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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제목

09 해 저물 무렵

작성자
김석환
작성일
2009.12.31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404
내용


09 해 저물 무렵

점심 식당에서 가까이 앉은 다른 일행 한 사람이 아휴 어제로 망년회 다 끝났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연말을 보내며 하는 통과의례처럼 치뤄야 할 일을 다 마치고 홀가분해 하는 목소리였다. 그러자 그 일행들이 공감하듯 말을 받아 맞장구 쳤다. 연말을 맞아 이런 저런 망년회 모임을 갖느라 더 분주히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대부분 사람들이 한 해의 마감이 더 빨리 닥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모임이 그리 많진 않았지만 나도 이런 저런 망년회에 참석하며 12월을 지났다. 그런 일정이 연말을 더 분주하게 하는 것이 걱정스럽지만 특별한 핑계 거리가 없으면 알려온 모임 자리로 발길을 향하곤 한다. 그런데 수더분하게 되는 그런 시간이 때때로 삶을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평소 잊고 지나던 지인들을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모임에 모두 빠지다 보면 사회적 관계에서 허전함을 느끼게 될 수 있다. 그처럼 참석해도 특별한 이야기 거리가 없으면서도 참석하지 않으면 소외된 듯한 느낌이 되는 망년회는 인생과 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매년 관습처럼 한해를 보내는 마음 풍경을 되풀이 갖는 가운데서도 올해는 시작할 때부터 특별한 의식을 갖게 했었다. 덧없이 흘러온 가운데 어느덧 나이가 쉰의 숫자를 지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마음 가짐에 그렇게 무거운 연륜의 때가 닥치는 것이 버겁고 감당하기 어려운 느낌이어서 세월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는 어느 해보다 크게 다가오는 세월의 느낌을 내색 않은 채 지나려 했다. 하지만 내가 태어난 해의 숫자와 태어난 닐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어 어느 순간에나 내가 살아온 날들이 정확하게 드러나게 된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생존해 가는 동안 한 해 한 해 저절로 쌓여지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어느 땐가 모를 삶의 종말까지 이어가게 될 길이다. 그런데 생을 지나오면서 이십, 삼십, 사십 살 등 숫자로서 나이의 큰 구획을 나누는 시기에는 생의 위치에 대한 감회가 크게 느껴지곤 했다. 그리고 때로는 그 숫자를 통해 인생의 의미가 더 무겁게 다가오기도 한다. 요새 와서 나이에 관한 조금씩 인식이 달라지고 있지만 나이에 따라 삶의 행태와 의식이 보편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점들이 있다.

전통적으로 일생 중 나이를 가장 특별하게 인식하는 때는 환갑이었다. 환갑은 육십년마다 자신이 태어난 띠가 다시 돌아오는 해를 일컫지만 옛 사람들은 그만큼 사는 것을 한 인생을 살만큼 산 시간으로 여기고 새롭게 태어나는 의미로 여겨 잔치를 벌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일생 중 다다른 어느 시기를 함축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여정에 이르는 쉰이라는 숫자도 지난 시절엔 요새보다 큰 무게감을 느끼게 했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그에 걸 맞는 경륜을 저절로 지니게 될 것 같았다.

어린 시절에는 어른들의 나이가 더 무겁게 다가왔었다. 이십이 넘은 사람은 어른이고 삼십이 넘은 사람은 장년이고 사십이 넘으면 높은 경륜을 지녀가고 쉰이 넘으면 큰 어른 같았다. 내 자신이 이르게 된 현재의 나이보다 어른들의 나이가 적었던 때에도 어른들은 다 원숙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나 자신은 이상스러울 만큼 그러한 나이의 의식이 들지 않은 채 지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정신적으로 남에게서 느껴지는 나이의 경륜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것이 한편으론 변치 않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 같아 다행스럽기도 하지만 또한 부족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근원적인 점에서부터 삶의 의미를 알고자 했었다. 그러나 그 때 주변에서 본 삶의 모습들이 삶의 의미를 충족하기보다 살아가는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서 뒤치다꺼리 하듯 허겁지겁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주어진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는 모습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직업을 갖고 그에 얽메여 살아가는 것처럼 인간의 삶이 어느 고정된 길에 놓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과연 대부분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참다운 삶의 의미에 맞는 것인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모든 생이 참다운 삶의 의미를 쫓아가기 어렵다는 것도 점차 의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이가 더 들어갈수록 삶에 대한 인식이 고정되어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의 생에 남은 시간이 적어지기 때문에 이것저것 의미를 따지기보다 내가 걷는 길에서 좀 더 알차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작용하는지 모른다.

올해를 맞으면서 가장 먼저 의식한 것은 내 삶의 과정을 돌아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평소 늘 자각하던 일들이었다. 나의 생은 처음부터 행복과 거리가 먼 길에 있다고 생각했다. 때때로 보이는 삶의 영롱한 빛깔 등을 내가 현실에서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세월이 흘러도 마음은 언제나 그대로 있지만 어느덧 청춘의 정열을 품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된 시절이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그런 세월은 나로부터 어느새 아주 멀어져 갔는지 모른다. 나의 생의 순간에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그냥 도외시할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행복한 삶에 대한 체념 속에 세월을 흘러 보냈다. 그러면서 이따금 차가운 겨울 햇살이 한가롭게 방안으로 들어와 비출 때처럼 마음 안으로 그러한 햇살이 들어와 비추고 있을 때를 느꼈다.

