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중국 북경 ․ 시안 기행 -1 (2007년 8월 13~19일)
12시26분 중국을 가기 위해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아침에 비행기를 놓쳐 다음 비행기로 가서 먼저 출발한 일행과 합류하기로 하고 사무실에 들러 나온 길이다. 그러나 단체 비자를 받은 것인데 혼자 떨어지게 되어서 공항에서 급히 도착 비자를 신청했다. 여행사 직원이 북경에 가거든 입국심사대로 나가지 말고 먼저 입국비자 사무소로 가서 비자를 받으라고 했다.
오후 1시 출발 예정시간이 지났는데도 비행기가 움직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늦었다고 태워주지 않은 것이 원망스럽게 여겨졌다. 잠시 후 비행기가 활주로로 이동해 1시 35분 이륙했다. 비행기가 허공으로 떠오르는 순간은 참으로 극적이다. 로켓 발사대처럼 활주로를 달려 하늘로 솟아오른다.
조금 후 비행기는 7772m 고도에 703km/h 속도로 날고 있었다. 외부온도는 영하18℃였다. 좌석마다 작은 화면이 부착되어 있어서 비행기의 운행 상항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화면의 지도를 보니 뻗쳐 나온 요동반도와 산동반도에 의해 중국으로 닿은 서해가 호수처럼 보였다. 비행기는 그 언저리에 배가 닿듯 다가가고 있었다. 북경이 점차 가까워지자 창 밖으로 전원적인 도시 풍경이 보였다.
이번 여행지는 북경과 서안이다. 중국을 방문하는 것은 몇 년 전 배를 타고 산동지역에 가서 유교문화의 발상지를 돌아보고 온 후 두번째이다. 그 두 고도(古都)를 돌아보는 것이 중국역사의 바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길을 나섰다. 평소에 문화를 이해하려면 직접 그 장소를 방문해 몸으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곳들은 중국 역사의 무대 형성에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북경은 현재 중국의 수도로서 현대의 변모도 비교해 볼 수 있을 같았다.
도착해서 입국 비자를 받고 자금성으로 간 일행을 만나야 하는 등, 해결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져서 비행기가 당도할 즈음 미리 앞 빈자리로 이동해 앉았다. 3시 3분 북경수도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북경의 날씨는 맑고 기온은 33℃라고 했다. 현지시각은 한시각 빠른 2시 3분이었다. 입국 비자 받는 곳을 물어서 찾아가니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 안에 그런 시설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런데 출발 때 예기들은 현지 가이드가 나타나지 않아 초초한 기분이 들었다. 수수료를 미리 지불했기 때문에 줄을 서서 기다리지는 않아도 되었으나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빨리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다. 조금 후 어떤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나 입국비자를 받았다.
예상보다 시간이 더 지체된 채 입국장 밖으로 나오자 예기 들은데로 내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든 사람이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가 자금성까지 태워주기로 한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그가 갖고 나온 차를 차기 위해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어둡고 너른 지하 주차장에 열기가 후끈했다. 그 사람은 중국말로만 해서 아무 대화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표정과 손짓으로 다른 일행과 함께 있는 현지 가이드와 통화하게 했다. 그리고 그가 통화하던 전화로 가이드와 통화하고 나니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공항에서 북경으로 가고 있는 도로 이름이 천축도로였다. 중국 전통건축 양식의 톨게이트 통과했다. 10년에서 15년생쯤 되어 보이는 포플러 가로수가 인상파 그림에 쓴 색채처럼 햇살을 받은 잎이 나부끼며 다양한 색상을 띠고 있었다.
택시가 북경에 진입하자 처음 방문하는 그 곳의 체취를 느끼려 촉각이 곤두서는 듯 했다. 북경은 1000년전 몽골, 한국, 산동 그리고 중국 북부 부족민들과 교역을 통해 무역도시로 발전했다. 처음에는 연경(엔징)으로 불렸는데 1400년대 주원장이 북경(베이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북경은 2008년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여 18,000명의 인원 수용할 수 있는 선수촌을 만들고 있다. 북경은 시안에 비해 좀 더 늦은 시기의 중국 역사의 단면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고대의 상징성과 신비감은 덜하지만 그를 통해 중국 역사의 한 흐름을 이해 할 수 있다.
현재의 북경 시가지는 현대식 고층 건물이 많이 늘어선 모습이 서울의 한 부분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건물에 쓰인 재료도 알미늄 외장판, 넓은 유리 커튼월등 보통 많이 쓰이는 것들이고 디자인 감각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가로변에 고층 아파트도 자주 눈에 띠었다. 가던 길에서 우측에 높은 굴뚝을 보며 우회전하여 북경 시내쪽으로 들어서니 차가 더 많아졌다. 도로변에는 광장과 공원도 보였는데 그 길로 차, 자전거 등이 자유롭게 어울려 다니고 있었다. 개방화되어가고 있는 시대의 표정이 가로변 풍경에서 느껴졌다.
현대에는 우리나라 국민의 소득 수준이 더 높아서 오히려 얕보는 인식을 갖게 되기도 했었다. 냉전 시대 중국은 국가 경제의 비젼을 갖기 어려울 것 같았다. 실제 지난번 중국 방문 때 지나던 곳에서는 삶의 고단함이 얼굴 표정에 나타나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요새 중국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하기야 그 때는 산동이어서 차이가 있었을지 모른다.
타고 간 승용차가 자금성 앞에 도착했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책을 사라고 했다. 가격을 물으니 5불이라고 해서 10달러 지폐를 주니 거스름돈으로 30위안을 주었다. 그런데 바빠 계산을 제대로 안한 채 10위안을 덜 받은 것이었다. 릭샤로 갈아타고 자금성에 도착하니 아까 공항에서 통화 했던 현지 가이드가 나와서 마중해 주었다. 그가 미리 구입해 놓은 표를 내고 그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니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에 비행기를 놓쳐 마음 고생한 것을 생각하니 감회가 일었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자금성을 답사했다. 가장먼저 당도한 곳은 태화전이었다. 태화전은 자금성의 통치를 상징하는 건물인데 2008년 올림픽에 대비하여 수리중이어서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태화전 주변은 경호를 이유로 여러 가지 고안이 되어 놓았다. 우선 뜰은 자객이 숨지 못하도록 풀 한포기도 없게 했다. 마당 바닥에는 깊이 1,5m 전돌로 깔아 놓았는데 그것은 도굴하다 벽돌이 무너져서 압사하도록 한 것이다. 성 주변에는 10m 높이의 성곽과 52m 폭의 해자가 둘러쳐 있다.
뜰을 바라보며 과거 조선시대 북경을 다녀갔던 사신들의 여정을 떠올리게 되었다. 내가 북경 여행에서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조선과의 교류적 측면이다. 그 시절에는 조공을 위해서나, 경축 사절이나, 책봉을 받기 위해서 등 사신들의 왕래가 있었다. 현재는 당일에 비행기로 이 곳까지 올 수 있으나 그 당시는 가는데 여러 날이 결렸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 시대에 자신들이 처했던 상황에서 세계를 인식했을 것이다. 이 곳을 대하는 인상은 비슷할 것이지만 그 분위기의 감각은 지금과 퍽 달랐을 것 같다. 당시에는 황제의 권위가 느껴지는 삼엄한 곳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더 크고 화려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큰 나라의 문화에 대한 동경 같은 것도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동이 용이치 않았던 시대에도 인간의 동경과 호기심의 대상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관계에는 각 나라의 입지가 작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성을 감안하더라도 조선 후기에 문화적 수입의 편향성을 보이는 것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금성의 배치는 1406년에서 1420년 사이 명나라 영락제 때 확정되었다. 명나라는 주원장이 남경에 수도를 두고 1368년 건국했다. 그리고 그 후 1420년 남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북경의 이전 명칭은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수도였던 연경이었다. 당시 영락제는 백만이 넘는 인력을 동원하여 진두지휘해 건설했다고 한다.
주원장이 죽었을 때 태자가 어리다는 이유로 동생이 황제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후일 주원장의 아들인 영락제(1403년에 즉위)가 삼촌을 죽이고 황제가 되었다. 명나라 때는 궁궐에 환관을 많이 두었다. 그래서 궁궐에 거하는 환관이 1만명이나 되었고 많은 때는 십만명까지 되었다고 한다. 환관을 중용하여 자발적으로 거세를 하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영락제는 특히 환관인 정화를 중용했다. 정화는 1만명이나 탈 수 있는 거대한 배로 세계를 일주했다. 그것은 서양에서 세계최초로 세계를 일주했다고 주장하는 마젤란보다 앞설 뿐 아니라 규모도 큰 것이었다.
