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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제목

04 건축가협회답사기행(건축가)

작성자
김석환
작성일
2009.11.10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411
내용

2004 한국건축가 협회 답사 (04. 5. 29)

전통건축 답사
우리 협회에서는 매년 정기 답사 행사를 갖어왔다. 올해도 지난 529일 회원들과 그 가족 및 건축학도가 참여한 가운데 행사를 가졌다. 그 동안 답사지는 주로 지방으로 정해졌었다. 그래서 건축 답사지만, 출발지인 도심을 떠나 자연을 벗하며 불현듯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흙내음의 정서를 느끼는 기회가 되곤 했다. 답사에 참가한 일행 중에는, 마치 고향에 갈 때처럼 설레는 기분을 느꼈던 사람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사이 현재 많은 회원들의 생활반경 안에 있는 서울내 문화유산은 돌아볼 기회를 별로 갖지 못해서, 조선의 도읍지로서 지닌 문화적 중량감에 비해 소홀히 대한 느낌도 있다. 그래서 모처럼 서울 시내에 있는 창덕궁과 북촌 그리고 경복궁을 돌아보는 이번 행사가 뜻 있게 생각된다.
서울에는 조선시대 조영된 궁궐이 여러 곳 있지만 그 중 경복궁과 창덕궁이 조선시대 궁중의 체취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다. 경복궁은 정궁으로 건립되어 나라를 새로 건국하면서 갖는 포부와 철학이 담겨 있고 창덕궁은 이궁으로 지어졌지만, 오랫동안 정사를 펼친 왕조의 체취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북촌은 근대기에 새롭게 형성된 도시와 건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처럼 이번 답사 대상의 건축적 성격은 사용자의 신분이나 품격면에서 퍽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답사 영역으로 볼 때는 경복궁과 창덕궁및 그 사이 전역을 돌아보는 것이다. 답사는 창덕궁, 북촌, 경복궁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먼저 930분 창덕궁 앞에 집결하여 답사를 시작하였다.

창덕궁
창덕궁의 공간구성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건립되었다. 조선왕조가 열릴 때 건국세력의 도도한 힘은 천하에 거스를 이 없었지만, 그 들 내부의 갈등이 터지고 말았다. 소위 왕자의 난 후에 태종은 형 정종을 옹립하여 개성으로 돌아갔다가, 자신이 왕이 된 후 한양으로 다시 돌아올 때 이곳 창덕궁을 이궁으로 짓고 나랏일을 보았다. 지을 당시는 이궁이라는, 그야말로 임시적 궁궐 성격을 부여했을 듯 한데, 창덕궁이 앉은 터는 경복궁보다 사사산으로 둘러싸인 도성의 중심축상에 더 가까이 자리 잡고 있어, 그 점이 창덕궁의 위치를 결정할 때 고려된 핵심 요소일 것 같다. 한편 조선의 개창자들은 그들이 내세운 새로운 이념에 맞게 중국 궁궐을 모델로 평지에 반듯하게 배치된 궁궐을 짓고자 했기 때문에, 터가 좁고 구릉지인 창덕궁 터가 정궁 위치 선정에서 제외된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궁으로 짓는 마당에서는 차선의 선택을 쉽게 했을 수 있다.
창덕궁 조영의 생각은 주어진 지형과 조화를 추구한 점이다. 창덕궁의 지형은 전체적으로 동남향으로 흐르고 있는데 건물은 자연스럽게 지형의 흐름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궁궐을 들어설 때 구릉진 산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이곳 저곳에 알맞게 끼워 맞춘 푸근한 느낌을 느낄 수 있다.
궁궐은 기능적으로 왕과 왕비의 활동 공간과 왕의 가족 공간, 그리고 그들을 보좌하기 위해 궁궐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모든 시설이 왕의 위엄과 관계되므로 격조 있게 해야 했다. 그래서 인간 스케일의 편안함보다 크고 화려함이 추구되고 궁궐로서 독특한 건축적 특색을 띠게 된다. 그리고 권위적인 성격을 지닌 궁궐 특유의 건축에 의한 권위 표출과 아기자기한 느낌이 조화되어 있다. 하지만 그로서 위엄이 약화되고 확장이 어려워 옹색한 측면도 생기게 되었다. 내전인 희정당과 대조전사이의 공간구성은 사대부가의 안채 사랑채의 관계와 유사한 공간 구성으로 되어 있지만, 희정당과 대조전을 오가도록 한 루 구조의 연결통로 하부가 피로티로 틔여 있어, 마당공간의 차분한 공간감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사정전과 희정당의 연결 관계에 있어서도 축의 어긋남에 의한 사다리꼴 공간이 형성되어 동선이 명료하지 못하고 건축적 격을 떨어뜨린다. 또 어차고 앞에서 전체를 바라볼 때, 희정당 앞에 달아낸 이국적 포치가 전통건축의 맵시와 어울리지 않고, 경사지 위에 올라 있는 내의원 건물이 장대해 보여 역시 왕의 영역에 대한 위엄을 떨어뜨린다. 그런 것들이 창덕궁의 전체적인 아름다움에 비해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현재 창덕궁은 원래 있던 많은 건물이 헐려 나간 채 공터로 남아 있는 곳이 있다. 특히 사정전 앞쪽에 있던, 승정원등 왕을 가까이서 보좌하던 사람들이 쓰던 시설들이 복원되지 않아 통치의 핵심영역에서 궁궐의 꽉 짜인 느낌을 느낄 수 없다. 그에 비해 대조전 주변은 주요 건물을 보좌하기 위해 지어 놓은 빽빽이 들러 찬 건물 사이로 미로가 형성되어 있고, 그런 위계감과 함께 풍기는 왕조시대 궁궐 특유의 느낌을 느낄 수 있다.

