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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제목

06 한국건축가협회답사기행

작성자
김석환
작성일
2009.11.10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971
내용

2006 건축가협회 답사 기행 --- 수원 화성 답사

건축가협회 건축 답사의 전통
1994년 건축가 협회 회원이 된 후로 오늘 같은 협회 답사에 참가한 것은 1999년이 처음이었다. 건축문화의 해인 그 해 12일 동안 안동과 경주 등지로 답사를 다녔는데, 첫날 답사를 마치고 오천 유적지에 숙박 하면서 한옥 체험을 곁들였었다. 그런대 그 때는 초심자로서 약간의 낯가림도 느꼈었고 찾아간 답사처의 문화유산도 생경하게 마주했었다.

그동안 건축가협회 답사에 참여한 것은 내가 전통 건축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후의 시간과 궤도를 같이한다. 1997년 미국 기행을 다녀오면서, 나의 관점에서 한국적 풍토에 기반한 건축적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여 내 건축적 자양분으로 삼고자 하는 생각에서 우리 건축을 돌아볼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뒤로 전국 곳곳에 있는 우리의 전통 건축 유산을 틈틈이 돌아보았다. 우리 전통건축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직접 돌아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왜 진작부터 건축가협회에서 시행하는 답사에 참가할 생각을 갖지 않았었을까 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그 후로는 사정이 있어 불참한 해를 빼고 거의 다 참가했다. 그래서 건축가협회 답사 참여가 나에게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그리고 2000 답사 때부터는 참가할 때마다 거의 매년 답사기를 썼다. 또한 그 사이 협회 활동에 참여하고부터 회원들과 만나는 일이 비교적 많아진 때문인지 낯가림도 덜해지게 되고, 나 스스로 가본 곳도 많아져서 점차 마음이 편해진 상태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건축가협회 답사에서 특별한 모습 중 하나는 원로 회원이 많이 참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답사 때마다 만나는 몇몇 분들은 단골 같은 느낌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건축을 만나러 가는 그런 행사에서는 모든 참가자가 건축에 입문할 때의 순수한 마음 그대로의 분위기가 된다.

그동안 건축가협회 답사 행사는 지회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행사이기도 했다. 특히 학교에 계신 회원들이 공로가 컷다, 그 때는 마치 자기 고장에 온 손님들을 맞이하는 분위기로 지회에서 점심 식사 등을 협찬할 때가 많았다. 그것이 건축가 협회의 인간적 유대감을 형성해온 미덕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동안 참가했던 답사지는 삼국시대의 백제지역, 서울, 수원, 강화, 그리고 인동, 충청지역 등인데 나 나름대로 이 답사를 통해 전국을 느끼는 전통의 맥이 생기게 되었다. 답사는 어느 한 지역을 이해하고 나면 이웃 지역과 연관을 통해서 생각이 넓어질 수 있다. 모두 중요한 지역이지만 건축가 협회답사를 통해서 전국을 돌아보려면 아직 멀었다. 남도 끝자락이나, 지리산 자락, 그리고, 안동, 경상도 지역, 강원도 지역 등 함께 가고 싶은 곳이 많다. 그러나 앞으로 답사의 성격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른다.

답사 출발
예정 시각에 출발지인 사당역에 당도해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오르니 아무도 온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잠시 차 안에 혼자 있다 보니 참가자들이 하나 둘 올라탔다. 하지만 몇 사람 오르지 않았는데 차가 불발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구름이 많이 끼어 흐린 날씨였다. 서울과 가까운 곳이어서인지 직접 오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813분 사당역을 출발해 터널을 831분 의왕 IC에 당도했다. 그리고 과천 공원 옆 도로로 가는 동안 터널을 지났다. 인근에 낮은 산자락들을 펼쳐 있는 이 주변은 예전엔 여백적인 곳이었으나 지금은 이곳저곳 도시가 되어 있다. 837분 수원 진입하는 국도에 들어서 부곡-수원 지하차도 공사구간을 지났다. 그리고 조금 후 농촌진흥청과 기상대 앞을 지났다. 교과서에서 수원을 농업도시로 배운 것이 생각났다.

