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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제목

시집을 내면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5.07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46
내용

 




시집을 내면서...


 


  작년 환갑을 지나고 다시 새해가 찾아왔다. 갈수록 세월이 빨리 흘러가는 듯 세월의 살가움도 채 느끼기 전에 새해가 금세 다시 온 것 같다. 그래도 이 맘 때는 새 봄의 생명력을 기다리는 작은 설렘을 가질 수 있어 좋다.

 

  여기 엮은 글들은 오랫동안 때때로 생각이 떠오를 때 끄적이듯 적은 것이다. 남에게 보일만 한 자신이 없지만 '환갑'을 핑계로 엮어 볼 생각을 했었는데 해를 넘겨 다시 읽어보니 더욱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된 데는 평소 사물을 보는 감각이 예민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특히 어렸을 적부터 자연 현상을 경이롭게 보아 왔다. 그리고 여행이나 산행을 하면서 마주치는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낄 때마다 감동에 사로잡히며 그 느낌을 글로 담아두고 싶었다.

 

  년대별로 글을 정리하다 보니 초반부에는 삶의 아픔에 대해 쓴 것이 많고 그 후로는 일상에서 대하는 사물이나 자연 그리고 답사나 여행 중에 받은 인상을 쓴 것이 많다. 대부분 그때그때 떠오른 시상을 적은 것이다. 그래서 시마다 다 쓴 날짜가 적혀 있다. 오랜 시간 숙고하며 다듬을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깊이 있게 다듬어지기보다 날 것의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많을 것 같다.

 

  나는 따로 문학적 수업을 한 적은 없지만 어렸을 때부터 책에서 대하는 글들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농촌에서 농사일을 거들어야 하는 형편에서 마음 편히 책을 대하는 시간을 갖기는 어려웠다. 집안 형편과 여러가지 일로 편한 마음으로 학창시절을 보낼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가난한 집에 우환이 쌓여갔다. 그리고 부끄러워서 친구들에게 점차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와 동생 둘만 남아 살아가던 고교시절에는 소년가장 같은 책무감도 들었다. 글을 다시 보니 어린 시절을 쓸쓸하게 지나온 아픔이 드러난 것도 있고, 혼탁한 세상을 외면한 채 어릴 적 순수한 심성을 고이 간직하고픈 마음도 담겨 있다. 나이가 들면서 그것이 조금씩 바래졌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마음 바탕에는 그 정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다.

 