낙선제 일곽
원래 창덕궁은 안내자의 인솔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으나, 협조를 받아 평소 개방하지 않는 낙선제 뒤뜰도 볼 수 있었다. 낙선제 일곽은 후궁과 옹주 등, 왕 가족의 생활공간이다. 그곳은 건물과 자연지형과이 잘 어우러져 있다. 평면적으로는 연이어 있는 낙선제, 집복헌, 수강제가 각각의 건물및 건물과 담장에 의해 연속적으로 형성되는 다양한 공간감을 띠고, 건물뒷 마당에서는 담장, 단차가 큰 지형을 이용해 꾸민 화단으로 둘러싸인 위요된 공간이 오밀조밀한 공간감을 형성하며, 그로부터 동선이 연결된 언덕 위 다른 성격의 건물들과 입체적으로 전개된다.
언덕 위로 올라가면 주변을 휜히 내려다 볼 수 있다. 그 언덕 위에 있는 한정당과 상량정 주변은 곳곳에 괴석을 세워 마당을 꾸미고 있는데, 시원한 조망과 함께 즐기려는 태도이다. 상량정과 승화루사이는 담장을 둘러 영역을 나누고, 만월문을 통해 넘나들면서 각각의 영역에 대해 호기심을 느낄 수 있게 되어 있다. 승화루는 일반적인 건물과 루를 결합시켜 놓은 특이한 구조인데, 주변 언덕 지형의 높낮이에 따라 생기는 다양한 접지성에 의해 도면만으로 읽을 수 없는 풍부한 느낌을 표출하고 있다.