846분 수원역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오기수 전 회장과 변용회장 김창수 부회장 한종언, 최승원 선생과 박경립, 이왕기 교수가 승차했다. 그래도 참가 인원이 많지는 않았다. 오늘 행사를 주관한 역사분과 위원회 박경립 워원장이 건축사 시험, 문화 보수 기술자 시험, 각 대학 졸업작품전이 겹쳐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올해는 답사에 참가한 사람이 예년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그럴수록 매년 참가하신 분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 보였다. 이번에도 그처럼 빠짐없이 오시는 분과 금성건축에서 함께 오신 몇 분, 그리고 사무국 직원들로 인원이 채워졌다. 하지만 그동안 매년 참석하시던 분들 가운데에도 많은 분이 보이지 많았는데 요새 행사가 많은 계절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동안 답사는 대부분 봄철에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답사 기억은 생명력이 느껴지는 들녘을 느끼며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행사 스케줄이 많아 미뤄져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가을철 답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행사 때 인원이 적으면 활기가 떨어지지만 상대적으로 더 오붓한 시간이 되기도 한다.

행사의 시작
945분에 창룡문에 도착하니 건축가협회 경기 지회 소속으로 참가한 몇 분이 나와 계셨다. 거기서 답사를 시작했다. 안내와 설명은 김동훈 경기지회장이 맡아주었다. 김동훈 소장은 최근 화성 주제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일도 많이 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 사이 박사까지 마쳤다는 것이 평소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생각되었다.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 축조한 이 성은 우리나라 성곽 중 최근의 성역 적업에 해당할 것이다. 과거에 성은 안정된 삶터 유지의 필수 조건처럼 인식되었다. 고대 국가가 성립한 이후 나라의 책임은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 하는 것이고, 그 수단으로서 성을 쌓아 그 안에 살게 했다. 그래서 성을 만드는데 많은 공력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성을 쌓아왔다. 특히 우리나라는 성()의 나라라고 할 만큼 고대로부터 무수히 많은 성이 만들어져 왔다. 성벽으로 방호되는 그 안에서 안정된 삶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그 성은 전쟁과 국가 변천, 그리고 새로운, 인구 증가에 따른 새로움 주거지 생성 등에 의해 계속해서 만들어져 왔다. 그래서 해미읍성처럼 조선시대 쌓은 성도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낙안읍성 등은 지금도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화성의 건설도 과거 지방에 지은 여느 읍성처럼 통상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은 그것을 필요로 하던 시대의 문화적 산물이다. 즉 그 시대 군사력과 무기에 대해 방어 수단이 될 수 있었던 때 유효한 장치이다. 그러나 현대에 사용되는 무기와 전쟁양상에 대해서는 그것이 별로 소용이 없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에는 더 이상 그러한 성을 쌓을 필요가 없어지고 말았다.

화성의 특별함
화성은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 될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성의 기본 구조는 고대로부터 정립되어 왔다. 화성의 특별함은 자연 지형과 어우러진 맵시와 성으로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여러가지 기술적 우수성 들이 예기되고 있다. 그러한 화성은 건설 계획 때부터 완벽한 기능을 발휘케 하기 위한 면밀한 연구 검토가 있었다. 가상의 전투 상황을 예측하여 실제 전투에서 효과를 거둘 수 있게 설계되었다. 화성의 전체 외곽길이는 약 6Km인데, 성의 기본 골격은 성벽과 4대문 그리고 지휘와 훈련, 진지 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지형의 잇점을 살리도록 고려되어 있다. 화성은 영역의 크기 인구수용의 규모, 공격과 방어시설, 시설물의 독특한 구조, 한국적인 맵시 등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곳에는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옹성이 있다. 성은 드나들기 위해 필수적이지만 상대적으로 파괴에 취약한 구조를 하고 있다. 그런 성문을 부수는 방법은 대개 커다란 나무로 된 일종의 해머인데, 그것을 여러 사람이 도움닫기를 하여 성문에 부딧혀 파괴한다. 그런데 항아리 모양의 옹성을 두면 도움닫기가 어렵게 된다. 그 외에도 여장, 문루, 포루, 공심돈 등 눈여겨볼 특별한 시설이 있다.

화성은 문루 4대문 ( 장안문, 팔달문, 창용문, 화서문), 암문(5), 수문 2, 은구 2, 장대 2, 공심돈 3, 각루 4개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서북각루, 서남각루(화양루) 동남각루, 포루(砲樓) 5개 포루(鋪樓)(5) 북서포로(각건대), 북푸루, 서포루, 동일포루, 동이포루, 봉돈 1, 노대 2, 8, 용도 1, 적대, 포사 3, 성신사 1, 사진단 1, 후당 1, 그리고 행궁 등 여러 시설들이 갖춰져 있다.

그리고 성벽위에 여장을 설치하고, 사수를 배치하여 효과적으로 적을 사살 할 수 있게 간격에 따라 화살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당시에도 여전히 화살을 주 무기로 삼고 있었다. 여장의 높이는, 사람들을 보호 할 수 있게 정했다. 그리고 성벽을 따라 전체를 돌아보도록 보행로가 되어 있고 그 곳곳에 성곽 주변을 바라보는 루 등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성곽 안쪽으로 적당한 터에 훈련용 장대가 시설되어 있다.