태화전에서 중화전으로 이동했다. 중화전은 황제의 평소 집무 공간이다. 중화전에서는 3년마다 과거시험을 치루었는데 그 때 황제가 친히 관람했다. 자금성 안의 건물들은 굴뚝이 없다. 벽 자체가 온돌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어 잇는데 건물 외벽에 난 구멍으로 숫불을 때서 난방을 했다. 그리고 자금성 내의 모든 기단은 한백옥(玉)으로 되어 있다. 중국 사람들은 옥을 많이 사용했는데 그것을 쓰면 건강, 장수한다고 믿었다. 중화전 뒤쪽에 기단 가운데 놓은 한백옥은 자금성에서 가장 큰 것으로서 16.75m x 3.07m x 1.7m 크기이다. 그 큰 돌을 옮기기 위해 길에 물을 뿌려 얼었을 때 미끄럼을 태워 이동했는데 50km 거리를 이동하는데 28일이 걸렸다고 한다.
다시 태화전과 중화전 뒤로 일직선 축을 따라 놓인 보화전으로 이동하였다. 보화전은 황제가 중화전에서 통상의 업무에 임하기 전 머무는 사적인 건물로서 휴식과 보고를 받는 공간이다.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등 자금 성의 중요 전각들의 건물들은 모두 같은 양식으로 되어 있다. 보화전 주변 물동이들은 24금으로 도금한 것이다. 자금성에 있는 물동이 308개중 정치적으로 중요한 곳만 청동에 24금으로 도금했고 나머지는 철로 만들었는데 1860년 전쟁 때 적군이 자금성에 쳐들어와서 24금 벗겨갔다고 한다.
보화전 뒤에 있는 교태전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로 사용되었다. 교태전에서 다시 그 뒤에 있는 건청궁으로 이동했다. 건청궁은 황제 가족의 생활 영역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이 건물은 정치 때만 쓰는 앞 건물들과 달리 공주가 시집갈 때나 장례의식 등이 이루어졌다. 계속해서 중화전 뒤로 돌아내려 갔다. 그 곳을 지나 건물 뜰에 이르니 기단이 3층 건물 높이나 되어 보였다. 자금성을 이동할 때 오르락 내리락 하는 계단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황제나 황후가 쓰는 주요 건물간의 이동은 수평으로 이동 할 수 있게 해 놓았다.
건청궁에서 우측 후문을 나가 계단을 내려가니 정원이 나타났다. 그 곳은 인공으로 조성한 숲으로서 휴식과 산책하는 공간이다. 후원은 과석과 나무 화초로 꾸며져 있고 인공으로 만든 산도 있었다. 그 인공산 위에 어경정(御景亭)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그곳은 황제가 그곳에 올라 주변을 관람하는 곳이다. 경복궁 후원의 향원정은 연못 가운데에 놓여 있어서 자연의 정서가 느껴지는데 어경정은 황제를 위해 자연을 인공적으로 꾸며 놓았다.
자금성을 둘러보는 동안 중화전, 교태전 등 전각 이름이 경복궁과 같은 곳들이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경복궁이 떠올라 비교하게 되었다. 전각의 배치와 이름, 그리고 후원의 괴목을 배치한 것 등에서 자금성을 본떠 한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전체적인 차이도 분명해 보였다. 자금성은 매우 공간적이고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그 이유는 기단을 많이 설치했기 때문으로 생각되었다. 많아도 세벌인데 다섯벌이나 되고 각각의 단의 난간석 등도 더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또 자금성은 전반적으로 붉은색과 황금색을 주조색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마당에 대한 느낌도 다른데 그것은 회랑의 유무와 관련이 있는 듯 했다. 그 이외도 건물의 양식상의 차이가 있다. 자금성을 통해 시대에 따른 문명의 변천도 느낄 수 있었다. 점차 과학적 사고가 나타나고 점차 현실성이 중시되는 흐름을 띠어가고 있는 듯 했다. 기술의 발달과 함께 합리주의로 변해가는 양상으로 느껴지지만 이전에 비해 좀더 장식적인 면모도 띠고 있었다. 자금성 뒤쪽으로 나가 도로변에 세워둔 버스를 타고 5시 30분 식당을 행해 출발했다. 뒤에 있는 경산은 해자를 판 흙으로 만든 인공산으로서 그 곳에 오르면 자금성 전체가 조망된다고 했다. 그 인공 산은 천수산으로 불린다.
식당으로 가는 동안 러시아워여서 차량 흐름이 정체되었다. 대도시에서 문제는 대동소이한 듯 했다. 도로를 지나는 보행자, 자전거, 차, 릭샤등이 다양하게 보인다. 자금성 근처 전통양식을 가미한 건물이 많았다. 그리고 신시가지는 현대식 건물이 많았다. 올림픽 선수촌과 메인 스타디움이 보였다.
왼편 민속촌은 56개 소수민족의 전통 생활상을 이해 할 수 있도록 민속박물관을 지어 놓았는데 우리가 가는 태가촌(太家村) 식당도 그 안에 있었다. 소수민족이 주로 사는 곳은 중국의 남부 지방인 운남성 근방인데 태가촌도 운남성 정부에서 운영한다고 했다. 6시 30분 식당에 도착했다. 에약된 자리에 앉으니 식사가 나왔다. 식사는 쌀을 주식으로, 국, 요리, 야채 가 담겨 있었다. 식당 안쪽에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다양한 복장을 한 공연자들이 차례로 나와 춤과 노래 연주를 하였다. 한가지 공연이 끝나면 이어서 다른 공연이 이어지며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그곳의 공연과 출연자들의 복장등을 통해 양자강 이남의 남방문화를 느낄 수 있게 하고 있었다. 한 종업원은 왼쫀 팔목에 붉은 실을 한가닥씩 매어 주었다. 이 곳에서는 환영의 표시로 집 밖의 나무에 그렇게 붉은 실을 매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공연을 보며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6시 56분 태가촌을 나와 호텔로 가기 전 경극 관람을 하기 위해 지나온 길을 거꾸로 이동했다. 길가 건물들이 대부분 현대식 구조에 건물 맨 위와 층 부분을 눈썹지붕을 만들어 기와를 입히는 전통 양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거기에 쓰인 기와는 공예적인 느낌이 드는 작은 기와이다. 7시 7분 자금성 가까이 도심 하천을 지났다. 공원으로 꾸며져 있어 시원한 물가에서 쉬려는 사람들이 쉬는 모습이 보였다. 청춘 남녀 한쌍이 막 입마춤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시간대로 보아 북경 시내를 오가는 퇴근길 사람들이 많은 듯 사람이 많아 보였다. 그들의 표정이밝고 명랑해 보였다. 복장도 단정하고 옷 맵시도 있어 보였다. 그들의 삶에 자본주의가 체질화 되어가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가이드가 북경 인구가 1,300만명이라고 했다. 북경 삼중학교를 지나갈 때 북경 교통집단이라고 쓰인 중절 버스가 옆에 있었다. 그것은 두개의 몸체가 이어져 잇는데 그 사이는 자바라처럼 되어 있어 유연하게 꺽여 보였다. 신호등에서 좌회전을 할 때 그 차가 진로를 가로막아서 입장 시간이 빠듯한 터에 신호 한 번을 더 기다려야 했다.
7시 1분 극장에 도착했다. 입구에서부터 정원 사이로 난 길을 통해 안으로 깊이 들어가 주차장에서 섰다. 바로 앞에 극장으로 들어갔다. 공연 시작한지 3분 되었다고 했다. 안에는 미국 사람으로 보이는 단체 관람객이 잇는데, 빈 좌석이 많았다. 자유롭게 자리에 앉아 관람했다. 경극 관람을 현지에서 하기는 처음이다. 그것은 남방 문화로 발달한 것이다.
고도의 몸놀림, 무술 실력 등이 높은 경지로 단련되어 있는 듯 했다. 소리 복장, 음악이 어우러져 격조룰 띤다. 춤사위처럼,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 둥 한사람이 정면으로 보였는데 달관한 듯한 얼굴 표정을 지으며 극의 흐름을 이어주는 연주를 하고 있었다.
