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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제목

99.04 한국건축의예기치않은느낌(건축세계)

작성자
김석환
작성일
2009.09.25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532
내용

한국건축의 예기치 않은 느낌



1998. 12. 10
울 건축
김 석 환





목 차

1. 한국건축의 예기치 않음의 요소
1) 건축의 예기치 않은 느낌
2) 자연과의 친화
3) 풍수지리
4) 놓임과 정서
5) 의미와 상징

2. 종묘와 사직단의 예기치 않은 느낌
1) 풍수와 한양의 형성
2) 한국제례건축과 신전
3) 예기치 않은 건축기능
4) 종묘
5) 사직단

3. 한국건축과 영역의 설계


1. 한국건축의 예기치 않음의 요소
1) 건축의 예기치 않은 느낌
좁은 의미의 건축적 느낌은 쉘타를 이루는 구축에 의해 불러 일으켜지는 사물의 감각이다. 건축은 공간을 구축하는 이유로 인해 구축적 힘을 발산하며 건축을 이루는 구조는 중력에 대항함으로서 자연의 균형적 질서를 드러내게 된다. 그에 반해 건축의 예기치 않은 느낌이란 형식자체에 의한 것이 아닌 우연히 발견되는 심미감이다. 건축은 지반에 정착하는 것을 필수조건으로 하는 것이기에 건축적 느낌은 대지상황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건축의 멋은 건물 자체에 한정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건물과 주변환경이 연관되어 나타난다. 그 느낌은 건물이 놓이는 지형적 상황및 주변과의 관계, 사물이 갖는 형태와 공간의 크기, 건물과 자연의 융합등에 의해 표출되는 복합적인 느낌이다. N하르트만은 미학에서 건축예술의 전경과 후경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전경은 실존적 사물로서 이루어지는 양상이며 후경은 건축을 인식함에 있어 공간적, 물질적인 형태 이상의 정서가 나타남이다. 예기치 않은 건축의 멋이란 바로 건축예술의 후경작용에 관계가 크다 할 것이다.

2) 자연과의 친화
한국건축은 지형지세에 순응하도록 하여 건물 개개의 조형적 이상보다 전체의 조화를 추구한 건축이다. 한국건축에서 풍겨지는 좋은 느낌은 건축자체만이 아닌 지형지세와 건물들의 배치로 인해 드러나는 총체적인 힘이며 인공적 사물을 자연에 순응하고 조화시키는 것은 한국건축의 핵심으로서 자연과의 친화를 최고의 덕목으로 인해 서정적 즐거움이 얻어진다.

도동서원의 건물과 담장은 자연지형에 따라 높낮이를 달리하며 적응되어 있어서 멀리서 그 곳을 보면 주변 지형과 일체로 보인다. 건축이 인위적 질서에 그치지 않고 그 건축이 놓이는 주변지형 및 경관과 융합됨으로서 자연이 주는 변수를 많이 담고 있게되어 예기치 않은 건축의 즐거움을 만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자연지형조건과 더불어 빛,소리, 조망효과등은 한국건축의 예기치 않은 정서의 유발요소이다. 빛은 한국가옥에서 공간의 느낌을 규정짓는 중요한 건축적 요소이다. 마당에 드리워진 건물의 그림자는 마당공간을 외부와 내부의 중성공간으로 인식하게 한다. 처마의 깊이는 벽과 마루에 시시각각 그림자의 길이를 달리 드리우며 건물에 표정을 갖게한다.

봉정사 영선암은 건물자체로는 두드러진 멋을 찾기 어렵지만 건물에 의해 위요된 빈 마당은 풍성한 느낌을 자아낸다. 산란한 대기의 햇살이 이 집의 마당으로 내릴때면 마치 이슬에 정제되어지기라도 하듯 맑고 고요해진다. 자연의 정취가 샘물이 고이듯 흘러듬같은 마당의 마루한켠에 앉아 있으면 시선은 마루턱을 넘는 처마 그림자와 마주치고 빛과 그림자에 의한 시간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창호지를 투과하여 실내로 들어온 빛은 부드러럽게 변하여 실내공간을 은은한 햇살로 침전시킨다.
또한 한국건축은 방에서 생활하는 동안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낙옆이 우수수 지는 소리, 먼 산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해안가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자연의 느낌을 소리로 접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건축은 인공이 자연과 일체된 상태에서 자연자체를 향수하고 유유자적하게 관조하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진실로 자연과의 친화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건축 태도에서만 얻을 수 있는 현상이다. 또 한국건축은 시간성을 느낄 수 있다. 공간의 깊이는 거리 경과에 따른 시간적 느낌을 갖게 한다. 태양의 운행에 따른 빛과 그림자의 변화는 동일한 영역내에서 시간의 경과를 의식할 수 있게 되고 건축부재의 재질감은 시간의 경과에 따른 느낌을 머금게 된다. 또한 한국건축은 주변과의 관계로 정형과 비정형의 여러가지 멋이 나타나 그 느낌이 풍성하다. 음악에서의 음계만이 아닌 음색에 의해 변화의 폭이 커지는 것과 같다.

