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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제목

07 고향을 바라보며

작성자
김석환
작성일
2009.11.10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688
내용

고향을 바라보며

고향을 떠난지도 어언 많은 세월이 흘렀다. 볼일이 있어 오랫만에 고향을 찾았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어제 밤 12시 전주에 도착하여 터미널 앞 찜질방에서 눈을 부쳤다. 아침에 일어나 덕진공원 근처 콩나물 국밥집에서 밥을 먹고 볼일을 보러 택시를 타고 완주군청으로 갔다. 전주역 방향으로 난 큰 길을 가다 내가 태어나 살았던 부근에 이르자 이 곳에 살았던 시절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고향인 터에 그 곳을 지나며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그리 되는 것이다.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택시 기사에게 옛날 살던 주변을 둘러 가자고 했다. 나는 전주에 갈 때마다 시간이 나면 그 주변을 서성거리는 버릇이 있다. 지금의 고향은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그 때의 모습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흐른 세월만큼 아쉬움도 삭여진 상태여서 변한 현실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고향의 모습을 잃어버린 아쉬운 마음이 늘 한구석에 있다. 도시로 변하면서 지형이 바뀌어 내가 살았던 동네의 위치를 정확히 가늠할 수도 없게 되었지만, 집 앞에서 바라보이던 건지산이 그대로 있기에 그로부터 어림 짐작 할 수는 있다.

우리 동네는 현재 있는 전북대 의대 동쪽 끝자락쯤이다. 그 뒤로는 저렇게 넓어야 할지 의아할 정도로 병원이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기야 땅값이 상대적으로 싼 지역이어서 장래를 위해 더 넓게 차지할 생각을 했을 것 같다. 그 차지한 부지가 하도 넓어서 옛날에 인후동 쪽에서왕릉이나 덕진 연못으로 가기 위해 걸어 다니던 인상 깊은 길이, 그 위로 지어진 의과대학 부지로 덮여 있어서 지하보도가 되어 있다. 택시가 바로 그 곳을 빠져나가 박물관 앞과 호성동을 둘러 군청으로 갔다.

호성동은 전주역 맞은 편 쪽인데 고향 살 때 가본일은 없다. 그 산 반대편 경사지에 위치해 있던 공동묘지가 집에서 보였었는데, 그 너머는 알 수 없는 깊은 산일 것으로 여겼었다. 그런데 그 앞에 전주역이 들어서면서 시내처럼 되었다. 동쪽 경사진 산 기슭에는 예전부터 있었을 것 같은 과수원이 있고 그 앞으로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제대로 고향 체취를 느끼지 못한 채 택시가 군청 앞에 도착했다. 그래도 차 안에서 고향 예기를 나눠준 기사가 고마웠다. 그 분은 임실이 고향인데 40년 전쯤 전주로 이사와 살고 있다고 했다. 차에서 내려 민원봉사실에 들어섰다. 용건을 말하니 3층에 있는 부서로 가라고 했다. 낯선 공간을 느끼며 3층 계단을 올라가다 뒤쪽으로 난 창 밖 풍경이 보였다. 그 순간 그 풍경에서 어슴푸레 낯익은 기억이 떠올랐다. 유적처럼 원래대로 남아 잇는 논바닥이 보였다. 분명 그 곳은 건지산 쪽에 외딴집처럼 놓여 있던 고향에서 느끼던 풍경이었다. 순간적으로 뭉클한 감정이 되었다. 나는 반갑고 그리움이 왈깍 솟아나 한동안 멈춰서서 바라보며 기억을 뒤졌다.

볼일을 보고 나서 다시 아까 밖을 보던 곳에 서서 바라보다, 뒤쪽으로 나가 보려고 군청 뒷문을 나서 담장 끝으로 갔다. 그러나 울타리로 막혀 있어서 더는 나갈 수 없었다. 담장 끝 모서리에 서서 보니 아까 보이지 않던 곳이 새롭게 보였다. 그런데 정말 추억의 장소가 남아 있었다. 그 곳은 분명 내가 논뚝길을 걸었을 곳 같았다. 논바닥이 남아 있었다. 철거 후 이주민을 위해 지은 판자촌이 있었다. 그 집들은 내가 기억하는 그 장소에 지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 일대가 메워지지 않고 그와 함께 남겨진 것이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 시절 정황이 다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군청 뒤 동쪽으로 보이는 곳이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고 거기서 서쪽으로 좀 멀게 보이는 곳에 우리 동네가 있었다. 우리 집 앞을 지나서 조금 걷다 만나는 개울을 건너 산길을 따라 멀어져 가는 상여를 보았었다.

