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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제목

96.05 인도의 르 꼬르뷔제 작품을 찾아서 1

작성자
김석환
작성일
2009.09.25
첨부파일0
추천수
1
조회수
2790
내용

인도의 르 꼬르뷔제 작품을 찾아서

1. 챤디가르의 작품을 찾아서
2. 아메다바드의 작품을 찾아서


1996. 5


김석환 / 울 건축
by kim, suk hwan




챤디가르의 작품을 찾아서



1. 챤디가르
챤디가르는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서북쪽으로 약 225Km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델리 역에서 인도의 특급기차를 타면 약 3시간 30분동안 가는 동안 차창 밖에 펼쳐진 폐허와 원시의 풍경을 지나 챤디가르에 당도하면 지금까지 끊임없이 시달리던 거리 사람들의 행열에서 벗어나 마치 현대 도시의 이성적 냉기가 서려 있는듯한 다소 차분한 분위기를 느낀다.
그곳이 인도의 현대도시이자 르 꼬르뷔제의 도시인 챤디가르이다.
1947년 펀잡이 파키스탄과 인도 사이에서 분할되었을때 고대의 도시 라호르는 파키스탄에 편입되었다. 새로운 수도가 1250만 인구를 안고 있는 동 펀잡을 위해 필요했다. 1950년에 인도정부의 우수한 기사 바르마에 의한 항공기 답사에 따라 히말라야의 산록의 경사진 고원에 멋있는 부지가 발견되었다. 신수도는 그 토지의 촌락의 이름을 따서 Chandigarh이라 명명되었다. Chandi는 달의 신의 이름이다. 50만의 인구를 수요하는 규모의 새로운 도시를 계획하였고 제 1기의 구역은 15만의 인구에 대한 것이었다.
인도는 르 꼬르뷔제에게 1925년에 발표한 빚나는 도시이래 25년간 도시계획을 연구하며 다듬어온 솜씨를 처음으로 실현할 기회를 제공했다. 광활한 신천지에 새로운 도시의 건설이 평생동안 이상도시의 꿈꾸기를 그치지 않았던 시인이자 건축가의 손에 맡겨진 것이다. 챤디가르는 르 꼬르뷔제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정신과 설레임과 모험이 숨어 있다. 건축가로서의 그의 가슴에는 항상 이상적인 모댈의 이미지가 잠재해 있었다. 그것은 젊은 시절에 여행했던 아크로폴리스였다. 파르테논 앞에서 건축의 계시를 받았노라고 말한 그에게 아크로 폴리스는 항상 뇌리에 건축의 원형으로서 자리잡고 그의 작업이 그와같은 상태를 지향해 가도록 이끄는 내면의 힘이 되었다. 파르테논과 같은 위대한 작품은 어디에서도 또한 어느 시대에서도 볼 수 없었다. 2000년 동안 파르테논을 보아 온 사람들은 여기에 건축에 대한 결정적 순간이 있다고 느껴 왔다.그가 자신의 꿈을 실현할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을때 그는 아크로폴리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근대건축이 자라서 국제 양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을때 르 꼬르뷔제 에게는 그것이 올바르게 성장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챤디가르의 게획이 수립되어가고 있을때 세계각국에 이미 건설된 근대도시는 많은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지나간 시대보다 환경이 황폐해 졌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그도 그러한 상황에 주의를 게을리 한것은 아니었다.
그자신이 주도한 근대건축이 원히지 않던 방향으로 도래한 현실을 의식했다. 여기저기서 근대 건축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로피우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우리가 아이를 낳은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아이는 우리생각과 다르게 크게 성장해 버렸다.
그는 챤디가르를 계획하는 시점에서 기계문명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현대의 도시의 문제에서 자연의 구제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인도는 오늘날 사라져버린 기계시대의 최초의 동란의 시대를 살 필요는 없었다. 반대로 인도는 모든것이 가능해졌을 때 눈을 떴다. 인도는 완전히 새로운 국가는 결코 아니며 가장 고도로 또한 가장 오랜 문명을 갖고 있다. 인도는 예지와 윤리, 그리고 자각을 가지고 있다.기계문명으로 변화된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해 진것은 자연과 인간의 회복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는 챤디가르 계획을 위해 인도를 접하면서 인도의 문화와 풍토를 이해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와 달리 틀에 갖혀 있지 않은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고 거기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인도인의 종교의식 명상의 삶, 가난하지만 구속이 없는 삶, 자연과의 인간의 공존, 태양의 축, 그늘의 숲, 평원, 명상, 조용함, 침묵.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신도시의 이미지가 모습을 갖춰 나갔다.