3) 풍수지리
풍수지리에 따른 명당은 맑은 했살이 들고 바람이 멎으며 풍광이 좋아 인간의 쾌적한 기분이 들게 되는 자연상태다. 산이 많고 줄기가 뚜렸한 한국지형은 그러한 특성을 나타내는 장소가 많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나라 각 산맥에 산줄기의 기운이 뻗쳐 내려와 모인 곳에는 예외없이 명찰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그 기운이 산과 들녘이 만나는 위요된 양지 바른 곳에 마을이 들어섰다. 사찰이건 마을이건 산에 기대어 삶의 터전이 이룩되는 것이다. 풍수지리는 과학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으나 인위적으로 의미를 부여한 점도 많다. 어느 장소를 정할때는 땅기운이 백두대간의 산줄기를 따라 내려오는 것으로 생각하여 지맥의 그와 연관성을 먼져 살폈다. 조선후기에 작성된 산경표에는 의한 백두대간과 정맥의 분류가 가계도처럼 기록 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물에 의해 나눠져 작은 줄기를 이루는데 그 나눠진 각각의 산줄기들을 백두산으로부터 연관지어 기록한 것이다. 그렇게 각기 나눠진 산줄기들은 각기 다른 기운과 장소적 특성을 갖는다. 풍수지리설이 학문적 체계가 되어 들어온 후에는 현실 적용의 힘이 더 커지게 되어 집을 짓는 기본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학문이 그렇듯 그 현상을 학문 체계로만 다 설명될 수는 없을 것이며 정서적 분위기로 먼져 마음에 전해질 것이다.

좋은 터를 고른다는 것은 자연안에서 위치 선정을 통해 인간의 삶에 득을 누리려는 것이다. 풍수지리는 좋은 터의 조건이 정형화되어 전해져 온 것이며 그 본질은 좋은 터에 위치하여 지속적으로 이로움을 취하려는 생명체가 갖는 의지의 발로이다. 명당자리라는 곳을 가보면 우성 넉넉한 품새의 자연자체로서 마음을 편하고 밝게 한다. 그리고 옛 건축은 하나같이 그 좋은 터 위에 위치하여 땅이 주는 깊은 정서를 함축하고 있다. 집을 지을때는 먼져 자연지세와 그 땅기운을 살폈기 때문이다.

4) 놓임과 정서
자연속의 어느 장소는 그 자체보다 건축이 그곳에 있음으로서 더 좋은 장소성을 갖는다. 금강산은 자연 풍광으로서 으뜸이지만 건물이 있기에 그 장소가 더 좋은 장소로 인식된다. 정선의 금강산도의 화폭 안에는 건물이 한채 그려져 있어서 아름다움을 향수하고자 하는 인간의 머무르고 싶은 의지가 드러나게 함으로써 그 그림이 더 좋아 보인다. 자연에 포근히 안겨서 그 건물안의 사람이 감상하는 느낌을 준다. 안견의 무릉도원도와 심사정의 잔촉도에도 마찬가지로 그려진 건물에 의해 마치 신선이 사는 선계처럼 보이도록 한다. 사찰의 터의 대부분은 좋은 터이지만 건축이 없다면 인간의 머무르고 싶은 의지를 크게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한국전통건축은 주변풍광이 좋은 한 위치를 점하여 그 풍광을 향유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정자건축의 목적은 한 장소에서 사방으로 바라보이는 조망으로 인해 얻어지는 즐거움이다. 그 건물에 다가서기까지는 건축 자체의 형식미를 의식하게 되지만 일단 건물안으로 들어가서는 건축은 단지 좋은 터에 위치하여 주변 풍광을 관조하고 비바람과 기후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견고한 장치일 뿐이다. 그리하여 인공과 자연이 일체된 정서를 단절되지 않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병산서원은 그 절정이라 할 것이다.

