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첫 눈
출발 때 한산해 보이던 도로가 법원 사거리를 지날 때부터 차량이 길게 늘어섰다. 친환경 아카데미에서 함께 수업 듣는 사람들이 워크샵 장소인 가평으로 가는 길이었다. 당초 내일 오전 행사에 참석할 일이 있어 참석치 못한다고 했는데 오늘 저녘에 일찍 돌아오는 차편이 있다고 해서 함께하기로 했다.
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길가에 다락 수목원이라는 표지석이 보였다. 거기서 우측으로 들어가며 일행이 주인에게 전화를 거니 바로 옆 건물에서 전화를 받으며 마중을 하고 방으로 안내해 주셨다.
처음 방문하는 장소는 낯설음의 서먹함을 느끼게 하는데 그것은 미지의 불확실성에 기인할 것 같다. 하지만 안내된 방으로 들어서서 짐을 놓고 쉴 수 있다는 장소의 확인이 마음을 편안함으로 바뀌게 했다.
밖으로 나와 우측 건물 앞으로 돌아가니 데크에서 저만치 마을 불빛이 조망되었다. 그리고 어둠 속이지만 아늑한 지형 감각이 느껴졌다. 시원스런 시선이 펼쳐질만한 한적한 공간이었다. 다시 건물을 돌아 차에서 내렸던 곳을 향하며 나무를 올려보다 눈이 내리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엔 잿가루처럼 보이기도 해서 긴가민가 했는데 확인을 하고 보니 새삼스레 기억 저 만치 밀려가 있던 사물을 대하는 감회가 새롭게 느껴졌다. 서설(瑞雪)은 상서(祥瑞)롭게 여기는데 워크샵을 위해 찾아든 일행들에게 마치 행운을 암시하는 듯도 했다.
숙소 현관에 있던 주인에게 “단풍은 다 졌겠죠?”하고 물어보니 “다 지고 없다”고 했다. 하지만 서운하다는 생각은 없고 단풍이 지고 나 후의 이맘때의 계절의 의미가 떠올려졌다. 그리고 이내 올해도 다 저물어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과 계절의 풍경은 관성적인 삶에서 깨어나 근원적인 의식을 낳게 한다. 그러한 요소들은 한정된 시간속에 존재하는 내게 그 여정의 어느 길에 들어서고 있다고 알려주는 표지와 같다. 인생을 결국 세월을 걷고 오간다.
이곳에서는 무엇보다도 주변 숲이 궁금했다. 그래서 주인에게 산책길이 어디냐고 물어 보니 랜턴을 들려주면서 뒤로 가라고 했다. 어둠 속에 키 큰 잣나무 숲길로 들어섰다. 점점 숲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백두대간을 걷던 때가 생각났다. 그 때를 다시 회상하며 숲길을 걸었다.
대간을 종주하던 기간은 일정한 간격으로 자연을 만나는 과정이었다. 도시 가로를 이동하는 것과 전혀 다른 세계의 공간에 들어서 걸어갔다. 산길은 질러가기 위해 생긴 것이 아니라 지형에 순응하여 산이 허락하는 지세로 이어진 것이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갔다. 어둠 속에 전등을 비추며 바라본 큰 전나무가 높이 솟아 있었다. 그 나무에 모여 사는 다른 나무들도 연륜을 풍기며 서 있었다. 불청객의 발길을 너그러이 참고 밤 하늘로 치솟은 나무들과 이웃해 사는 다른 나무들도 함께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원초적인 환경을 접하니 나의 일상적 굴레를 벗고 우주의 근원으로 이끌려 질 듯 했다.
한참 오름길을 걷다보니 앞쪽 맞은편에 운악산이 보였다. 운악산은 한북정맥에 속하는데 그것은 임진강과 북한강 사이에 발달된 산맥으로서 추가령 근처 식계산을 기점으로 북한지역의 철령, 백암산, 적근산을 지나 남쪽으로 김화 대성산, 수피령, 사창리, 복개산, 광덕산, 백운산, 도마치봉, 국망봉, 청계산, 운악산, 도봉산, 북한산, 노고산, 고봉산, 장명산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조종천 이쪽으로는 명지산, 매봉, 수덕산 등이 별도의 산줄기를 이루며 뻗어 있다. 산길을 내려오면서 바라보니 주변의 지형 윤곽에서 안산과 좌우산 자락이 위요하듯 보였다.