2.도시계획
챤디가르의 가로망은 근린주구 섹터의 단위로서 1200M×800M의 모듈로 구획 되어 있다. 그리고 캐피털은 거리의 머리부분에 위치하여 거리의 주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거리와는 분리되어 있다. 도로는 7V의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다. V1V2는 고속도로,V3은 섹터를 나누고 있는 도시의 일반적인 도로이다. 각 섹터 내부의 출입은 자동차용 도로로 부터는 그 연변에 있다 하더라도 섹터 안으로 직접 들어갈 수 없고 섹터안으로 진입하는 V4로부터V6를 이용해야 한다. 교통이라면 자전거,스쿠터 택시 그리고 얼마되지 않은 자가용차만 왕래하는 실정에서 곧벋은 도로는 항상 비어 있다. 이곳에서는 인도인의 습관으로 인하여 유니테 다비타시온류의 고층건축 건설은 제외 되었다. 섹터에는 사회계급에 다라 서열이 부여되어 있다. 이것이 현대의 도시게획 이론을 적용한 도시에 부정합한 영향을 끼칠 것은 명백한 일이다.
챤디가르의 도로를 지나면서 빌딩의 벽을 이룬 도시의 모습은 발견 할 수 없다. 마치 평원에 규칙바르고 곧게 뻗은 도로를 따라 달리는 기분이다. 도로옆에 무성하게 자라는 가로수사이로 언듯언듯 나타나는 낮은건물의 모습에서 서구 여타 도시의 번잡하고 활기찬 도시풍경은 찾을 수 없다. 도로로 나뉘어진 각 섹터는 섬처럼 이웃 섹터와 고립되어 있다. 그리고 도시생활은 섹터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인도의 자족하는 공동체 사회의 모습이다.

3.캐피털의 건축
외부공간
이 곳의 방문자가 캐피털의 입구에 당도하여 건물을 보기 위해선 광장을 향해 오르막 길을 잠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약간 휘어 진 길을 따라 가면 오른 쪽에 대법원이 나타난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서 인공의 언덕에 가리워졌던 의회동이 왼꼭에 나타난다. 이것은 설계자의 연출에 따라 움직여가는 것이다. 왼꼭에 공사중 파낸 흙더미로 만들어진 인공의 언덕과 오른 쪽의 숲이 그 연출의 세트이다.
캐피톨 마스터 프랜은 평면 자체가 기하학적 변주의 시이다. 거기에는 건물의 평면도와 같은 감각의 진수가 담겨있다. 의회동과 대번원 영역의 경계에는 명상의 계곡이라 불리우는 인공계곡이 있고 의회동 정면에 좀 떨어진 거리에는 그늘의 탑이 서있다. 그리고 양건물의 축과 직각 방향에 펼친손의 모뉴멘트가 서 있다. 의회동과 대법원 앞에는 인공의 풀에 건물이 비치도록 되어있다. 의회동과 법원 사이의 거리는 460M에 이른다. 이러한 각각의 성격을 지닌 건물과 조형적으로 계획된 시설물들의 화음이 전해지는 이 외부공간은 캐피털에서 가장 강한 상징성을 느끼게 한다. 이곳에 서면 캐피톨의 몇개의 건물에 가리워지는것을 제외하고 멀리 평원 끝까지 시선이 닿아 고요하게 느껴진다. 현대인에게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것은 이러한 고요함과 침묵의 힘인지도 모른다.
행정동은 이곳의 중심에 초대되어 있지 않다. 주 광장에서 행정동은 의회동의 너머로 비켜서 보인다. 르꼬르뷔제의 생각에는 행정동은 단지 사무하는 기관으로 인식한듯 하다. 이 곳에 초대된 또다른 건물은 그 행정의 수반이 거쳐 하는 총독관져가 계획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 건물은 실현되지 못했다.