첫 막은 두 명의 무사가 등장하여 극을 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두 명의 여자와 한 장수가 등장했다. 여자는 높은 옥타브로 노래했다. 관운장으로 보이는 긴 수염의 장수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표현하는 듯 했다. 출연자가 늘자 악사도 더 늘어 자리를 조금씩 변경 했다. 비파 연주자가 맨 좌측 정면으로 보였다. 공연중 전기 스파크 소리나 나서 흠이 되었다. 8시 30분 경극이 끝나 차를 타고 호텔로 갔다. 방은 4055를 배정 받았는데 다음날 아침 6시 30분부터 식사가 가능하며 8시 30분에 출발한다고 했다.
8월 15일 아침 5시 30경에 기상해 세수를 하고 식당에 갔다. 우리 일행은 한 팀만 보였다. 완두콩 등이 섞인 밥 빵, 훈제된 우유, 과일 과 함께 먹었다. 다시 객실로 들어와 양치질과 짐정리를 했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중정식 평면의 5층 건물이었다. 내가 묵은 방의 창문도 중정에 면한 창이었는데 4층이어서 햇빛이 잘 들어왔다. 그러나 밖에 나가 건물을 보니 외관은 별로였다.
8시 58분 호텔을 출발했다. 어제보다 더 덥지만 날씨는 쾌청했다. 팔달영 만리장성을 보러가고 있다. 가이드가 그 곳에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1시간에서 1시간반 정도 걸린다고 했다. 만리장성은 동쪽으로 사내관에서 시작하여 서쪽 감숙산 거역관까지 6,350km(1만 2천 7백리)나 된다.
북경 교외지역을 가는 동안 프라타나스, 은수원사시 등 가로수가 터널처럼 서 있었다. 도로변 가로수 밑을 하얗게 칠해 놓은 것이 특이해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그것은 야간에 차가 부딧히지 않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우측으로 평야지대가 펼쳐 있는데 드문드문 전원주택지가 보였다. 그리고 길 옆에는 하천이 흐르고 있는데 한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그 하천에 놓인 다리를 막 건너오고 있었다.
농촌의 특유의 채취는 변함없이 느껴지지만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표정은 몇 년전과 달리 갑자기 밝고 세련되어진 느낌이 들었다. 중국은 2008년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어 준비가 한창인데 그 영향도 클 듯 했다. 특히 관광지에서는 그 때를 대비해 일종의 올림픽 산업이라 할 수 있는 활기를 띠어가고 있다. 도로변에 보이는 간판 디자인에서도 변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9시 43분 좌측으로 바위산이 보였다. 9시 45분 새로운 도시가 보였다. 그 산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데 수많은 바위 봉우리와 골이 첩첩해 보였다. 10시 14분 아직 시내를 벗어나지 않은 상태인데 교외 지역의 산이 보였다. 북경 교외를 나가는 도로에는 은수원사시, 포플러 등 키큰 가로수가 연속되어 있었다.
지나는 도로변 풍경에서 소박한 농촌 분위기가 느껴졌다. 마을을 지날 때는 식당 자전거 수리점 등이 보였다. 그리고 마을을 벗어나면서 시원한 평야지대가 나타났다. 일행은 그 풍경만 보아도 좋다고 했다. 북경에서 장성까지는 70km 정도 거리이다. 그것은 그 밖에서 만리장성을 넘어 쳐들어 올 수 있는 거리이기도 하다. 차량이 많아 예정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10시 50분 버스가 팔달영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팔달영은 해발 1000m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는데 500~600년전 명청조때 건설된 것이다. 그 명칭은 사통팔달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만리장성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혀 세게 도처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그리고 팔달영은 그런 관광객들을 위해 산 위로 쉽게 오를 수 있게 케이블카를 설치해 놓았다. 들어선 입구 우측으로 장성 박물관이 보였다. 그 너머로 관광지답게 너른 주차장과 관광상품을 파는 상점이 늘어서 있었다. 만리장성 관광은 밖에서 보기 때문에 햇살이 따가울 때를 대비해 모자 파는 곳이 많았다.
11시 케이블카 정류장에 도착하여 표를 사고 줄을 서서 기다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점차 시야가 높아졌다. 10여분 동안 꽤 먼 거리를 이동해 윗쪽 탑승장에 도착하니 터널을 지나 나가게 되어 있었다. 터널을 빠져 나오니 시야가 넓게 조망되며 만리장성이 보였다. 조금 아래로 내려가서 우측으로 보이는 암문으로 들어가 성벽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산의 정상쪽으로 걸어 올라가면서 성벽의 구조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바닥에는 전돌이 깔려 있는데 사람들의 발길에 닿아 패이고 번들거렸다. 그리고 여장에는 화살 구멍이 설치되어 있었다. 전돌로 만든 성벽 구조는 수원 화성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전돌의 크기는 훨씬 컸다. 성곽을 따라 걸어 올라가니 맨 위에 봉화대가 있었다. 봉화대는 늑대 똥을 태워 연기를 피웠다. 거기서 주변이 훤히 내려다 보여 만리장성의 윤곽을 포착할 수 있었다. 인근 전체가 산악지대인데 만리장성은 굽이굽이 지나는 산능성이를 연결하고 있었다.
만라장성은 동쪽의 산해관부터 서로 자위관(가욕관)까지이다. 진나라 진시황때 축조한 것을 명나라때 벽돌을 써서 보수했다. 명나라 때는 100년 기간동안 천문학적 노동력이 투입되었다. 만리장성은 이북 초원 지대에서 말을 타고 넘어와 약탈하는 이들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진시황의 눈에는 자신이 통일한 영토만도 벅차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위쪽은 자신과 다른 종족들의 삶터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만리장성을 건설하려는 발상도 퍽 소박하다. 농업을 하는 정주민족이 북쪽의 유목민족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피땀을 흘려 만든 만리장성은 결국 적이 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것을 넘어 쳐들어온 징기스칸은 “성벽의 힘은 그것을 방어하는 병사들의 용기에 달렸다.”고 했다. 12시 10분까지 내려와 집결지서 만나기로 했다. 한 아이가 뒤에 쳐져 길을 부모와 떨어져 남겨 있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차를 타고 다시 북경시로 들어오다 12시 50분 외곽지역의 한 식당에 도착했다. 그 식당은 쇼핑센터에 함께 붙어 있는데 규모가 매우 컷다. 일행은 거기서 점심을 먹고 쇼핑을 했다. 2시 10분 오후 일정인 명 13릉을 보러가기 위해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그 가까이 가니 주변에 복숭아 과수원이 많이 보였다. 가이드가 사과, 대추, 자두 등도 많이 나는데 맛이 좋다고 했다. 북경은 년 강우량이 50-700m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벼농사가 되지 않는 대신 땅이 가물어 과일 맛이 좋게 된다고 했다.
2시 57분 세계문화유산인 명 13릉에 도착했다. 입구를 들어서는 좌측에 글씨가 새겨지지 않은 백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것에는 사연이 얽혀 있었다. 당시 황태자가 황제 서거후 일주일이 지나서야 도착을 했다. 그런데 황실 법도에 임종을 지키지 못하면 황위를 계승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총명했던 태자가 황제의 공적을 어찌 이 비석하나에 다 새길 수 있겠느냐며 그냥 백비로 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기지를 발휘해 그 난관을 벗어나고 황위를 물려받았다.
명십삼릉 중 현재 장릉, 정능, 사릉, 3곳이 개방되고 있는데 정릉은 신종황제(1563-1620)의 능이며 사릉은 마지막 황제 순종의 묘인데 그는 이자성에게 쫓겨 경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최후를 맞았던 사람이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무덤에서도 역사의 비애가 묻어난다.
명13릉 전체 영역은 풍수상 길지를 찾아 정한 듯, 좌우 산 이름이 용과 호랑이를 뜻하는 이름이어서 좌청룡 우백호 풍수 개념 적용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을 무너뜨린 이자성은 이 곳에 명 황제들의 지하 궁전이 있는 것을 알고 쳐 들어와서 건물을 모두 불태웠다. 그런데 정릉 비각에 불화살을 아무리 많이 쏘아도 불이 나지 않자 혼비백산하여 물러갔다고 한다. 그 건물의 벽. 기와, 모두 옥으로 만든 것이어서 불이 나지 않은 것이었는데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이자성은 농민군을 이끌고 점령했으나 4일천하로 끝나고 청나라가 (1644-1911) 등장했다. 이자성은 결국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결과가 되었다.