답사 진행
창룡문에서 답사를 시작하였다. 창룡문에도 옹성이 있는데 그 곳은 옹성 정면 중앙에 문을 낸 장안문이나 팔달문과는 구조가 조금 다르다. 즉 문이 없이 옹성 우측으로 트인 옆으로 돌아들게 되어 있다. 창룡문 천정에는 봉황새가 그려져 있다. 창룡문을 나와 오른편 방향으로 성벽의 순라 길에 올라서서 저만치 보인 동북공심돈으로 갔다.

화성에서 가장 특이한 시설인 동북공심돈은 공격용진지로서 소라각 이라고도 하는데 그 안에는 소라의 내부처럼 통로가 나 있어 그렇게 불리게 된 듯하다. 그 통로에서 밖으로 포와 화살 등을 쏠 수 있는 구멍이 있다. 동북 공심돈은 탱크처럼 두꺼운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호된 상태에서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이다.

동북공심돈의 외벽은 공격에서 무너지지 않게 두텁게 되어 있다. 그 위치도 적의 움직임을 가장 잘 살필 수 있는 지점을 택해 자리를 잡았다. 즉 동북 공심돈은 성의 동북 코너에 있으면서, 평지에서 오는 상대의 움직임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지점에 있다. 공심돈은 기능적으로 지어진 것이지만 전벽돌의 질감과 총구가 어우러진 모습에 의해 조형으로도 매우 완결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동북 공심돈의 벽두께는 적의 포격에 견디도록 1-1.2M정도로 두껍게 되어 있다. 그리고 벽에 낸 포문을 통해 적에게 공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내부 통로에서 빙빙 돌아가면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 갈 수 있다. 그리고 공심돈 지붕에는 루가 설치되어 있고 루 주위에 성벽처럼 여장이 설치되어 있는데 여장은 성 안쪽으로 낮고 바깥쪽으로는 높게 되어 있다. 지붕은 가리개 역할을 하여 불화살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화성의궤에는 현재 모습과 달리 지붕이 성 바깥까지 되어 있다. 공심돈 위 지붕에 서니 주변 전체가 조망되었다. 그 곳에도 역시 여장이 있어서 몸을 보호하며 적을 쏠 수 있게 되어 있다.

화성은 전통의 성곽처럼 산수와 어우러져 이루어내는 정취와 멋을 지니고 있다. 화산을 등지고 나즈막히 펼쳐진 경사지와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진 영역을 성곽으로 둘러치고 있다. 그리고 그 성 밖은 평야지대이다. 화성은 그 들녘을 경영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전시의 안전을 도모하여 지어진 것이다.

약간 내리막 경사가 진 곳을 이동하여 동장대를 지났다. 동장대는 1795715일부터 825일 사이에 완성했는데, 장용의 영 군사 지휘소가 있다. 동장대는 성안이 너르게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는데, 지휘소로서의 기능에 알맞게 루 앞으로 사열할 수 있는 터가 닦여 있다.

그곳을 나와 이동하여 암문을 보았다. 암문은 적에게 키지 않고 출입할 수 잇게 만든 것인데, 위치가 잘나타나지 않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침투가 어렵도록, 안팍으로 암문과 계단으로 되어 안에서 그 곳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감시 할 수 잇게 만들어 놓았다.

계속 성벽을 따라 가다 암문에서 밖으로 나갔다. 여장에는 전초앙1개 원초앙 2개가 있다. 돌로 쌓은 성벽 위에서 여장이 시작되는 부분은 전돌을 띠 모양으로 돌렸는데, 원래 그 부분에 적을 관찰하는 구멍이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복원하면서 엉터리로 해서 만들지 않았다. 치성은 중국의 축성 기술을 따온 것이다. 치와 치, 공격진지간의 거리는 화살 사정거리의 2배이다. 양쪽에서 사살할 수 잇게 했다. 포루 각루는 역시 공격시설인데, 위에서 불화살을 피할 수 있게 지붕이 있다.

동북각루는 방화수류정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는 건물이다. 주변에 연못과 멀리 보이는 산, 그리고 주변에는 소나무, 버드나무 등이 서 있다. 그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적이 그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전해 전쟁 기분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멍하니 구경하다 누각 담장에 낸 화살구멍으로 쏜 화살에 맞게 된다.

