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2009춘천마라톤풀코스첫완주기
어제 답사에서 하루 종일 걷고 나니 다리가 아팠다. 행사 진행을 맡게 되어 오늘 완주를 위해 무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식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그리 되고 보니 더 신경이 쓰였다. 더욱이 춘천까지 가려면 새벽에 집을 나서야 했다.
맞춰 논 시계의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나면서 다리가 괜찮은지 움직여 보았다. 자고 일어나면 풀리겠지 하고 잤는데 다 풀리지가 않아 마음이 무거웠다. 처음 하는 풀코스에 몸 상태까지 좋지 않으니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더욱이 지난 9월 13일 철원 dmz마라톤에서 하프를 뛴 이후 한 번도 뛰지 못한 것도 걱정이었다. 평소 체력 단련의 기회가 된 산마저 자주 가지 못했는데, 염려가 되어 지난주 일요일 오후에는 북한산 비봉을 한번 다녀왔었다.
내가 이 대회에 참가할 생각을 가진 것은 지난 6월 처음으로 10km와 하프를 달리고 난 후이다. 내가 불과 일주일 만에 예상 밖의 기록으로 두 코스에 완주를 하자 동료 회원이 댓글에 “춘마의 전설을 쓸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그 때 나는 풀코스를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춘마의 전설’이라는 말이 뇌리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접수를 시작한 때 신청을 해 두었다.
신청을 하면서 홈페이지를 들러 보니 여러 가지 참고할 만한 글들이 있었다. 대회를 준비하는데 필요한 훈련 스케줄 등 조언도 있었다. 그리고 호반과 단풍이 어우러져 환상적으로 느껴지는 사진이 이 대회의 분위기를 즐겁게 상상케 했다. 그러나 그동안 바삐 지나오면서 연습을 하지 못해 염려가 되었다. 철원 마라톤을 달리고 난 후에도 이 대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의식하며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 했지만 실천을 하지 못한 채 어느 덧 대회 날을 맞게 되었다.
덕수궁 앞에서 6시 5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미리 예약을 한 터라 그 차에 오르니 안심하고 행사에 참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는 동안 잠을 자다 깨어보니 춘천 행사장 입구에 닿아 있었다. 하지만 진입 차량이 늘어서 있어서 천천히 움직였다. 차가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지 운전기사가 차를 세우고 내리라고 했다. 내려서 경기장을 향해 걸었다. 길가에서 참가자들에게 파워젤을 팔고 있었다. 먹어본 적은 없는데 에너지 보충을 위해 이런 음식을 섭취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 동호회원들도 참가하지만 캠프가 없어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진압방향에서 경기장을 들어갔다가 탈의실이 바깥에 있어 다시 밖으로 나가 그리로 갔다. 그리고 짐을 맡기다 김치중 부회장을 만나고 조금 걸어나오다 정철수 건축사도 만났다. 경험이 많은 김치중 부회장이 풀코스를 뛰려면 조금이라도 미리 뛰어야 한다고 해서 몸을 풀고 언덕 위 보조 트랙을 한 바퀴 돈 다음 사회자가 경가장안에서 함께 준비 운동을 한다는 안내 방송을 하여 경기장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운동장 안으로 들어서니 참가자들이 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번 대회의 본부로서, 대회에 맞춰 완공된 춘천송암스포츠타운의 주 경기장은 주변 산세에 안기듯 되어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운동장에는 초록색 인공 잔디가 깔려 있고 스텐드 좌석에는 이 대회의 명칭 및 로고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는 경비행기가 날고 있어 축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 사이 사회자가 리듬에 맞춰 준비 운동을 하자고 했다. 치어걸들의 유연한 동작이 경기장에 설치된 스크린에 비춰 보였지만 따라하는 사람들의 동작은 그렇게 우아하게 되지 않았다.