우리 동네는 열 집 정도가 드문드문 흩어져 놓여 있던 작은 농촌마을이었다. 인후동에서 왕릉으로 가는 길을 날맹이라고 불렀는데, 우리 동네는 그 날맹이 길에서 건지산 쪽으로 펼쳐진 경사지에 위치했다. 날맹이 길에는 한수형네와 장아찌를 담그는 집, 그리고 거기서 우리 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길자네, 경선이네, 그리고 그의 작은집이 바로 위쪽에 있었다. 다시 날맹이서 왕릉으로 가면 좌우로 과수원이 있었는데, 그 시작되는 곳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식구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한 집과, 그 밑으로 광국이네 집, 그리고 그 앞으로 미영이네 집이 있었다. 그 집은 시내에서 늦게 이사왔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다 같은 금암학교를 다녔다. 마을 친구중 모교인 금암 국민학교 동창생은 경선이와 광국이 둘이 있었다. 그 두 집은 친척이었던 것 같다. 집과 집이 떨어져 있는 사이에도 크고 작은 밭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우리 집은 마을에서 건지산 쪽으로 나즈막히 경사진 지형의 끝자락에 위치한 외딴집이었다.

우리 집은 대지 크기가 약 100평정도 되었을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지금 같은 규모 개념이 없는 단지 집이었다. 우리 집은 한옥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양식을 갖춰지은 집은 아니었다. 그 집에 살 때는 좋고 좋지 않고를 떠나서 그냥 집으로 여겨졌을 뿐이다. 하기야 어려서 양옥과의 차이도 구분할 만큼 아는 것도 없었다. 전쟁이 나기 전 정착해 지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그 때 집을 지은 목수가 놀러 오기도 했던 것 같다. 집 모양은 -자집인데 북동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어른들이 집을 짓는 재목을 앞산에서 직접 구해서 지었다는 말을 들었었다. 우측 끝에 부엌 그 앞에 방 그 다음에 가운데 방이 있었다. 마당쪽 마루판 아래에 있는 아궁이에서 불을 땠던 그 방을 같이 썼는데 혼자 있기 좋아하는 나에게 맞지 않았다. 그 때 집의 기억은 불편함 뿐이었다. 가끔 비가 새서 기와를 고치고 짚으로 역은 지붕을 다시 잇고 해야 했다. 그런 때는 시내 양옥에 사는 친구가 부러웠다. 그리고 우측으로 부엌과 방이 위아래로 붙어 있었다. 그 부분은 따로 살림을 할 수 있어서 세를 주기도 했다. 집에서 바라보는 왼편에 2칸의 헛간이 있었다.

뒷마당은 부엌과 통해 있어서 집을 한바퀴 돌아볼 수 있었다. 집은 크고 작은 나무가 심어진 울타리가 있었다. 뒷마당에서 뒤쪽 언덕진 위로는 무성한 대나무 숲이 둘러쳐 있었는데, 그 중간중간에 측백나무도 있었다. 또 건물 좌우측과 앞으로도 대나무 측백나무 까죽나무 등으로 된 울타리가 있었다. 그리고 집 앞에는 마당이 있고 우측에는 장독대가 있었다.

우측에서 뒷마당으로 돌아가는 측면은 마을길과 접해 있었다. 그 길은 건지산 쪽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울타리 안으로 길 옆에 돼지우리와 변소 잿간 등이 있었다. 닭을 기르기도 했다. 지금도 농촌 가옥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시설들이다. 그리고 뒤로 돌아가면 뒷마당이 있었다. 화단이 있고 박태기나무 등이 심어져 있었다. 그 뒷마당은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었다. 뒤쪽 밭과 지형차로 생간 언덕에 토끼 굴이 있었다. 그 곳에 토끼를 길렀는데 내가 팠던 것 같다. 집 앞에는 우물이 있었다. 우물은 마을로부터 내려오는 길가에서 집터보다 1M정도 낮게 있었다. 집을 짓고 아버지 형제가 우물을 팠다고 한다. 들에 일하러 가거나 산에 다녀오는 사람들은 길목에 있는 우리 우울물을 마시고 갔다. 그러면서 물맛이 좋다는 말들을 했다. 대문을 나서는 바로 앞에는 논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른 집 소유였다.

