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기존 삶터의 망실을 앞에 둔 삼송 신도시 건설 지역을 돌아보고...
1. 삼송지역 마을의 전통적 삶터로서의 막내림
토지 개발공사에서 추진하는 삼송 신도시 건설 지역의 기존 마을 주빈들은 현재 기존 가옥의 철거를 앞두고 속속 집을 비우고 떠나고 있다. 신문지상에서 여기 저기 신도시 건설 소식을 듣게 되지만 그때마다 그냥 남의 일로 스쳐 지나치기 일수이다. 그런데 고향으로서 오랫동안 살아오던 집을 비우고 떠나 폐가로 변한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니 한꺼번에 휩쓸려가는 재난 앞에 선 느낌이 들었다. 와 보지 않으면 세간의 소식을 접하는 것만으로 알기 어렵고, 다시 소식을 접하고야 내용을 지나서야 알게 된다. 관심이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퍽 야속한 기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지역은 그린벨트에 군사보호구역이다. 땅은 대부분 원주민들이 소유하고 있다. 민간 개발이라면 몇 단계를 거쳐야 하거나 아예 꿈도 꿀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부 산하 기관의 공공사업 성격을 들어 그 계획이 착착 실현되고 있다.
고양의 기존 마을들은 면면히 평온한 모습을 지녀 왔다. 이 지역을 둘러보면서 도드라짐 없이 검박하고 끈끈히 드러나지 않게 주어진 삶터에서 자족하며 살아온 체취가 느껴진다. 택리지에 “양주, 포천, 가평, 양평은 동교이고, 고양, 적성, 파주 교하는 서교인데 두 교(郊 서울에서 백리 이내)는 모두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빕맛 좋기로 소문난 일산 평야와 금촌 평야가 있지만 이 곳처럼 구릉지대에 있는 마을들은 구릉지대 사이에 형성된 밭 정도가 고작인 형평이어서 삶의 넉넉함을 누릴 형편은 아닌 상황이었다.
이 지역의 유명한 유적지로 화석정과 자운 서원이 있는데 화석정은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머물던 정자이고, 율곡 이이의 영정과 위페가 모셔진 자운서원은 기호학파의 본산이다. 그러나 그 인물들의 삶의 자취가 세거지(世居地로) 형성되어 있지는 않다. 황희 정승이 살던 인근 사람들은 그가 정승을 한 사람인 줄조차 몰랐었다고 한다. 그 정신이 전통으로 이어져 왔음인지 이 지역 사람들로부터 진실하고 정직한 심성이 느끼어진다. 그리고 면면이 이어온 삶터의 성격 자체가 가장 중요한 특성이자 문화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삶터의 애잔한 감회나 수습 없이 황패한 모습으로 버려진 채 진행되는 모습에서 개발 자체로서의 원시적 욕망만이 느껴지게 된다. 이 지역의 마을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문화재 발굴사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대부분 사업 추진 단계에서 보상이 이루어지고 이주의 시작과 함께 이루어져서 시기를 놓치고 일수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 영위되온 삶에 대한 참다운 기록마저 제대로 남겨지지 않고 망실될 처지가 된 상황이다.
2. 철거될 기존 가옥의 현황과 그 안에 담긴 건축적 의미
11월 초 개발 지역의 기존 가옥들을 돌아보았다. 독장골, 삼막골 등 삶터의 체취가가 느껴지는 마을에서 삶의 품이 된 집들은 마치 소풍길처럼 가을 정취가 풍기는 산자락 한 모퉁이에 의지에 있었다. 이미 이주가 시작되어 삶의 온전한 온기를 느끼기 어렵지만, 가옥들은 이 땅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면면히 살아온 체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집의 구조가 삶의 형편에 의해 조금씩 변모되어 온 모습이지만 천천히 살펴보면 그 구조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원형과 변형의 흔적으로부터 삶의 내력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터를 잡을 때 갖은 자연과의 어울림이라든지 집의 형편에 따른 가옥의 크기와 구조 그리고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룰 때 서로의 대한 배려의 심정 등도 느낄 수 있다. 또한 시대 상황의 변화에 의한 삶의 변화와 그에 따른 가옥 구조의 변천도 느낄 수 있다.
당초 구조는 농가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후 지붕 개량, 헛간 등에 방 들임, 수세식 변소와 주방 설비의 변화가 수용되어 있다. 농토가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 산업화 이후 농사일만으로 집안의 살림이 충족되기 어려운 형편에서 농사 대신 도시 일을 하게 되어 집의 구조적 변화가 필요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농사일 수확의 갈무리 헛간, 창고, 가축 시설 등이 사라지고, 거실과 주방의 설치, 수세식 화장실, 파이프온돌 장치가 된 방들이 시설 되었다. 외양간이나 땔감 그리고 농작물을 갈무리하던 헛간 등이 없어지고 방을 들여 세를 주기도 했다. 그리고 냉장고 등 보편적으로 쓰이게 된 살림 도구의 수용에 따른 가옥 구조 변화도 찾아볼 수 있다.