춘천마라톤 대회는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다음해인 1946년 창설되었는데 참가 규모와 그러한 역사적 전통에 의해 세계 8대 메이저 대회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그 명성에 걸맞게 신윤복, 김원탁, 김재룡, 김완기, 황영조, 이봉주 등 한국 마라톤 역사에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 이 대회에 출전한 기록을 갖고 있다. 이 대회는 그러한 역사와 낭만적인 코스의 매력이 더해져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 모두가 한번쯤 꼭 참가하고 싶어하며 ‘춘마의 전설’ 이라는 말이 생겨난 듯했다.
전광판 시계를 보니 출발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다시 사회자가 일반참가자들에게 기록별로 구분한 출발 그룹을 찾아 대기하도록 예기했는데 나는 기록 미보유 그룹인 K그룹에 속하여 위치를 찾아갔다. 대회 시작 시간인 10시가 가까워지자 사회자가 출발해 나가는 남문 통로에 있는 분들에게 선수들의 주로를 확보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카운트를 하고 초청한 에이스 선수들이 출발했다. 그리고 경기장에 설치된 커다란 전광판에 그들이 달리는 모습이 나타나 있었는데 마치 중거리 선수들처럼 빠르고 힘찬 모습이었다.
그들이 출발한 후 조금 시간 간격을 두고 일반 일반참가자 가운데 A그룹 선수들이 출발했다. 다시 시간 간격을 두는 동안 사회자가 앞뒤에 선 참가자들에게 서로 어께를 주물러주라고 하자 내 앞뒤에 계신 분들이 시원하게 해 주었다. 앞에 게시던 분이 뒤 돌아서 전문가라고 하면서 잘 해 주었다. 그러고 나니 정말 어께가 시원했다.
그룹별 참가자들은 앞 순번이 출발하는데로 빈자리를 메꾸듯 차례로 트랙을 따라 돌면서 출발 지점으로 이동해 대기하다 출발했다. 이동하면서 안마해 주신 분이 예기를 들으니 장애인 올림픽 성화 봉송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요새는 무릎이 좋지 않아서 조심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처음이라 긴장이 된다고 하니 정 힘들면 중간에 포기하라고 했다. 억지로 하다 몸을 상해서 아예 더 할 수 없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현명한 판단이라고 했다.
앞에 있던 그룹이 출발선으로 이동한 후 신호에 따라 출발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내가 속한 K그룹 출발 차례가 되어 출발선으로 이동했다. 긴장을 늦추기 위해 잘 모르는 옆 사람들과 간단한 말을 주고받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역시 풀코스의 중압감이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지만 전에 동료가 “코스가 환상적이어서 힘든줄 모르고 즐겁게 달리게 된다.” 한 말을 되뇌이며 생각한 만큼의 고생을 덜하며 마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도 가져 보았다.
그런데 많은 그룹이 차례로 출발하다 보니 마음 한편으론 오히려 기다려지는 상황이었다. 앞에 대기하던 J 그룹이 출발하고 나자 시간이 지체되고 있는지 사회자가 우리 그룹은 잠시 후 바로 셋부터 세고 출발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바로 셋을 세었다.
출발 신호에 따라 난생 처음 해보는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감내해야 할 대장정에 나서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다시 숙연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앞에 경기장 남문을 빠져 나가는 동안 참가자들을 응원하러 온 가족과 친지들이 달리는 이들의 그러한 심정을 위로하려는 듯 주변에서 이름을 부르며 “파이팅”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남문을 나가니 시야가 트여졌다. 넓직한 신작로 같은 내림길에서 참가자들이 어께가 부딧힐만큼 엉기듯 가면서 각자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풀코스라 그런지 하프 때 주자들이 뛸 때보다 속도를 늦추어 달리고 있었다. 나도 천천히 뛰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어 나갔다. 그래도 더 천천히 달리는 사람들이 있어 조금씩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 앞이 막혀 이리 저리 피해가기도 했다.
