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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제목

05 한국건축가협회기행(건축가)

작성자
김석환
작성일
2009.11.10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688
내용

2005 한국건축가협회 기행

답사 출발
건축가협회에서는 매년 전국 각지로 건축 답사를 시행해 왔다. 대부분 늦은 봄과 초여름 사이에 있었는데 올해는 건축가 축제 준비로 바빠서 시기가 늦어져 지난 1016-17일 사이에 부여지역으로 건축 답사를 다녀 왔다. 이번 답사 대상은 부여지역 백제 건축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부여의 정림사지와 부소산성 그리고 그 외곽지역에 세워지고 있는 백제문화재현단지였다. 163시에 서울을 출발하여 유성으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 고속도로 주변 들녘에서 깊어가는 가을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지만 세월의 변화를 망각한채 바쁜 도시 생활에서 건조해진 정서를 환기시켜주었다.
첫날은 답사지 인근 유성에 숙박하며 다음날 본격적인 답사를 준비하는 일정이었다. 오후 615분경에 숙소인 유진 호탤에 도착하였다. 이왕기 교수 등 현지에서 합류한 일행과 만나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온천으로 유명한 그 지역 숙소마다 딸린 목욕탕에서 온천욕을 한 다음 만나 식당에서 저녘 식사를 하며 원로로부터 건축을 배우는 재학생에 이르기까지 자기소개와 환담하는 시간을 가졌다. 식사를 마치고 각자 배정된 방으로 돌아갔으나 이내 이심전심 포장마차로 회동하게 되었고 그 여운이 삭여질 때까지 이동하며 자리가 이어졌다.

