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건축가협회 답사 기행문
2000. 6. 3~4
○ 답사의 출발
빠듯한 시간에 출발 장소에 나가 차에 오르니 많은 분들이 먼저와 타고 계셨다. 차 통로로 빈 좌석을 찾아 들어가며 눈길 마주 닿는 데로 인사를 나눈다. 모인 일행의 나이 차가 많지만, 회원이라는 구성 요건이 서로 부담 없는 처지로 인사를 나누게 한다. 예기치 않게 만난 지인들이, 옆자리에 앉아 예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정겨웁다.
출발 시간이 되었지만 신청한 사람이 아직 다 오지 않았다. 건축가라는 직업이 참 바쁘기도 하다. 실현되지 않은 경우의 허탈감을 누구나 한번쯤 경험했을 테지만, 그래도 결론이 나기까지는 기획에 참여하여 조언도 하고 자료 조사와 안을 작성하기에 분주한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다. 신청하고 오지 못하신 분 모두 바쁜 사정이 있을 것이다.
참여하신 분들 가운데는 젊은 층보다 연배가 높으신 회원이 더 많아 보였다. 그래서 젊은 내가 여기에 나온 것이, 선배님들만큼 넉넉해지지 않은 나이에 너무 여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문득 든다. 건축가협회 공식 행사로서, 각 분야 경륜 있는 전문가들이 안내하는 유익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기대되어 신청했었다.
○ 숨결이 느껴지는 자연 풍경
6월초, 평화로운 시선이 펼쳐 가는 푸르른 들녘, 모내기한 벼가 발을 담그고 한창 뿌리를 내리려 애쓰는 때다. 논물에 투영되어 어우러진 논바닥의 흙빛과 여린 모의 연두색 빛깔이 청초하고 아름답다. 푸른 하늘은 아니지만 뿌연 안개 사이로 흐릿하게 비추이는 햇살, 기온도 누그러지고 그림자는 엷게 그려졌다. 농부가 모를 심는 풍경이, 흙에 고향을 둔 일행의 마음에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옛날 시골은 가난의 상징이었다. 부끄럽기도 했던 땅, 감추고 싶었던 고향, 그러나 재화보다 자신들의 심령이 더 가난함을 고백하게 된 이 시대에는 누구나 옛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치 집안에 걸어 두고 싶은 정감 있는 그림처럼, 마음에 틀을 두어 저 풍경을 한 폭씩 담아 갈 듯 했다. 수증기 같은 구름을 관통한 햇살에 비추는, 모판에 끼인 물이끼의 연두빛깔이 반짝인다. 또 밭에서는 너르고 싱싱한 담뱃잎이 기운차게 자라고, 태양이 고도를 높여 갈수록 안개는 걷혀, 햇살이 만드는 그림자도 뚜렷해진다. 넓은 감자밭 대공이 필 무렵, 땅속에서는 감자 씨알이 사춘기 소년의 불알 마냥 굵어 갈 것이다. 그 들녘을 바라보는 농부의 대견함, 허나 모낸 논은 이제 시작이다. 염생이 풀의 하얀 꽃이 찔레꽃과 엉켜 논둑을 장식하고 있다. 아직 빈 느낌이 드는 저 대지도, 몇 달 후면 흘려보낸 시간의 보상으로 황금빛을 출렁이며, 무성한 수확을 가져올 것이다.
우리 국토의 서남쪽은 굽이굽이 흩어진, 야산과 함께 이어지는 평야 지대이다. 그 야트막한 산들은 농사일에 지친 농부들에게 상쾌한 휴식처가 되어 기운을 차리게 한다. 곡식이 자라나는 이 땅은 인간에게 언제든지 삶의 기운을 새롭게 북돋울 수 있는 곳이다. 더욱이 도회인의 소회로는 언제나 새 삶을 동경하게 하는 곳이다.
답사는 무엇을 얼마나 알게 할까? 특별히 마음먹고 나서야 만나게 되는 과거의 문화유산들, 자칫 옛것에 대한 애정이 앞설 수도 있다. 하지만 꼭 특별한 가치를 찾으려 하기보다, 단지 인간 삶의 흔적으로 지나칠듯 느껴야 바르게 와 닿을 수 있다. 이번 행사의 목적은 물론 건축 답사지만, 일행들의 다른 속내에는, 자연과 산사의 분위기에 힘입어 정서적 건조함을 씻고자 함도 있을 법하다.
○ 필경사
필경사는 당진에 소재 한다. 흙에 뿌리내리는 삶이 상상되던 소설속 장면과 같은 곳, 그러나 지금은 서해안 시대를 대비하여 대단한 개발 열기에 휩싸여 있다. 이 곳으로 진입하는 교차로 부근은, 서해고속도로상에 동양최대길이로 건설되는 서해대교가 연말 완공을 목표로 그 엄청난 역사를 계속하고 있다.