뒤로 돌아 정릉 지하무덤으로 내려갔다. 전체적으로 전후좌우 3개의영역으로 되어 있었다. 신종은 재위 48년 향년 58세 붕어했다. 1956년 시굴, 1959년 기념박물관 공개 출토유물 3000점 이상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황제의 시신은 옥으로 된 지하궁전을 만들어 안장했는데 깊이는 지하 21m나 된다. 내려가니 지하에 앞으로부터 중앙에 좌, 우, 중앙의 실이 배치되어 있다. 실제 무덤은 가운데 맨 뒤 실이다. 실과 실 사이의 문에 설치된 곳에 쓴 빗장이 유리 박스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설명을 들으니 쓰임이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문의 한쪽 두께 30cm 15cm 중량에 의 해 여닫아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문 위에는 8톤 청동 올려놓았다. 마치 고대 이집트를 소재로 만든 영화속의 장면이 떠올랐다. 금강벽돌은 45일 굽고 45일 기름에 절여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습기가 먹지 않게 했다. 4시 40분 박물관 좌우 전시관을 보고 주차장으로 나왔다.
5시 10분 주차장을 출발했다. 차 안에서 가이드에게 계림이 좋다고 들었다 하니 요즘은 장가계가 더 유명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용경협 소계림도 좋은데 그곳은 만리장성에서 북쪽으로 40km 지점에 있다고 했다. 오후 6시 10분 전날 저녘 식사를 했던 태가촌 근처 식당에 도착하여 현지식 저녘을 먹었다. 식사후 옆집 차 가게에 들렀다. 그곳에서는 일행별로 실에 안내하고 고감차, 동방미인, 자스민, 보이차를 시음하게 했다. 고감차는 처음 입맛이 약간 씁쓰름하다 뒷맛이 단내가 났고 동방미인은 숭늉처럼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마실 때 구수한 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시민은 향기가 나고 보이차는 보리차와 비슷한 맛이 났다. 그 보이차 맛은 평범하지만 그 것의 제조과정은 특별했다. 다른 차(茶)들이 시간이 지나면 품질이 떨어지지만 보이차는 오래 묵은 것일수록 맛이 깊고 가격도 높다. 보이차는 높이가 35m 정도로 큰 나무에서 수확하는데 원숭이를 훈련시켜 따게 한다고 했다. 14명 우리는 일행에게 각각의 차를 달여 일일이 맛보게 한 성의 때문이라도 성의껏 차를 사게 되었다. 나오는 길 모퉁이 양쪽에 조각이 가득 새겨져 있는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그곳이 소수민족 문화 보급을 위해 만든 민속촌인데 그 기둥은 그것을 상징하여 만든 것이라고 했다. 버스를 타고 전날 묵었던 호텔에 도착해 여장을 풀었다.
8월 16일 아침 8시 호텔을 출발했다. 그날은 오후 답사를 미치고 바로 서안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에 짐을 챙겨 가지고 차에 탔다. 아침 답사지는 이화원이다. 호텔을 출발해 30-40분 정도 걸리는 이화원에 도착했다. 이화원 앞에서 대추를 리어카에 싣고 팔고 있었다. 지금까지 본적이 없는 굵은 대추였다. 정문을 통해 이화원 안으로 들어갔다. 이화원은 292만평이나 된다. 그 중 인공호수인 곤명호는 이화원의 3/4이 된다.
이화원(㶊和園)의 본래 명칭은‘서태후 여름 별장’이다. 이화원은 1750년 조성되었는데 18세기에 건륭제가 크게 확장하고 장식했다. 1860년 영불 연합군에 의해 파괴된 것을 1886년 서태후가 근대적 군대를 세우기 위한 자금을 돌려 재건했다. 그리고 5~8월 사이에 이 곳에서 지내며 정치를 했다. 이화원은 통치영역, 거주영역 그리고 경치를 즐기는 영역(원유영역)으로 나뉘는데 정문에서부터 차례로 나아가게 된다. 이화원의 건축은 주로 동문과 만수산에 집중되어 있다. 통치 영역의 중심 건물인 인수전은 어질어야 오래 산다는 의미로 붙여진 전각 이름이다. 서태후는 청나라에서 가장 오래인 48년간이나 집권했다. 그는 황제인 남편이 죽은 후 4살된 아들을 황제로 세우고 수렴 청정했다. 그리고 여동생의 아들(광서황제)를 황제로 세우고 다시 수렴 청정했다. 그러나 광서황제가 20세 되어 홀로서기를 시도하며 반발할 기미를 보이자 옥윤당(玉潤堂)에 감금했다. 광서황제의 황후는 거사에 가담했다하여 즉시 죽이고 조카를 황후대신 보냈으나 그 역시 만나지 못하도록 이 곳 이윤관(㶊芸館)에 가두어 대가 끊기고 말았다.
생활 영역의 낙수당(樂壽堂)은 거주하는 곳으로서 광서(光緖)황제 15년(1889)에 지었다. 그 앞에는 사슴과 학을 각각 2마리씩 청동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은 대륙이 화평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낙수당 뜰에는 거대한 괴석이 놓여 있는데 그 이름이 집안이 망했다는 의미의 패가석(廢家石)이다. 서태후가 옥으로 된 괴석을 좋아하여 그것을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큰 상을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한 농부가 그 괴석을 50km 떨어진 곳에서 이동해 오던 중 15km 떨어진 곳에서 파산하여 패가망신하게 되었다. 그 후 다름 사람이 그것을 이동하여 상을 받았다.
원유영역에는 곤명호를 바라보며 거닐 수 있는 긴 회랑이 유명하다. 그것은 길이가 동서로 728m나 되어 기네스북에도 오른 세계에서 가장 긴 회랑이다. 서태후는 조석으로 미남들과 함께 그 회랑을 산책했다고 한다. 회랑 안쪽 상부에는 서유기 삼국지 등 중요 장면들을 칸칸이 그림을 그려 놓았다. 회랑을 가다 오른쪽에 놓인 만수산은 곤명호를 파면서 생긴 흙으로 만든 인공산이다. 그 정상에 지어 놓은 불향각은 전망을 감상 할 수 있는 곳으로서 그곳에서 서태후의 환갑장치를 했다. 서태후가 머물던 시기의 절대 권력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현재 이화원은 북적거리는 관광객들의 눈요기 거리가 되어 있다. 12시에 그 곳을 나와 식당으로 행했다. 오후에는 북경대를 답사하는 일정만 잡혀 있어서 시간에 여유가 있어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 붙어 있는 상가에서 자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예정 시간에 맞춰 그 곳을 출발하여 2시 35분 북경대에 도착했다. 먼저 도서관으로 이동하여 그 곳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도서관은 연면적 5만평에 700만권 장서가 있다. 그 건물의 북경대학원서관이라고 쓴 현판 글씨는 등소평의 친필이며 모택동은 이곳에서 도서를 관리한 적이 있다고 했다. 밖에서만 바라보다 이동하여 교실을 돌아보았다. 방학기간인데 강의와 자습하는 모습, 여름학기 개설되어 있었다. 북경대는 120개과 작은 교사동으로 나뉘어 있다. 건물은 대부분 전통 양식이 가미된 현대식 건물로 되어 있다. 다시 이동해 북경대에서 가장 오래전에 지어진 건물들이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그 곳은 철학, 역사, 언어 등 기초 인문학과로 쓰이는데 북경대 설립 초기에 개설된 과목이고 건물도 더 고풍스런 모습이어서 이 학교의 역사가 느껴졌다.
거기서 정원 사이를 지나가니 체원배(1868~1940) 선생 동상이 보였다. 그는 1916~1927년 재직 북경대학교 교장을 지냈는데 북경대에 큰 공적을 남긴 듯 했다. 그 옆으로 나가니 미명호라는 호수가 보였다. 미명호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부자이던 허선이 갖고 잇던 개인 토지인데 북경대에 기증해서 지금처럼 교지가 넓어졌다고 한다. 그 곳을 보고 우리가 들어갔던 곳과 다른 정문으로 나왔다. 정문은 전통 양식으로 되어 있었다.