백제문화재현단지
다음날 아침 해장국을 먹고 830분에 답사를 시작하였다. 숙소를 출발 백제문화재현단지까지 한시간여를 차로 이동하였다. 목적지에 가까운 주변 들녘에 추수가 끝난 곳과 아직 황금색 벌판으로 남아 있는 논이 번갈아 보였다. 금강을 건널 즈음에는 기온이 떨어져 풀닢에 굵은 이슬이 맺힌 아침 들녘에 가꿔 논 채소에서 풍겨오는 삶의 체취가 어쩐지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이윽고 백제문화재현단지에 도착하니 아직 공사중인 그 곳 관계자들이 반갑게 일행을 맞이하고 이곳저곳을 안내하며 설명해 주었다.
백제시대 유물들을 통해 우리는 백제의 시대 찬란함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문화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이웃한 고구려나 당나라 등 당시 교류했던 나라의 수준 높은 문화와의 접촉를 통해 형성된 면도 많았을 것이다. 비교적 비옥한 토지를 기반으로 정치적 안정기에 국가적으로 경제적 번영이 이루어진 자취일 것이다. 그러한 기반과 문화를 지향한 삶의 태도가 어우러져 이루어졌을 것이다. 후일 고려가 무역국가로써 성장 하였듯이, 백제는 더 이른 시기에 해상 활동에 의한 교류가 활발했던 듯 하다. 하기야 장보고의 해상 활동도 백제 영토권인 서남해 지역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왕건 일가의 활동도 그것을 본받은 성격을 띠고 있다.
백제는 한성백제, 공주백제, 부여 백제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백제 시대를 알 수 있는 대표적 유적으로는 몽촌토성 같은 한성 유적, 공주와 부여의 유적, 익산 미륵사지 등이 있다. 그런데 경주에 가서 신라시대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것과 대비해 보면 백제의 수도였던 곳들에 가서는 그 실체를 피부로 느끼기 부족한 느낌이 든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남겨진 문화유산의 숫자가 적고, 특히 수도로서의 윤곽을 떠올릴 수 있는 건축 등 형상적 이미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인 듯도 하다.
그처럼 신라나 고구려에 비해 백제를 느낄 수 있는 유산이 없어 상대적으로 외소하게 취급되는 문제들이 뜻 있는 사람들에게 문제로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그 문제가 정치인들의 공약으로 제기되고 방안중 하나가 채택되어 실현과정에 있는데 백제문화재현단지가 바로 그것이다. 백제시대 궁궐과 마을, 사찰 등을 복원하고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지어 백제의 시대상을 알게 하려는 생각으로 벌이는 일이다. 그러나 역사 문화 의식을 갖는 것이 반갑게 여겨지면서도 그 내용을 생각하며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박물관은 그 뒤로 재현하는 궁궐과 사찰 등 전통 양식의 이미지를 가리게 되어서, 방문객으로 하여금 옛 역사의 실제 느낌을 접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아쉬웠다. 궁궐과 사찰이 시설이 옆으로 나란히 놓인 구조도 백제 시대상을 생각하는데 혼란을 겪게 할 수 있다. 사찰의 5층탑의 위용은 주변의 많은 건물중 높이가 높은 특이한 건물처럼 인식 되어 그 존재성을 제대로 느끼기 어렵고 그 터의 선정에 관한 의미 부여도 원래 사찰과 궁궐이 있던 장소가 아니어서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다. 계획을 결정할 때 더 많은 논의와 방향 설정을 위한 중지를 모을 필요가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전시관은 백제의 하늘을 담은 개념을 갖고 설계했다고 한다. 현대적인 공간 구성을 하고 있는 너른 로비에서 우측으로 이동하여 전시실 내부를 관람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전시에서 특이한 것은 그 시대 건축술을 유물처럼 보여주기 위해 건물을 재현해 놓은 것과, 민속을 소개할 때 그 행위가 이루어지는 배경 건축물을 함께 지어 놓아서 생활상을 생생히 표출하려 한 점이었다. 그런데 전시된 유물 가운데서는 금동 향로가 압권이었다. 그 향로는 절정의 조형예술의 감각을 보여주는 명품이다. 향로의 받침 부분은 물의 세계를 상징하는 용이 용틀임하는 모습을 형상화했고, 그 위 향로 몸체는 연꽃에 받혀져 있는 삼신산의 수 많은 산봉우리와 십장생도에 등장하는 동물들이 어우러진 모습을 세겨 놓았다. 그리고 맨 위에는 태평성세에 찾아든다는 아름다운 자태의 봉황이 않아 있다. 그 향로에는 뛰어난 조형성과 유불선의 사상적 깊이가 녹아 있는 것이다. 박물관에서는 그것을 통해 백제 문화의 수준을 한번에 전해질 것을 기대한 듯 별도의 작은 영상 관람실을 꾸며 놓았다. 영상 설명이 끝나자 앞 벽에서 모조의 금동 향로가 앞으로 나와 실물을 감상 할 수 있게 해 놓았다. 금동향로를 통해 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증명하려는 듯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금동 향로에는 한 많은 사연이 묻혀 있다. 그 금동 향로는 태평성시에 장인이 작품을 하나 만든 것이 아닌 특별한 이유로 이루어진 것이다.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가 힘을 쏟는 것을 틈타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빼앗은 한강유역을 신라가 다시 침공해 점령해 버렸다. 그에 분노한 백제는 대대적인 군사를 일으키고 일본군의 협력까지 받아 신라를 침공하였다. 처음에는 백제가 우세했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왕이 포로가 되고 노비의 칼에 참수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태자의 전술적 실수 때문이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슬픔에 쌓인 태자는 출가하려고 결심하였으나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만류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태자는 속죄와 애도의 마음에 절을 짓고 최대한의 정성을 들여 부친을 추모하였다. 향로는 그 절에서 출토되었다. 부친을 그리는 마음으로 최대한의 정성으로 만들게 한 결과물일 것이다.