내림길을 다 내려가니 길이 좌측으로 꼬부라지고 다시 오름길이 되었다. 거기서는 오름길이라 모두가 더 천천히 달렸다. 올라갔다 U턴해 내려오다 보니 3km 구간 표시가 보였다. 그 곳을 지나 좌측으로 달렸다. 달리고 있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이희철 회장이었다.
달리던 길에 언덕을 넘으니 강이 보였다. 그리고 춘천 마라톤 대회의 상징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던 호반과 단풍이 어우러진 특유의 경치가 보였다. 오름길 고개를 넘어 좌측으로 돌아가는데 앞에 보이는 터널 같은 곳에서 그 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와” 하고 지르는 함성이 들렸다. 내 주변에서 달리는 사람들도 그 곳을 지나는 동안 앞 사람들을 따라서 함성을 질렀다. 힘든 일에 임하며 각자 자신의 의지를 북돋우려는 심정에서 그런 행동이 나오는 것 같았다.
내림길 끝 지점에서 우측 다리를 건너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막 다리로 진입하는 곳에 5km 구간 표지가 설치되어 있었다. 바닥 매트에 칩 감지 장치가 되어 있는 듯 여러 사람이 그것을 밟고 지나는 동안 감지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연속음으로 들렸다. 그러나 이제 초반이어서 앞으로 남은 거리를 생각하니 까마득했다. 지나온 8배가 넘는 거리를 달려야 한다. 지금이야 힘이 있으니 천천히 달리는 것이 힘든 줄 모르지만 나중에는 몸의 에너지가 고갈된 상황을 이기며 달려야 할 것 같았다.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꺽어 접어드니 좌측 산자락과 호반 풍경이 잘 어울려 보였다.
이 지역의 산세는 산이 크면서도 마침내 뻗지 못하고 강에 가로막혀 단맥이 된다. 그 안에 들어서고 나면 지맥기문둔갑술을 펼쳐 놓은 것처럼 갈래를 찾기 어렵다. 그리고 뻗치지 못한 지맥이 물길과 치렁하게 얽혀 있다. 산과 산, 물과 물이 답하다 서로 메아리친다. 그처럼 산수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풍경을 대하니 기분도 상쾌해서, 초반의 지치지 않은 가운데 즐기듯 달릴 수 있었다. 주위에서는 동호회원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달리는 모습도 보였다.
우측 건너에 출발한 경기장이 보였다. 그 곳으로부터 돌아온 거리도 벌써 멀리 느껴졌다. 앞쪽으로 보니 호반의 수면이 펼쳐 보였다. 그리고 그 호수 주변의 끝자락이 보였다. 이번 대회 코스는 그 바라보이는 호수를 돌게 되어 잇는데 위쪽으로는 아득해서 거리를 다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포기 하지 않는 한 그 모든 거리를 다 감당해야 한다. 초반이라 아직은 힘이 있었지만 얼마나 큰 고통스러운 순간이 찾아 들지 알 수 없었다.
계속해서 강변을 달려 10km 지점을 지났다. 그 곳에서도 칩 감지를 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5km마다 놓여 있을 것 같았다. 달리는 주변은 여전히 호반 정취가 베어났다. 사람들도 모두 컨디션이 좋은 모습이었다. 주로에서 그룹으로 참가한 사람들은 보조를 맞추며 서로의 컨디션을 살피기도 했다 거리가 늘어갈수록 사람들의 점차 말수가 적어지고 자세도 차분해지는 듯 했다.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보조를 맞춰 달리고 있었다. 더러는 속도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조금 빠르게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를 달리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목표를 갖고 완주의 고통을 함께 할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와 아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내가 힘든 만큼 함께 견디는 사람들이 같이 뛰고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었다. 이런 대회에 참가자끼리는 결코 경쟁이 아닌 진정으로 서로서로 완주하도록 위로해줄 동료들이었다. 달리면서 그런 사람들의 호흡을 함께 느끼는 것이 편하게 여겨졌다.