그처럼 삶의 양상과 함께 가옥 구조도 변모되어졌지만 바탕은 대부분 처음 지을 당시 농가집의 원래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가옥으로서 일관된 공간적 규준으로서 삶의 구조에 작용해 온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이 지역의 가옥들을 살펴보면서 그러한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전통 가옥의 원형적 구조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가옥의 형식이 삶의 내용을 한정하기도 하고 규정짓기도 한다.
1) 신중익 가옥
처음 찾아 간 집은 오금동 산막골의 신중익씨 집이다. 신중익씨는 내과박사 1호인데 별장으로 쓰기 위해 이 집을 구입했으나 지급은 살지 않고 세를 들여 놓았다. 이 집은 진입하면서 ㅡ자 집 한 채가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측면으로 돌아가 보면 건물이 안마당을 둘러싸며 빙 둘러쳐 있는데 측면폭도 정면 폭만큼이나 길어서 규모가 큰 집임을 알 수 있다.
안채는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의 구조로 되어 있고 바깥채는 대청간과 중문 방, 그리고 우측으로 헛간 부엌 광 등이 연결되며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이 집은 전체적으로 ㄱ자집 두 채가 대각선으로 대칭을 이루고 ㅁ지로 완전히 마당을 위요하고 있는 모습이다. 양동 마을 등에서 볼 수 있는ㅁ자 집은 대개 ㄷ자 집에 ㅡ자 집일 때가 많은데 그 중 ㄷ자로 된 채가 경사지에 놓이면서 중층 구조로 되는 경우가 많고 가옥 구조의 품격이 좀 더 높게 되어 있다. 여기처럼 ㄱ자집 두 채가 대각선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가옥을 맛고패 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경기 지역의 독특한 가옥 구조이다. 가옥 내에 찬바람을 막아 안온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농촌의 갈무리 작업이나 살림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이는 마당을 통해 가옥의 쓰임을 연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이 집은 대개 200년 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부재 굵기가 비교적 가늘어 검박한 느낌을 띠면서도 전체가 반듯한 전통가옥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집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품격이 느껴진다. 집의 측면에 무너진 상태로 있 담은 마당쪽으로 뻗쳐 있는데 그것은 바깥 채 앞마당을 두르고 그 담장에 바깥 대문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같은 구조로 미루어 볼 때 바깥채는 사랑채로 쓰였을 것 같다. 그리고 집 뒤 계곡에는 이 집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우물이 있다. 이 집에서 특히 눈에 띤 것은 바깥채 마당의 댓돌 앞에 놓인 석물이다. 돌 가운데가 파여 있고 그 전면에 바람을 불어 넣을 수 있게 만들어진 형상으로 보아, 그 위에 화로를 올려 놓고 불을 피운 것으로 짐작된다. 조각까지 되어 상당한 격이 느껴지는 그것에서 이 집을 지니고 산 주인의 삶의 모습이 엿보인다. 주변의 너른 농토가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 고장 출신의 사대부가 벼슬을 하고 물러난 후 말년에 거처한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 집은 이 지역에서 찾아보기 드물게 격이 느껴지는 반듯한 공간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한 가옥이 철거될 위기에 놓인 것이 안타깝게 여겨진다. 해당 지자체에서 계획이 진행 될 때 이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 보존 대상과 방안을 논의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게 느껴졌다.
2) 이중열 씨 집
그 다음 간 곳은 인근의 산막골 이중열씨 집이다. 이 집은 내부가 개조되어 가치를 인식하기 어렵다. 안채 건물의 일부는 건물 평면을 양옥 구조로 변경하면서 원래 마당 위치에 달아내 지은 것이다. 건물 내부가 깊어져 어두워진 상황이다. 다만 보와 기둥만이 빠끔이 보여 그 집의 구조적 원형을 인식 할 수 있다.
그 바깥 채 가옥은 처마에 서까래 등이 원형대로 남아 있다. 그 건물이 본채와 마주보고 있었던 상황이다. 이 집은 전통 가옥 구조가 변모된 상황이지만, 원래 이지역 가옥들에 적용된 전통적 건축 수법을 구사해 지어진 상황임을 확인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내부에서는 변형되어진 상태지만 밖에서 보면 바깥채와 함께 일정 규모를 확인 할 수 있으며 가옥으로서의 품격이 느껴진다.