그날은 비행기를 타고 서안으로 가야 되기 때문에 더 일찍 식당으로 이동했다. 이동 하는 날은 시간이 애매해지는 점이 있다. 4시 32분 평양관 식당에 도착했다. 건물에 붙여놓은 간판아래쪽에 8시부터 평양처녀들 공연이라는 글씨가 써 있었다. 로비 옆에 고려 인삼을 진열해 놓은 곳이 있었다. 고려 인삼의 효능에 대해 “오장을 자양하고 정신과 혼백을 안정시키고 심계항진을 치유하고 눈을 밝게 하고 마음을 안정시키고 지력을 제고하고 뇌를 보강하고 원기를 크게 보충하고 종양을 억제하고 혈 지질을 조절하고 노쇠를 지연시키며 양기를 강하게 하고 음기를 보충하여 연념익수하는 등 특이한 효능을 갖고 있다”고 써 놓았다. 그것을 읽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신비의 영약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5시 전에 들어가 기다리다 우리 일행만 식사를 했다. 서빙하던 아가씨들이 갑자기 앞치마를 두른채로 무대로 올라가 노래를 했다. 처음엔 의아해했는데 노래를 듣고 보니 모두 수준급 가수들 같았다. 그들은 돌아가며 고향의 봄, 휘파람 등을 불렀다. 휘파람 노랫말 중 “오늘 계획 3배 했다고 생긋이 웃을 때 이 가슴엔 불이 인다오“ 라는 가사가 특이하게 들렸다.(070819 김석환)
중국 북경 ․ 시안 기행 -2 (2007년 8월 13~19일)
5시 30분 식사를 마치고 서안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엊그제 북경으로 들어올 때 보이던 가로 풍경이 다시 보였다. 6시 5분 북경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수속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비행기의 출발시각은 7시 15분이었다. 50분정도 시간 여유가 있어 공항내를 배회하며 북경에 머무는 동안 보았던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그 곳에서 느낀 것은 흥망성쇠였다. 새로운 나라의 등장이 이전 것을 멸하고 새로 등장하기를 반복된 과정이다. 그러나 그 과거의 것이나 새롭게 등장한 것이나 지금은 모두 역사속에 명멸해 가고 없다. 자금성, 만리장성, 명13릉, 이화원 등 사람들이 과거의 영화가 깃든 유물들을 보면서 때로 감탄해마지 않지만 어느 것도 영원히 지속되지는 못했다.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는 오늘 도착할 서안에 대한 의식만이 집중되었다. 마치 타임 머신을 타고 그 시간의 장벽을 넘어 역사의 체취를 느끼러 가는 길 같았다. 서안은 그 지명에서부터 중국 역사의 체취가 느껴진다. 평소 진시황릉, 병마용갱, 삼장법사와 서유기 등 서안과 관련된 말을 많이 들어왔는데 그런 것들을 떠올릴 때마다 전실이 서린 곳처럼 느껴졌다. 서안 부근에는 황하지류인 위수가 지나고 있으며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 길을 통해 서역으로부터 비단, 유리, 호박, 석류, 수박 등이 들어왔다.
일행을 태운 비행기가 창공을 날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져서 날개끝에 전등이 등대 불빛처럼 보였다. 동체 중간에서는 빨간 등이 등대등처럼 돌아가며 사방으로 빛을 발했다. 그처럼 회전하는 전등을 멀리서 보면 일정한 간격으로 점멸하듯 보인다. 창공은 어둡고 지평선만 붉게 보였다. 지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는 석양의 노을진 모습이 마치 지구 저편에서 해가 솟아 나올 듯이 보였다. 운해를 지날 때는 그 빛을 받은 뭉개구름이 마치 산호초처럼 보였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구름 아래 바다처럼 너른 대지를 지나가고 있을 것 같았다. 북경과 서안 1040km 떨어져 있다. 해가 지고 지평선까지 어두워지자 창 밖에 적막이 감돌았다. 한참 지나 아래쪽을 보니 도시 불빛이 보였다. 잠시 후부터 비행기 고도를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비행기가 착륙하려고 속도 조절을 위해 선회하며 날개를 오므리자 소리가 크게 들렸다. 활주로 가까이 당도해서는 눈금을 재듯 몇 센티미터씩 섬세하게 낮아지는 느낌이었다. 동체를 활주로에 정열시키듯 다가가다 바뀌가 닿으며 공항에 착륙했다.
서안 공항이 있는 곳은 서안이 아니라 함양이었다. 이 곳은 2,200년전 진시황의 아방궁이 있던 곳이다. 복희시대 서안 근처에서 동물을 길들였다. 서안 근처애서 발굴된 반포(半포) 출토품은 6000년전 것이다. 그 유물들을 본다고 해서 당시 역사를 확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때의 역사를 느끼게 하는 끈이고 단서이다. 통일 전 진나라는 서안과 가까운 산시(山西산시)에서 시작되었다. 서안이 수도 였던 나라는 진(221-227) , 한, 서위, 북주, 북조등이다. 서안은 황하 지류인 위수와 접해 있는데 넓게는 중국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황하 유역에 속한다. 서안은 우리에게 장안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서기 600년까지 장안으로 불리었는데 그 후 당태종이 서쪽이 편안하다하다 해서 서안이라 불렀다. 장안은 서안의 옛 이름으로서 삼국지에 그 지명이 자주 등장한다.
비행기를 나가며 시계를 보니 9시 17분이었다. 짐이 도착하는 곳으로 가서 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빨간 가방 한 개가 몇 바퀴를 볼아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공항 직원이 챙겨가지고 짐이 나오는 입구로 콘베이어를 타고 들어갔다. 기다림이 지루한 아이들이 짐이 나오는 곳의 가림막을 들춰보고 있었다. 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눈팔다 놓치면 다시 한바퀴 돌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하나하나 유심히 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자기 짐이 나오자 낙시질하듯 건져 갔다.
9시 37분 공항 앞에서 대기중이던 106번 파란색 버스에 탑승했다. 서안은 섬서성에 속해 있는데, 섬서성 넓이는 22만 km2로서 남북한을 합한 면적쯤 되고 인구 3,500만명이고 서안은 9983km2에 인구가 650만이다. 서안은 동경 108‘ 북위 34’에 위치하는데 공항에서 48km 떨어져 있으며 차로는 40-50분 정도 걸린다. 서안은 1년에 평균 10번 내릴 정도로 비가 적게 오는 지역이다. 그래서 그 때 내리는 비를 복비라고 부른다.
중국에는 55개 소수민족이 있는데 서안에는 46개 소수민족이 있고 그 중 회족이 가장 많다. 그 회족은 이슬람교도가 많다. 그 다음 만족이 많은데 한족과 구별이 거의 없다. 그리고 조선족은 아주 소수인 편이어서 서안에 사는 조선족 1000명에 지나지 않으며 대부분 가이드와 언어교육에 종사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그들을 한족인줄 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도 굳이 조선족임을 내세우지 않는다. 또 지금은 한족화 되었다고 했다.
가이드가 남경 대학살을 기억하는 중국 사람들은 지금도 일본 사람을 싫어하는데 한국 사람의 모습이 일본 사람과 비슷하여 오해를 하기도 한다고 했다. 중국사람은 평생에 3가지를 다 못하고 죽는데 언어 다 배우지 못하고 음식 다먹어보지 못하고 너무 넓어서 그 나라 구경 다 못하고 죽는다고 했다.
서안 시내에 들어왔다. 호텔 가까이 지나는 로타리 광장에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 아래 많은 사람들이 나와 모여 있었다. 열대야에 잠들지 못하고 더위를 식히러 나온 것이라고 한다. 서안은 북경과 다른 분위기이다. 북경이 통치의 권위가 화려하게 느껴진다면 서안은 아직도 전국시대 전장의 체취를 지니고 있는 느낌이다. 서안의 주 산업은 농업과 관광이다. 그래서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았듯 죽은 사람이 산 사람 먹여 살린다는 말이 나온다.
고도(古都)는 지리적 특징도 중요하게 작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위치는 세력 분포에 따른 균형 감각도 고려되어 있다. 여러 나라가 하나로 합쳐질 경우 그 전체 국토의 거리도 고려된다. 서안은 무력의 시대에 그 힘으로 이룩된 사회구조의 수도로서 위치가 고려되어 있다. 후대에는 수도의 위치를 내어주게 되었는데 그러한 변화는 중국 영토에서 정치적 중심과 관계가 있었다. 서안은 황하의 물길과 통하고 대륙의 중심적인 위치로서 장점을 갖고 있지만 사막지대가 많고 동남부를 아우르기에는 다소 치우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현재 같은 산업 구조와 경제 상황으로는 무게 중심이 그보다 동측으로 이동해야 맞게 된다.
