야하는데 그 시각에 택시 기사가 나와 주는 것도 고마운 일이었다. 택시 기사 분들은 목적지에 내려줄 때 나에게 괜찮으냐고 하면서 얼굴을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결심이 확고한 나의 모습을 보고서야 안도하며 돌아서곤 했다. 나도 부담스럽지만 이미 나선 길이고 그러한 망설임이 있었으면 제대로 진행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시각부터 먼 여정의 하루가 시작된다.
자연의 품은 경험하지 않았던 미지의 세계이며 동경심을 향한 앞으로의 발길이자 모험의 발길이기도 하다. 경험하고 나면 호기심도 사라지게 된다. 그 험난함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 다시 갈 생각이 없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앞으로 남은 길은 험하다 할지라도 반드시 걸어가고 싶은 의욕이 생긴다.
일단 길에 들어서면 온종일 묵묵히 걸었다. 먼 거리는 쉬 줄어들지 않는 느낌이었다. 좁고 희미한 산길이지만 그곳을 지나는 느낌은 다양하다. 시야가 트인 길 막힌 길 넓은 길 좁은 길 등 그마다 감각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형상도 곧은길, 굽은 길, 오름길, 내리막길, 숲길, 땡볕길, 낙엽이 푹신한길, 자갈길, 너덜길, 암릉길, 진흙탕길, 넓은 길, 좁은 길 등 다양했다.
아스라이 뻗쳐 있는 정맥 마루금의 장쾌함과 어둠을 헤치고 숲이 밝아오는 햇살의 싱그러움 기운 등 자연 풍광의 경이로움뿐 아니라 때로는 오소리 멧돼지 같은 야생 동물을 만나거나 처음 듣는 새소리를 듣기도 했다. 정맥의 훤칠한 마루금이 펼쳐 보일 때는 가슴이 탁 트인다.
비록 당일 구간을 마치고 나면 내 일상의 공간으로 서둘러 되돌아오게 되지만 깊고 큰 산세의 품에서 홀로 있는 시간 동안만은 도시 속에서의 생활 습관을 떨치고 자연의 섭리에 귀의하듯한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대자연에 동화되며 내 자신의 의식이 맑고 투명해지는 느낌을 느꼈다.
종주 과정에서 고난도 많이 겪었다. 길을 잘못 들어 헤맬 때도 있었고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된 때도 있었다. 구간 들머리 초입부터 길이 잘 보이지 않아서 날이 거의 샐 때까지 기다리느라 먼 거리를 가야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허비할 때가 있었다. 악천후와 밤길에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내려와 다시 걷기도 했고 길을 못 찾아 같은 산을 세 번이나 오른 적도 있었다. 주왕산 구간에서 땜빵 산행을 할 때는 한 밤에 계곡으로 탈출하다 계곡에 면한 경사지에서 나뒹굴어 여기저기 상처를 입기도 했다. 구조를 요청해도 연락이 되지 않는 깊은 산속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며 참담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서울서 먼 들머리 날머리를 오가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그렇지만 보람이 훨씬 컸다. 그것은 우선 정맥을 걷는 그 자체로서의 원초적 체험과 뿌듯함이다. 산에 들면 일상을 벗어나 시름을 저만치 벗어두고 자연의 생명력과 동화되며 그 체취에 젖게 된다. 그러면서 심신의 건강한 기운을 함양할 수 있고 내 안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때때로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또한 심화된 자연의 체험과 입지의 이해 등 이런저런 공부가 되었다. 정맥 종주는 산맥의 흐름을 느낄 수 있고 산세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다. 지형을 읽는 다는 것은 바로 앞만 보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지도와 비교하며 끊임없이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면서 산세 및 지나는 고을의 입지에 관한 안목이 넓어지는 느낌도 들었다. 건축은 지형, 대지, 자연 조건을 잘 살피고 그와 적절한 균형을 이루게 하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산행은 인문과 역사, 공간과 지형의 안목을 키우는데 가장 좋은 공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지도만을 보고 현재 지나는 위치나 갈 방향을 가늠하며 지나야 하기에 끊임없이 주변을 의식하고 살펴야 한다. 가까운 곳 뿐 만 아니라 멀리 있는 산이나 지세와 연관 지어 살펴보기 위해 시야를 넓게 갖게 되기도 한다.
하루에 걷는 거리가 먼만큼 온종일 걷고 나면 시작했던 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지역을 들어서곤 하게 되었다. 그런 때 한 고을에서 다른 고을로 접어드는 새로운 장소의 입지의 느낌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 접하는 고을의 역사적 체취 등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형성돼온 고을들은 삶이 터전의 조건들이 갖추어진 곳이다. 즉 고을들은 그마다 입지 조건 속에 형성되고 그와 균형을 이루며 발달해왔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맥의 형성에서 오는 교훈적인 의미도 있다. 정맥을 걸으며 지세의 흐름 양상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때로는 지세의 흐름을 살피며 감각적으로 길을 찾아야 할 떼가 있었다. 태백 통리역에서 진행 할 때 앞에 놓인 산자락을 타고 지났다. 그 곳에서 정맥으로 이어가는 흐름은 틀림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줄기를 있는 자락이 따로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걸었던 길이 정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다시 걸었다. 정맥은 곁가지로 잇지 않았다. 그저 어느 지형이고 이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마루 금을 잇는 지세의 주 기운이 뻗쳐 흐르는 줄기였다.
그리고 인내심을 기를 수 있었다. 자연은 모든 것을 기르지만 종주중 먹고 마실 것은 스스로 구하기 어렵다. 그래서 산에 들어서면 그 안에 머무는 동안 필요한 물과 식량 등을 준비해야 한다. 한 여름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상황에서 온종일 걸으려면 끊임없이 물을 마셔야 한다. 그렇게 물과 음식을 보충하며 체력을 스스로 지탱해야 했다. 하지만 매고 걸을 수 있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언제나 충족하게 지니고 있을 수는 없기에 견디는 상황이 많았다.
자연은 아름다운 감상의 풍경만이 아니다. 때론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험난한 상황이 될 수 있다. 자연은 인간에게 혜택만을 주는 것도 아니다. 늘 쾌적하고 아름답고 평온함만을 느끼게 되는 곳도 아니다. 그 스스로 존재할 뿐 문명에 길들여진 인간에게 일상생활에서 일용할 것이 아무것도 갖춰져 있지 않은 곳이다. 그로써 그 안에 들면 원초적 생존 본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문명의 혜택이 전혀 없는 그 안에서 그 자연의 질서에 따라야 하는 인식을 갖게 한다.
원래 인류는 야생에서 살았지만 현재는 문명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산에 머물러 살아가기 어렵다. 아무리 산중의 체험이 소중하다 하더라도 내가 계속해서 산에 머무를 것으로 생각하고 들어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명이 사라지고 나면 인류는 다시 그 안에서 생존하는 능력을 터득할 것이다. 톰 행크스가 열연한 연화 ‘게스트어웨이’가 생각난다. 타고 가던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해서 구사일생으로 무인도에 도착해 홀로 살아가게 되었다. 평소 일용하던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고 결국 자구책으로 원시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낙동정맥을 종주할 동안은 고난의 행로를 어서 마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다 마치고 나니 그 때의 그리움이 마음 안에 고여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가끔 그 시간들을 되돌아본다. 올해 경험한 낙동정맥 종주는 내가 살아오는 동안 가장 선명한 기억중 하나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201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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