12.5km 지점을 지나는 곳에 물을 축일 수 있는 스펀지가 놓여 있었지만 그냥 지났다. 아직 목이 마르거나 열이 많이 나는 상태는 아니었다. 가급적 그런 것에 덜 의존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가다가 좌측으로 연결된 하천을 건너는 작은 다리를 지나 우측으로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달리는 구간에서 그처럼 오르막길이 나타나면 부담스럽게 된다.
한동안 오름길을 지나 평평한 구간에 접어들며 좌측으로 길의 흐름이 휘어졌다. 그리고 다시 우측으로 호반이 펼쳐 보였다. 그리고 주변 산에 단풍이 들어 가을 정취를 자아냈다. 하지만 의암댐 근처보다 수면의 복이 좁아져 있었다. 다시 앞으로 코스가 멀리 가늠되어 보였다. 앞으로 멀리 펼쳐진 호반 주위 언덕으로 지나는 것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저렇게 긴 거리를 달린다는 것이 무모한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되기도 했다.
호반을 내려다보며 달려가는데 뒤에서 “이름이 같으시네요” 하는 말이 들렸다. 나를 아는 사람인 것 같아 뒤돌아보니 처음 보는 분이 자기도 이름이 같다면서 인사를 건넸다. 나도 반가워 어디 사시느냐고 하니 양천구에 산다고 했다. 내가 그 곳에 동사무소를 도서관으로 리모델링 한 것이 있어 더 인연처럼 생각되었다. 반갑다고 인사를 하니 앞서 가라고 했다.
우측으로 호반풍경이 보이는 길을 한동안 달렸다. 호반 너머로 강 건너 풍경이 보였다. 강 가에 숙박 시설 등이 보였다. 그리고 송암 경기장이 점차 뒤로 보였다. 계속해서 평평한 길을 달리다 보니 도로 좌측으로 높은 가설 흙막이 벽이 보였다. 그 곳을 지나 약간 내리막길을 지나니 좌측으로 건물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로부터 점차 강변으로부터 멀어져 마을과 논밭 사이의 길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을 가운데를 지나는 길로 들어서니 주민들이 길가로 나와 응원을 해 주었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 13km 지점에 다다르니 학생으로 구성된 치어걸들이 열심히 응원을 하고 있었다.
14km 지점에서 언덕 오름길을 지나자 다시 내림 길이 되었다. 주변에는 평화스런 시골 마을 풍경이 펼쳐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15km를 지점이 보였다. 그 곳에 다가서자 다시 바닥에 감지 칩이 작동하고 있었다. 통상적인 생각으로는 그 곳까지 적지 않은 거리를 지났지만 여전히 긴 구간의 부담을 갖고 달리고 있었다. 아직 하프 지점까지 거리가 많이 남아 있었다. 어서 하프 지점이라도 지났으면 하는 바램이 생겼다. 하프는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그 만이라도 지나면 다시 하프를 출발할 때 심정과 내가 달려본 경험으로 가리를 가늠하며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나의 체력을 다 쏟아 붓는다는 생각으로 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16km 지점을 지났다. 이제 하프가 5km 정도 남았다. 하지만 아직은 반도 지나지 않아서 전체 거리를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 할 수 없었고 불안감도 떨칠 수 없었다. 단지 매 순간을 충실히 하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17.5km를 지났다. 지난번 철원 대회에서 가장 힘들게 느껴지던 지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처럼 고통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프 뛸 때는 힘 든 거리였는데 아마도 더 먼 거리를 임하는 가운데 내 몸 스스로 체력 안배를 하게 되었는지 그런대로 달릴만했다. 그 곳을 지나며 물에 젓은 스펀지 하나를 집고 목과 다리에 적시자 조금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달리다 보니 점차 배가 고파왔다.
그 마을 부근을 지나는 동안에도 그 곳에 사는 주민들이 나와 응원을 해 주었다. 그 마을 안쪽을 달리다 밖으로 시선이 트여 나가는 곳에 이르니 추수하다 만 논에 누렇게 익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점차 강변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19km 지점부터 다시 강변길을 달리게 되었다. 다행히 아직 몸에 큰 무리가 오지는 않았다.
