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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제목

06 금강산 기행

작성자
김석환
작성일
2009.11.10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3029
내용

금강산 기행


 금강산 초행길
지난 317일 밤 서울 교대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버스를 타고 서울을 출발, 무박 3일 일정으로 금강산 산행을 떠났다. 저녘 1030분 그 곳에서 2대가 출발했는데, 안국동 한국일보 앞에서도 5대가 출발하여 첫 휴게소에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체 참가자수가 250명 정도나 되었다. 첫 번쩨 휴게소에서 합류한 스포츠한국 이재영 국장과 두레 관광 장근수 부장이 번갈아 올라와 이번 여행에 대한 안내를 했다.
금강산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어린시절 부터였다. 간혹 어른들이 하는 예기를 듣기도 했고, 학교 다닐 때 배운 노래에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라는 가사도 있었다. 하지만 분단된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곳으로 일찍이 체념했던 곳이다. 그렇지만 다른 북한 지역과 달리 금강산은 사람들 마음속에 자랑스런 우리의 산으로 자리매김 되어 있는 듯 했다.
사실 금강산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할 때면 반드시 연관지어 말 할 수 밖에 없는 곳이다. 그 곳의 기록은 역사적으로 화랑도가 삼일포에서 심신수련을 하였다고 하는 신라때부터 등장한다. 그리고 금강산은 진시황이 삼신산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라고 한 삼신산중의 하나로 전해오고 있다. 그 때문인지 그 명성은 나라 밖까지 널리 알려져, 조선시대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금강산 구경을 시켜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태종 때 하륜이 명나라에서 온 사신에게 왜 그렇게 금강산을 좋아하느냐고 불어 보았더니 천하제일의 절경이라 하니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한다.
또 금강산은 우리문화의 자긍심을 갖게 하는 진경산수의 탄생 무대이다. 그래서 그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금강산은 꼭 한번쯤 다녀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길이 열린 후 좀처럼 서둘러 나서려는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한정된 시간과 장소, 안내에 따라 둘러보는 것으로는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었다. 또 출입 과정에서 겪게 될 경직된 수속과정이 떠올려지게 되는 것도 망설이게 되는 요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스포츠 한국에서 주관하는 산사랑 자연사랑에서 평소 정기적으로 거행하는 산행처럼 일정을 잡은 것이 편한 마음으로 합류케 된 계기가 되었다.
무박 여행이기 때문에 가는 차안에서 잠을 자두어야 했지만 제대로 잠이 들지 않아 뒤치닥거리게 되었다. 그 사이 버스는 밤길을 줄곧 달려 아침 340분 고성의 금강산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식당에 도착했다. 그리고 식사 준비때까지 잠시 차안에서 수면을 취했다. 530분에 인솔자가 차를 돌며 식사하라고 일행을 깨웠으나 곤한 표정이 되어 미적거리다 억지로 식당으로 행했다. 점심 식사 전까지 마음대로 사먹을 곧도 없을 것 같았다. 거기서 많은 사람이 뷔페식 아침 식사와 요령껏 세면을 했다. 동이 트고 싸늘한 아침공기를 쏘이니 잠이 달아나고 다시 금강산을 찾는 설레인 기분이 되었다.


번거로운 통관수속
630분 이윽고 차가 출발하여 우리측 출입국 사무소로 이동하였다. 차 안에서 미리 배부 받은 대한민국 출입국 신고서를 작성했다. 출발 15분 후 동해선 도로 남북출입 사무소에 도착하여 곧바로 수속을 밟았다. 길 옆 팻말에 속초 52 KM, 간성 26KM 위치로 쓰여 있었다. 그곳에서 마치 외국 갈 때처럼 짐 검색과 신분확인 등, 수속을 마치고 뒤쪽 광장으로 나갔다. 거기서 이곳까지 타고 왔던 차량과 달리 전체를 대상으로 일련번호를 매겨 좌석을 지정한 버스로 갈아탔다. 많은 사람이 수속을 밟고 다시 인원을 점검하느라 통과하는데 1시간 정도 걸렸다. 8시경 그곳을 출발 다시 북측 입국수속을 밟기 위해 이동하였다. 가는 도중 버스안에서 인솔을 맡은 현대 아산 직원이 북측 지역안에 들어서면 도로 이동시 손가락질을 하거나 주변을 촬영할 수 없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긴장되고 상기된 목소리로 신신당부하듯, 휴대해서는 안될 물품이나 주의해야 할 것들을 예기했다. 북한으로 들어갈때는 서적, 핸드폰 밧데리, 충전기, 노트북, PDA, 망원경은 금지하고 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일행은 안내하는데로 잘 따라주었다. 811분 휴전선을 통과해 북측 지역에 들어섰다. 안내원이 인근에 구월산 구산봉이 보인다고 알려주었다.