창덕궁의 원유공간
쉰다는 것은 인간적이다. 그에 비해 일이라는 개념은 사회적 관계 속에 성립될 때가 많다. 현대사회에 대부분의 일은 삶의 수단으로서 성격을 띠고 있다. 왕조시대 왕의 일거수 일투족은 국가의 운명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중대한 것이어서 피로도 컷을 것이다. 궁궐의 후원은 마음대로 유람도 떠날 수 없는 왕에게, 막중한 권력자로부터 한 인간으로 돌아가 휴식할 수 있는 장소이다. 물론 그곳에 있는 순간에도 시종들이 시립하여 자세를 흐트러뜨릴 수 없게 하지만 생각만은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후원으로 가는 길에 가장 가까이 있는 부용지 주변은, 연못을 중심으로 부용정, 주합루, 영화당 들이 둘러쳐 있는데, 그 곳은 왕이 신하들과 경연과 휴식을 공유하던 장소이다. 탁족하듯 반도지에 다리를 담근 부용정은, 물위에서 연못을 대하는 느낌을 갖게 한 고려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부용지 뒤쪽은 정말 왕의 사적인 영역으로 조성된 곳이어서, 연경당과 인접한 연못에 면한 애련정은 부용정보다 훨씬 아늑하다. 연경당은 순조가 사대부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양반가옥 구조로 지어 놓은 집이다. 연경당 뒤 높은 곳에 위치한 농수정은 올려 볼 때 평범해 보이지만, 올라가 보면 초야 선비들의 별서처럼 주변의 야트막하게 펼쳐지는 구릉의 한적한 풍경을 느낄 수 있다.
이번에 다 돌아보지 못했지만, 연경당 너머의 반도지와 옥류천 부근의 정자들은 한국 후원 건축의 백미라고 일컬어진다. 반도지는 길을 산책하면서 보고 다가가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존덕정은 잘룩한 허리를 가로질러 통과하는 다리 옆에서 오를 수 있다. 그리고 주변 언덕을 산책하다 올라 연못을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승재정도 있다. 그처럼 하나의 경관 초점을 두고 자연 지형과 위치에 따라 생기는 각기 다른 느낌들을 느낄 수 있게 한 솜씨가 음미할 만 하다.
더 멀리에 놓인 옥류천 부근의 정자들은 깊은 숲속에 들어가 한적하게 쉴 수 있도록 마련된 곳이다. 계류의 물과 바위 숲바람을 느끼며 자연에 동화되는 순간을 맞을 수 있다. 그런 공간이야말로 초야의 선비들이 심신을 수양하기 위해 자연을 찾아들던 공간과 같은 성격이다. 글을 새겨 놓은 작은 바위는 단지 하나의 바위를 넘어 관념적인 대상이 되고 있다. 배경의 숲은 아무런 형상도 갖지 않고 다듬어 놓은 것도 아니지만, 무한한 정서를 발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 품에 안긴 한 칸 정자들이 편안함과 호젓한 아름다움을 이루어낸다.

북촌
일행은 12시경 창덕궁을 나왔다. 걸으며 돌아 본 시간이 꽤 되어 모두 배가 고플 것 같았다. 점심식사 후 다음 답사지인 북촌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딱히 가기로 정해 논 곳도 없고, 좁은 집에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들어가기도 어렵다 하여, 밥을 먹고 각자 흩어져 230분까지 자유롭게 보기로 했다.

북촌의 형성과 변천
조선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북촌이 존재할 수 없었다. 궁궐터를 물색할 당시 적용한 풍수지리설에 따른 명당의 힘이 온전하려면 주변이 그냥 자연상태로 남겨져야 하기에 건물을 짓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엄격한 인식도 시대와 더불어 조금씩 완화되었다. 우선 새로운 토지 수요가 생겨난데다 궁궐과 가까워 편리한 위치여서, 이 곳에 집을 짓고자 하는 욕구도 커졌을 것이다. 그래도 민가가 함부로 들어설 수는 없었기 때문에 운현궁 같은 왕족의 집이 드문드문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 왕조가 망하자 상황은 급속하게 변화되었다. 일제는 국권을 빼앗은 후 근대화를 명분으로, 백성들의 인식안에서 조선 왕조를 망각시키기 위해 궁궐을 훼손하였고, 그 존재를 무시하면서 근대적 도시구조로 탈바꿈시켰다. 그 결과 도성개념이 와해되고 격자 가로망이 생기는 등 도시 조직과 토지 이용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 지역도 그런 과정에서 밀집된 주거지로 변모했다. 그런데 사업주들은 가옥을 구하려는 수요자들의 능력에 맞춰 많은 수의 가옥을 짓기 위해, 이전에 규모가 컸던 필지를 도로로부터 진입이 가능한 상태로 작게 분할하였다. 그 결과 현재 남아 있는 북촌의 성격이 형성된 것이다.
북촌은 문화적 가치 보존의 필요성과 소유자들의 개발 요구 사이에서 갈등을 빗어 왔다. 그리고 그 사이 서로 양보와 타협점도 찾아졌다. 원래의 골격을 유지하는 바탕에서 보수와 현대적 설비 장치들을 하 수 있게 하고 있다. 또 원하면 현대식 주택으로도 지을 수 있도록 해서, 한옥을 부수고 고층으로 지은 다가구 주택등과 혼재되어 한옥마을의 느낌을 점차 잃어가는 염려도 안고 있다. 그래서 이 지역을 둘러보는 것은 조선시대 도시의 조영정신과, 조선왕조가 끝난 후 사회변화와 더블은 변천을 되새겨 보는 의미도 갖고 있다.