전통문화 학교
백제문화재현단지에서 약 1km 떨어진 거리에 전통문화 학교가 있다. 전통문화 학교는 전통 문화를 계승 발전시킬 인재를 길러내는 전당이 되고 있다. 학교는 현상설계를 통해 당선 된 민현식씨의 설계에 의해 지어졌다. 이 학교의 전통건축학과에 재직중인 장헌덕 교수는 종종 전통문화 학교를 지으면서 전통 건축 양식을 채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을 받곤 한다고 한다. 그러나 배치나 공간 해석에 있어 건축가가 평소 밝혀온 건축관을 읽을 수 있다.
이 학교의 진면목은 실습장을 돌아보며 느낄 수 있었다. 전통 건축을 짓는 전 과정에 필요한 과목들을 가르치는데, 전통 건축의 치목과 부재의 조립 등 실질적인 교육을 진행한다. 전통 건축 부재는 하나하나가 공예품처럼 느껴진다. 가까이서 보니 부재 규격이 지어진 건물에서 볼 때보다 엄청나게 컸다. 현대에는 그러한 자재를 구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인간이 주변에서 나는 재료를 구하여 집을 지었던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실습장에는 전통건축에 쓰이는 소로, 첨차, 암키와, 숫기와 막새 등 각종 부재를 진열해 놓은 공간이 있었다. 그곳을 나와 불화, 목공예, 전통 도자기 등의 제작 실습실도 둘러보았다. 둘러보고 나오면서 윤석우 회장이 앞으로 전통건축 분야는 이 학교 출신이 횝쓸 것 같다고 했다. 그것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정림사지
백제시대 초에 세워진 사찰인 부여의 정림사지는, 초기 불사 건축 형식인 1탑식 평자가람으로써 한국 건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지닌다. 그런데 근래 석불 보호각을 지어 놓아서 그 사찰의 고유 모습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염려가 있게 되었다. 그 안에 놓인 것은 고려시대 유행한 미륵 불상으로서 사찰의 유래와 연관이 없다. 지금이야 그것이 원래의 것이 누구나 알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면 그것이 원래의 것처럼 혼동될 염려가 잇다.
이곳 오층 석탑은 그 탑은 역사성이나 조형적 가치가 뛰어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탑을 자세히 보면 그 힘에 저절로 이끌리게 된다. 탑은 붓다의 무덤을 상징하는 것으로써 곧 붓다를 상징한다. 고행을 거쳐 보리수 아래서 해탈한 붓다, 그 깨달음의 본질은 욕망을 버리는 것이었다. 무욕을 깨달은 붓다지만 후세인들은 그 위대함을 기리기 위해 엄청난 공력을 들여왔다. 그리고 그것에는 표식의 상징성과 의미의 영원성이 각인되어 있다.
불탑의 시원은 붓다의 사리를 안장한 인도에 있는 산치 대탑이다. 그것은 엎어논 복발위에 보륜을 얹어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이후 불교가 전래된 각지에는 그것을 모방하여 각 지역에서 쓰이는 구조와 재료로 목탑, 전탑, 석탑 등의 탑을 조성하였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초기에는 목탑이 많이 건조되었다가 점차 석탑이 많아지게 되었다. 석탑은 목재 구조를 번안한 형태로부터 불발하였는데,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그 초기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곳 정림사지 석탑은 그로부터 좀더 단순해지고 정형화된 형태로 등장한 모습이다. 그러한 석탑 양식은 이 후 신라시대 감은사지탑처럼 3층석탑으로 정형화되고 다시 석가탑차럼 완벽한 비례체계로 이루어진 완결된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다.