3) 오금동 독정골 박재춘가
덕양구 오금동 59번지의 이 집이 있는 곳은 독쟁이 마을로 불린다. 이 마을 집입구에 “문화재 발굴지역 경작 절대금지”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이 마을은 입구로부터 계곡을 따라 안으로 들어간 위치에 놓여 있다.
이 집은 안쪽 채에 부엌과 안방 대청마루 등이 있고 바깥채에 외양간 헛간 등이 있는 전형적인 이 지역 농가 형태이다. 그리고 원래는 초가집이었는데 지붕 개량사업으로 스레트 지붕으로 되었다가 다시 기와 지붕으로 바뀐 상태인데 처마 와 대청의 천정 등에 가옥구조가 원형을 간직한 채 건강하게 드러나 보인다.
건물 뒤에는 신주를 모신 독이 놓여 있어 이 마을의 민속 신앙 등을 이해 할 수 있다. 그처럼 기존 마을의 집들은 가옥으로서 건축적 내용 구조 뿐 아니라 이 고장의 문화도 간직되어 있다.
4) 강태희 가옥
이 집은 오금동 122번지에 위치한다. 추석때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던 집이었는데 지금은 이사하고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안채는 구조가 조적조로 변한 상태이다. 벽까지 벽돌로 되어 있어 집 구조의 내력을 확인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나 대청 부분의 지붕이 지불 서까래 구조를 따라간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지붕을 그냥 두고 떠받치는 기둥과 벽체를 조적조로 다시 한 상태로 여겨진다. 이 집은 150년 정도 된 집이라고 하는데 가옥의 구조는 안채, 바깥채의 ㄱ집 두채가 안 마당을 사이에 두고 대칭적으로 놓여 있다. 기와가 걷힌 상태인데 기와를 잇기 위해 설치한 각재가 드러나 보이고 그 속에는 그 전에 이은 스레트가 보였다. 그 스레트를 잇기 전에는 초가지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와를 얹기 위해 각재를 다시 댄 것은 초가지붕일 때 고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가지런하게 기와를 얹기 어렵게 때문이다.
5) 변삼숙 할머니집
오금동 중촌 모탱이 마을의 변삼숙 할머니(90)집은 50년 전에 지은 집이다. 변삼숙 할머니(90)는 22세 시집와서 68년째 살고 있다. 그 할머니가 쓰시는 방에서 시집올 때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뒤주를 보여 주셨다.
이 집도 안채, 바깥채의 ㄱ집 두 채가 안 마당을 사이에 두고 대칭적으로 놓여 있는데 그것은 이 지역 집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구조의 모습이다. 안쪽채의 대청은 그대로인데 부엌 위치에는 현대식 주방이 꾸며져 있다. 그리고 헛간에는 방을 들여 세를 놓았고 외양간은 창고로 쓰이고 있다. 이전에 초가집이었는데 스레트 지붕으로 개량했다 다시 개량기와를 얹었다. 그 집에도 면면히 이어져 적용되온 전통 가옥 기술이 나타나 있다. 가옥의 격을 지니기보다 전통적으로 구사된 집 짓기 기술이었다. 그리고 그 것이 보편적인 가옥 구조의 성격을 지니게 했을 것이다.
6) 솔고개 너른 마당 식당
원흥동 솔개 마을의 솔고개 너른 마당 식당 집은 1948년 지은 집이다. 대청위로 노출되어 보이는 종도리에 ‘단기 4281년 무자년 2월, 17일 오시 입주’라고 기록된 상량문이 쓰여 있다. 이 집도 ㄱ자 집 두 채가 안 마당을 ㅁ지 형태로 둘러치고 있는데 건물의 측면 길이가 길어 입구에서 안마당이 좁고 길게 보인다.
이 집도 원래 초가집이었다고 하는데 서까래 등은 옛 부재이고 기둥 보 등은 새것으로 되어 있다. 이 집의 위치가 서삼능 입구인데 인근에 골프장이 있어 일찍이 별장지대화 되었다. 새마을 사업이 시행되던 시절 당시 대통령이 인근 골프장으로 골프를 치러 오던 지역이어서 제일먼저 새마을 사업이 시행되어 초가집이 스레트 집으로 변모되었고 그 후 지금처럼 다시 기와를 올렸다.
3. 기존 삶터의 망실과 신도시 건설의 괴리
들은 이사가고 삶의 체취가 널부러져 있다. 이제 새로 지을 건설의 사업성과에 대한 열망이 휘감고 있는 채 이 곳에서 오랜 새월동안 영위되온 삶은 망실되어가고 있다. 진정한 삶의 주인공이 떠나고 삶의 물갈이가 되게 된다. 그 현실을 떠올리면 사금파리 조각에 베이듯한 아픔이 느껴진다.
