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ENU

Essay

제목

04.05 중국건축기행(건축사)

작성자
김석환
작성일
2009.11.10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701
내용

중국기행

가깝고도 멀었던 곳
쫓기듯 분주한 도회인의 생활은 흐르는 세월을 덧없이 빠르게 느껴지게 한다. 그리고 새로운 각오 속에 맞았던 새해의 선명한 기억이 채 희미해지기도 전에 저물어 가는 연말이면 망년회니 송년회니하는 모임이 분주해지고, 실없지만 더러는 그런 모임에 스스로 나가서 한해를 보내는 감정을 정리할 기회를 갖는다. 작년말 그런 모임에 나갔을 때 옆에 않은 분이 중국엘 간다고 했다. 관심이 있어 들어보니 기간도 길지 않고 비용도 예상보다 적었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고 꽤 돌아 보았었다. 그런데 연재를 하면서, 혹 나도 모르게 국수적인 정서가 내 안에 작용하여 우리 것을 더 높이 평가하고픈 감정이 반영되지 않았나 혼자 생각해보기도 했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우리 문화와 관련이 있는 주변 나라들도 돌아보려고 생각했었다. 우리 전통 문화유산 가운데는 우리 자체에서 생성된 것보다도 이웃나라들과 교류를 통해 형성되온 것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본래 생성된 모습을 먼저 알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 다른 문화를 아는데는 직접 찾아가 땅을 직접 밟아보고 체험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그로부터 내적 필연성이 저절로 느껴질 수 있다. 또 문화현상은 현장체험과 함께 그에 작용한 사상을 알고 볼때 보다 잘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유익할 줄 알면서도 그동안 다녀온 이웃나라는 오래전 일본을 한번 다녀온 것이 고작이었다.

필자가 이 여행소식을 들었을 때는 마침 내가 속한 일상의 공간을 벗어나 우리와 연관된 문화현상들을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보고자하는 생각을 갖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짧은 기간이지만 그 땅을 밟으며 생생한 느낌으로 이해하고 우리와 연관된 문화현상들을 너른 시각에서 보고자 했다. 그런데 중국은 그동안 여러차례 다녀본 유럽 등에 비할바 없이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도 평소 정서적으로는 더 멀리 느껴져 왔다. 우리가 냉전시대를 살아오는 동안 의식 안에서는 옛날 사람들보다 더 멀어지고 말았다. 우리와 체제가 다른 나라로서 전에는 그런 국가를 방문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경제가 이념을 초월하는 오늘날에도 그 곳을 밟는 첫 걸음은 어딘지 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중국이 개방화되고 경제에 진력하면서 그 냉전 이데올로기의 인식적 장벽이 많이 제거되어 왔다.

뱃길
내가 이 여행에 불현듯 참가한 것은 특히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딴 나라로 간다는 것에 마음이 동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 뱃길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의 대마도는 지리적으로 우리 영토인 제주도보다도 가깝다. 하지만 아무리 가까운 길이라도 다른 나라를 간다는 것에는 그 경계를 넘는 특별한 느낌이 생긴다. 그런데 중국은 항해술이 덜 발달했던 천여년전 선조들도 바다를 건너 왕래했었다.

이웃 중국과 연관하여 우리나라를 생각할 때는 지정학적 특성에 의한 상대적 감각이 유발된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바다로 갈라 놓여 있음으로서 지리적 독립성이 확보되고, 또 그로서 문화적 정체성을 이루는 한 요인이 되었다. 지질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수만년전에는 중국과 우리나라가 한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기의 일은 상상할 수 있을 뿐 오늘 우리의 인식은 현재의 지리적 조건에서 형성된다. 바다로 가로놓인 지정학적 특성이 딴 나라의 호기심을 더 크게 갖게 한다. 나는 바다를 다 건널 때까지 그 모든 느낌을 체험할 마음으로 갑판위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갔다. 그리고 배를 타고 건너가면서 망망대해에서의 외로움과 육지의 소중함 이국 땅으로 향해가는 낯섦과 호기심의 복합한 감정을 체험하게 되었다. 밤에도 갑판에 서서 깜깜한 밤바다 항해의 느낌을 느꼈었다. 밤에는 낯동안 기록으로 찍던 사진도 찍을수 없었다. 대신 더욱더 무거워진 침묵 속에 일렁이는 바다 물살의 느낌에 귀기울이고, 문명으로부터 멀어진 곳에서 더욱 뚜렷이 빛나는 밤하늘의 별을 새롭게 느끼며 갔다. 하지만 저녘무렵부터 풍랑이 크게 일어 멀미를 한 탓에 항해는 더 길게만 느껴졌다.

