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책과 사람 : 한국전통건축의 좋은 느낌(김석환 지음)
글 / 채풍묵 선생님(시인, 대원고등학교 국어 교사)
naver.blog dream10에서 옮김
《한국 전통건축의 좋은 느낌》의 저자는 우리 전통건축 가운데 가장 귀하게 여기는 아홉 군데를 통해 그 느낌을 친절한 언어로 풀어주고 있다. 뛰어난 경지의 전통건축이 갖는 건축적 성격과 그 이루어진 배경 그리고 거기서 느낄 수 있는 미적 감각 등을 통해 매력적인 건축의 세계와 아름다움의 진경으로 독자를 안내하고 있다.
외국 관광객들은 한국의 전통건축 가운데 ‘종묘’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그리고 흔히 종묘를 동양의 ‘파르테논’이라고 일컫는다. 파르테논 신전은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위치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으로 불리는 건물이다. 종묘나 파르테논에서는 숭고한 정신성이 느껴진다. 거기에 깃든 정신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것보다 숭고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을 뿐 아니라 종묘제례와 종묘제악은 인류구전 및 세계무형유산 걸작으로 설정되기도 했다.
종묘 안의 대표 건물은 ‘정전’이다. 정전은 조선 왕조의 위패가 봉안된 건물로서 제사를 올리는 주 건물이다. 정전은 전통건축 가운데 가장 큰 힘이 느껴지는 건물이기도 하다. 그것은 건물이 지닌 웅대한 규모는 물론이거니와 구름 문양, 기둥의 굵기, 월대의 박석과 전돌의 크기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부분들이 하나로 통일되어 절제의 미를 구현한 것이 매우 뛰어나 힘과 단순미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러면 내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전통건축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석사이다. 특히 부석사 무량수전은 진정한 명품만이 갖는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부석사를 오르며 범종루 누하를 지나 맞닥뜨리는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겹쳐 보이는 모습은 한국 전통미를 대표해 왔다. 부석사 무량수전을 오르는 길은 특별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동선(움직여 옮겨가는 발길선)을 갖고 있다. 축대를 하나하나 지나며 오르는 과정은 점점 느낌이 고조되어 깊은 이상세계로 한 발씩 다가가게 한다. 그리고서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님을 상징하는 불이문(不二門) 역할인 안양루를 지나 비로소 도달하는 무량수전 마당. 거기서 뒤돌아보면 발 아래 펼쳐지는 소백산과 태백산 줄기를 시원하게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그 순간 뒤로는 부드럽고 섬세한 감성으로 울림을 주는 무량수전의 자태가 그윽하다.
한편 한국 건축이 도달했던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는 건물이 있다. 서애 유성룡을 배향한 병산서원이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 시대에는 뛰어난 성리학자가 죽은 후 그를 추모하고 모시는 ‘서원’이라는 교육기관이 있었다. 사상의 차이에서 비롯되지만 사찰이 종교적인 수도원이라면 서원은 현세의 수도원이라고 할 만한 곳이다. 그런 까닭에 조선시대 서원의 학자들 즉 ‘선비’들은 청정하게 수도를 닦으면서 오직 학문에 힘썼다. 그들은 문학, 역사, 철학,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학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건축물에서도 형식보다 조화, 절제와 생략, 소박하고 두터움, 여백 등 뛰어난 미적 안목이 나타난다.
병산서원의 구조는 ‘입교당’(토론식 강의를 진행하는 강당)과 맞은 편 ‘만대루’(휴식과 경연 장소) 그리고 좌측의 동재(상급생 기숙사)와 우측의 서재(하급생 기숙사)가 중심이다. 병산서원 최고의 멋은 입교당에서 만대루 쪽으로 넘겨 보이는 이미지이다. 그때 건물의 크기와 멀고 가까운 위치가 작용을 해 건너 보이는 만대루와 병산과의 중첩된 이미지가 적정한 균형을 이루는 상태가 된다. 거기서는 건축과 자연이 어우러진 최고의 상태를 보여준다. 잘 다듬어진 건축과 그것이 놓여진 자리에서 비롯되는 예민한 상태의 균형, 병산을 끼고 휘돌아친 강물의 물줄기와 수묵화의 여백처럼 여유롭게 펼쳐진 백사장, 그리고 단아한 자태의 고고한 노송 몇 그루, 이 모든 것이 원숙한 수묵화의 필치처럼 잘 어울려 아름다움이 극대화되고 있다. 그리하여 화려하거나 과장되지 않은 진실함, 간결하고 힘찬 느낌, 조용하고 신중한 몸가짐으로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다.
특별히 깊고 그윽한 분위기를 더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선암사, 화암사, 영선암 등으로 발길을 잡는 것도 좋을 것이다. 조계산에 안겨 있는 선암사는 전국의 대사찰 중에서 가장 옛 사찰다운 느낌을 잘 간직한 고찰이다. 산에 파묻힌 선승들처럼 아주 조용하고 명상적인 느낌으로 발길을 끈다. 편안하고 깊고 경견하다. 그곳은 간결하고 담백함이 뿜는 힘과 더불어 사찰의 각 건물이 총체성 안에서 개별적인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덕목을 갖추고 있다.