낙동강의 비단 물줄기를 애정스레 껴않고 름름하게 서있는 병산, 그리고 희고 고운 백사장을 넉넉히 비워두고 은자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이 수려한 자연의 풍광이 만대루 마루위에서 함께 어울어 이야기한다. 그것은 건물 자체만으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잘 다듬어진 건축과 그것이 놓여진 자리가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예민한 상태의 균형이 이루어져 나타난 것이다.

5) 의미와 상징
한국건축에는 한사상으로부터 불교, 성리학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꿰뚫는 축과 같은 지배적인 힘으로 작용하는는 의미와 상징체계가 담겨있다.
사찰건축의 배치는 기본적으로 불교 교리의 충실한 번안이다. 일주문으로부터 대웅전에 이르는 과정은 수행과정과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 있는 각각의 세계를 상징한다. 불이문 까지는 속계6천에 속하고 일주문은 불각의 상태요 천왕문은 상이각이며 땅을 딛고 있는 하늘이라는 의미의 도리천을 지난 불이문은 수분각의 세계이다. 다시 불이문을 지나면 야마천, 도솔천, 화악천, 타화자재천, 색계18, 무색계4, 도합 33천을 지나야만 불성과 만날 수 있다.

음양오행사상은 인간활동을 도에 따르게 하는 수단으로 나타났다. 노자는 자연의 운행질서를 도로 보았다.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고하여 자연을 본받는 것이 도라고 하였다. 음양오행 사상은 지난날 한문화권의 세계관의 기초였으며 자연에서 관찰된 만물의 현상을 규정하고 해석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음양오행의 직접적인 원리의 출발은 음과양, 양성의 결합에 의한 새로운 생명의 창조라는 생명원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음양오행의 궁극적인 이치가 담긴 형상을 태극으로 나타내었다. 태극은 음의 성분과 양의 성분이 결합되어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로부터 나와서 세상의 모든 조화를 낳는다. 오행의 5라는 숫자는 고대 중국인들의 기본 개념이었다. 즉 세계가 5-동서남북중-으로 분류하여 지칭하는 개념이었다. 오행 그 개념의 연장에서 만물을 다섯가지 성분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그 것들이 각기 상생작용을 하는 것과 상극 작용을 하는 것으로 나눤다. 물과 불은 상극관계요 물과 나무는 상생의 관계이다. 세상의 존재하는 것이 모두 각각의 성질을 띠고 있으므로 상생요소가 만나도록 하여야 편안하고 복이 따르며 서로 상극인 존재가 만나면 화를 입게 되므로 그 성질을 잘 살펴서 써야 한다는 것이 음양오행론의 실천 사상이다. 음양오행사상이 실생활에 확대 적용되면 세상의 모든 일을 그 원리에 따라 해석하고 연관을 지었다. 건물을 배치하는 좌향이나 시간 공간의 표시에도 1012지의 의미를 두고 나타내었다. 궁궐은 양택에 위치시켜야 하고 제례공간은 음택에 위치시킨다. 풍수상의 기운이 약한곳을 보호하기 위해서 비보를 한다. 종묘에는 음택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가산과 연못을 만들었다. 경복궁의 근정전 월대에는 각 풍수사상에 따라 각 방향에 그 방향을 상징하는 동물을 조각해 놓았다. 남쪽에는 주작이요 북쪽에는 현무며 근정전에서 바라보는 왼쪽이 청룡을 두고 우측에는 백호를 조각하였다. 건물에는 물을 상징하는 청룡조각을 하고 화재를 막기 위해 불을 먹는다는 불가사리도 설치하였다.

2. 종묘와 사직단의 예기치 않은 느낌
1) 풍수와 한양의 형성
조선건국 과정에서 무학대사가 이태조에게 새도읍으로 정할것을 천거해 정해진 한양은 풍수상의 길지의 요건을 두루 갖춘 곳이다. 백두대간이 내려오다가 함경도와 강원도 경계쯤인 분수령이라는 곳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산줄기를 한북정맥이라고 한다. 또 충청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속리산에서 동북쪽으로 갈라져 나온 산줄기를 한남금북정맥, 그 끝부분은 한남정맥이라고 한다.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은 한강을 북과 남에서 품고 있는 산줄기이다. 한북정맥은 여러 산들을 이루면서 흘러오다가 서울 가까이 와서 북한산을 이루었고, 한남정맥은 서울 부근에서 한강을 사이에 두고 관악산을 만들었다. 북한산에서 다시 갈라져 나온 줄기가 백악과 응봉을 만들고, 응봉에서 동쪽으로 뻗어나간가지가 타락산을, 백악에서 서쪽으로 뻗어나간 가지가 인왕산을 만들었다.