20km에 이르니 초코파이를 나누어 주었다. 달리다 간식을 먹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마치 들에서 일을 하다 새참을 먹는 기분이었다. 기왕에 먹는 동안 쉴 요량으로 털썩 주저앉아 먹고 일어서 길에 나열된 탁자위에 따라 놓은 음료수를 먹었다. 달리다가 오래 지체하면 더 힘들어 진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달리려니 팍팍했다. 하지만 느리게라도 달려야 다시 콘디션이 회복될 것이라 생각하면서 달렸다.
조금 가다 보니 오른 쪽에 하프 지점을 알리는 표지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으로 그 지점을 지나는 동안 여러 사람의 칩 감지 소리가 요란했다. 그 곳까지가 내가 지금까지 달리기를 경험한 전부였다. 이제 새로운 경험에 접어들게 되었다. 남은 거리가 많았다. 같은 거리지만 이제까지 힘을 쏟아서 지쳐 있었다. 이제부터 달리는 거리는 정말 온 몸의 힘을 다 쏟아 이겨내야 하는 구간이었다.
앞으로 계속 달리다 보니 우측으로 건너편 코스가 보였다. 앞에 저만치 보이는 춘천댐을 돌아 반대편 길로 접어들게 되어 있었다. 점차 힘이 들어 속도가 더뎌지기 시작했다. 그 부근에서 한 사람이 “건축사시냐”고 말을 건네며 지나갔다. 반갑게 돌아보니 부산에서 왔다고 했다. 나도 반갑게 인사를 하고 앞서 가시라고 했다. 우측으로 강을 건너 보이는 터널 같은 곳에서도 함성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다들 힘이 부치는지 5km 전에 지났던 곳에서 내 지르던 소리보다 작았다.
춘천댐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곳으로 다가가는 길이 오름길이라 힘이 들었다. 멀리 바라보니 댐 위를 지나 U턴해 가는 곳도 오름길이었다. 점차 힘이 빠지는 상황에서 그 런 곳을 지나게 된 것이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오름길이 있으면 내림길도 있는 법이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마음을 편하게 가지려 했다.
댐에 이르자 그 곳에 안내를 하던 사람이 이제 18km 밖에 남지 않았다고 격려해 주었다. 확실히 전체 구간의 반을 지나고 남은 거리가 더 적었다. 하지만 몸이 지친 상태에서 이제부터 정말 견뎌낼지 장담 할 수 없는 힘겨운 레이스가 시작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춘천댐 위로 강을 건너며 양측을 번갈아 보니 아름다운 경치를 띠고 있었다. 그 부근을 보니 올 봄 용화산에 왔을 때 운전기사가 이 곳에서 조금 헤메느라 왔다갔다 한 것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내가 달리고 있는 이 길도 전혀 낯선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전에도 춘천을 아름다운 곳으로 생각해서 관광차 더러 들렀었다. 소양강 댐을 두어번 다녀갔고 인근의 청평사에 답사를 오기도 했었다. 재작년 오봉산에 왔을 때는 손가락을 뱀에 물려 119 구급대의 구조로 배를 타고 소양호를 거슬러 내려오기도 했었다.
댐을 건너 우측으로 꺽어지며 오름길을 달렸다. 그 오름길에서 겨우 발걸음을 옮기듯 뛰고 있었다. 나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지친 모습이었다. 걷고 싶었지만 멈춰 걸으면 신체적 흐름을 잃기 쉽다는 말이 생각나 아주 천천히 달렸다. 하지만 오름길을 오르고 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다시 굽은 내리막길이 되었다. 그 내림길이 편안하게 느껴져 속도를 내어 달리다 25km 지점에 도달했다.