825분쯤 감호가 곁에 보이는 북측 출경소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줄을 서 있는 동안 반갑습니디다 반갑습니다.’ 하는 노래가 스피커에서 계속해 흘러나왔다. 그리고 금강산 관광을 환영합니다.”라는 프랭카드가 걸려 있었다. 출경사무소는 임시로 지은 간이철골 구조에 천막을 씌워 놓은 상태였다. 줄을 선 일행들은 조금 긴장해 보였다. 통과하는데 아까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다행히 아무 문제없이 모두 예정된 9시 북측 출경소를 통과했다. 밖으로 나와 가는 방향으로 길옆에 세워 놓은 차를 다시 찾아 타고 곧바로 출발했다. 주변 감호 주변에 보이는 산들은 철분섞인 화강석의 풍화된 질감과 등글둥글한 바위 등에서 특유의 조형감이 느껴졌다. 길을 가면서 해변에 펼쳐진 금강산 자락이 보였다. 산이 바다 가까이서 잦아들면서 자연하천과 모래사장이 시원스레 펼쳐진 모습이었다. 그런데 철도 건설을 하면서 산자락이 파괴되어 있어서 안타까웠다. 내륙쪽에 펼쳐보이는 농촌에서는 논에 보리 갈이하는 북한 농부들이 제법 너른 들녘에 띄엄띄엄 보였다.
920분 온정리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관광일정에 들어갈 순간이었다. 금강산에 처음 들어온 감회가 일었다. 차에서 내려 주변부터 돌아보았다. 온정각은 설악동 집단 시설지구 같은 분위기이다. 그러나 주변을 올려다 보니 구룡폭 쪽과 만물상 코스의 산 줄기가 목적지를 확인해주듯 펼쳐 보였다.

첫 금강산 구경 만물상 코스
937분 우리가 타고 온 관광버스에서 내려 33인승 버스로 갈아타고 첫 금강산 관광을 시작하였다. 우리를 인솔한 직원은 현대아산광관의 금강산 조장이었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 차창 밖으로 금강산 권역안에 지어 놓은 금강산 관광호텔과 교예단 숙소인 제2초대소 등이 보였다. 그 곳을 지나 올라가는 도중 차창밖에 잘 자란 소나무 숲이 보였는데 인솔자가 금강송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것은 홍송, 적송, 미인송으로도 불리는데 우리나라에는 이곳과 백두산, 봉화, 울산 등지에 분포하며 시베리아에서도 자란다고 했다. 서래목 현상으로 가지가 부러져 나가서 쭉쭉 뻗은 모습이 된다. 우리 일행이 올라가는 길은 온정령이라고 불리는데 그 고갯길은 108구비나 된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10년동안 8KM 닦았고, 6.2514KM를 더 닦았는데, 그 때 닦은 길은 그곳에서 영웅고개라고 불린다고 한다. 온정령을 77구비쯤 올라가니 높은 올라온 길의 주변 풍광이 아스라이 멀리 보았다. 그 곳 육화암 부근은 봉래 양사헌 선생 하늘이 높다하되 하늘하래 뫼이로다.” 라는 시를 읊은 곳이라고 했다.