한밤이 지나 8인용 선실 작은 이층침대에 누워 잠을 설치다 새벽녘에 일어나 다시 갑판에 나가 둘러보았을 때, 진행방향으로 멀리 띠모양의 불빛이 보였다. 그러나 한동안 다가가도 그 불빛은 더 가까워 보이지 않았다. 잠시 배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나오니 희미하게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우측 뱃전에서 전에 이 뱃길을 다녀본 사람인 듯 사람들에게 손으로 저쪽을 가르키며 산동반도라고 했다. 나도 그 쪽을 바라보며 우리나라쪽으로 뾰족히 뛰어나온 지도 모습을 떠올렸다. 그 때 저 안쪽으로부터 중국의 해양경찰이 작은 배로 다가와 도선을 했다. 배는 희뿌옇게 보이는 산동반도 옆을 미끄러지듯 지나가 청도항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막상 배가 도착하고 보니, 바다건너 다가갈 때의 호기심은 깨지고 눈앞의 콘테이너를 하역하는 광장같은 부두가 회색 공간을 느끼게 했다.


밤바다 항해

깊은 어둠에 잠긴
푸른 바다위
침묵의 심연으로 빠져든 배

그 시각
느낌만으로
내 안에 열려드는 세계

총총한 잔별과
먼 바다 언저리
고깃배에 메달린
희미한 등불이
함께 밤하늘이 된

천지분간 할 수 없는
광활한 물살의 평원위를 흘러
바다건너 딴나라로
항해하는 배

중국 근대화의 교두보 청도
청도항에서 입국 수속을 거처 나오니 현지 여행사의 소형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일행이 다 타자 현지 안내를 담당한 왕씨가 차안에서 인사를 했다. 앞좌석 우편에는 그의 부인이 함께 타고 같이 여행하며 남편의 일을 도우려는 듯 보였다. 운전기사를 포함해 그렇게 모두 16명의 인원이 여행을 마칠 때까지 이 차 안에서 함께 하게 되었다.

점심 식사를 1시간 남짓 남겨 둔 시각에 광장을 출발하여 청도시에 있는 잔도로 행했다. 잔도는 독일인들이 중국에 진출할 때 처음으로 건설해 놓은 부두 시설이다. 청도는 그렇게 중국 근대화의 도화선에 불이 당겨진 곳이다. 그러나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외세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지금은 타의에 의한 근대화 과정의 징표가 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청도는 서양에서 보면 개항의 장소이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수치스러운 역사의 단면을 고스란히 들춰내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스스로 세계의 중심에서 천하를 다스린다고 자부해 왔던 중국이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것은 구한말 우리가 겪었던 동병상련의 아픔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근래 중국은 세계가 부러워할 할만큼 눈부신 경제 성장을 하고 있다. 그로서 과거 대국으로서의 자부심도 되찾아 가고 아픔도 삭여진 마당인지 청도에 남은 외세의 유적들을 부끄러워하는 눈치는 없다. 오히려 외국 관광객을 더 많이 불러들여 수입을 올리려는 요새의 중국 분위기로는 더 말 할 나위 없이 좋은 관광 상품이 되고 있다.

잔도 끝에는 원형으로 섬처럼 둑을 쌓고 전통양식의 건물을 한 채 지어 놓았다. 그 건물은 육각형 평면에 3층으로 되어 있는데, 긴 부두의 뚝은 단지 그 곳까지 이르는 길이 될 뿐인 반면 배경 건물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한 그 건물은, 바다를 배경으로 거대한 스케일로 형성되는 경관의 초점 역할을 하며 시각적으로 두드러져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개항의 역사성과 전통 양식으로 된 그 건물은 관광효과를 톡톡히 유발하고 있었다. 그곳은 황해에 면한 해안인데, 바닷물은 퍽 맑아 보였다. 거기서 병을 띄우면 저절로 인천앞 바다로 흘러간다고 한다. 이 도시 사람들이 바닷물로 가까이 다가가 즐기는 평화로운 풍경과 해안을 따라서 늘어선 고층건물이 함께 어우러져 근래 변화하는 중국의 단면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일행은 그 곳 관광을 마치고 소어산(小漁山) 공원으로 향했다. 그 공원에 오르면 바다와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데 공원을 오르는 길 주변에는 청도를 통해 중국에 교두보를 확보한 독일사람들이 거주를 위해 지은 서양풍 전원형 고급 주택들이 즐비하게 세워진 동네가 있다.