다시 이동하여 휴식처와 같은 분위기의 방화수류정 앞에서 올려 보았다. 화성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설은 공심돈과 수류 방화정이다. 주변에 연못이 잇어서, 휴식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수류 방화정은 성 곽 시설로서는 매우 특별한 곳이다. 즉 그 모습에 주변의 용연 등 풍광과 어우러진 전통적 풍류가 베어있다. 연 못과 산이 보이는 풍광이 있는 위치에 평범한 포루를 짓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방화 수류정은 루이기도 하고 지휘소이기도 하고 망루이기도 한, 복합적 기능을 수행하는 건물이었다. 방화수류정에는 마당보다 높게 월대가 만들어져 있는데 지휘관이 그곳에 앉아 전황보고를 받기도 했다. 또 맵시로써 적을 안심하도록 속이는 유인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돈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이 건물에 소요된 공사비는 육천양인데 보통의 경우보다 월등히 많은 비용이다.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성의 독특하고 멋스러운 이미지와 풍경을 낳았다. 그 앞에 있는 연못과 주변을 흐르는 개울과 함께 어우러진 그야 말로 건축적 풍경인 것이다.

방화수류정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다. 그 앞에 보이는 연못 이름은 용연인데 광교산에서 시작된 산줄기가 거기로 흘러 내려와 고인 곳이다. 동북각루 부근의 지세가 용머리 형상인데, 용연 앞에 용머리 바위가 있다. 방화수류정 기단의 가운데 부분은 전돌로 치장되어 있다. 방화수류정과 용연이 어우러진 경치를 용지 대월이라 하는데 그것은 화성8경의 하나로 꼽힌다. 방화수류정 토대벽에 벽돌을 쌓고 사마토로 채웠다. 사마토는 흙, , 모래 1:1:1 비율로 갠 것이다.

방화수류정 옆에 위치한 화홍문은 그 아래로 물길이 흐르고 있는 북수문이다. 문 아래로 물길이 지나갈 수 있게 7개의 홍예를 쌓아 물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 화홍문에서 성벽을 따라 포루를 지나면 장안문이 나온다. 그런데 그 문은 공사중이어서 성을 따라 계속 걸을 수 없었다. 장안문은 6.25를 겪으며 부숴진 것을 복원한 것이다. 김동훈 소장이 어려서 화성 이름을 외울 때, “화성 동문 도망가는 곳, 서문 서 있는 문, 남문은 남아 있다. 북대문은 부숴지고 없다고 외웠다고 한다. 북문인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을 통과하는 팔달로는 사통팔달 하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수원은 개성, 안성 등과 함께 근대적 상업 도시이기도 하다. 그 지역 사람들은 다 독하기로 소문나 있다. 그중에도 그 시절 개성 사람 발거 벗고 10리 뛰면 화성 사람 100리 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원 사람들이 더 독했다고 한다.
장안성으로 내려와 성 박을 산책하듯 걸으며 보았다. 북동포루를 지났다. 한국 토목학회 미국 토목학회 2004년 문화유산 랜드마크이다. 서북 공심돈 모서리를 둥글게 한 것은 쇠 꼬챙이로 돌을 빼지 못하게 한 것이다. 성벽과 겹쳐서 멀리 보이는 성의 풍경이 보인다. 성 안으로 들어가 다시 안 쪽에서 성 위를 걸으며 화서문 -북포루-북서포루- 적대(북서적대)를 보고 장안문에서 내려가 성 밖으로 걸어갔다. 1230분 식당에 도착하여 갈비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걷느라 시장 하던 차에 음식이 맛이 좋아 모두 즐겁게 식사를 했다.

120분 다시 식당을 출발하여 행궁을 보았다. 현재 행궁의 표고는 원래 표고와 2m 정도 차이가 난다. 행궁은 정조의 융릉 행차 때 임시 궁궐 기능을 가졌는데 일제 때 산산조각 냈다. 그리고 군대, 의료원, 농촌지소, 학교를 세웠다. 현재 화성 제 모습 찾기 운동을 하고 있다. 장락당(내원) 신풍루 봉수이 어전이다. 행궁앞 건물은 시에서 사들여 부수고 광장을 조성했다. 2시에 화성을 출발하여 220분 경기문화의 전당에 도착했다.