신도시 건설이 예정된 기존 마을을 돌아보는 동안 옛 마을들에는 사람이 자연과 만나 편안하고자 한 터 찾기의 생각들이 고스란히 화석처럼 존재해 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산막골, 가시골, 솔개 마을 독쟁이 마을 등 그 마을 이름으로부터 그 지역의 유래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 땅과 밀착되어 살아온 전통 마을은 현대 주거지와 달리 훨씬 다양한 삶의 이야기와 풍부한 문화적 인자들을 함축하고 있다. 신원동에는 궁중 생활을 마치고 나온 내시들의 거주지와 무덤 등이 있었다.
일사천리로 그림을 완성하려는 의지의 에너지의 거친 호흡 앞에서 착찹한 심정이 느껴지는 것은 억지로 삶터를 잃고 떠나는 이들에 대한 심정적 측은함 때문만이 아니다. 가치관의 인식적 차이로 인해 현재 인식하는 한쪽의 가치만을 지향함으로서 또 다른 가치를 상실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현재보다 비싸고 화려한 건물이 들어설지라도 고양 신도시 건설은 삶터의 실존성으로부터 괴리된 채 서 있게 된다. 비록 새로운 도시에 대한 커다란 꿈이 도사려 있을지라도 그리고 그 꿈이 현재보다 휠씬 가치 있는 것일지라도, 한 가족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널부러진 액자 사진이나 알몸으로 드러난 침대 등을 보면서 느껴지듯이 면면히 어어 온 삶터가 포화를 맞아 스러지듯 망실되는 현실이 참참하게 느껴진다.
개발로 인해 망실되어가는 있는 농촌마을은 역설적으로 점차 보존 가치를 높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역사의 실체의 한 단면으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고대의 삶터를 발굴하고 커다란 고고학적 성과로 평가하는 것처럼 마을에는 삶의 총체성이 담겨지게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파괴되어 사라지는 농촌 마을 전체가 훗날 하나의 문화 화석으로 취급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역 기존 마을은 서울에 근접하여 사회상에 따은 변모를 보여 주는 이 곳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유산일 수 있다. 우리는 개발 대상지의 원주민을 위한 이주 단지 조성을 종종 목격한다. 이 곳도 하나의 필지가 80-100평 정도 되는 원주민 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한번 원래의 터전을 잃고 나면 이주만 정착지가 다시 개발 대상지가 되어 또 다시 이주를 반복하면서 삶의 터전으로부터 부유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할 때가 있다. 일산 신도시 주변처럼 도시의 개발 욕구는 인근 지역의 영향을 받아 점차 확장되어 간다.
기존의 삶터를 부수고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 일을 당연시 하는 인식 자체가 의문이다. 더욱이 삼송 지역에서 도시지역 대상지로서 가장 적합한 읍내 지역은 제외한 채 추진되고 잇다. 그 이유는 그 곳이 보상가가 높기 때문일 것 같은데 그렇다면 모든 것이 철저하게 경제 논리로만 추진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역사적 가치 문화적 가치 모든 것을 경제 논리로 따져 결정 될 일이 아니다. 서울의 북촌도 한 때 개발 논리의 잣대로 바라보면서 전통 가옥 보본 정책을 장애물처럼 여긴 적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람들이 인식이 크게 달라지고 서울의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통 마을의 삶터로서의 의미는 경제 논리로서 대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적 삶터는 새로 지어질 좋은 집보다 더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새로운 건설을 위해 삶이 누적된 현장을 다 망실해버리고 마는 것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한다. 삶은 건축보다 중요하다. 새 집보다 삶의 기억이 더 소중하다. 삶의 체험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지의 삶은 문화적 실제가 아니다. 삶의 흔적이 중요하다고 볼 때 현재 기대하는 신도시의 꿈은 경제적 욕망 그 이상이 아니다. 문화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는 이 마당에 우리는 기존 마을의 의미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훗날 그 가치가 더 소중히 여겨질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2007년 11월 김석환)
□ 필자 약력
김석환(1959년생)님은 서울산업대학교 건축설계과 강사, 삼육의명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하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습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초대작가로 활동중이며, 통일로변 군시설 현대화 사업을 담당했습니다. 고양시와의 인연은 1994년 일산 신도시 K씨 주택 설계와, 일산구 건축 및 조경 자문위원을 역임하면서 맺었습니다. 현재한국건축가협회, 대한건축사협회, 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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