부소산성
부소산성에 당도하여 입구에 있는 부여 박물관을 먼저 밖에서 돌아보았다. 그것은 김수근 선생의 작품인데 지금은 문화재 연구소로 쓰이고 있다. 이 작품은 그 형태가 일본 장수의 투구, 또는 도리를 닮았다 하여 외색 시비를 불러온 일이 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사건을 계기로 학자와 예술가 사이에 우리 것을 찾자는 의식이 발동되었다. 안을 들어갈 수 없어 밖에서 둘러보고 그 옆에 있는 부소산성에 올랐다. 이런 산성은 산책길을 걷듯 느긋이 답사하는 맛이 제격이지만 시간이 없어 낙화암과 고란사만을 바쁘게 둘러보고 나왔다.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써 서기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나라가 패망한 곳이다. 그래서 부여를 떠올릴 때면 패망의 한을 남긴 채 스러져간 나라에 대한 비원의 감각이 느껴진다. 순리로 끝나지 않은 인간의 역사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의 감회가 일기 마련이다. 한 나라의 수도의 입지는 국가 존망의 전략과도 연관지어 생각할 만큼 그 의미기 크다. 백두대간으로 신라와 경계가 나뉜 백제의 영토에는 전주 등지의 드넓은 곡창 벌판이 포함되어 있다. 국가의 경제면에서나 지리적 조건으로는 호남평야에서 기반을 닦는 것이 더욱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수도를 부여로 옮겼다.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은 한성과 공주에서 축적된 기존의 정치적 배경과 국력 감퇴를 염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백제가 이전에 수도로 삼았던 한성과 공주는 강 이남에 있어 남하하는 고구려 세력에 대처하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부여는 금강을 배후에 두고 있는데 배수의 진을 친 형국이었다. 배수의 진은 필사항전의 기세를 갖게 하지만, 막상 퇴로가 필요한 때에는 막혀 절멸하게 되는 전술이다. 백제가 최후를 맞이할 때도 쳐들어오는 신라군을 막지 못하고 퇴각을 못한 채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그 당시 궁녀들이 적군에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낮다 하여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곳이 낙화암이다.
백마강 강 이름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용을 낚기 위해 백마를 미끼로 썼다는 전설로부터 붙여졌다고 한다. 실제로 그 때 낙시질을 했다는 조룡대로 이름 붙여진 터가 있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금강은, 금산, 대전 공주 등을 휘돌아 이곳 부여를 지나 군산과 장항 사이 금강하구를 빠져나가 서해로 흐른다. 금강 하구는 채만식이 일제침략을 받은 우리 민족의 애환의 삶을 그린 소설 탁류의 무대이다. 그 금강 줄기는 낙화암 앞을 흐를 때가 가장 처연한 물빛이다. 흐느끼듯 느릿이 굽어 흐르는 백마강의 표정에 정말로 삼천 궁녀의 비원이 서려 있는 듯 하다. 어릴적 기억으로 낙화암에서 보이는 백마강변에 너른 백사장이 펼쳐 있는 소슬한 풍경이 압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너머로 마을이 보이고 백사장에 풀이 자라며 느낌이 바뀌고 있다.
낙화암 아래쪽에는 고란사가 있다. 고란사는 백제가 멸망한 후에 지어진 것이다. 이 곳은 고란초로도 유명하다. 고란사에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왕이 그 물을 즐겨 찾았는데 물을 떠 갈 때 그 곳 물임을 증명하기 위해 고란초를 띄워오게 했다 한다. 고란초는 30-50년 다년초 고사리과 식물로서 잎 뒤에 연륜에 따라 반점이 생기는데, 나라가 망한 한이 쌓여 생긴 것이라고도 한다.
부소산성은 내에는 궁궐, 우물, 군창지 창고 등 많은 시설이 있었다. 또한 서복사지라는 사찰터와 패망후 삼천 궁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궁녀사도 있다. 부소산성을 끝으로 답사를 마치고 귀경길에 올랐다. 늦가을 단풍구경에 나선 관광객들이 많은 때인지라 고속도로가 심하게 정체되었다. 그렇지만 우리 일행이 탄 버스는 전용차로를 달려 비교적 빨리 서울에 당도하였고 집에 가기 좋은 몇 곳을 정해 일행을 내려주었다. 답사에서 돌아와 헤어질 때마다,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바삐 자기 위치로 돌아가는 도시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고란초의 독백

양지도 그늘도 나는 싫어서
낙화암 바위틈에 끼어 살지만
고란사 종소리가 나를 달래고
넓은 땅 마다하고 숨어 살아도
못 잊어 찾아주는 고란초라오

이 몸은 실날같이 갸날프지만
눈서리 거친 바람 이겨가면서
겨레의 흥망성쇠 지켜봤다오
인정과 세태도 역역히 보며
잎 뒤에 노란점을 찍었답니다.

요희들아 누구에게 아참하느뇨
사치스런 꽃송이 부럽잖아요
면면히 홀씨와 향기를 풍겨
부소산과 더불어 살아왔다오

사시사철 푸른 절개 천추에 전한
삼천궁녀 넋이 내맘이라오
무명무상절절(無名無常絶切)도 내맘이라오
약수에 내몸 띄워 님께 바쳐온
백제의 그 정신이 내맘이라오

(고란사 뒤편에 있는 시비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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