대법원
대법원은 캐피톨 건축 가운데 가장 먼져 착수된 것이다. 르 꼬르뷔제는 1951년 현지의 방문에서 건물에 대해서 나아갈 길을 찾아냈다. 태양이 이 나라에서는 명령적인 절대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그늘의 차양을 만드는 것이 제일의 해결책이다. 브레이즈 소레이유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낭만적인 표현 요소로서도 안성 맞춤이었다. 계획할 당시에 그려진 그의 낭만과 시심을 알 수 있는 스케치가 남겨져 있다. 거대한 차양이 외부공간을 포용하듯 펼쳐져 있는 그림이다.
대법원의 지붕에 떠있는 연속된 볼트의 거대한 우산의 그늘은 그 건물에서 가장 인상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회화적인 비례로 구성된 브리즈 소레이유가 외부에 설치되어 지붕형태와 함께 강한 조형적 힘을 발산하고 있다. 법정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작은 칸막이 상자처럼 끼워져 있다. 주 출입구는 지붕까지 오픈되어 의사당쪽에 면해있다. 두꺼운 측벽의 개구부와 같이 도려낸 부분과 아치 터널을 이루는 기둥에 가가 원색의 채색이 되어 강렬한 느낌을 더해준다. 내부로 진입하면 3층 까지 연결된 경사로에 다다르게 된다. 경사로에 연결되어 엘리베이터 홀과 각층의 복도가 있고 엘리베이터는 2대가 설치되어 있다. 대법원 후면에 돌출된 사무실 블럭의 매스도 브리즈 소레이유로 되어 있다. 외부에 창이 없이 직접 외기에 노출되어 있어서 서늘한 그늘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 건물의 생명은 외부에서 보여지는 조형의 힘에 있다. 그러나 건물 내부에 들어가 보면 엘리베이터, 천정의 노출배관, 그리고 콘크리트의 시공 상태가 너무 조잡하다는 느낌이 든다. 건물의 이용계층이 낮아서인지 건물이 관리상태도 좋지 않고 지저분하여 아쉽게 느껴졌다. 높은 층높이에 의해 길어진 경사로를 오르면서 이용자들이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꼬르뷔제에게 있어서 이 경사로는 인도의 건축에서 개념상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인도인에게는 기계보다 보행의 이동이 더 자연스러울 수 있다. 르 꼬르뷔제가 설계와 건축에 전념할 때도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시인과 화가나 조각가도 거기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회동
그의 초기의 스케치에는 의회동도 마주보는 대법원과 같은 이미지로 계획 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계획을 진행해 가면서 변화해 나갔다. 그는 아메다바드를 비행기로 여행하면서 사바마티 강가에 줄지어 솟아 있는 쿨링타워를 보고 영감을 받아 그것을 회의장의 구조로 채용하였다. 그리고 내부의 그 매스가 지붕위로 치솟아나와 이 건물을 특징짓는 조형적인 틀이 되었다.
이 건물의 내부 공간의 중요한 개념은 기둥의 숲이 리듬을 만들어 내는 높고 서늘한 공간이다. 이것은 내부의 외부공간이다. , 하원의 회의장과 사무실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 내부 광장에서 흩어져 각기 다른 목적의 장소로 찾아들어간다. 각층을 이어주는 것은 르 꼬르뷔제가 즐겨 사용하는 경사로이다. 이 곳을 오르며 다양한 장면의 스펙타클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회의장 곡면쉘의 상부는 경사지게 하고 거기에 금속제 뚜껑을 덮었다. 이 뚜껑은 바로 물리 실험실과 같은 장치로 하고 자연채광의 조절, 인공광, 환기, 그리고 한편으로 전자 음향기구를 겸한다.
음향처리에 불리한 원형의 평면에서 흠음재료의 사용 위치에 따라 음을 반사하고 흡수 할 수 있게 하여 계산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벽면은 르 꼬르뷔제의 그림에 의한 거대한 티피스트리와 조형적 모티프 들의 균형 에 의해 축제와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건물의 외관은 기하학적인 매스와 덧 붙여진 여러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도록 계획 되어졌다. 건물의 정면에는 빗물홈통의 형상이 매우 조형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판형의 기둥은 자유스럽게 크고 작게 뚫려 있다. 외부의 설치된 브리즈 소레이유는 단순한 매스에 볼륨감을 더해준다.