시대로 들어선 가로변에서 서안의 첫인상을 느끼게 되었다. 길가에 간판이 달린 2층 정도의 건물들이 이어서 있는데 우리나라 60-70년대 도시 가로 분위기가 느껴졌다. 칸칸이 큼직한 간판이 걸려 있어 그 건물들이 쓰이는 용도로 대개 알 수 있다. 그 가운데는 가끔 고층건물과 건설중인 높은 건물도 보였다.
10시 16분 호텔에 도착했다. 고층 건물이었다. 로비 중앙 4마리 용이 혼천의를 떠받치고 있었다. 바닥은 대리석으로 마감 되어 있었다. 1310객실에 들어갔다. 불이 들어오지 않아 카운터에 연락하니 조금 후 방문해서 해결해주고 갔다. 씻고 자리에 눞자마자 피곤해서 바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6시 30분에 기상했다. 창 밖이 훤해오고 있어서 창 밖으로 보이는 서안의 첫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안개가 끼었는데 시가지 풍경이 북경과 퍽 다른 느낌이었다. 건물이 낡고 지저분하고 거리를 배회하듯 생활하는 소상인들의 비루한 삶의 표정이 베어 총체적으로 나타나는 느낌이라고 생각된다. 서안의 주 산업은 농업과 관광이다. 도시 가로에 서비스 산업이 번창하지 못함으로서 도시 조직이 그로서 표출되는 변화와 활력을 띠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건조한 느낌이었다.
세면을 하기 위해 세면도구를 꺼내려고 배낭에 손을 넣다 카바가 벗겨진 면도날에 오른손 손가락 끝에 상처가 났다. 8시 30분 4층 식당에 갔는데 그 곳에 근무하는 아가씨가 손끝에 벤드를 붙여 주었다. 넓은 테이블에 모자가 함께 앉았다. 그들은 서안을 5일 동안 보는 일정으로 왔는데 오늘이 돌아가는 날이라고 한다. 이 곳에서 본 곳 중에 진시황릉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화산도 보았다고 한다. 화산은 현장이 불경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데 서유기에서 요괴가 일으키는 화염 때문에 곤란을 겪다 옥황상제의 도움으로 무사히 지나는 장면이 나온다.
9시 36분 호텔을 출발했다. 오늘 답사 일정은 오전에 비림 박물관, 그리고 오후에 진시황릉과 병마용갱을 보는 것으로 되어 있다. 호텔을 출발하여 비림으로 갔다. 차가 가고 있는 도로는 600년전 명나라때 만든 도로이다. 가이드가 서안에는 택시가 1만 5천여대나 있는데 택시내에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서안 시내 가로수로는 회화나무와 프라타나스가 많이 보였다. 잠시 후 비림에 도착했다. 그 곳은 1078년에 조성되었는데 원래 공자묘가 있던 곳이다. 그런데 그를 추모하거나 학문적 전통에 의 해 이 곳에 세워진 비석이 많이 모여 있게 되어 비석의 숲이라는 의미로 비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 곳에는 왕희지, 구양순, 안진경 등 서예대가가 써서 돌에 새긴 비석 등 여러 가지 서체와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과 관련된 글씨들을 볼 수 있다. 특히 관우가 유비에게 바친 그림이 새겨진 비석이 인기이다. 비름에 들어서어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길 좌우로 정자 같이 생긴 건물들이 연속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잇는데 그것은 그 안에 비석을 보호하는 비각들이다. 그 안의 비석들은 황제의 공적비 등을 세워 놓은 것이다.
11시 55분 교외지역으로 나가며 터널 같은 포플러 숲을 지나갔다. 주변에 벽돌로 지은 집들이 전원 풍경으로 보였다. 중국에는 소나무 같이 단단하고 내구성 있는 나무가 적은 편이어서 건축에 벽돌을 사용해온 전통이 있다. 진시황릉이 있는 부근의 식당으로 가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12시 식당에 도착했다. 1,2층으로 된 큰 식당이다. 테이블마다 써비스로 내 놓은 맥주가 한병 씩 있었다. 식사 메뉴는 밥 국, 청정채, 복음과 튀김요리등이 6-7가지 나오는 현지식이다.
테이블 가운데 빙빙 돌아가는 원반 테이블이 있는데, 그곳에 갖다놓는 요리를 자기 앞으로 돌려놓고 조금씩 덜어 먹는다. 나는 식단과 양이 생소해 그냥 적당히 덜어먹어서 포만감을 느끼며 식사한 적은 없었다. 1시 13분 식사를 마치고 진시황릉 지하궁전을 보러갔다. 거기서 진시황릉 까지는 2-3분 정도 이동하는 가까운 거리였다. 현재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는 진시황릉은 실제의 능이 아니라 그 능을 1/4로 축소하여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식당에서 진시황릉 유물 전시관을 가기위해 지나는 동안 길가에 이집트 피라밋 등 세계 7대 불가사의를 축소해 만들어 놓은 모습이 보였다.
진시황(BC259-210)은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하고 서안을 수도로 정했다. 진시황의 통일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로써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가 형성되었고 통치가 사회적 원심력으로 작용함으로써 중국이라는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진시황은 문자, 화폐, 도량형, 수레바퀴 등 4가지를 통일시키기도 했다.
많은 나라로 갈라져 있었던 통일 전에는 하나의 나라에 관한 관념도 없었을 것이지만 통일을 이루고 난 후에는 그것은 분열될 때마다 새로운 목표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민족적 정체성과 국민의식이 생겨났을 것이다. 또 그에 따른 다양한 문화와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또한 통일은 기술 문화 등을 망라해 거대한 사회구조에 따른 새로운 자극을 주어 발전되게 하였을 것이다. 진시황처럼 무력으로 통일한 사람은 전쟁을 이긴 정복자의 권위가 있게 된다. 그 이후로는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인위적으로 복종과 섬김의 질서을 갖추고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가 뒷받침 된다. 그리고 안정적으로 전통을 이루며 그에 따른 문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진나라 통일 후 거대 사회의 등장은 궁중 문화처럼 이전과 다른 품격과 고급문화도 생성케 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지배 구조의 폭력성을 망각하고 새롭게 생성된 고급문화의 매력을 동경하고 받아들이게 되기도 했을 것이다.
고대 문명에는 원시사회에서 고대사회로 형성된 그 시기의 체취가 담겨 있다. 손으로 만들던 시대의 체취와 공예적 매력을 띠기도 하고 엄청나게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건설된 놀라움도 느껴진다. 진시황의 무덤에서는 그가 죽은 후에도 천하를 지배하려 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생전에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지 신하에게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명했다. 그 사람들은 서귀포를 불로초가 잇는 곳으로 여겼다. 그런데 불로초를 구하러 간 사람마다 돌아오지 읺았다. 그들 자신이 신선이 되어 돌아가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진시황은 매부리코, 세가슴, 늑대 울음소리의 목소리를 가졌었다고 한다. 진시황은 여자10, 남자24명 등 34명의 자녀를 두었다. 부소가 큰 아들인데 진시황은 호혜를 좋아했다. 진시황은 생전에 5번 순행을 했다. 순행때 81차 동원했다. 그는 사천성 사위구에서 사망했다. 7월에 죽었는데 9월에야 시신이 함양으로 돌아왔다. 유서를 남겨 부소에게 나라를 물려준다고 했는데 그것을 조고와 이사가 위조했다. 거기서 지록위마라는 말이 생겼다.
진나라는 엄격한 통치 질서를 세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이 죽은 후 얼마 존속되지 못했다. 진시황이 세운 최초의 통일 국가인 진나라는 결국 호혜가 황제가 된 지 15년만에 멸망했다. 여기 저기 반란이 일어난 가운데 항우와 유방의 전쟁 4년만에 유방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승리한 유방은 한나라를 세웠다.