도시형 한옥의 의미
도시형 한옥의 건축적 의미는, 원래 자유로운 입지 속에 자연과 관계 맺던 전통 가옥이 도시라는 장치틀 안에서 새롭게 관계 맺는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태초로 이룩된 건축공간은 무한한 대자연에 대비된, 인위에 의해 조절된 한정적 부분공간의 의미를 띠고 있다. 그리고 건물의 밖은 실제로 좁은 공간으로 남아 있을지라도 무한공간을 상징하게 된다. 한옥은 지음에 대한 원시적 구조방식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원초적 건강함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인위성만이 드러나기 쉬운 도시환경에서, 한옥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지게 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도시구조의 바탕위에 놓여지는 도시 한옥은, 본래 자연과 자유롭게 호흡하던 건축과 자연의 관계를 위협받게 된다. 거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점은 전통건축이 도시라는 놓여진 환경의 변화속에서 여하히 그 가치를 지켜낼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해서, 북촌의 도시형 한옥은 도시라는 가옥이 놓이는 여건이 변하는 상황에서, 전통건축 본래의 건강함이 지켜지도록 슬기롭게 대처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지속돼 온 짓기 수법이 도로와 이웃대지로 제약된 좁은 대지의 제약 상황과 만나, 전통한옥이 갖고 있던 내외부 공간의 관계로 형성된 건강함과 기능적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해결방식에서 필지가 접한 도로의 위치와 향에 따라 대처된 특징적 유형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되는 점은 그 건축적 성취가, 개량형 한옥 같은 이론적 접근이 아닌 전통건축을 고수하는 기술자들에 의해 여건 변화에 대한 자의적 대응 결과로 이룩된 점이다.

