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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제목

03.02.28 장지로가는길

작성자
김석환
작성일
2009.11.10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677
내용

장지로 가는 길

문인장으로 거행된 명천(鳴川) 이문구 선생님 영결식이 228일 아침 9시 동숭동 마로니에 광장에서 있었다. 그 전에 문학 관련 단체에서는 고인의 장례식을 문인장으로 거행하기로 결의했었다. 그날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그분이 마지막 가시는 길에 작별을 고하러 모여들었다. 식장 주변에는 전임, 신임 대통령을 비롯 각계에서 애도하며 보내 온 많은 화환이 영결식장 무대를 가득 장식하였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문인이었으나 그렇지 않고 특별히 인연이 없었더라도 평소 이문구 선생님을 마음으로부터 존경해 온 사람들인 것 같았다.

강형철 시인의 사회로 진행된 이 날 행사는 개식선언과 약력 소개, 유족 및 문화예술계 대표의 헌화, 그리고 조사와 조시, 방문객 헌화, 폐식선언으로 행사가 진행되었다. 식이 열리고 모인 사람들 모두 고인을 기리고 명복을 비는 묵념을 했다. 이어서 신세훈 문인협회 회장을 비롯한 소설가 이호철, 유종호, 성기조, 박상륭, 황석영 선생등 대표적인 문학계 인사 가운데 개인적 친분이 깊었던 사람들이 조사를 했다. 뛰어난 작품만을 써 오신 순수한 작가 세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문단을 이끌며 보여준 포용력과 자상함, 그로서 이루어진 많은 일들을 회상하며 고인을 추모했다. 조사를 낭독한 사람들은 엊그제 선생과 마지막으로 병상에서 나눈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이어 김년균, 김형수 시인의 조시(弔詩)가 있었다. 그리고 문화관광부의 새 수장이 된 소설가 출신 이창동 장관이 정부 대표로 조사를 했다. 그는 조사에서 개인적으로 스승으로 생각했던 선생님이 떠나셔서 이루 말 할 수 없이 큰 슬픔을 느낀다고 했다.

깊은 애도가 담긴 조사가 길게 이어지면서 예정된 시간을 넘겨 가자 사회자가 시간을 환기시켰다. 1030분 영결식을 마치고, 선생님 유언대로 유해를 화장하기 위해 동숭동 광장을 출발하여 1120분경 벽제 화장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안내를 맡은 사람이 화장 시간을 조금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유족이 식사부터 하자고 해서 일행들은 지하1층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죽은 사람을 모시고 와서 산사람들은 배고픔을 느끼고 밥을 먹는다. 나도 밥을 먹으며 마음속으로 선생님께 송구함을 느꼈다. 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와 이종주 시인, 안훈모씨와 잠시 예기를 나눴다. 안훈모씨는 나에게 아마 여기 온 빈객 가운데 가장 짧은 기간 인연을 맺은 사람일 거라고 했다.

내가 이문구 선생님에 대해 관심을 크게 갖게 된 것은 지난 97년이다. 내가 집을 설계해 준 안훈모씨가 선생님으로부터 문학 수업을 받는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바쁜 사업가가 문학을 한다는 것에 놀랍고 한편 존경심이 생겼다. 안훈모씨는 집이 완성되고 브로숴를 만들 때 나에게 건축가의 변을 써 달라고 해서 써 주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이문구 선생님에게 보여드리고 손질을 받겠다고 하여 좋다고 했다. 나중에 손보아 주신 것을 받아보니 내용은 그대로면서 훨씬 문장이 좋아졌다. 그 집은 이후 여러잡지와 TV에 소개 되었다. 그런데 안훈모씨는 IMF때 부도가 나고 그 집도 채권자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한동안 연락도 끊기었다.

나는 작년에 한국문예창작학회에서 주관한, 이문구 선생님의 작품 무대를 돌아보는 제 1회 문학공간기행에 참가했었다. 거기서 이문구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첫날 답사의 마지막 장소로 매월당 김시습의 행적이 담겨 있는 무량사를 보고 나오면서 나는 선생님께 예전 안훈모씨와 함께 했던 일을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매우 반가워 하셨다. 나는 그 때 지금도 안훈모씨와 연락이 닿으시느냐고 여쭈어 보았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바로 수첩을 꺼내어 전화번호를 알려주셨고 즉시 휴대전화로 안훈모씨와 통화할 수 있었다. 다음날 행사가 끝나고 작별 인사를 드릴 때 선생님께서는 다음에 안훈모씨와 함께 오라고 했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그러겠다고 인사하고 서울로 떠나 왔지만, 다시 찾아 뵙기도 전에 부음을 듣고 말았다.

12시경 화장이 시작되었다. 화실에 막 들어가는 순간 유족들의 오열이 터져나왔다. 그 오열은 화장하는 동안 내내 그치지 않았다. 선생님의 형체가 없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150분 화장이 완료되었다. 흰 가운을 입은 인부 두 사람이 화실(火室)앞에서 빈 유골함을 들고 유골을 수습할 채비를 했다. 잠시 후 화실 문이 열렸다. 안이 언듯 보이는데 아무것도 없는 듯 보였다. 바닥에 흰 물체만 조금 보였고 그것이 다였다. 순간 마음이 텅 비어옴을 느꼈다. 두 인부가 겨우 바닥에 흔적처럼 조금 남은 유골을 수습하여 분골실로 가 분골했다. 그리고 이내 흰 보자기에 싼 작은 상자 하나가 나왔다. 상주인 아들이 유해가 담긴 함을 들고 나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슬퍼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다 체념하고 마음 안에서 다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토록 슬피울던 미망인의 얼굴도 잠시 평온해 보였다.