10시에 도보로 산행을 시작하는 만물상코스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후 거기서부터는 각자 자유롭게 산행을 하게 되었다. 그 코스의 정점은 천성대였으나 인솔자가 힘이 부치는 사람은 그 곳을 포기하고 망양대를 오르라고 했다. 금강산의 비경을 대하게 된다는 기대로 마음이 부푼 상태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첫 번째 눈에 띠는 장면은 소정 변관식의 그림에서 본 유명한 삼선암이었다. 삼선암은 하늘을 찌르듯 뽀족 솟은 세 개의 바위가 서 있는 모습으로, 세 신선이 내려와 그 곳 경치가 아름다워 바위가 되어 서 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우선 삼선암 뒤쪽 봉우리에 올라 먼저 주변을 조망했다. 서쪽으로는 시야가 트여 산자락이 멀리 보이고 동쪽으로는 귀면암 너머로 만물상 전경이 비교적 가깝게 보였다. 그곳을 내려와 다시 천선대 오르는 길을 따라 갔다. 그 길은 만물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오르게 되어 있다. 200M쯤 올라 귀면암을 지날 때 뒤돌아 보니 양 옆에 문주처럼 서 있는 기암 절벽 너머로 산자락이 겹겹이 겹쳐 보였다. 그 위쪽부터는 길이 좀더 가파라져서 철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많은 사람이 두줄로 놓인 좁은 사다리로 줄을 지어 오가느라 움직임이 더디게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 가서 천선대에 오르니 만물상이 정면에서 펼쳐 있고 뒤돌아 본 방향에는 내금강쪽 산세가 넓게 조망되었다. 거기서 숨을 가다듬고 천천히 금강산 감상에 젖어보았다. 만물상 정상까지는 오르지 않았지면 거기서 정면으로 펼쳐보이는 만물상 경관이 가장 낳을 듯 싶었다. 우리가 떠올리는 금강산의 이미지 특징에는 눈앞에 보이는 만물상 모습처럼, 다이아몬드 조각같은 바위가 수 없이 중첩된 조형감이 작용한다고 생각되었다.
금강산은 지도상에서 국토의 허리쯤에 해당한다. 북쪽으로는 통천, 서쪽으로는 회양과 김화, 남쪽으로는 양구와 화천에 접해 있고 동으로는 동해바다에 면해 있다. 내륙으로부터는 평강 고원의 평지에서 솟아난 형상부터 바다에 면해 어우러진 모습까지 다양한 경관을 이루어내고 있다. 비로봉을 정점으로 한 큰 봉우리와 깊은 계곡을 경계로 크게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삼일포지역으로 구분하여 이야기 하는데 그것은 내금강 산세와 외금강의 산세 변화, 그리고 바다나 평원등 주변풍경의 변화와 관계가 있을 것 같았다.
거기서 더 느긋이 주변을 음미할 생각이었으나 바람이 세계 불고 계속해서 사람들이 올라와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내려와야 했다. 천선대에서 조금 내려오다 구름다리를 건너 길이 나 있는 망양대에 올랐다. 1망양대부터 제3망양대까지 연이어 있는데 그곳에서는 금강산 산세가 동해바다와 함께 조망된다. 그려왔던 금강산에서 이 봉우리 저 봉우리를 오르며 좀 더 그 체취를 음미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보며 스케치를 하기도 했다.