길 우측에는 고추를 주로 심는 텃밭이 있었는데 우물에 제일 가까운 쪽은 밭을 구분하여 재를 버리고 쪽파나 시금치 등을 심었다. 그리고 그 너머 황토밭에는 수박이나 참외를 주로 심었다. 대문 좌측으로 가면 토란이나 참깨를 주로 심은 작은 텃밭이 있고 그 뒤에 밤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하지만 밤은 작고 잘 열리지 않았다. 거기를 지나가면 주로 배추를 심었던 밭과 그 앞으로 논이 있었다. 그 밭 밑으로 시작되는 논 가운데쯤에는 크지 않은 방죽이 있었다. 그 방죽에는 물고기가 많았다. 특별히 개울이 없는데 물이 마르지 않았다. 위쪽 어딘가 수맥이 있었을 것 같다. 방죽 앞의 고랑을 타고 물이 흘렀는데, 물이 차서 그 부근의 모는 잘 자라지 않았던 것이 생각난다. 여름철엔 항상 물이 차 있을때는 몰랐지만, 얼음이 녹은 봄에 방죽을 정비하기 위해 물을 퍼내면 팔뚝만한 붕어나 미꾸라지 버들치 등 갖가지 물고기가 나왔다. 넓지 않은 방죽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물고기가 사는지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그 방죽은 늘 호기심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세계였다.

집 바로 뒤에 있는 밭에는 감나무가 있었다. 단감나무였는데, 더운 여름에는 그 밑이 시원한 그늘이 되어 멍석을 깔고 누울 수 있는 좋은 쉼터가 되었다. 그 밭에는 검은 콩을 주로 심었었다. 그리고 그 위쪽에 있는 비탈진 밭에는 주로 고구마나 콩을 심었다.

한옥은 난방과 취사를 직접 불을 때서 해결한다. 그래서 매일 불을 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땔감이 있어야 한다. 농촌에서 땔감 구하는 것은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반드시 들여야 하는 수고였다. 농촌의 집들은 모두 같은 상황이었다. 땔감으로 가장 좋은 것은 소나무 숲에서 솔닢이 떨어져 쌓인 낙엽이었다. 그것은 불도 잘 타고, 타고 난 후 불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은 채 열기를 오래 지니고 있었다. 그 불에 고구마나 감자 등을 넣어두면 잘 익었다. 그렇게 일상에서 늘 쓸 수 있는 연료가 많이 필요했지만 그 양은 늘 쓸 땔감으로는 턱 없이 부족했다.

땔감 구하는 일을 나무 하러 간다고 했다. 그 때는 누구나 나무를 하러 다녔다. 잠시라도 땔 감 걱정을 잊으려면 땔감을 비축해두어야 했다. 그래서 농작물을 추수하고 얻은 집단이나 콩대등은 헛간에 아껴 쌓아두고 있었다. 평소 나무를 하러 간 곳은 앞산인 건지산이었다. 그런데 나무를 하다 간수를 만나서 모두 빼앗기기도 했기 때문에 간수라는 말을 가장 무서워했다. 간수란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감시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나는 직접 맞닥뜨린 일은 없지만 어른들은 갈퀴를 빼앗기고 오기도 했다.

건지산을 가기 위해 집에서 내려가다 보면 개울이 있었다. 개울은 어린 시절 가운데 가장 즐거운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여름에 소나기가 오고 난 후에 친구들과 물고기를 잡으며 첨벙거리고 다녔다. 그 개울 역시 내 삶터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이었다. 비가 와서 큰물이 날 때도 있었는데, 그러면 개울이 넘쳐서 그 너머 산을 갈 수 없었다

농촌은 삶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늘 많다. 삶의 수단이랄 수 있는 농사는, 씨 뿌리고 김을 매고 수확하는 노동의 반복이다. 그 경작뿐 아니라 갈무리하고 정리하는 데도 많은 일이 따른다. 그래서 농촌에 살면 학생일지라도 늘 그 환경에 맞닥뜨려지게 되고 일에 참여하게 된다.