그 곳에 다시 식수대와 스펀지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물을 마시고 다시 주로에 나서니 주변에 페이스메이커들이 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든 풍선의 글씨를 보니 거기까지는 생각보다 잘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27.5km 지점을 지나는 동안에도 힘을 내어 달렸다. 그러나 서서히 무리가 왔다. 가로시설에 1km마다 설치한 거리 표식도 더 멀게 느껴졌다. 정말 힘이 들어서 어서 30km를 지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단한 몸을 이끌듯 가다 30km를 지났다. 거리를 나타내는 앞 단위 숫자가 바뀐 것이 조금 위안이 되었지만 다라가 붓듯이 뻐근해지고 통증이 왔다.
그 곳으로부터 지나는 길도 점차 더 지루하게 느껴졌다. 좀체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 것 같았다. 억지로 점차 발을 떼기가 고통스런 상황을 견디며 달리는 동안 겨우 숫자가 1km씩 더해지고 있었다.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은 풀코스에서 마의 33km 라는 말을 많이 한다. 풀코스를 달리는 동안 그 거리에서 탄수화물 에너지가 거의 다 고갈되는데, 그 다음부터는 지방에너지까지 다 쓰게 되고, 나머지는 제 근육의 에너지를 깍아 먹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기진맥진되어 정신까지 몽롱해져서 제 의식으로 달리게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처음으로 그 구간에 이르게 된 것이 걱정스러웠지만 한편으론 빨리 그 구간을 벗어나길 바랐다. 그렇게 33km를 견디고 나면 10km가 채 남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는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견디는 자세로 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힘이 든 만큼 거리가 줄지 않았다.
시대 구간에 접어들자 도로가 앞으로 죽 이어져 있고 밋밋하여 구간 거리가 줄어드는 느낌이 없고 풍경은 건조하여 더 팍팍하게 느껴졌다. 달리는 구간은 넓은 도로에서 주로의 차선만 차를 통제하고 나머지 좌측 차선으로 차가 달리고 있어 호반 옆을 달라던 분위기와 달리 팍팍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우측 인도에서 시민들이 응원해주는 것이 힘이 되었다. 그들의 응원에 보답하기 위해 잘 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특별히 의식하던 33km 지점을 지났다.
달리다 보니 앞에 소양2교가 보였다. 철 구조물로 된 그 풍경도 삭막하게 보였지만 그런 이정표라도 나타난 것이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색다른 이정표를 지나면서 기분을 전환하고 조금이라도 거리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되길 바라며 그 위를 지났다.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꺽어들었다. 시내 구간에서 벗어나는 듯 했지만 조금 한산 할 뿐 여전히 간선 도로의 건조한 풍경이었다. 그 곳을 지나기 전부터 페이스메이커 옆에서 달리게 되었다. 힘겹게 지나고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조금 기운이 회복 된 듯, 조금 더 힘 있게 달리게 될 때도 있었다. 그리고 페이스메이커보다 더 빨리 달리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페이스메이커와 보조를 맞추려다보면 같은 속도로 달리더라도 더 힘들게 느껴졌다.
35km 지점에서 급수대가 놓여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물을 마시고 스펀지의 물을 축였다. 목이 마르거나 하지 않아도 그리해서 스스로 기분을 전환하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앞을 지나는 동안 잠시 걸으며 기운을 회복 하려는 것 같았다. 나도 잠시 멈춰 물을 마시고 스펀지 물을 축였다. 하지만 춘천 마라톤 안내에서, 멈춰서면 다시는 뛰지 못한다는 말을 생각하고 다시 뛰었다. 그 곳을 지나며 마의 구간을 지나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녹아내릴 듯 했지만 그래도 아직 견디고 있다는 생각에 안도를 하며 달렸다. 그러나 앞으로 콘디숀이 어떻게 변할지 긴장을 하였다.