영선암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 있는 봉정사에 딸린 암자이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촬영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 암자는 맑게 정제된 분위기와 청량감을 간직하고 있다. 옛 건축에서 현대 도시 건축과 다른 청량감을 느끼는 이유는 자연의 힘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균형, 자연과 맺고 있는 깊고 그윽한 정서를 향유하고 있다. 빈 아랫마당에 면해 놓인 툇마루에 조용히 앉아 있으면 맑고 정갈한 분위기와 함께 자연의 힘을 응축해서 고이게 하는 것 같은 미묘함이 느껴진다고 한다. 영선암의 건물과 마당, 계단 등의 배치가 외부와 끊임없는 호흡이 일어나고 숨결이 유지되도록 인위의 힘이 자연스럽게 가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선암은 건축의 질서틀 안에서 조용히 햇살이 닿아 생기는 갖가지 정감있는 표정, 사물 본연의 생명력과 숭고함, 맑고 순수한 느낌이 함께 한다.
저자는 현실을 벗어나 어려움을 자초함으로써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끼는 역설을 ‘은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 은자의 경지를 구현한 아름다운 건축물로 소개한 곳이 ‘소쇄원’과 ‘독락당’이다. 소쇄공 양산보가 20대 시절부터 은둔하며 이루어 놓은 소쇄원은 한국 정원의 멋이 최고로 구현된 곳이라고 한다. 봉을 기다리는 집(손님 영접) 대봉대, 우정을 나누는 사랑채 광풍각, 주인이 머무르는 영역 제월당 등 세 개 건물이 중심 영역에 있다. 이런 건축물들이 주변 정서와 매우 민감하게 결합이 되어 본래 자연보다 더 격조 높은 미감을 표출한다. 인위의 힘이 존재하면서도 드러나지 않고 자연스러움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 소쇄원 최고의 덕목이다.
조선 시대 동방 5현으로 불린 회재 이언적이 벼슬에서 물러나 다시 등용될 때까지 7년 동안 머물렀던 ‘독락당’도 뛰어나 선비의 건축적 안목이 잘 나타난다. 권력에 의해 왜곡된 자아를 스스로 치유하는 가장 좋은 수단은 얻은 것을 버리는 일이다. 그래서 이언적은 파직되어 돌아와 독락당 건물을 증축할 때 건물 배치에 은둔의 의사를 반영한다. 낮은 수평성, 은밀한 미로 구성, 자연과의 극적인 만남이 고려되어 있다. 그래서 독락당에는 미로를 따라 나아가는 동선상 공간적 여백과 분위기 반전이 있다. 미로의 끝에는 ‘계정’이라는 정자가 골짜기 옆에 자리하고 있다. 그 끝에 열려진 풍경은 평이한 자연이다. 그러나 그처럼 평이한 장면을 극적으로 느껴지게 한 것이 중요하다. 건축의 형태는 하나의 양식을 보여줄 뿐이며, 배치에 의한 외부 공간의 구성이야 말로 진정으로 의지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먼 곳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궁궐도 또한 훌륭한 정취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저자가 소개한 ‘창덕궁’은 궁궐의 건축적 기품과 함께 자연 정취가 어우러진 곳이다. 한때 일제에 의해 ‘비원’이라고도 불려졌던 창덕궁 후원은 소쇄원과 함께 한국 정원을 대표하기도 한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엄격한 법식에 치우쳤다면 창덕궁은 이궁으로서 비교적 자연스러운 지형과 건축적 사고가 반영되어 그런 후원이 나올 수 있었다.
숭고한 정신세계는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오히려 더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있다. 그 깊고 맑은 정신과 그것을 담는 건강한 육체는 자연과의 균형과 생명력에서 나온다. 그리고 우리네 전통건축은 ‘지음’에서 비롯되는 힘과 ‘자연’과의 교감에 의한 힘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것이 한국 전통건축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지은이는 말하고 있다. 우리가 전통건축이라는 대상을 찾아 무엇인가를 느껴보려고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깊은 산 속 넉넉한 품에 안긴 샘물에서 청량한 물 한 모금을 맛보는 그런 느낌. 그런 지은이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도 맑고 그윽한 눈이 되는 자신을 느낄 것이다.
-
김석환
안녕하세요? 선생님도 제가 쓴 곳들을 매우 좋아하시나 봅니다. 때때로 다시 찾아보아도 좋았습니다. 마음 평안히, 기회 되시는데로 좋은 느낌과 만나시기 바랍니다.
14 년전 -
서경삼
이 책 속 여행을 아직 다 하지 못하였습니다. 서서히 다 하겠습니다.
14 년전
게시물수정
게시물 수정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삭제게시물삭제
게시물 삭제를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