지난 세월의 지나감을 회상해 보면 유독 겨울 풍경이 떠오른다. 농촌에 살던 어린 시절 한해 한해가 바뀌고 나이가 더 든다는 것을 늘 겨울 풍경 속에 느껴왔었다. 그 때는 주로 내가 늘 바라보는 자연의 모습으로 세월의 변화를 느꼈었다. 내가 기억에 떠오르는 그 시절 해 바뀜으로 가장 크게 인상 지워진 풍경은 추수하고 비워진 논에 얼음이 언 광경이었다. 풍경에 날씨가 그대로 나타났다. 두껍게 얼 때와 살얼음이 얼 때가 있었다. 썰매를 타기 위해 두껍게 얼기를 바랐었다. 쌩쌩한 추위에 아이들이 논에 모여 각자 직접 만든 썰매를 탔다. 을씨년스럽지만 놀이와 세월이 어우러진 즐거운 한 때가 베어드는 추억이었다.

그 소박한 즐거움의 시간동안은 내게 놓인 형편으로부터 느끼던 시름을 잠시 잊어버릴 수 있었다. 겨울은 좀 더 길었다. 하지만 아직 바람에서 차가운 기운이 다 가시지 않았던 때부터 어른들은 농사 준비를 했다. 아직 차가운 날씨인데도 뭔가 바쁘게 농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분주해지고 무엇인가 자라기 시작하면 그 자라남과 더불어 세월이 흘렀다. 자연의 생명 활동과 더불어 해가 바뀌어 왔다. 그렇게 아득히 침잠하던 세월이 자나가고 도회지에서 현실에 부디치며 지나온 세월이 더 많이 쌓여왔다.

어린 시절은 어떤 존재로 규정되어지지 않는 시기였다. 그러나 점차 어떤 존재로 규정되어가게 된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고 그렇게 되어질 것이 두려웠다. 비교적 세상의 틀에 박히지 않게 살아왔다고 여겨지지만 내가 세상과 관계 속에 규정되고부터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일들이 결핍으로 나타났다. 고교시절엔 제대로 다닐 여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개별적 형편대로 살아왔지만 전제적인 사회의 룰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룰에 따라하지 못하는 것은 과오를 저지른 것처럼 되곤 한다.

스스로 부족함을 메우려 하면서 흘려보낸 시간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제대로 알기 어렵다. 소위 전문가의 길에 들어서서 그에 대해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학력, 경력 등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시간으로도 많은 시간을 채워 넣었다. 사회적 커리큘럼으로 정해진 듯 한 그런 요구에 응하는 시간의 의미로 본다면, 그리고 그것이 내가 가야 할 길에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한다면 그런 일로 채워진 인생의 시간들을 허무해하지 말아야 할지 모른다. 지난 시간이 오늘의 준비이고 그를 위해서 써왔다고 변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그런 구속의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게 놓인 가볼만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또한 내가 어떤 위기의 순간에 생명의 끈이 그치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에 안도해야 할지도 모른다. 살아오면서 내가 어쩌면 생이 멈추었을 것 같은 위험에 직면한 순간도 있었다. 대개 사람들도 그런 순간들을 맞을 때가 있다. 그리고 다행이라고,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행운이 없었다면 최악의 상황으로 끝났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 순간에도 그런 마음을 먹었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크게 변하지 않았었지만, 그 다행함의 의미를 떠올리고 주어진 시간을 새 생으로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애시당초 목숨의 연장으로서 생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한가닥 삶의 의미를 붙들며 가고 있는 것이 그 핑계 삼는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작은 꿈의 갈망 속에 세월을 지나왔다. 내가 지난날 어떤 처지에서 하지 못했던 것을 만회하려는 갈망, 소망의 갈망, 기다림의 시간으로서 생의 어느 부분들도 지나갔다. 그 어떤 기다림에 대한 몰입은 살 수 있는 기간 동안 정말 해야 할 일들이 미뤄지거나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결핍의 충족 의지는 또 다른 상실을 낳게 된다. 그리고 살아온 과정들이 어리석음으로 범벅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내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의욕을 잃거나 별 볼일 없는 일상을 지나더라도 내가 태어난 시간으로부터 시간은 더 해간다. 결국 생을 잘 산다는 것은 시간을 잘 쓰는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내 생의 강물은 어디까지 흐를지 모른다. 인간에게 죽음이 두려운 것은 오래 삶의 욕망 때문이기 보다는 그 버거운 의미를 당장 현실로 받아들여질 만큼 산다는 것의 의미가 정리되어 있지 않은 탓일 게다. 하지만 시나브로 그 거리에 닿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제대로 알고 임한다는 생각도 부질없을 것이다.

이제 지나온 세월처럼 기다릴 여유의 시간이 별로 주어질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내가 할 일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건강한 심신으로 갈 수 있는 시간을 자각해야 한다. 완고함을 버리고 무던하거나 꿈꾸기보다 더 현실적인 생각을 갖거나 고집스러움보다 남을 더 이해하려 하거나 하는 생각들로 고쳐가야 할지 모른다. 행복한 모습은 나의 얼굴이 아니라고 했던 생각을 바꾸어야 할지 모른다. 세상과 동행하면서 이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서먹한 느낌을 훌훌 털어버리고 마음에 새 집을 지어야 할지 모른다.

앞에 놓인 길에 부푼 희망을 품더라도 내 마음 귀퉁이에서 쓸쓸히 흘려보낸 세월이 지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희망과 달리 앞으로도 잡초 같은 인생길이 계속 될지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는 조금이라도 마음에 따뜻한 온기를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나 스스로를 너무 척박하게 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에게 청춘의 생명력은 다 가버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다. 설렘과 기다림, 어떤 것에 도전하고 기다렸고 간절했던 마음, 아름답게 다가왔던 이 세상의 풍경 등을 이따금 떠올려야겠다.

다가오는 새해의 시간은 늘 추위에 부풀어 오르던 버들강아지 꽃눈처럼 다가왔었다. 얼어붙은 가지에서 그 새 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내일의 세월에도 내가 다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기운이 작용되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내일로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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