대중적 인식제고의 필요성
북촌 한옥은 이 시대에 새롭게 소중히 인식되는 전통가옥의 독특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제대로 인식되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한옥을 볼 수 있는 장소로 으레 남산 한옥마을을 떠올린다. 남산 한옥마을은 조선시대 서울시내 이곳저곳에 있던 대갓집 5채를 남산 기슭에 옮겨 마을처럼 조성해 놓은 것인데, 이미 이름난 관광지가 되었다. 그런데 남산 한옥마을은 스러져가는 가옥을 보존해서 일반이 볼 수 있게 한 것은 유익한 일이지만, 옮겨 놓음으로서 원래 장소에서 지니고 있던 진정한 건축적 느낌을 잃어버린 측면도 있다. 그에 비하면 북촌의 한옥은 실제 거주하는 가옥으로서 진실성과 건강함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전통건축문화유산은 사람이 살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고 있지만, 진정한 건축적 생명력은 실제 삶이 어우러진 상태에서 발해진다. 그런 관점으로 볼 때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남산 한옥마을보다 실제 살고 있는 북촌이, 전통건축의 진솔한 면모를 살펴보기에 더 적합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옥마을의 풍경은 개개 건물의 집단적 이미지에 의해 느껴지게 되는데 지붕이 보이는 고층 건물에서 내려다 볼 때는 지붕이 가지런히 이웃해 보이지만, 거리를 걸으면서는 건물마다 조금씩 변화된 부분들로 인해 한옥의 느낌이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향후 북촌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서는, 대중의 눈에 전통마을의 이미지로 뚜렷이 인식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그곳을 찾아가면, 대개 사람들이 민속 마을에서 떠올리듯이 마을 공통의 장소성이 느껴질 수 있는 공간구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몇몇 장소에 전통 마을처럼 정자나무 아래 모여들 수 있는 마을 차원의 장소를 조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위적 수단이 북촌의 본래 모습과, 다르게 될 염려가 있을지 모르지만 외국의 관광객들이 남산한옥마을 찾 듯 이곳을 찾을 수 있도록 관광자원화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경복궁
새 왕조의 궁궐을 짓는 것은 새 나라의 기운을 펼쳐 보이는 상징적인 일이기도 했다. 새 출발을 하면서 새로운 이상을 펼칠 천하제일의 명당 터를 찾아 정한 것이 한양이었다. 백지위에 맘껏 자리를 잡은 그 혈의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
하지만 오래 전 처음 경복궁을 처음 찾았을 때, 터를 정할 때 얽힌 풍수적 요소와 어우러진 멋진 모습을 기대하고 갔던 필자는 막상 도착해서 상상했던 궁궐다운 모습이 느껴지지 않은 것이 불만이었다. 그 후로도 매번 경복궁에 갈 때마다 전체에 대한 인식에 혼란을 겪었었다. 그 이유를 돌이켜 생각해보니, 조선총독부로 쓰였던 중앙막물관과 굳게 닫혀진 근정문 때문에 홍례문과 영제교 영역을 지나며 느껴지는 느낌을 알 수 없었고, 출입도 동측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둥궁앞 문을 임시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남겨진 궁궐건축이 많지 않은 반면 본래 궁궐내에 있지 않었던 여러가지 건물이 함께해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논란은 있지만 그 후 궁궐 복원 사업에 의해 조선총독부 건물이 헐리고 복원된 홍례문으로 들어설 수 있게 된 후로 궁궐의 전체 모습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인왕산과 백악산이 궁궐과 함께 배경으로 보이는 훤출한 풍광을 볼 수 있다. 그런 자연요소와 연관없이 근정전을 보았을 때는 과도하게 장대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많은 시일이 걸려 이룩된 현재의 모습은 그 인상도 많이 바뀌었다.
공사를 벌이는 동안 옛 것을 제대로 만들 수 있을까 염려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후 점차로 복원한 건물이 하나둘 들어차면서 궁궐의 기본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미해결된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아직까지 휑한 느낌이 드는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다. 또 주변 도로 등이 원래 레벨보다 높아져 묻힌 상태가 된 것은 근본적인 문제이다. 광화문의 위치도 원래보다 후퇴되어 있고, 서십자각도 도로를 내면서 헐리고 없어졌다. 그리고 영역내 지어 놓은 이질 적인 건물들도 해결해야 할 숙제이다. 지금도 박물관을 비롯하여 문화재 연구소, 민속박물관 등 원래 궁궐 시설이 아닌 여러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정전 영역
경복궁 동측 대문으로 들어서 동남측 모서리 방향에서 눈을 들어 보면, 북측의 백악, 그리고 우측의 인왕산이 산수화 병풍처럼 그림틀 안으로 담겨 보인다. 백악산과 인수봉이 둘러쳐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경복궁의 터는 인왕과 백악 그 산세와 대조되며 너른 평지감이 강조된다. 그 느낌에서 입지 선정의 명을 받고 경복궁의 입지를 살피며, 새로운 국가의 수도를 건설하고자 들뜬 그 기분을 대하는 듯 하다.
경복궁의 궁궐 안에서도 입지선정에 있어 논리로 내세운 풍수지리설의 힘이 전해진다. 박석이 촘촘히 질박하게 깔려 있는 정전의 너른 뜰은 건물과 다른 장엄함을 띠는데, 거기서 궁궐을 호위하듯 서 있는 인왕산의 특별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경회루 주변
경복궁안에 조성해 놓은 너른 연못과 장대한 루에서도 절대 왕조의 힘이 드러난다. 경복궁의 후원의 조성 수법은 창덕궁과 사뭇 다른 감각을 띤다. 창덕궁은 한국 특유의 느낌이라고 하는 자연과 동화된 아늑한 감각이 느껴지는데 비해, 너른 평지에 반듯하게 지은 경복궁에서는 원유 공간에서도 인위적 장대함을 표출하고자 한 것처럼 느껴진다. 경회루는 영남루처럼 너른 자연 풍광을 보는 것과 다르게, 흔히 경험 할 수 없는 원유공간의 감각을 경회루 주변에서 경험할 수 있다. 언젠가 기회가 있어 경회루 위층에 올라가 본 일이 있었는데, 정말 주변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좋았다. 특히 연못 건너 저쪽을 상대적 감각으로 바라보는 맛이 있었다. 그리고 단절을 낳는 물은 그곳을 특별한 공간처럼 인식되게 한다. 물로 둘러싸인 그 자체로서 성결한 장소의 느낌을 표출할 수 있다. 이번 답사에서는 위층에 올라가 보지 못하고 피로티 주변만 둘러보았지만, 너른 연못과 물위에 떠 있는 섬의 관계로 생기는 시원한 개방감과 그늘 공간의 서늘하고 안락한 느낌이 느껴졌다.