한양의 지세는 북쪽에 북악을 주산으로 하고, 왼쪽에 청용인 낙산, 오른쪽에 백호인 인왕산과 남쪽에 안산인 남산을 두고있다.이 네 산을 서울의 내사산(內四山)이라고 한다. 이 내사산에 둘러쌓인 곳의 가운데로 한양의 명당수인 청계천이 북북서()에서 시작하여 동()에서 와서 서()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서울은 그렇게 산과 물이 어울린 좋은 터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서울의 내사산을 쌓아서 성벽을 쌓았으니 이것이 도성이다. 풍수지리와 도성의 골격을 정하는 전조후시좌묘우사의 배치 개념에 의해 경복궁을 축으로 하여 경복궁의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단의 위치를 정했다.

2) 한국제례건축과 신전
한국전통신앙은 다신교적 성격을 띠고 있다. 산신, 수신, 월신등 보편적인 신이 있는가 하면 조상신, 터주신, 부엌을 관장하는 조앙신 등과 같은 개별적 신도 있다. 또 마을에는 당산을 세워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다. 한국양반가옥에는 유가가례에 따라 경내에 사당을 두고 조상신을 모신다. 사당을 지을 수 없는 서민 가옥에서는 다락이나 헛청의 일부에 작으나마 그러한 시설을 둔다. 집안에서 부뚜막에 청수를 떠 갈아올리며 모시거나 항아리안에 모시기도 한다. 어쨋든 우리의 신앙은 시설보다 정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양반가의 사당에는 사대봉사를 하고 그 윗대는 천위하여 시제를 지냈다. 사당을 집의 영역내에 모신 것은 조상신이 그 집안의 길흉과 대소사에 함께 참여하는 의미를 갖게되고 그 후손들은 집안에 애경사가 있으면 먼져 조상에 그를 고한다.

한국의 종묘와 사직단은 영신하여 모신다는 면에서 일종의 신전이라 할 수 있으나 그것들은 서양의 신전과는 다르다. 신전 건축은 크게 신의 처소로서의 장소적 기능과, 신전으로서의 엄숙함과 귄위를 나타내는 상징성, 그리고 제사를 올리는 기능성을 갖는다. 신전여부는 인간이 거하는 건물같은 피막으로 위요된 내부공간보다 신의 거주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신위는 천상에 계신 신이 제사때 제사를 받기 위한 표시이며 한국제례건축이 신전으로서의 기능을 갖는 것은 제사를 받기 위해 영신에 응하여 오셨을 때라고 볼 수 있다. 평소 신위만을 모시던 곳에 임재하여 경배받는 곳이 된다. 그리고 제사기능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모든 영역이 제례공간으로 쓰여지고 평소에 놓이지 않았던 시설들이 부가되어 제례기능이 완성되는 것이다. 제례의식을 거행할때는 건물뿐이 아니고 차일을 친 월대에까지 제관들의 도열과 이동, 악공과 가무단 등의 위치에 따른 공간적 쓰임새가 정해지며 모든 제례를 행하는 공간으로서 건축적 질서를 갖추게 된다. 그래서 제례시의 종묘와 사직단은 외부 공간과 연관된 평소와 다른 예기치 않은 건축적 감각이 나타나 보인다.

3) 종묘
종묘는 조선왕조의 역대 왕의 신위를 모시고 때마다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조 27대 왕과 4분의 추존왕 그리고 이태조의 4대선조 도합 35왕과 비의 신위를 건물 한칸마다 모셨다. 종묘는 이태조 3(1394) 12월에 건축하기 시작하여 다듬해 9월에 준공되었다. 이 때에는 내원(內垣)안에 대실이 7. 좌우익실 각각 2. 공신당 5. 신문3. 동문3. 서문 1간을 세웠고 외원(外垣)에는 신주(神廚)7.형관청(亨官廳)5. 좌우행랑 가가5. 남행랑9. 제궁(齊宮)5간이었는데, 여기에는 최초로 개성에서 옮겨온 선대 4조의 신주를 봉안하였다. 그 후 태종 72월 종묘남쪽에 조산(造山)을 했고 9(1409) 가산(假山)을 다시 증축했다고 했는데 이를 보면 이 터전이 인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수 있다. 태종 14년에는 종묘 주위의 담장을 축조하였고 세종3(1421)에는 정전인 종묘 서편에 조인 영녕전을 세웠다. 선조 254월 임진왜란으로 왜적이 한양에 입성하기 전에 왕은 종묘 신주를 모시고 서경으로 몽진(蒙塵)하였다.