2시경 장지로 가기 위해 다시 차를 탔다. 거기서 보령까지 갈 사람과 서울로 돌아갈 사람 두 대로 나뉘었다. 움직임이 느껴지며 차가 출발했다. 나는 장지로 가는 차를 타고 가면서 여러 가지 상념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얼마나 악착같이 자신의 존재에 집착하는가. 그러나 죽는 순간 그것으로 끝이다. 사람이 죽어 한줌의 재가된다는 말을 실감했다. 불과 몇 일 사이에 이 세상에서 갖고 있던 형체가 사라졌고, 이제 선생님의 유해는 밖의 풍경을 볼 수 없다. 차가 출발하고 한동안 차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차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공통적으로 선생님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분의 문학 세계, 개인적 친분, 아니면 구수하고 탁월한 이야기꾼을 잃어버린 아쉬움을 되뇌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239분 김포 톨게이트를 지날 무렵 애통함에 화가 치민 듯 몇몇 뒷좌석 사람들이 맥주와 소주를 돌려 마셨다. 그리고 장지에 도착할 때까지 고인과 관련된 추억들을 이야기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5시경 대천으로 접어들었다. 선생님 집안 어른들이 작업실에 잠시 들려 가자고 했다. 시내를 거처 작업실로 갔다. 가는 도중 호수옆을 지나게 되는데, 맨 뒤에 앉은 황석영 선생님이, 저곳이 이문구 선생님 소설에 나오는 곳이라며 소설속에 나오는 이야기를 했다. 58분에 작업실에 도착했다. 우편물이 주인 없는 집의 문틀에 여러통 끼어 있었다. 선생님의 가족들이 영정을 앞세우고 집을 한바퀴 돌았다. 고인이 되셨지만 그의 혼백도 마지막으로 작업한 이 곳이 가장 머물고 싶은 곳일 것이다. 나도 작년에 이곳을 선생님과 함께 둘러보았다. 이 집은 고향에서 사업하는 한 독지가가 지어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었다. 그런데 이 집을 짓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말들이 많았다고 한다. 호수로 면한 전망을 생각해서 서양으로 건물을 배치하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서양으로 지으면 집이 열이 달아서 낮에는 들어갈 수도 없을 것 같아 내 생각대로 남향으로 지었다고 하셨었다. 그래도 여름에 더워 죽을 뻔 했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이 곳에서 매월당 김시습 등을 집필하셨다.

마지막 장지에서 치러야 할 일 때문에 시간을 오래 지체할 수 없어 518분 작업실을 금방 돌아 나왔다. 다시 저수지 옆을 지나 시내쪽으로 나오는 도중 옆에 앉은 이경철 기자가 소설에 그려진 이 곳 풍경을 말했다. 그는 선생님이 저수지 물 안개는 그렸어도 봄이 와서 진달래 피는 것은 다 그리지 못하셨다고 했다. 봄이 되면 저 속에서 다 나온다고 했다. 선생님이 살아서 거기까지 썼어야 했다고 했다. 더 좋은 글을 많이 남기셨어야 했다며 슬픔에 잠겼다.

535분 최종 장지인 관촌마을에 도착하였다. 작년 문학공간기행때 선생님은 관촌수필의 무대인 이 곳 솔나무 동산에서 자신의 추억을 회상하며 말씀하셨다. 바다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 앞이 바다였었는데 지금은 메워졌다고 했다. 저 곳에서 썰물 때 붉게 물든 황혼을 등지고 통통배가 들어오면 동무들과 함께 달려나갔었다고 했다. 또 저 바다에 선생님 형제가 수장되었다고 한다. 누군가 이야기의 끈을 잡아 당기기 않아도 복바치듯 술술 말씀하셨다. 또 이곳은 선생님에게 어린 시절의 가장 소중한 추억이 어린 곳이었다. 그곳을 바라보면서 말씀하시는 음성에서, 날로 도시 모습으로 변모되어가는 농촌 풍경뿐만이 아니라, 어린 시절 체험했던 무대가 사라진데 대한 작가의 상실감과 아픔이 느껴졌다.

그렇더라도 아직 관촌수필의 무대를 상상 할 수 있는 자취는 남아 있다. 도로가 반듯하게 자르고 지나가고 있지만 마을 앞 논배미도 있고, 뒷산에는 그 때 선생님이 소설을 구상하며 음미하듯 보셨을 것 같은 솔나무 밭도 남아 있다. 그리고 마을에는 선생님의 생가도 남아 있다. 그 생가는 원래 초가집이었는데 남이 사서 2층으로 개조했다고 한다.

나는 이곳에 도착하면서, 작년에 선생님이 고향에 오면 시내 길을 지그재그로 다닌다고 하셨던 말이 생각났다. 동네 사람들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다. 작가의 세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님의 어린 시절을 보아 온 같은 세대들은 길거리서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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