다시 숙소 방으로 들어서면서 만난 사람들이 내리는 눈을 보고 “첫 눈 아닌가?” 하며 좋다는 말을 연발했다. 안으로 들어가 깔아 놓은 이불을 걸치고 앉으니 이맹룡 건축사가 방으로 들어오다 보면서 “‘첫날밤 첫눈’ 얼마나 좋아 그 중 한 가지 말만해도 가슴이 콩당 콩당 뛰고...” 라고 했다. 뜻은 잘 몰랐지만 순수한 마음이 느껴졌다.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릴겸 방에서 추위를 녹이다 찾는 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갔다. 일행이 두 개의 불가에 둘러서 있었다. 바베큐 화로에는 숯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눈발과 그 불이 대조를 이루는 느낌이었다. 일행이 인사말을 하며 술잔을 권하고 음식을 나눠 먹었다. 성가대원인 조원용 건축사는 성악곡을 멋지게 불러 환호성을 자아냈다. 아무 부담 없는 처지의 사람들끼리 편한 시간이 되었다.
이런 시간은 특별히 의미를 부여할 것이 없다. 목적이라면 함께한 사람들 끼리 서로를 가까이 알려는 것일 수 있다. 또한 참가한 사람들만의 관심사와 생각들을 나눌 수 있는 기회일수도 있다. 그래서 그냥 편하게 서로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면 그 자체로 의미 있게 되는 일 같았다. 근래 친환경 건축이 화두이고 그러면서 새로운 추세에 적응하기 참가한 마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 뭔가 끊임없이 쫓아가듯 하면서 마음이 분주해진 상황인 때 마음을 풀어헤칠 수 있는 수목원을 찾은 것도 자연스러울 수 있다.
난로가에서 한동안 두런두런 예기들을 나누며 머문후 일행이 실내로 이동했다. 큰 방으로 가는 동안 마당과 데크에 눈이 하얗게 쌓여 보였다. 방으로 들어서니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몇 분 서 있었다. 방을 나와 다시 눈 마당을 걸었다. 눈발이 점차 세차지고 마당에 눈이 더 쌓였다. 흰 눈길에 처음 발자국을 남기고픈 흥미가 일어 데크길을 한바퀴 걸었다. 앞 쪽 마을에서 개 짓는 소리가 들렸다. 포근히 밤이 늦어가고 눈 길에 그 마을도 더 아득해졌다. 다시 바비큐 장으로 가니 몇 명은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시 술잔을 주고받으며 계속해서 내리는 눈을 맞았다.
방에 다 모였다고 부르러 와서 큰 방 안으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딱히 할 말도 없고 그냥 같은 공간에 모여 있는 시간이어도 나름의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 이런 자리일 것 같았다. 얼마 전 전철을 타고 가다가 앞에선 학생들이 나누던 대화가 생각났다.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MT가서 “망가진 모습은 보지 않았잖아” 하는 말이 떠올랐다. 그들도 살아오면서 그 의미를 아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의 연배로는 자신의 모습을 더 보여서 크게 쑥스럽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평소 듣기 어려운 각자의 삶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망가진(?) 예기는 별로 없었다.
돌아올 시간이 되어 일행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눈이 그치고 깊어진 밤공기가 시리게 맑아져 있었다. 눈이 바닥에 하얗게 깔리고 별이 총총히 밤 이야기를 피우는 길을 되돌아왔다. 졸립고 피곤하지만 허허로이 도시의 일상을 벗어나 자연 기운을 쏘이고 오는 시간도 괜찮은 듯 했다.
(091120)
첫 눈
서울 밤거리를 나와
시린 숲속으로 가서
그립던 하늘을 올려보다
신기루처럼 첫눈을 맞았다.
얼굴에 닿아 녹아 흐르는
차가운 감촉에
영영 떠난 줄 알았던 세월 감각이
기억을 헤집고 살아난다.
해가 저물어가는 무렵
나무가 발가벗은 세월 풍경과
내 초라한 삶이
다시 어우러지고
시리고 그리움으로 지날
그리고 누구러진 햇살이 더 따스해질
계절의 품새를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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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환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아득한 고향의 체취를 간직한 고장으로 느껴지는 곳입니다. 제가 남이섬에 작업한 문학촌이 있어서 저도 인연이 있습니다. 좋은 고향을 두셨습니다...
14 년전 -
씨앤지
첫눈을 참 멋찌게 맞이 하셨네요~~ 저의 고향이 가평이랍니다...ㅋ
14 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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