선조26년 왕이 한양에 환도하여 심련원(沈連源)의 집을 임시 종묘로 삼았고, 주왕 41(1608) 정월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5개월만인 광해군 원년 5월에 완공하였다. 이때 난전에 10간이었던 정전은 11간으로 건축되었으며 영녕전도 재건되었다. 영조 2(1726)에는 정전 4간을 증축하여 15간으로 만들었으며 정조2(1791)에는 공신당을 중건하였다. 헌종때(1836) 2간을 더늘려 17간으로 증축하고 그 뒤 영녕전의 신위도 경희궁으로 옮겨가면서 대대적으로 개건하게 된다. 이때 영녕전은 정실 4간에 동서래실(東西來室)이 각각 4간이었다. 종묘는 제위가 늘어날수록 새로운 제실이 필요해지므로 현왕의 제위 때마다 늘려지어 왔다. 현재의 그 길이는 조선왕조가 막을 내린 시점으로 더 늘러나지 않고 형성된 것이다. 종묘가 1919간이고 영녕전은 1616간에 각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데 이것은 헌종 이후에 다시 증축된 결과라고 본다. 왕조가 더 계속되었더라면 얼마나 더 증축되었을지 예측기 어려우며 어떻게 보이게 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쨋든 현재의 모습은 큰 기품과 좋은 균형을 보이고 있다. 정전 건물의 크기와 월대는 비너스의 머리와 몸체처럼 일체되어 균형을 이루고 있기도 하지만 월대 박석의 그 거친 질감이 풍기는 엄격함은 제례를 거행하는 의식을 더 위엄있게 느껴지게 한다.

종묘는 제례의식을 거행하는 때를 제외하고 사용하지 않은채 평소에는 엄숙한 상징물처럼 서 있을 뿐 그 규모의 필요나 제례건축으로 쓰임에 따른 사용동선의 흐름과 공간의 위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제례를 거행할 때 정전 전체에 차려진 제상과 제관들의 움직임을 보면 정전과 월대의 공간 쓰임새에 따른 건축적 기능이 확연히 드러난다. 막연하게 보였던 신도와 답도, 그리고 각 문의 위치와 기능이 보이고 제실안에서의 제기의 수, 제상의 위치와 크기, 그리고 제관의 서 있는 위치와 그 역할이 보이게 된다. 종묘 정전의 외부공간은 평면상의 위치에 따라 기능분화가 일어난다. 우선 정전을 출입하는 3개의 문의 기능이 각각 다르다. 정문은 신문으로서 신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이다. 동문은 왕과 문관이 출입하는 문이며 서문은 무관이 출입하는 문이다. 총체적으로 정전월대의 각 부분은 마치 평면계획된 방들처럼 고유기능을 갖고 쓰인다.

제례는 초헌, 아헌, 종헌의 순으로 진행된다. 초헌관은 모든 제관의 으뜸인 사람이 맡게 되어서 왕이 친행할때는 스스로 초헌관을 맡는다. 초헌관은 영신,헌작, 송신시에 정전 및 월대에 꿇어엎드려 국궁사배를 올린다. 그런다음 제신(祭臣)을 거느리고 찬의의 안내에 따라 신단을 오르내리며 제례를 행한다. 집례의 인도에 따라 제사를 진행하는중 제관들이 제물을 올리고 향을 사르는 동안에는 초헌관은 아헌,종헌례가 계속해서 거행되는 동안 잠시 동문을 나와 소차방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소차방은 한 칸의 막을 친 구조로서 또 하나의 예기치 않은 건축을 보여준다. 제례때에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월대의 쓰임새이다. 조선시대에는 제관외의 참관원은 영의정이라 할지라도 제례를 행하는 월대위에 오를 수 없었다. 그리고 제례시 월대는 제례에 참여하는 제관과 악사, 그리고 일무원이 서는 모든곳에 차일을 쳐서 실내에서 행사를 거행하듯 하였다. 그곳에 임시로 치는 차일은 정전이 신의공간으로 쓰임과는 대조적으로 사람이 쓰고자 하는 건축 기능을 발휘한다.