가계 수입원은 토지에서 나는 농작물이었다. 앞서 말한 밭이 제법 있었지만 그 것으로 한 가정이 안정된 가계를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농촌에서 밭이란 경제적 수지를 보장되는 의미의 것이 아닌 지녀온 땅에 단지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그 모든 땅에서 얻는 수확은, 논에서 나는 벼 10가마 정도, 그리고 배추, 무우, 고구마, 콩 등이었다. 쌀은 우리 집 1년 식량으로도 부족했다. 배추, 무우 등을 길러서 밭떼기로 팔기도 했다. 고구마 등은 거둘 때 많은 양을 한꺼번에 팔기도 하고 저장해 두었다가 조금씩 내다 팔기도 했다. 그런데 고구마는 저장기간 동안 얼거나 썪는 것도 많았다. 수박이나 참외는 아버지가 안 계신 이후로는 심지 않았다.

그래도 농촌 생활에서는 오늘날처럼 돈 쓸 일이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농촌 생활에선 기본적으로 식량과 땔감이면 되었다. 하나는 먹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고, 하나는 주거구조상 삶의 영위에 필요한 것이었다. 평소에는 그냥 주어진 환경에 순응해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경제적 어려움은 등록금 같은, 돈으로 직접 해결해야 하는 일이 닥칠 때 느끼게 되었다. 생활도구의 구입이나 식량을 사기 위해 작은 돈이라도 늘 필요했다. 하지만 집안 사정은 쪼들리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나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집안 형편이 더 어렵게 된 것은 국민학교 2학년 때 닥친 우환 때문이었다. 나는 그 후로 말 없는 성격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의 아버지 일이 겹쳐 아무런 의지도 할 수 없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어머니와 나 두 여동생 만 살았다. 쪼들림속에 마음도 늘 위축되었다. 내성적인데다 농촌에 살면서 신문을 돌리거나 하는 일도 생각할 수 없었다. 밭때기로 판 때나 어머니가 집에서 기른 채소를 머리에 이고 장에 내다 판 것이 유일한 현금 확보 수단이었다. 그러나 큰 수입이 생길 리 없었다. 등록금 독촉을 받아도 집에서는 말을 잘 하지 못했다. 미래에 대해서 상의할 사람도 바램도 없었다. 학교에 다니는 것은 형식적 과정을 거치는 의미로 여겼다. 희망이 느껴지지 않은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형편이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마음뿐이었다. 두렵도록 변화 없는 현실에서 허공 같은 미래에 막연한 희망을 걸 수 밖에 없었다. 스스로 무엇인가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는 때가 오기를 마음속으로 바라는 사이 작정 없이 세월이 흘러갔다.

고향에 살면서 나에게 인간적 성장의 의미로 여길 수 있는 것은 자연을 느껴 온 것 밖에 없었다. 집 주위 논밭에서 철따라 자라는 작물들의 신비스런 성장의 변화와 생명력, 그리고 집 앞으로 넓게 보이는 논과 개울, 건지산이 어우러진 자연을 느끼고, 뻐꾸기 소리를 듣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내 안에 희망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졸업 전 서울로 떠나와서이다. 꼬르뷔제 작품집을 보고 건축의 길을 꿈꾸게 되었다. 하지만 홀로 떠나온 후 고향은 나의 현실적인 삶터가 아니게 되었다. 한 인간의 삶의 체취와 기억이 서린 소중한 곳이지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날 파헤쳐져서 모습을 잃고 말았다. 현재 상태로의 변모가 그 때 된 것이다. 하기야 빠르게 변해 가는 세상에서 늘 그대로 있기를 기대하기가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한 인간의 삶을 살았던 터전이 상실된 의미는 좀 더 근원적인 문제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고향의 시절로부터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나갔다. 지금은 잃어버린 삶터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뒤돌아보는 고향이 되었다. 고향은 행복의 의미이건 불행의 의미이건 나를 형성하였다. 그래서 떠올릴 수 있는 것만도 소중한 의미일 수 있다. 그 시절 마음에 드리워진 절망감과 외로움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지만 가끔은 고향의 모습이 한 없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2007. 1. 31 김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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