금강산과 진경산수의 뿌리
금강산은 우리에게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을 표출한 진경산수의 본고장으로 인식되어 있는데 그것은 정선이 1734년에에 그린 금강전도에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라 생각된다. 겸재가 그린 금강산 전도는 육안으로 대할 수 없는 전체의 느낌을 포착한 것이 놀라웁다. 그런데 그의 그림에 나타난 필치가 만물상의 바위 형상을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금강산 산세로부터 그의 필치가 형성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술사학자 유홍준 선생은 겸재가 1733(58)년에 그린 내연산 삼용추에서 비로소 겸재의 힘찬 필치가 처음으로 나타난다고 했는데 금강산 전도는 그 1년후에 그린 것이고, 겸재가 금강산에 다녀온 후 20년만의 일이었다. 진경산수가 창시되기까지 그만큼 산고의 세월이 걸렸다고 할 수 있다. 겸재는 여러차례 금강산 사생 여행을 다녀왔는데, 1711년 겸재가 생애 6번째로 금강산을 가보고 그린 신묘년 풍악도첩에도 금강전도가 있지만, 앞에 말한 금강전도와는 화격이 확연히 다르다. 당시 겸재가 자주 사생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절친한 벗인 사천 이병연이 금강산 초입의 금화 현감으로 있었던 요인도 있었던 듯 하다. 겸재는 1712년 다시 금강산을 찾았는데, 그때 그린 해악전신첩에는금성피금정부터 단발령만금강〉〈금강산 내총도〉 〈정양사등 내금강 그림과불정대 망12〉〈백천교 출산도등 외금강 그림삼일포도〉〈옹천도〉〈총석정도등 해금강 그림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들른 삼연 김창흡의 연고지인 철원 삼부연도, 곡운 김수증의 은거지인곡운 농수정도등이었다. 겸재가 진경산수로 세상에 알려지고 칭송받는 것은 사실상 총 30폭으로 된 이 해악전신첩에 수록된 작품들로부터였다. 겸재 이후로는 단원 김홍도도 금강산을 많이 그렸다. 178845세의 단원은 정조대왕으로부터 복헌 김응환과 함께 금강산을 비롯한 영동의 승경을 그려오라는 중요한 명령을 받았다. 정조는 이때 각 고을에도 명을 내려 경연에 모시는 대신처럼 대접하라는 각별한 지시를 했다고 한다. .이 때 동행하며 기록한 표암 강세황의 글로서 일정을 유추해볼 수 있는데, 외금강으로 들어온 단원은 옥류동, 구룡폭포, 코스와 만물상 코스를 다 오르고, 삼일포, 해금강, 옹천, 총석정을 거쳐 회양으로 들어가 표암을 다시 만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단원은 금강산 그림을 그려 정조대왕에게 바쳤다. 그런데 그 그림들은, 안타깝게도 순조 때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지금은 볼 수 없다. 다만, 서유구가 임원경제지에서 증언한 글을 통해 수십미터 되는 장폭의 두루마리 그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으로 장폭의 두루마리 그린을 그리기 위해 초벌 그림으로 그렸다고 생각되는 금강사군첩70폭중 60폭이 전해지고 있다. 문헌상으로 김홍도의 금강산 화첩은해산첩이라는 이름으로 전 5권에 70폭이다. (유홍준, 화인열전1,2 역사비평사)
그리고 근대 화가로써 금강산을 가장 많이 그린 화가는 소정 변관식이다. 그는 어떤 사람은 나의 산수화는 금강산뿐이라고 하지만 사실 금강산의 장엄함은 내가 평생 그려도 다 못 그릴 그런 장엄미를 갖춘 것이다. 금강산을 스케치 해둔 것도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없다. 그러나 내 머리와 가슴 속엔 금강산의 기억과 감격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나는 금강산의 어느 한 부분을 그릴 때마다 그곳의 산세는 물론 바위의 생김생김과 물의 흐르는 방향과 물살의 세기까지 기억하고 그린다. 단원 김홍도와 함께 내가 가장 존경하는 화기인 겸재 정선이 금강산을 자주 찾고 많이 그렸지만, 나도 8년이란 세월을 해동제일산을 찾고 그를 30년간 그렸으니 그와 나는 이제 불가분의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고 했다. 1974, 여름, 화랑
현재 근래 덕수궁 현대 미술관 분관에서 소정 변관식의 30주기에 맞춘 전시가 열리고 있다. 그는많은 금강산 작품을 남겼는데, 소정의 금강산 그림 중에는 그가 금강산을 다녀 온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린 것이 많으며 그림 크기도 대작이 많다. 그가 1959년도에 그린 삼선암은 교과서에도 실렸는데 소위 소정의 전기 양식을 대표한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는 조선 시대 거장들에 대한 인물에 대해 신화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무조건 그 아래 두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그 평가는 세월과 더불어 달라질 수 있다. 금강산을 다녀온 후 소정 전시를 관람하며 그에 대한 평가는 세월이 지날수록 더 높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강산은 그림뿐 아니라 시 등 문학적 창작 무대가 되기도 했는데,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가 그처럼 많은 그림과 문학 작품으로 표출되어 문화기류를 이루어 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온정리의 오후
240분경 만물상에서 온정리로 돌아왔다. 안내 받기에는 2시에 한번 삼일포 가는 버스가 있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 그 곳은 볼 수 없게 되었다. 다른 곳 같았으면 개인적으로 차편을 동원하여 갔을 것이지만 여기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러고 나니 오후에는 별로 할일이 없게 되었다. 다만 온정리 인근에 있는 온천이나 식당등에는 수시로 드나드는 셔틀버스를 타고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다. 종합 터미널로서, 그 곳에서 이곳저곳으로 가는 버스가 집결 되어있다.