향원정 주변
일행은 발길을 향원정으로 옮겼다. 향원정은 현재 경복궁 답사의 종착지 같은 위치에 있다. 그래서 이 곳 답사길에서 궁궐의 화려한 위엄의 느낌으로부터 한적한 자연의 품으로 빠져 나온 여유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향원정은 인위적으로 반듯하게 꾸며진 경회루나 창덕궁 후원의 정자들과는 다른 느낌을 풍긴다. 평화스럽게 느껴지는 너른 연못 가운데 조성한 섬 위에 놓인 향원정은 물로 단절된 고절함과 호젓함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연못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주변과 단절된 상태에서 다리로 연결돼 있는데, 그로 인해 접근을 쉬 허락지 않은 채 연못가에서 바라보는 사람들로부터 피안의 세계처럼 동경심을 자아내는 느낌이 된다.
원래 후원이란 말 그대로 정원 위주로 조성된 영역이다. 주 영역과 건물들의 뒤에 놓여 후원이라 불렸다. 그런데 지금은 없지만 향원정 뒤에 있던 건청궁은 별서처럼 향원정을 앞에 두고 감상하는 자세로 지어진 건물이다.

태원전 영역
태원전의 복원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공사 담당자가 북궐도와 지층을 굴토해서 얻은 원래 건물의 유구 자료, 그리고 주변 지형등을 참조하여 그를 토대로 복원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한때 이곳에는 현대사에서 1212사태로 명명되는 주동자들의 지휘 본부였던 사용된 30경비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지금은 이전하고 없지만, 그 때 사용한 기름에 의해 오염된 지반 정화 공사를 하고 있었다.
경복궁의 태원전은 역대 왕의 어진을 모셔 두었던 곳이다. 종묘가 제례를 올리는 고인에 대한 공식적인 추모의 장소였던데 비해 선원전은 왕이 개인적인 가족에 대한 추모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종묘가 궁궐 밖에 설치된데 비해 그 시설은 궁궐내에 있었는데 창덕궁에도 선원전이 있다. 가끔 TV 사극에서 착찹한 순간에 선워전을 찾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곳에는 왕과 비등의 승하시 능에 모실때까지 빈소를 차린 곳이다. 능이 다 지어지면 그 곳에 안장하고 상이 끝난 후 종묘에 신위를 모셨다.
태원전을 보기 위해 오가는 동안 저쪽 담장 너머로 향원정이 보였다. 과거 30경비단이 주둔할 때, 부대의 존재가 노출되지 않도록 더 폐쇄적으로 운영했던 때문인지, 향원정 주변에서 막힌 느낌도 있었는데, 거기서 낮은 구릉 아래로 내려다볼 때의 느낌이 평소 접할 수 없던 그윽한 장소로 느껴졌다. 이 곳이 모두 복원되고 개방되면 궁궐의 참 모습을 더 잘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사중인 태원전 영역을 끝으로 경복궁 답사를 마쳤다. 나오면서 그 날의 소감 정리와 인사를 했다. 참가자들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평소 잘 와보지 못한 터에 오늘 행사기회로 새롭게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04. 05. 29 김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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