행정동
르 꼬르뷔제의 작품 중에는 조각가가 하듯이 조형적으로 통일된 형, 그리고 조립공이 하듯이 고립된 형태나 부품의 조합의 두가지 수법중의 하나를 찾을 수 있다.
행정동도 단순한 매스의 독립적인 구성에 조형요소가 첨가되고 각 요소간에 긴장을 유발시키는 르꼬르뷔제의 후자의 수법이 읽혀진다. 행정동의 특징은 길이 254M의 길이의 길다란 매스에 손잡이 처럼 매달린 경사로의 외부매스, 그리고 모듈러에 의해 크고 작은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긴 건물은 신축 죠인트에 의해 3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이 건물에 들어가려면 먼져 외부에 설치된 출입 관리소에서 허가를 득해야 한다. 이 건물의 중앙 부분에는 수 충분의 높이를 가진 개구부가 있어서 외부에서 건물의 앞뒤를 연결해 주고 있다.
현관을 진입하면 대법원과 같은 코아 구성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도 건물의 규모에 비해 에레베이터의 대수가 적다는 느낌이 들었다. 각층의 이동은 경사로를 이용하도록 계획 되었다. 외부에 혹처럼 붙여진 경사로의 내부는 정사각형의 모자이크된 작은 창으로 어스름한 빛이 들어온다. 지붕에 올라가면 예의 옥상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마르세이유 아파트에서 처럼 경사로와 계단 그리고 흥미로운 행동을 유발시키기위한 외부시설물의 장치들이 조형적인 콘트라스트를 이루어 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옥상정원은 넓은 평원으로 시선을 가져가는 조망의 장치로서 더 큰 가치가 느껴진다.

펼친손
선사시대 이래 손은 작업의 도구로서 뿐 아니라, 자연을 자신의 목적에 따르게 하는 인간의 능력을 상징해 왔다. 즉 인간의 손으로 기원할수도 축복할수도 있는것이다. 작가로서 그자신의 손은 창작의 상징체였다. 챤디가르 캐피털을 계획하면서 그는 평화를 염원하는 상징으로서 손의 모뉴멘트를 세울것을 제안하였다. 19541126일 르 꼬르뷔제는 네루수상에게 보내는 한통의 편지에서 펼친손이 상징하는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인도는 예지와 윤리, 그리고 자각을 지니고 있다. 이 손은 창출된 부를 받기 위해 펼쳐져 있고 그것을 자국민 및 다른나라 국민에게 분배하기 위해 펼쳐져 있다. 펼친손은 기계문명의 2단계, 즉 조화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줄 것이다.같은 시기에 인도의 기술자 바르마는 르 꼬르뷔제 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인도에는 람 브하로자Ram Bharosa라는 말이 있읍니다. 이것은 전혀 보수를 기대하지 않고 봉사하기를 지향하는 최고선 에 대한 지향을 흔히 의미합니다. 우리는 겸허한 국민입니다. 당신의 펼친 손 의 철학은 인도인들에게 전면적으로 지지를 받을 것입니다.이 손은 멀리서도 보여 방문객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손은 바람의 방향에 따라 회전할수 있게 되어있다. 펴친손은 지면아래로 오픈된 공공 토론의 무대와 객석이 설치되어 있다.