진시황의 통치 이념은 한비자의 법가(法家)에 바탕을 두고 있다. 진시황이 펼친 정치적 이념 등은 진시황의 당시 세상에 관한 상황 인식이 반영되었을 것 같다. 진시황은 자신의 나라와 거리가 먼 산동반도의 유가사상이 현실적이지 못하게 느껴졌을 수 있다. 진시황 이전의 주나라 때는 유교사상을 통치 기반으로 하면서 지방정부에는 가족을 파견했었는데, 진시황은 군현제를 실시하고 관료를 파견했다.
모형으로 만든 진시황릉 전시관에 도착했다. 그 건물 입구에는 진시황이 통일 후 이룩한 업적에 관한 내용이 전시되어 있었다. 진시황은 통일 후 화패, 문자, 도량형, 수레바퀴 등 4가지를 통일시켰는데 언어는 통일시키지 않았다. 홀 벽에 당시의 화폐를 확대해 설치해 놓은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둥근 모양에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는데 그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 사상을 담고 있다. 안쪽에는 병마용갱, 만리장성, 황릉의 축조 과정에 관한 내용을 전시해 놓았다. 안으로 들어간 전시실 입구쪽에는 맹장녀 이야기를 소재로 꾸며 놓은 것도 있었다. 진나라 때 밭일은 여자만 했고 남자는 전쟁이나 부역에 차출되었다. 맹장녀 남편도 만리장성에 부역당해 갔는데 떠날 때 약속한 해가 지나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부역 현장엘 찾아 갔다. 하지만 남편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 벽을 붙들고 통곡하니 성벽이 갈라졌다는 이야기다. 그 옆에 동마차의 수레살은 30개로 되어 있는데 그 것은 1달을 나타낸 것이다.
그 안쪽에는 병마용갱의 제작 과정이 담긴 내용도 있었다. 용의 키는 170-196CM인데 제작 당시에는 10가지 색상을 사용했었다 한다. 그렇지만 바래어 지금은 그 색상을 인식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용은 진흙을 빗은 다음 불에 구워 만들었는데, 그 굽던 가마터는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았다.
계단을 통해 7.1M 깊이로 된 지하로 들어갔다. 진시황의 관이 중앙에 안치된 모습이 보였다. 배치 구도는 군대를 거느린 진시황이 황하머리에 베고 장강위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 있는 모습이다. 그 주위로 6명의 미녀가 둘러서게 했다. 능의 천장은 복희가 낫을 들고 여와는 가래를 들고 있는 모습을 조소상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해와 달도 만들어져 있었다.
진시황 무덤 옆에 여자는 있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여자는 많았지만 여자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궁녀가 많아서 하룻밤도 그와 같이 지내지 못한 사람이 많았는데, 한나라 미인은 진시황이 소가 발걸음 하는 곳에서 잠을 자는 것을 알고 소금을 먹여 소가 오게 하는 기지를 발휘해서 여러날 진시황과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진시황의 아버지는 여불위인데 그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어 진시황이 사실을 모르고 자랐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진시황이 태어난지 3달만에 죽었다. 그러한 환경은 진시황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행을 미쳤을 것 같다.
지하 궁전을 나와 2시 진시황릉에 도착했다. 진시황은 통일 후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였다.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30만명, 아방궁을 짓는데 50만명을 동원했다. 실제 진시황릉은 가로 세로가 120m, 지하4층 지상 26층 규모의 성(城)과 같은 구조이다. 진시황릉은 72만명을 동원하여 37년동안 건립했다. 동원된 사람은 노동력을 상실하면 생매장했다. 그리고 게으름을 피운다고 생각하면 머리카락을 뽑는 형벌을 가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산 사람들이 처참한 생을 살았다.
진시황릉은 사기에 언급되어 있으나 현재의 능이 확인되기 전에는 그 존재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현재 능을 평범한 산으로 생각했었다. 병마용갱은 물고랑을 치던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병마용갱이 발견되자 그것을 근거로 그 주변에 있던 그 산봉우리가 진시황릉일 것으로 추정하고 레이저를 동원하여 확인했다. 중국은 유물을 변견하여 신고한 사람에게 포상하는 제도를 갖고 있는데 그 때도 5만원의 상금을 주었으나 그는 받지 않고 반납했다고 한다.
다만 그는 병마용갱에 관한 책을 썼는데 그 덕분에 돈 벌었다. 그러나 돈이 많아지자 아들이 빈둥빈둥 놀기만 하여 돈을 번 대신 아들을 버렸다고 말했다 한다. 그래서 지금은 아들에고 돈을 주지 않고 수입의 90%를 기증한다고 했다. 그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의지가 굳센 분 같아서 얼굴이 궁금해졌다. 진시황릉을 막 들어서자 우측으로 기념품을 파는 상점도 있었는데 그 곳에 들어서니 진시황릉을 발견한 그 분이 직원 옆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분의 책을 사면서 기념촬영을 하고 나와 진시황릉 정상까지 걸어 올라갔다.
진시왕릉은 마치 거대한 산처럼 보였다. 가운데로 꼭대기까지 오르는 계단이 놓여 있었다. 오르는 계단 옆에 백일홍, 석류 달려 있다. 길가에 줄지어 심은 향나무를 다듬어 놓았다. 주변은 너른 평야지대이다. 뒤로는 산이 있다. 우측 멀리 시가지가 보였다. 진사황 주변 평야지대였다. 무엇을 생각할까 생각하였다. 진시황릉에서 내려오니 단에 위수(강태공) 남전옥, 진시황릉, 발굴전 비교, 구석기 시대부터, 지끔까지의 유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단에서는 당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무예를 펼치고 있었다.
입구로 나와 기다리던 버스를 타고 병마용갱을 보러 갔다. 병마용갱은 1,2,3,호 갱과 전차 유물관으로 나뉘어 있다. 3시 55분 1호분으로 들어섰다.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작 현장에 그대로 있는 유물을 대하니 시간의 두께를 넘어 그 시대 상황이 생생하게 느껴져서 한동안 한 곳에 머물며 느껴보았다. 병마용갱에는 8,000개의 조소상이 있다. 그것은 적군의 포로, 죄수, 돈이 없는 사람등을 모아서 만들게 했는데, 각각의 모습은 그들이 서로의 모습을 본 떠 만들었다고 한다. 레이건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이 곳 병마용갱을 보여 주었는데 그 때 그가 말엉덩이를 만진 것이 화제가 되었다. 중국에서 말엉덩이를 만지는 것은 아부하는 의미여서 그러한 해석을 달아 신문에 났었다고 한다.
1호분에서만 너무 지체한듯 싶어 그곳을 지나 2호분에 들어섰다. 그 곳은 1호실에 비해 규모도 작고 보존 유물도 적었다. 그보다는 발굴 때 절개된 상태로 자취를 보존하고 있었다. 다음 앞쪽으로 이동하여 3호분을 보았다. 그 곳도 2호분과 비슷한 상황으로 용이 제대로 남아 있지는 않았고 그 때의 체취가 느껴지도록 굴토 현장만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그 곳을 보고 밖으로 나와 마지막으로 별도 건물로 되어 있는 전차 박물관을 보기 위해 이동했다. 거기에는 마차 발달 상황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돌아본 각 실마다 관광객이 북적거렸다.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이 북적되어 병마용갱이 세계적인 관심을 끄는 곳이라는 것이 실감 되었다. 그 유물들이 서안의 인상을 유지케하는 요인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에 의존하는 것이 현대의 발전에 지장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고도의 인상을 지키기 위해 현대 산업 발전이 정체되어 새로운 활력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행이 다 둘러보느라고 예정시간을 넘겨 대기중인 주차장에 도착해 기다리던 버스를 타고 6시 식당으로 출발하여 7시 15분 식당에 도착했다. 그 식당은 호텔에 부속된 것이어서 호텔 현관으로 들어가 좌측으로 회랑을 따라 식당으로 갔다. 직선으로 가다 꺽어 돌아갈때까지 계속 이어진 길이가 무척 긴 회랑이었다. 이화원 회랑처럼 전통 양식의 건물에 일정한 간격으로 등이 매달려 있는 것이 운치가 있었다.
그 회랑을 지나 안내된 곳은 뜻 밖에 앞쪽으로 공연무대와 관객석 시설이 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8시부터 공연을 한다고 했다. 막 몇가지 음식이 나와 먹고 있는데 종업원이 다가와 장소를 옮겨야겠다고 했다. 그 장소는 입장료를 별도로 2반원씩 더 내야 하다고 했다. 우리는 말하는 대로 따라 이동했다. 자리를 잡고 나니 다시 음식을 갖다 주어 식사를 계속했다.