소어산 공원은 그 주변 지형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데 그 자연환경을 살려 섬세한 손길로 가꾸어 놓았다. 한국, 중국, 일본 건축은 구조수법이 모두 비슷하다. 그런데 건물 모양이나, 세부적인 꾸밈새에서는 성격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소어산 공원에는 그 곳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새겨져 있다. 또 한쪽에는 검은돌에 상형문자를 조각해 놓았다. 그리고 벼랑끝쪽에는 자연석 사이에 돌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를 놓아 머물 수 있게 해 놓았는데, 그곳에서는 바다를 시원스레 조망할 수 있었다. 일행은 그 곳에서 풍광을 감상하고 시내로 내려가 중국에서 첫 식사를 했다. 식당 앞에 도착하여 차를 내려 들어서니 남녀 종업원이 출입문 좌우에 서서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깊이 허리 숙여 정중하게 맞이했다. 중국을 대표하는 세가지 요리로 사천, 광동, 산동 요리를 꼽는데, 그 지역은 당연히 산동요리였다. 메뉴에 따라 정해진 음식을 정성스럽게 내 놓았는데, 특히 마시자마자 따라 주는 엽차 인심은 그만이었다.

평소 머릿속에 그려진 중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
딴 나라를 가보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에게는 떠올려지는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문화권이라 개념이 반영된다. 그 구분은 크게 동서양으로 나눠지며 작게는 동남아 동북아시아라고 하는, 어느 지역 인근 나라들을 한데 묶어 특색을 나타내기도 한다.

세계 각지에는 인간적 개성과 지리적 특성이 다른 나라들이 있어서, 그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어느 지역 사람들의 성격과 나라 이미지를 대략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사람들은 각자 권력을 의식함이 없이 태어나고 자라나지만, 나이가 들면서 사회의 구조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사회적 카테고리 안에서 인간의 삶의 반경과 운명이 결정되는 것을 수긍하면서 어떤 문화권의 인간형이 되어간다.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과 함께 동북아시아 문화권으로 불리며, 역사적으로 좋건 싫건 그 이웃 나라들과 많은 관계를 맺었다. 특히 일본보다는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일본과의 관계는 우리가 필요로 해서 이루어지기보다 그 쪽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경우가 훨씬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중국으로부터는 주로 받는 입장이었다. 동북아시아 삼국은 인종적으로 유사할 뿐 아니라 한문이라는 문자를 공유해 왔고 유교, 불교 도교 등 같은 사상을 공유하였다. 그 공유한 사상에 힘입어 문화적 유사성이 형성돼 왔다. 지금까지 힘을 떨치는 동양의 핵심 사상들은 중국에서 형성되었거나 그 곳을 경유해 흘러들어왔다. 하지만 그렇게 문명적 공통성을 가져 왔으면서도 근본적인 차이도 지니고 있다. 중국은 한족이고 우리는 몽골계 우랄알타이어족으로서 그 계통이 다르다. 현재 중국에서 변방의 소수민족중 하나로 취급되고 있는 조선족이 우리와 같은 혈통이다. 같은 문화권이지만 그처럼 인종적 차이와 다른 지리적 배경 속에 다른 인식과 세계로 존재해 왔다.

우리가 떠올리는 중국인의 인상 하면 대국적 기질, 밝은 장삿속, 도인과 같은 사상적 무장, 속내를 잘 보이지 않음 등이 떠오른다. 그래서 중국의 이미지는 항막한 사막과 수려한 계림 풍경만큼이나 다양하고 복합적이어서, 영화

0
0

게시물수정

게시물 수정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삭제게시물삭제

게시물 삭제를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