그 구간에서도 내가 속한 K그룹 4시간 20분 페이스메이커를 의식하며 함께 달렸다. 그러나 점차 허벅지에 통증이 느껴져서 계속해서 보조를 맞춰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가다가 도저히 견디기 어려워 페이스메이커를 놓아 주었다. 그리고 잠시 멈춰 근육을 풀고 다시 달렸다. 역시 멈춰서다 보니 더 힘이 들었다. 하지만 억지로 뛰어가다보니 조금 몸이 풀렸다. 그리고 잠시 후 37.5km 지점에 도달해 그 곳에 비치된 스펀지로 물기를 축이고 자원 봉사를 하고 있는 여학생들이 컵에 담아주는 방울토마토를 먹으며 기운을 가다듬었다.
그처럼 군데군데 급수대 등이 설치된 곳마다 여학생들이 달리는 주자들을 염려하며 정성스레 챙겨주고 응원하는 것이 너무도 고맙게 느껴졌다. 그래서 먼 거리를 달리는 동안 그처럼 주로상에 일정간격으로 놓인 급수 대 등이 나타나면 마실 것 뿐 아니라 따뜻한 마음으로 위로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다시 그 곳을 지나 평평한 도로를 달렸다. 길 가에서 간간히 동호회 동료나 가족등을 마중하며 별도의 음료수 등을 먹이면서 지친 참가자를 응원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런데 그 분위기가 초반의 명랑함과 달리 어떤 절박함의 교감속에 위로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나도 지친나머지 어느 순간부터인가 도로가에서 열심히 응원해주는 응원단이나 고적대의 감사함마저 희미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저만치 앞에 보이던 오르막길을 오르고 나니 우측으로 꺽어 내리막의 좁은 도로를 지나가게 되었다. 힘든 상태였지만 그 내림길에서 조금 편안함을 느끼며 38km를 지났다. 이제 십리만 달리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십리도 너무 멀게 느껴져서 다시 2km 정도로 나누어 견뎌 보려고 했다. 2km를 견디고 나서 새로운 기분으로 마지막 2km를 견디면 완주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스스로 그러한 이야기를 만들고 위로를 삼으며 달리지 않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강변에 가까운 듯 음식점 간판이 많지만 여전히 건물들 사이로 길을 지나는 구간이었다. 그래도 거기서는 내림길이어서 조금 편하게 달릴 수 있었다. 그 길을 가는 동안 점차 강변으로 다가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40km 지점을 지났다. 1km가 멀고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 언덕 오르막길이 나왔다. 그리고 그 부근에 41km 구간 표시가 보였다. 이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기를 쓰면 완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지나다 보니 반대편에서 언덕을 넘어 걸어오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무심코 응원나온 사람들 인 줄 알았는데 목에 메달 하나씩을 걸고 있는 것을 보니 먼저 완주하여 집으로 행하는 사람들 같았다. 나도 조금만 견디고 나면 그 메달을 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들이 부럽고 대단하게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내었다.
언덕길을 오르고 나자 스타디움이 보였다. 내림길이고 골인점이 앞이어서 이제 정말로 완주의 순간이 바로 앞에 다가온 듯 했다. 거기서 경기장 입구로 다가가니 입구 옆에 서 있던 사람이 “이제 정말 500m 남았다”고 했다. 하지만 입구로 직진하면 100m 도 채 안남은 것 같은데 아직 그렇게나 남았나 하고 다소 실망스럽게 들렸다. 경기장을 돌아 들어가는 주로 양 옆으로 울타리를 쳐 놓았는데 관중들이 그 울타리를 에워싸고 들어오는 주자들 가운데 아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문득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나를 부르는 소리처럼 들려 바라보기도 했다. 누구도 거기서 포기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에 아는 사람과 눈인사라도 나누게 되면 완주의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될 것 같았다.