삼일포는 갈 수 없게 되어 온정리 온천장으로 갔다. 온정리는 따뜻한 샘이라는 지명답게 온천이 유명하다. 천하제일의 명승지와 온천, 보통 산행에 다녀올 때 땀을 피곤함과 함께 씻고자 사우나 탕에 찾는 심리가 있는데, 이곳은 아름다운 산에 그치지 않고 드문 온천이 있어서 관광지로서는 그야말로 천혜의 곳인 셈이다.
현대아산에서 운영하는 온정리 온천은 지하 200M에서 나오는 천연 온천수이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삭이기 위해 금강산에 은거하면서 이곳에서 목욕을 했다는 이야기와 조선시대 7대 왕인 세조가 지병인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에서 온천욕을 하고 효험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세조의 피부병에 관한 이야기는 오대산 상원사에서 문수보살과 관련된 것도 있는데, 상원사와 금강산에 연이어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그 곳들의 산 경로로 유람을 다닌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온정리 온천에는 그 곳에서 솟아나는 온천수로, 옥돌 온탕, 게르마늄온탕, 맥반석 한증탕, 폭포탕, 련주탕(맑고 께끗), 황토한증탕 등 많은 종류의 탕을 설치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옥외와 연결된 휴식공간도 두고 있다. 온천 앞에 만물상에서 내려오는 계곡이 있고 그 주변 소나무 숲이 온천밖으로 연결되어지는데 8인실, 15인실 등에서는 밖에 나가 산림욕을 함께 즐길 수 있게 해 놓았다.
온천을 마치고 온정각까지 걸어 나와 서관에서 손칼국수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온정리는 금강산 관광에 수반되는 숙박과 식사 기념품 판매 교통 이용 등 편의시설, 그리고 휴식 및 쇼 관람에 이르기까지 금강산 관광 서비스의 총 본산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금강산을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게 느끼는데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관광 사업이 몰고 온 변화이다.
이 곳에서 물품을 구입하거나 식사를 할 때는 다 미화로 지불해야 한다. 가격은 갈비탕 등 일반 음식 대부분이 10달러인데 우리나라에서 받는 가격과 비교할 때 비싼편이다. 식사를 한 후 한참을 서성거리듯 기다리니 흩어져 있던 일행들이 숙소를 배정받기 위해 다시 모여들었다. 온정리 입구의 콘테이너 박스로 지은 구룡마을에 숙소를 배정하고 여장을 풀게 했다. 밖에서 보이는 박스를 열지어 놓은 모습이 삭막해 보여 영 달갑지 않았지만, 안에 들어가니 온기를 느낄 수 있어 편안해졌다.
이후에는 저녘 식사를 하고 북한이 자랑하는 교예단 공연 관람을 하는 일정이 있었다. 그러나 몸살 기운이 있어 방에서 일찍 자리를 펴고 쉬었다. 산행에서 바람을 맞으며 이곳저곳을 오르고 스케치를 한데다 어제 잠을 못잔 탓인 듯 했다. 저녘도 거른 채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아침까지 계속 그대로 누워 있었다. 일행의 들락거리는 기척을 잠결에 느낄 수 있었다. 새벽녘에 잠시 밖에 나갔으나 쌀쌀한 날씨에 금새 오한이 느껴졌다.
19일 새벽 5시반경 잠이 깨었다. 같은 방을 쓴 일행들도 부시럭거리다 잠을 깨어 자리에 누운채로 이야기가 오갔다. 아침에는 몸이 가벼워졌다. 푹 쉬기를 잘 한 것 같았다. 먼저 세면을 하러 나오니 윤곽이 뚜렷하게 보이는 금강산 위로 달이 걸려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숙소를 나서니 적막한 아침 날씨가 쌀쌀하게 느껴졌다. 낯선 외지의 생경함이 더욱 을씨년스럽게 하는 것 같았다.