그 날 메뉴는 만두 요리였는데 18가지 종류의 만두가 나온다고 했다. 예기 들었던대로 만두가 차례로 나왔다. 어떤 것은 1사람당 1개 이상씩 돌아갔다. 그것을 차례로 음미하며 먹게 되었다. 종류를 다 맛보기도 전에 배가 불렀다. 그래도 맛을 보기 위해 나온 것을 한개 씩 다 먹었다. 마지막 나온 것은 탕에 넣어 끓인 다음 건저 먹게 했는데 만두가 꼭 완두콩만 했다. 그 마지막에 나온 그것은 서태후 만두라고 했다.
호텔로 돌아와 여장을 풀고나니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새로운 것을 대하게 되는 답사에서는 긴장의 피로가 쌓이게 된다. 쉬고 있는데 일행으로부터 술 한잔 하자는 연락이 와서 903호에 모여 맥주를 마셨다. 청도 맥주인데 보리의 구수한 맛이 살아 있었다. 여행지에서 마지막으로 숙박하는 날이어서 여행의 감회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18일 아침이 밝았다. 어제 늦게 잔 때문인지 어제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 오늘 오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외국에서 며칠 지내는 사이 국내 사정은 다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더 여유롭고 한가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전에 중국에 왔을 때는 생경한 느낌이었는데 점차 더 개방적으로 변화되어서인지 여느 외국에서처럼 자유스러웠다.
오전 8시 식당으로 내려가 식사를 한 후 혼자 장안성을 보러 갔다. 그날은 오전 시간이 비어 있어서 남는 시간에 택시를 타고 가려 했는데 로비 직원이 바로 앞이라고 걸어가면 된다고 한다. 어제 본 로타리 우측에 문이 장안성의 출입구였던 듯 했다. 그러나 전돌로 반듯하게 쌓여진 모습이 별로 옛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전벽돌 특유의 질감과 반듯한 감각이 표출된다.
장안 시내의 가로는 가로 11줄, 세로 14줄로 되어 있다. 그리고 장안성은 1396년 명태종 주원장이 건설했는데 흙을 다져 쌓고 그 바깥에 전벽돌을 써서 만들었다. 그 때 키위주스, 찹살뜸물 등 사용했다.
성곽 둘레로 산책 코스처럼 되어 잇는 길을 따라 걸어가며 성곽을 처음 지었던 느낌을 상상해보았다. 성곽 옆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그 산책길 옆 정자에서 노래연습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각자 맡은데로 열심히 노래와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 앞에 멈춰서서 노래를 들으며 장안성을 스케치했다.
다시 호텔에 도착하니 11시 22분이었다. 모임 시간을 20분으로 알았는데 일행이 보이지 않아서 두리번 거리게 되었다. 로비에서 가이드에 연락하니 12시라고 했다. 다시 장안성에 가서 사진을 찍고 돌아오니 시간이 맞았다. 방에 가서 짐을 챙겨가지고 내려왔으나 아직 내려오지 않은 사람이 있어 기다리다 어제 호텔 옆 보아 둔 풍경을 스케치 했다.
일행이 다 모여 점심을 먹기 위해 차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장안성의 성루 등이 보였다. 지나가는 길은 3층 정도 건물에 식당과 가계등이 늘어선 소박한 거리였다. 그 가로변에 있는 식당에 들어서니 2층으로 안내했다. 현관 근처에 폭죽을 터뜨린 흔적이 있었다. 8월 18일 길일이라 하여 이날을 택해 여기저기서 잔치가 벌어지는 것 같았다. 2층에 올라서니 입구 테이블도 잔치 분위기였다. 손님 뒤에 선 여자 2명이 축하사진을 찍기 위해 그림을 펼쳐 들고 서 있었다. 예약이 되어 우리가 앉을 테이블에 밥과 기본 메뉴가 올려져 있었다. 일행이 자리에 앉자 요리가 순차적으로 한 접시씩 나왔는데 맛은 괜찮은데 양이 많아서 음식이 남았다. 테이블에 미리 놓여 있는 술은 과실 맥주라고 하는데 마셔보니 샴페인이었다. 2시 10분에 식당을 나와 서안 역사박물관을 보러 갔다. 10분쯤 후 당도하여 입구 서점에서 전시 도록을 사고 안으로 들어가 차례로 관람을 했다. 그 곳도 여느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그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시대 순으로 전시해 놓았는데, 서안의 역사적 실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곳을 보고 그 날의 마지막 답사지 대안탑으로 이동했다. 그 곳에 도착해 여행사 직원이 표를 사는 동안 앞 광장에서 탑을 보며 사진을 찍었다. 유서 깊은 곳을 찾아온 감회가 절로 일어났다.
이 곳 대안탑 주변은 그 주위로 건물이 많이 지어지고 있었다. 중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최를 위해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서안 같이 지명도가 높은 관광 자원이 있는 주변은 혼란스러울 만큼 많은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서안은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곳으로서 현장이 구법을 향한 출발지이기도 길목이었다. 실크로드를 통해 교역이 활발했던 시절에는 그 여정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현재의 공사를 벌이는 모습을 보니 마치 그 때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듯이 보였다.
탑을 세울 당시에는 없었을 담장이 둘러치고 문을 설치해 놓았다. 정문으로 들어가 먼저 탑을 찾아갔다. 탑 내부 관람은 일정에 없었지만 별도 요금을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탑 내부는 맨 윗층까지 계단으로 오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서유기에서 삼장법사로 불리는 현장 스님은 중국 최초로 서역(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온 구법승이다. 불교 경전은 논장, 경장, 율장 3가지로 구분하는데 삼장은 그 경전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삼장법사는 그것을 모두 가져온 스님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며 그의 법명은 현장이다. 그 곳에서 현장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탑이었다. 7층 탑이지만 높이가 61M로 7층 건물보다 훨씬 높았다. 그 계단을 오르는 것은 마치 현장이 겪었던 구도의 길을 상징하는 듯 했다.
그 탑을 대하니 현장의 자취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서유기는 그의 행적을 소재로 쓰여진 것인데 만난을 무릅쓰고 행한 구도의 열정이 그 소설의 소재가 되게 했을 것 같다. 현장에 의해 중국에 불교가 확산되게 하였으며 문화를 크게 바꾸어 놓은 계기도 되었다. 그리고 그의 행적을 거울삼아 인도로 법을 구하러 떠난 사람도 있었고 이 곳에도 많은 구도자가 몰려들었다. 신라의 원측대사도 이 곳에 왔었다고 한다.
대안탑을 보고 6시경 저녘을 먹기 위해 떠났다. 그것으로 중국에서 답사 일정을 다 마치게 되었다. 식당은 어제 갔던 장소인데 메뉴는 어제와 달리 현지식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시간이 남아 공항에 가기 전 다시 대안탑의 야경을 보기 위해 광장으로 갔다. 그 곳은 표를 사지 않고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잇는 곳인데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주차장에 내려 걸어 들어가니 약간 오른편으로 대안탑이 야경으로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축제하듯 즐기고 있어 활기가 넘쳐났다. 탑을 지을 때의 의미와 현재 삶 속에 문화로 용해된 의미가 비교되었다.
8시 30분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비행기 출발 시각은 1시 30분인데 9시 20분에 공항에 도착되어 시간이 많이 남았다. 밖에서 한시간 가까이 머물다 검색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 때까지도 출발 시간이 많이 남아 지루하게 기다리다 비행기에 탑승했다.
잠시 후 비행기가 이륙했다. 깜깜한 밤이어서 창공의 느낌을 별로 느낄 수 없었다. 모니터에는 1만200m 상공을 시속 805km 속도로 가고 있다고 표시되었다. 도착할 인청 공항 날씨는 맑고 기온은 27도라고 나타났다. 3시 55분경 국제공항에 도착 예정이라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옆자리 앉은 사람의 권유로 양주를 한 병 샀다.
3시 40분 공항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밖으로 나와 인사를 하기 위해 뒤에 나오는 일행을 가다렸다. 잠시 후 일행이 다 나오고 있었다. 옆에 잇던 남자분이 함께 여행했던 일행에게 다가가 포옹을 했다. 어머니가 남편을 소개해주어 여행 막바지에 다시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늦은 시각이어서 일행들은 짧은 작별 인사를 하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070819 김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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