출발 때 나섰던 경기장 남문을 들어섰다. 출발 때는 지금 들어서는 방향으로 달려 나가게 길이 트여 있었는데 지금은 장애물처럼 막혀 있고 경기장 트랙을 돌아 골인하게 되어 있었다. 주자들이 달리는 방향을 따라 마치 트랙 경기를 하듯 따라 달렸다. 한바퀴 도는 거리는 부담이었지만 경기장 바닥이 신발에 잘 밀착 되는 느낌이어서 도로를 달릴 때보다 디디는 감촉이 좋았다. 그 곳을 지나며 마음을 차분히 하고, 마지막 힘을 내어 몇 사람을 추월하기도 하며 골인 지점으로 들아 들었다.
마침내 골인 지점이 바로 앞에 보였다. 이제 완주의 불안감은 다 사라지고 없었다. 몇 미터 앞에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내 모습이 촬영되든 아니던 나름대로 주자로서의 자세를 바로 갖추며 골인선으로 다가들어 테이프를 끊듯 두 팔을 벌리고 골인했다. 그리고 완주 기록을 측정하는 칩 감지기의 소리를 확인하고 조금 더 가다 달리기를 멈추었다. 그 순간 만감이 교차되었다. 내가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해낸 사실이 미처 실감나지 않을 만큼 어렵게 생각했던 일을 마친 것이 감격스러웠다. 아침에 제대로 마칠 수 있을지 불안한 마음으로 출발했다가 완주를 하고 출발선에 다시 들어선 것이다.
질서 유지를 위해 참가자들이 나가는 통로 옆으로 울타리가 쳐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나가는 사이 나눠 주는 완주 메달을 받았다. 그 메달은 바로 내가 제대로 마친 것을 인정해 주는 징표였다. 그래서 받은 매달을 앞뒤로 요모조모 보면서 완주의 감회를 느꼈다.
그 때 순간적으로 그리스 마라톤 평원을 달렸던 병사의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을 한시 바삐 전하려고 마라톤 평원을 달려 소식을 전한 후 절명했다. 그런데 그 사건을 계기로 창설된 수많은 마라톤 대회에서는 오늘 내가 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너무 쉽게(?) 완주를 해 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 날의 그런 상황을 생각하면서 한편으론 마라톤의 기원이 된 마라톤 병사의 숭고함이 희석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들었다. 그 죽음으로 결말을 맞은 인간 한계의 일이 너무 평이하게 여겨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마라톤 행사를 되돌아보면 달리는 신발, 주로에서의 목마름을 해결 하기위해 준비하는 물 등 기타 여러 가지 준비들, 그리고 과학적으로 검토된 지식 덕분에 많은 사람이 마음 놓고 달릴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아무 준비 없이 무장한 생태로 달렸을 마라톤 병사의 결의가 여전히 숭고하게 의식되었다.
달리기를 마치고 나니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발걸음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아서 엉기적거리며 경기장 뒤를 돌아 가 칩을 반납한 후 물품을 찾고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탈의실을 나오다 김준식 건축사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아침에 김치중, 정철수 건축사와는 대회를 마치고 그 부근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버스 타는 곳으로 이동하다 우연히 김치중, 정철수 건축사를 다시 만났다. 하지만 그 외의 회원들을 다 만나기는 무리 같았다.
넷이서 간단한 요기라도 하고 헤어질 생각으로 주차장 옆 포장마차로 가서 잔치국수와 순대 그리고 소주 한 병을 시켜 나눠 마시며 완주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모두 좋은 기록으로 마친 것 같았다. 그 사이 대회 주최측으로부터 기록 메시지가 와서 확인하니 4시간 34분 35초였다.
올 때 각자 다른 버스를 타고 와서 갈 때도 그 교통편을 이용하기 위해 헤어졌다. 나도 타고 온 방향의 버스에 올라타고 4시 32분 서울로 출발했다. 차가 대회 코스의 시작 구간인 의암댐을 지나고 있어서 다시 달렸던 의암호 주변 주로를 바라보았다. 아침에 서울에서 이곳으로 올 때 걱정 했던 심정과 달리 풀코스를 완주했다는 사실에 마냥 뿌듯한 기분이었다.
(09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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