7시 동관에 가서 아침식사를 했다. 그리고 출발시간까지 동관 기념품 판매장을 구경하였다. 그곳에는 평양 은배술, 산삼술, 곰뼈 약술, 청자기 들쭉술, 심전대보술, 과일술, 황구렁이술, 머루술, 불개미술, 장뇌삼술, 백두산 영지술, 금강술, 백도라지, 둥글래, 오가피, 구기자 등 건강식품이 많았다. 차에 타기 전 동관 밖에 입간판에 그려 있는 관광 안내도를 보며 그날 볼 구룡연 코스와 금강산 윤곽을 확인했다.

구룡연
845분 온정리 주차장을 출발하여 구룡연 코스 관광을 시작하였다. 먼저 대형 관광버스를 이용해 목란관 근처 주차장까지 올라갔다. 그곳으로 가는 도중 신계사가 보였으나 서지는 않고 돌아오는 길에 각자 들려 보라고 했다. 차에서 내린 곳은 계곡 옆에 주차를 위해 닦아 놓은 공터로서, 그 옆으로는 구룡폭포와 이어지는 계곡이 있었다. 그 계곡가로는 큰 소나무 숲이 있고 그 숲 너머로 투명한 푸른빛을 띠며 서 있는 금강산줄기와 어울린 모습이 해맑게 느껴졌다. 만물상은 삼선암 초입부터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경관을 다가가며 갔었는데, 오늘은 이 계곡을 따라 계속 거슬러 올라가는 코스이다. 그래서 주변의 산세와 계곡의 깊이, 길의 방향과 경사의 완급, 그리고 모퉁이를 지날 때 새롭게 펼쳐지는 장면들을 느끼며 가게 되었다.
주변의 산들은 만물상 봉우리들과는 다르게, 약간 둥글고 조직이 좀더 큰 암괴로 산 봉우리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화강암의 결정 구조와 풍화 정도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는 듯 했다. 그리고 계곡을 보면 급물살에 씻기어 다듬어진 널찍하고 매끈한 바위들이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으며, 눈이 녹으면서 모습을 드러낸 개울물도 맑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계곡물이 흐르다 웅덩이에 고인 담소가 여기저기 있다. 그 계곡에 기암절벽이 둘러쳐 생기는 공간감과 앞으로 트인 시선에 닿는 인상이 각기 다른 장면들을 나타내었다.
금강산은 철따라 이름도 달라서 봄은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으로 불린다. 봄에는 마른 가지에서 움트는 생명력이 산세에 투영되는 느낌,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지는 그윽한 느낌, 단풍이 물드는 가을에는 온갖 빛깔리 바위에 산란하는 온갖 느낌, 그리고 겨울에는 눈에 덮힌채 드러나는 봉우리의 형상의 느낌의 변화일 듯 했다.
길을 가는 도중 가끔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유적을 지키고 설명하는 사람들과 마주쳤을 뿐 상쾌한 산내음을 맡으며 걷는 기분이 평소 산행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다만 금강산에 왔다는 의식이 작용하여 특별한 모습이 눈에 닿기를 기대하는 심리를 갖게 되는 것 같았다. 구룡폭 코스에서 본격적으로 경관이 보이는 것은 옥류동 근처였다. 주차장에서 2.7Km, 구룡폭포를 1.1Km 정도 남겨 둔 곳에 옥류동이 있다. 수정같은 맑은물이 구슬처럼 흐르는 곳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담소의 넓이가 630M2, 깊이 6M, 길이 58M나 된다. 거기서부터 맑은 개울과 소, 폭포등이 가끔 눈에 띠었고 구름다리도 몇 번 지나가게 되어서 색다른 산행의 느낌이 들었다.