4.그외지역의 작품
미술관과 어린이 박물관
와상으로 성장해가는 미슬관 이 구상은 1931, 처음으로 계획된 이래, 끊임없이 되풀이 제안되어, 비로소 실현된 것이다. 이 계획은 본질적으로 유기적 구성의 원리에 의해 구성되었다. 그로서는 와상의 미술관이란 자연의 성장 법칙과 일치하는 것이며 구체적인 기능과도 일치하는 것임을 믿었을것이다. 그는 1950년대에 동계열의 3개의 미술관을 아메다바드와 동경에 각각 실현 하였다. 그중 아메다바드의 작품이 시초이다. 이 곳에서는 그 원형이 세심한 주의에 의해 더욱 세련되어 건축적 힘이 느껴진다. 캐피털의 의회동에 사용된 빗물홈통이 축소되어 측면에 메달려 있다. 이 홈통과 상부에 돌출된 톱라이트는 단순하게 처리된 건물의 매스에 생기를 불러 일으킨다.
피로티를 통해 현관에 진입하면 평면의 일부가2층까지 오픈된 홀이 있다. 그의 미술관에 대한 구성을 보면 동일한 기능의 장소가 필요한 만큼 연결되고 또 필요해따라 확장해 나갈수 있는도록하는 개념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2층에는 경사로를 통해 오르게 되어있다. 내부의 분위기는 노출콘크리트와 부분적으로 칠해진 벽과 천정면의 시각적 균형에 의해 이루어 진다. 그것은 인도에 지어진 여타 건축과 같은 서늘한 느낌이다. 미술관 내부의 천정에서는 톱라이트에 의해 자연광이 부드럽게 실내에 퍼져 전시대상물의 성격에 따라 인공조명과의 조합에 의해 잘 조절되어지고 있다.
르 꼬르뷔제에 의해 실현된 3개의 미술관이 동일한 개념의 표현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의 동선구조와 내부마감과 채색여부, 그리고 빛의취급 방법의 차이에 의해서 각각의 독자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어린이 박물관은 스위스 로잔에 있는 르 꼬르뷔제 기념관과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두개의 건물이 각기 콘크리트와 철골이라는 구조의 차이점을 갖고 있다. 로잔에서는 평소 르 꼬르뷔제의 건축과 다른 표현의 실험성을 느꼈으나 친근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던 기억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인도적인 소박한 표현이 친근감을 갖게한다. 단지 이건물에서 어색하게 느껴진 부분은 떠있는 지붕구조에 돌출된 보였다. 외벽창은 라뚜우렜트 수도원에서 음악가 봐이잔스키와 같이 연구한 음향의 기하학과 같은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부에 독립된 매스로 구성된 경사로는 눈높이 천정스라브 밑으로 설치된 연속창의 어스름한 채광에 의한 동굴과 같은 원초적인 공간의 이미지등 그의 특유의 공간처리 방법으로 되어있다.

건축학교
건축학교의 배치는 아틀리에와 중정이 교실을 둘러싼다. 건물은 직북으로 향해서 북광선의 은은하고 서늘한 광선을 받도록 하였다. 방의 칸막이는 낮은 것으로 되어있다. 외벽은 보통 적 흑벽돌로 되어있다. 캐피톨에 가까이 있는 건축이 강한 표현이 되지 않도록 한것이다.
교실의 창은 천정쪽에 높이 설치되어 있다. 교실에서 창너머 주변 풍경에 마음을 쓰지 않게 하고 강한 직사광선이 책상위에 비추어 눈부시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것은 말년의 베니스 병원에서 제안했던 실내 채광의 원리와 유사하다.
파도의 물결모양이 반복되는 듯한 외부형태는 그의 건축 가운데 독특한 이미지이다. 외부형태는 동일한 패턴이 반복된 단순한 모습이지만 내부는 조형감이 충만하다. 들려진 지붕의 곡면구조는 실내에 그대로 노출되어 노출 콘크리트의 마감으로 되어 있다. 공동블럭의 창틀을 쌓아만든 회랑은 벽으로부터 빛이 흘러들어 기하학적 패턴을 바닥에 수 놓는다.