실용주의 시대정신의 반영
우리는 화성 건설의 배경과 과정을 기록을 통해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출발은 정조의 개인적 삶과 관련이 있다. 화성은 효행의 도시로 불리어지기도 하는데, 그렇게 불리는 까닭은 영조때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가 바로 정조의 친부로서 그의 아들인 정조가 이 곳에 천장하였고, 자신이 죽으면 그 옆에 능을 써 달라고 유언해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융릉과 정조의 건릉이 함께 있는 융건릉은 그 효행의 상징이 되고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불행한 사건은 정조 일생에서 가장 치열한 의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요인이었던 듯 하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당시 치열했던 당쟁의 여파가 작용되어 있다고 생각한 듯 하다. 그가 개혁 정치를 표방하면서 신하들과 치열하게 대치 구도를 유지하게 된 것은, 그 일을 교훈 삼아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당쟁 사회에서 축적되는 신하들의 정치적 힘을 무력화하려 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화성을 건설한 후 수원으로의 천도설도 그러한 정치적 행보와 관련해서 해석하기도 한다.

이 성에서 주목하는 점은 이 성을 축조하던 시대에 일고 있던 실학의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른바 실학 정신에는 근대성과 같은 맥락이 있는데, 과거의 성리학적 이념성과 비교할 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중시되어졌다. 그리고 이 성을 살펴볼 때도 그러한 합리적 사고에 따른 합리적 정신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동원된 모든 기술이 새롭고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 축성술에 중국 등 외국의 축성 기술 등을 연구 분석하여 참조하기도 했다.

이 성을 짓는 과정을 살펴보면 요새에 공사를 추진하는 것과 같은 마인드가 느껴진다. 매우 근대적이라 할 수 있는 과학적인 의지와 노력이 가해진 것이다. 아마도 근대 적인 축성의 사레로 꼽을 수 있다. 그것은 우선 건설계획과 설계의 체계화, 건설인력 동원 및 건설 공사 계획의 수립과 합리적 운용의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 건설 계획은 그 이전의 사례를 면밀히 검토하여 가장 효과적인 성이 되도록 고안한 것이다 성의 윤곽은, 지형지세를 활용하였고, 성안의 재활과 출입의 고려, 그리고 공격과 방어에 필요한 시설을 두었다. 성의 입지에 관한 자연 지형지세를 따르고 있다. 그것은 전통적인 개념과 같다.

축성의 계기
이 성의 축성 배경은 매우 사적인 동기를 갖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조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 생애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 화성 건설은 양주 배봉산에 있던 장헌세자(사도세자--후에 장조로 추승됨)묘를 현재의 융릉 위치에 천장키로 한 것이 발단이었다. 천장하기 전 그 능지에는 주민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일을 진행하려면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이주시켜야 했다. 그래서 현재의 화성에 이주를 위한 읍지를 조성하였다.

화성을 짓기 전, 이 곳은 그렇게 이주해온 사람들이 살고 있던 상태였다. 그 후 수원 유수가 그 읍에 대해 성을 건설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 축성 논의가 시작되었다. 조정에서는 그에 대한 논란을 거듭한 끝에 성을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왕의 의지와 주변 사람들의 융릉에 관한 정조의 각별한 의식을 염두에 두고 건설되었다. 정조는 특히 체제공 등 고위 관리를 임명함으로서, 그 일에 관한 성격을 높였다. 그리고 국가적 공력이 기울여졌다.

정조의 능행 등 행차를 게기로 화성안에 행궁을 갖췄다. 그리고 행궁이 있는 것부터 마을의 성격이 특별성을 띠게 되었다. 행궁은 배산 임수의 형국을 하고 있으며 규모도 그 격에 맞게 크게 되어 있다.

현재의 화성
현재 화성은 성을 축조할때의 목적대로 쓰이고 있지 않다. 그 한정된 구조 영역은 깨어지고 그 것을 포함하여 광역 도시 구조로 편입되어 잇다. 그리고 성벽은 성 안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것이었으나, 이제 그 성의 안팎 구분 없이 형성된 도시에서, 역사적 의미를 띠고 특별히 취급되는 시설일 뿐이다. 그리고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의미로서 도시구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수원은 특이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이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위상을 갖고 있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현재 화성은 원래의 건설 목적대로 쓰이고 있지 않다. 쓸 수도 없다. 수원 같은 대도시에서는 더욱 그렇다. 낙안 읍성에서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상대적으로 성을 지을 당시 상활상을 이어갈 기반이 있다. 그러나 수원 화성은 도시내 편입되어 하나의 유물로서만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도시 구조상 제약 조건이 되기도 한다. 문화 시설의 보존과 도시 구조로서의 활성화 사이에 드러내지 않은 고민을 하고 있기도 하다. 문화유산으로부터 해제한다는 말도 나온다고 했다. 구도시(화성)와 현재 도시의 갈등과 문제 등이 해결할 과제로 남아 있다. (김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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