4) 사직단
사직단은 곡신과 토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이다. 그것은 삶의 기본조건을 이루는 것들로서 왕조의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보다 더 중요시 되었으며 매년 봄,가을과 가뭄이 들거나 풍년을 기원할 때 제사를 올렸다. 한양 천도때 좌조우사의 배치에 의해 경복궁 서쪽에 사단과(社檀)과 직단(稷檀)을 나란히 세웠다. 원래 배치는 담으로 둘러친 경내에 동서남북 사방에 문을 내고 남문을 정문으로 삼았으며, 가운데 석축의 기단을 쌓고 중앙에 다시 2개의 단을 쌓은 것이다.

각 단은 정사각형으로 한변을 25척으로 하고 지대석, 면석, 갑석을 축조한 건축식 기단 쌓기를 했다. 단상에는 높이 2.5, 1척의 석물을 세워 후토씨(后土氏) 후직씨(后稷氏)를 배향했다. 단의 네 모퉁이에는 구멍뚫린 돌이 있고 큰 쇠고리가 채워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제일(祭日)에 기둥을 세우고 차일을 쳤다.

사직단의 외곽 영역을 둘러친 담장의 외문을 지나면 다시 안 담장이 둘러쳐 있고 그 안에 두개의 반듯하게 정리된 사단과 직단이 나란히 놓여 있다. 사단과 직단은 단을 쌓아 구축한상태 그대로이나 졔례때는 그위로 차일을 치는데 그렇게 되면 마치 종묘의 정전같은 기능이 된다.

건축공간이란 어떤 점에서 보면 페합의 차이일뿐 무한 자연공간위에서 일부에 쓰임의 위치를 한정하고 다른 공간과 연결하는 상태로 볼수도 있을 것이다. 사직단은 평소에는 단지 석단이 있는 것으로만 보여지지만 제례시에 보면 시설의 구조와 배치에서 건축화된 공간구성과 짜임새를 느낄 수 있다. 의식이 거행되기 전 제실에 보관하던 제기를 꺼내 제물을 담아 상차림을하고 준비를 마치면 집례의 인도에 따라 왕과 제관이 각가 맡은 의식을 거행한다.

종묘와 마찬가지로 사직단의 각문은 신문(神門)과 왕과 신하의 제관이 출입하는 문이 구분되어 있다. 남문은 신문이고 북문은 제관과 축함과 천근생만 드나들 수 있다. 사단과 직단을 오르는 사방에 설치되어 있는 계단도 각각 사용하는 용도가 다르다. 남쪽계단은 신계(神階)이고 북쪽은 초헌관 서쪽은 아헌, 종헌관이 오르도록 되어있다.

동서남북으로 난 홍살문도 제례 의식의 동선상 쓰임이 다르고 주관하는 참관인과 제관 그리고 악사와 일무원들의 공간이 짜임세 있게 펼쳐진다. 그 쓰임의 위치가 명확하여 마치 건물을 칸막이로 구획하여 쓰는 것 처럼 느껴진다. 초헌, 아헌, 종헌의 순서로 제례가 진행되는 동안 제단에 촉을 밝히고 향을 피우고 제물을 올리며 절을 하기 위해 오르내리는 동선과 순서가 시간의 경과속에 질서정연하게 펼쳐 진다. 그래서 그 의식이 거행되는 동안 사직단의 경내는 그야말로 건축물이 지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간적 질서를 느낄 수 있다.

3. 한국건축과 영역의 설계
한국건축에서 가장 크게 느껴지는 힘은 영역의 건축화이다. 한국 건축에서 영역은 건물이나 지형에 의해 외부공간을 건축화한 결과로서 각 영역에 들어서면 공간의 볼륨감과 성격을 느낄 수 있다. 그 영역은 궁궐, 사찰, 서원 그리고 주택등 모든 건축에 이르기까지 신성한 장소로서의 의미부여와 공간의 위계 구분, 그리고 작업공간으로서의 쓰임이나 관상의 대상으로서의 비워둠, 그리고 신분과 성별구분에 의해 성격이 특징 지워진다. 그에 비하면 건축자체는 하나의 양식을 보여줄 뿐이며, 건물의 배치에 의한 영역 구성이야말로 진정으로 부여된 의지에 따라 창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영역은 인위와 자연의 결합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공간의 정서가 있다. 상징성과 의미가 담겨있을뿐 아니라 쾌적함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되어, 기분좋은 접근과정을 갖는다. 그리고 한국건축의 높은 가치를 형성하는 자연과의 친화현상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우리민족의 사상과 이땅의 풍토가 어우러져 이룩된 우리 건축문화의 원형질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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