이 건물은 심훈이 글을 쓰기 위해 집필실로 지은 것이다. 집터 앞에는 경작하는 논이 바로 마주해 있어서, 글을 일군다는 의미의 집이름이 더 느낌에 와 닿는다. 여기서 쓰여진 심훈의 소설 상록수는 농촌을 주제로 한 계몽 소설이다. 제목의 상록수는 흙 위에 뿌리를 튼튼히 내리고 살아가는 삶을 상징한다.
심훈은 그 푸르고 건강한 이미지를 빗대어, 농촌 젊은이들에게 의미 있는 삶을 일구어 가도록 고취하고자 했다. 집터 한켠에 작가의 소설을 상징하듯, 침엽수 한 그루가 연륜을 더하며 사철 푸르게 자라고 있다.
이 집은 글쓰기에 적합한 구조로 지어졌다. 집필실로 쓰인 대청을 가운데 두고, 잠자는 방과 부엌, 창고 등을 연결해 두었고, 때때로 찾아오는 손님을 위한 손님방도 두었다. 전체적으로는 한옥에 현대적 요소가 가미된 평면 형식을 하고 있다. 대청마루는 벽이 마루 바닥까지 트이지 않아 닫힌 느낌이며, 창이 벽의 중간에 나 있다. 대청 출입도 마당에서 바로 할 수 없으며 현관을 통해 들어가야 있다. 형태는 가구법이 간결한 한옥 구조로서 초가 지붕으로 되어 있고, 부재에 의한 면분할이 외관 형성에 크게 작용하고 있다. 방 창 앞으로는 난간을 두른 화단을 만들었는데, 그로서 집주인이 근대적 사고로 교육받은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
독락당이나 윤증고택처럼 역사적으로 남은 전통 건축들이 주인의 안목에 의해 품격 높은 건축으로 되어졌다. 하지만 근대의 소설가의 집은 어쩐지 설익은 건물 일거라는 선입관으로 대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가 요새 건축업자가 지은 집들보다 백배 났다. 작가의 생가를 관광 상품화하여, 상술이 꼬이게 하는 것이 못마땅하다가도, 이러한 생가는 한 작가의 얼과 만날 수 있어 귀히 여겨진다. 상록초등학교, 상록마을, 동네의 모든 명칭이 심훈의 자취와 관계를 맺고 지어졌다.
이 유산은 마을 사람들의 가슴에 자긍심을 심어 놓았다. 그것이 도가 지나쳐서, 필경사 앞에는 의리의리한 기념관이 있다. 다른 경우지만 마을에는 커다란 현대식 교회가 지어졌다. 소박함을 잃는 것은 자칫 진실로부터도 멀어질 염려가 있다. 집 뒤켠에 난 길로 돌아 나오며 필경사가 멀어져 가는 동안, 익어 가는 보리밭 위로 한 마리 백조가 날고 있다.
○ 해미읍성
향수를 자극하는 들녘 풍경도 해미읍성이 가까이 있는 서산을 지날 때쯤이면 어지간히 보아 온 터다.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호서좌영에 속하던 곳이다. 읍성은 외부와 차단된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안전한 삶이 영위되도록 한 방호 구역이다. 자연 지세에 순응하여 유기적으로 형성된 전통 마을과 달리 이 곳은 당시의 계획된 도시이다.
가옥의 멋을 발산하는 양반 가옥은 예의 규범을 적용하여 도상학적으로 펼쳐 놓았을 뿐, 애초에 아름다운 비례를 위해 지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채와 채사이, 담장과 건물사이, 건물과 자연 사이에서 허와 실, 매스와 그림자의 균형을 이루며 멋이 지녀지게 된 것일 것이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읍성가운데 가장 좋은 감각이 느껴진다. 그 투박한 성벽은, 부분으로 보면 질박한 물성의 벽일 뿐이지만, 전체 윤곽선은 참 간결하고 맵시 있다. 이 성을 쌓을 때도 마찬가지로 멋의 비례를 먼져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방호를 위한 것이지만, 성벽은 노고가 쌓인 인간의 손길에 의해 ,공예품과 같은 맵시와, 누적된 땀에 의한 숭고함을 띠게 되었을 것이다.
이 곳은 성벽의 물성도 좋지만, 내부에서 느껴지는 공간감은 더 좋게 느껴진다. 엄격한 경계내 빈 공간의 푸른 잔디밭에서 평온함이 느껴진다. 또 북쪽 동헌 뒤에 있는 앝으막한 야산의 둔덕에 의한 지형 변화는, 가지런히 닦여진 평지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나는 지난해 어느 연재지에 종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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