다리를 건너 다시 300M쯤 더 올라가니 무봉폭포가 나왔다. 그 곳은 봉황새가 날개를 펴고 꼬리를 휘저으며 춤추듯 날아오르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늘진 곳이고 눈이 아직 얼어붙어 있어서 폭포다운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그 바로 위로 구룡폭포를 864M 남겨놓은 곳에는 련주담이 있다. 구슬처럼 아름다운 초록담 담소 두개가 비단실로 꿰어놓은 듯 연이어 있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다시 구름다리를 건너서 구룡폭 길의 막바지쯤에 다다르니 구룡폭과 상팔담을 가리키는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곧바로 가면 구룡폭포이고 우측으로 다리 건너 올라가면 상팔담이 나오는 곳이다. 상팔담은 보류하고 곧바로 난 구룡폭포 쪽 길로 올라갔다. 얼마 오르지 않아 금새 우측으로 구룡연이 나타났다. 맞은편에 전통 양식의 정자 건물이 있어서 쉽게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 건물이 관폭정인데 구룡폭포를 정면으로 감상하며 쉴 수 있게 지어 놓은 것이다. 관폭정에는 우리 민족의 건축적 기교가 발휘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거기에 멈춰서서 천천히 구룡폭포를 감상했다. 구룡폭포의 정취를 느끼는데는 그 앞 정자각이 없는 편이 더 나을 듯 싶었다. 그러나 그 폭포수가 호쾌하게 느껴지는 계절이면, 폭포를 감상하기에 안성맞춤인 위치일 것 같았다.
구룡폭포는 아홉 마리의 용이 용틀임을 하며 솟구쳐 오르는 듯한, 장쾌한 느낌이 든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위로 멀리 올려 보이는 산세가 마치 천상세계처럼 연상되어 신비감이 더 생길 듯 했다. 그러나 계절상 목포수가 적어 기대했던 장대한 느낌을 제대로 느끼지 못해 아쉬웠다.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부분은 자연 산세 그대로의 큰 계곡이었다. 구룡폭포는 그 계곡이 절벽을 만나 계곡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형국이다. 사실 이 여행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이 곳은 나에게 특별한 목적지였다. 어렸을 때 방에 결려 있던 액자속에 아버지가 구룡폭포 아래서 지팡이를 짚고 서서 촬영한 사진이 있었다. 그러나 대화도 없던 아버지와 아들은 장성하기도 전에 영영 만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늘이 드리워 그 곳에 머무르는 동안 한기가 느껴졌다. 사람들도 오래 머무르지 않고 곧 내려갔다. 내려오다 아까 보아두었던 상팔담쪽 길로 올라갔다. 초입부터 절벽에 설치해 놓은 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할 만큼 길이 험했고 거리도 꽤 멀었다. 올라가는 사람들은 내려오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연신 얼마나 남았느냐고 하소연하듯이 물어보았다. 봉우리를 오르자 우측으로 평지처럼 난 길 막바지에 사람들이 앉아 쉬고 있는 모습에서 다 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사다리를 타고 봉우리에 올라가니 상팔담이 내려다 보였다. 상팔담은 구슬처럼 아름다운 8개의 담소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구룡폭포 위 보석같이 생긴 산 주위를 돌아 흐르는 계곡에 생긴 웅덩이들이다. 이 곳은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나무꾼이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올라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아름다운 모습에 반한 나무꾼은 다시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는 날 돌아가지 못하도록 선녀의 옷을 감추어 두었다. 그리고 옷을 입지 못한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을 때 나무꾼이 나타나서, 당신이 너무도 아름다워 내가 옷을 감추었노라고 고백하여 함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곳도 계곡에 쌓인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채 덮여 있어서 선녀가 목욕하는 모습은 연상할 수 없었다. 구슬같이 연이어진 담소에 맑은 물이 고이고 주변의 녹음이 비쳐 투명한 느낌을 발할 때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것 같았다. 상팔담 뒤로도 많은 산봉우리가 겹겹 둘러쳐져 있는데, 거기서 가장 높게 보이는 봉우리가 금강산 최고봉인 1640M 높이의 비로봉이었다.