요트 크럽하우스
챤디가르의 주위에는 파치아리강과 마니. 마즐라 강이 있으나 몬순시를 제외하고 대개는 말라있다. 5월과 6월의 혹열기에는 모래와 먼지가 시를 덮는다. 그래서 물을 채우기 위한 둑을 만들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호수에 물이 가득 고였다. 이렇게 저장된 호수에 의해 시민의 좋은 휴식처가 마련 되었고 보트놀이도 할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여가를 즐기려는 사람들을 위해 클럽하우스가 필요하게 되었다.
르 꼬르뷔제는 캐피톨 북쪽에 건물을 만드는 것을 피하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히말라야 들까지 넓은 풍경을 가리지 않기 위한 것이다. 르 꼬르뷔제는 도로에서 3M내려온 곳에 건물을 배치함으로서 산책로에서 보이지 않게 하였다.
이 건물은 등간격의 스판에 의한 소박하고 낭만적인 작품이다. 단순한 매스와 그 윤곽 안에서의 복잡한 콘트라스트와 개방된 공간처리가 자연스럽다. 단순한 구성안에 거장의 자연스러운 솜씨가 녹아있는 작품이다.

5.피에르 쟌느레의 작품
르 꼬르뷔제의 전작업에는 많은 협동자가 등장한다. 언젠가 르 꼬르뷔제 건축에서 그 협동자들의 역할을 정확히 규명할 시기가 올지도 모른다. 특히 평생을 함께한 피에르 쟌느레의 역할에 대하여 가늠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이 말없고 겸손한 건축가의 개인 작품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챤디가르에 있는 간디 기념관은 그의 손으로 지어진 것이다. 그 작품에서 나타난 디테일의 솜씨는 한마디로 르 꼬르뷔제 작품 그 자체의 느낌이었다. 르 꼬르뷔제의 아이디어가 이 사람의 디테일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할수 있을지 모른다.
알프레드로토는 19686월에 베르크지에 피에르 쟌느레의 역할을 훌륭하게 표현한 말을 실었다.“이 걸출한 건축가,무비의 남자를 너무도 뒤쪽에 숨겨온 것은 아닐까, 꼬르뷔제 자신과 현대 건축이 피에르 쟌느레 에게 부하한 것을 되돌아 보지 않고라고 썼다.

6. 챤디가르의 교훈
여기에는 한 건축가의 꿈과 의뢰자의 요구에 의해 건설된 거대한 드라마가 있다. 우리는 챤디가르의 거대한 건축적 힘 앞에서 현실안에서 꿈을 잃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본래의 꿈을 일깨울수 있다. 현실은 르 꼬르뷔제의 세대가 굼꾸던 이상의 미래 사회로 구현되지는 못했지만 그들에게는 새로운 시대에 거는 이상과 꿈이 있었음이 진실이었다.
우리는 르 꼬르뷔제가 애정을 갖고 평생동인 변함없이 추구해온 성과앞에 서 있다. 그리고 건설된지 30년이 지난 오늘 챤디가르 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 앞에서 적이 되든지 동지가 되든지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알아야 할것은 그가 건축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는 건축의 역사상 드물게 시적 감성을 건축에 표현한 것이다. 건축에 있어서 시적 감수성의 정신이 이 시대의 요구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건축이 추구할 수 있는 고귀한 가치이다. 건축은 시대 물질적 상황이 아닌 인간의 속성을 위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날로 악화 되어가는 자연환경의 파괴와 인간 생존의 불안 앞에서 르 꼬르뷔제의 건축과 도시에 대한 사고가 결집된 챤디가르는 미래의 건축 창조에 길잡이가 될 것이다. (1996.05 건축사 김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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