금강산의 사찰들
내려오는 길에 신계사에 잠시 들렀다. 아까 올라가는 길과 줄곧 함께한, 그 앞을 흐르는 계곡 이름은 산계천이다. 해인사에서 신계사를 복원하고 있는데 공사중이서어 그 느낌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신계사는 정철, 김삿갓, 이이 등 인연이 닿은 유명 인물들이 많다. 고은 시인도 이곳에서 수행한 적이 있다고 한다. 금강산은 불교와도 연관이 깊어서 비로봉 등 산 봉우리의 이름에 불교에서 등장하는 상징적인 명칭이 쓰인 곳이 많다. 금강산이라는 이름도 불교의 대표적 경전인 금강경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금강산에는 신계사외에도 유명 사찰이 많았다. 내금강의 첫 번째 사찰인 장안사는 고구려 승려 혜량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후 고려말기인 1343년 원나라 순제의 황후가 된 기씨가 원 황제와 태자를 위하여 대규모 중창불사를 할 때 2층으로 된 대웅보전과 사성지전 등이 지어졌다. 장안사에서 위쪽으로는 표훈사, 정양사, 마하연, 묘길상, 비로봉으로 가는 길이 나 있으며, 그 아래쪽으로는 삼불암, 백화암등지로 가는 길이 있고 안문재를 넘으면 유점사로 가게 된다.
장안사 앞을 지나 만폭동 어귀에 다다르는 왼편에 있는 표훈사는 장안사, 유점사, 신계사, 건봉사와 함께 금강산 오대 사찰의 하나로 꼽히는 사찰로써 옛 건물을 가장 많이 남기고 있고 정양사는 표훈사 북쪽 지대가 높은 곳 양지 바른 정맥에 놓여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정양사 오른편에 있는 헐성루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하고, 마하연은 대승(大僧)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의 마야하나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외금강의 유명 사찰로는 유점사와 신계사가 있다. 남쪽 산록에 있던 유점사는 외금강의 대표적인 사찰인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그리고 신계사에서 구룡폭을 지나고 비로봉을 넘어 묘길상, 마하연, 표훈사 등지로 갈수도 있다고 한다. 1605년 사명이 불사리를 되찾아 와서 모셨다는 건봉사는 금강산 최남단 사찰로써 현재 유일하게 남한 지역에 속해 있는데, 6.25때 화재를 입었다 근래 중창불사 되었다.
신계사는 현재 대한 불교 조게종 신계사 복원 추진 위원회에서 중창불사를 하고 있다. 그 곳에서 나눠준 안내지에 법당 용마루 너머의 하관음봉, 법당 앞에서 바라보는 세존봉, 집건선연 등은 신계사 법당 안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비경입니다. 법당 앞 커다란 두 그루 보리수와 보산 왕실의 원당이었던 어실각 터를 바라보면서 문무대왕, 김유신, 정철, 정선, 김삿갓, 효봉스님 등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붓끝처럼 생겨 장원급제와 대문장가가 나온다는 문필봉의 정기를 받을 수 있는 인연과 추억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민족 전통문화를 복원하고 민족의 통일기도 도량으로 가꾸어가고자 합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다시 추억속으로
구룡연 코스 관광을 마치고 내려와 온정리 서각에서 그 날 열리는 일본과의 준결승 야구 경기를 보았다. 오전에 산행을 시작할 때부터 사람들이 잔득 관심을 갖고 있던 참인데 지고 있어서 큰 실망들을 했다. 3시 온정각 정류장에 대기하던 차에 타고 귀경길에 올랐다. 차 안에서도 온통 야구 예기였다. 다시 출발과정과 거꾸로 수속을 밟고 돌아왔다. 북측 지역을 벗어나올 때 고성 통일전망대가 보였다. 지난날 그 곳에서 망원경으로 이곳을 그리움으로 보던 때가 떠올랐다. 차가 내설악 쪽으로 길을 잡을 무렵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우리의 산천이 새롭게 보였다. 특별하지 않아도 사람들과 어우러사는 포근하고 편안한 풍경이 새삼 살갑게 느껴졌다. 홍천을 지날 무렵부터는 밖이 어두웠다. 밤길을 달려 10시로 예정했던 도착 시각보다 조금 빨리 출발지에 도착하여 각자의 금강산 추억을 담은 채 집으로 향했다.
(2006.3.19 김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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