  글을 정리하다 보니 평소 감춰두고 싶었던 마음까지 드러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아픔도 함께 드러나는 것이 민망스럽게 생각된다. 거기에는 몸부림도 있고 좌절감도 있다. 나의 슬픔은 어떤 연유로 생겨났을까 뒤돌아본다. 자아를 발현하지 못하고 스스로 포기해야 했던 것으로부터 오는 슬픔도 있고 현실과 내 자아와의 괴리와 갈등, 좌절감, 외로움이 슬픔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늘 결핍을 견디어왔다. 그 내력은 환경의 탓도 있고 성품의 작용이기도 한 것 같다. 나는 내 안에 있을지 모를 어떤 소양을 밝히거나 아름답게 가꿀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책을 보는 것도 일안하고 책을 본다고 꾸중을 들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책을 보는 것이 죄스러웠다. 나는 언제나 나를 주장하지 않고 스스로 그 분위기에 따라 책을 접었다. 그러나 마음의 눈에는 대자연의 신비롭고 경이에 찬 모습이 늘 바라보였다. 현실에서는 어둠의 장막에 가려지듯 함께 나눌 수가 없었지만 마음 안에 비치는 일들이 정말 소중한 것 같았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그 때는 조금의 특별함도 있었던 것 같다. 그 특별함과 마음의 상처가 나를 형성해 온 것 같다. 나는 입학하기전 저절로 글을 읽고 쓰게 되었고 우주의 경이에 사로잡혔다. 까닭을 몰랐지만 초교 2학년을 올라갈 때 부모님이 선생님을 찾아가서 월반을 시켜달라고 한 적도 있다.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자연 운행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이치에 따라 생각만 하면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직관력을 느꼈다. 내가 태어난 집은 전주 변두리 건지산을 마주 보고 있는 농촌이었다. 지금은 도시로 개발되어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머릿속으로는 늘 생생히 그려진다. 어린 시절에 전깃불 없이 태초의 모습대로 다가오는 자연을 대하며 갖가지 생각이 불러 일으켜지고 사유를 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로 다가온다. 밭에서 자라나는 갖가지 채소들의 신기한 생명력, 집 앞 논둑과 밭 사이 길을 지나가다 만나는 작은 개울, 맑은 날이면 늘 대하는 밤하늘은 그야말로 세상을 경이롭게 했고 늘 생각에 잠기게 했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우주, 그리고 자연이 그토록 신비롭고 고귀하며 아름다운 것이라는 확신이 늘 마음 안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것이 참된 본연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도 그처럼 순수할 것으로 여겼고 그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조금씩 어른으로 다가가고 사회인이 되면서 점차 세상의 현실을 알게 되고 세상이 그로부터 많이 벗어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사회인으로 끼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한걸음 한걸음 더 세상에 발을 들여 놓을수록 그 자연의 순수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되는 것이 슬픈 감정을 갖게 했다. 어쩌면 세상과 인간의 삶이 고귀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소년 시절의 생각과 현실적 괴리가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지니게 된 슬픔의 근원인 것 같다. 아니면 너무 일찍 세상을 느끼며 고뇌하게 되었고 너무 이상적인 생각을 신념으로 갖게 된 것이 원인일지도 모른다. 중학교 때는 살던 집을 억지로 떠나 시내에 살다 고교 때 다시 돌아오면서 늘 교감하던 자연을 대 할 수 없고 단절되는 당혹감과 가정 형편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고 고교시절 이후엔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살아감과 살아짐에 대해 생각했다. 살아짐은 피동적으로 살게 되는 순간들이고 살아감은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본래 모습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삶이 살아지고 있는 듯 보였다. 직장생활 등 주어진 목표와 임무가 확연한 생업의 일들은 대부분 그 안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살아짐을 벗어나려면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생계 수단과 연관이 있다. 싯다르타처럼 구걸을 해서 삶의 속박에서 자유로울 방법도 있다. 풍족함을 피하고 가난함을 택하면 그 만큼 자유로워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예술가의 삶은 작업 특성상 조금 더 자율성이 있다. 그러나 순수하게 예술 작업으로 생계가 보장된 사람은 드문 편이다. 자유와 생계 사이에서 갈등을 겪기도 한다. 나 같은 건축가의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일이 진행되면서 설계 의도가 제대로 실현되기까지 갈등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건축가로서의 삶을 기쁘게 여겨왔다. 온갖 현실적 괴로움에 당면하게 되더라도 현실의 삶으로 끝까지 갈 길은 그것뿐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다내가 살아가는 길이 참 된 것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물음을 할 수 밖에 없었다그런 생각을 하면서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근원적 모순에 대해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본질도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본성과 같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본성 안에 지금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전혀 다른 본래의 잊힌 것이 따로 있을 수 있다. 그 안에 진정 주인이 되어야 할 것이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대부분 현실의 삶을 전부로 여기기 쉽다. 아니 그 안에서만 살아가기가 쉽다. 나는 철학적 사유를 늘 지니고 살아온 셈이다. 인생에서 가장 만족스런 일은 건축가로 살게 된 것이지만 내 안의 근원적 바탕은 그런 모습일지 모른다.

 

  인간이 이런저런 이유로 존엄한 존재로 살아가지 못하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슬픈 일이다. 사람은 어떤 특정 위치나 이름으로 불릴 때 사회적으로 그 같은 사람으로 자리매김 되고 못 박히기 쉽다. 그로 인해 본의 아닐망정 굴레가 씌워지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사회구조나 일상적 삶의 구조 그리고 대인관계에 이르기까지 그런 위험이 도사린다. 어려운 환경 때문에 남들이 좋은 학교나 직장이라고 부르는 곳에 함께 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낮은 자리에 앉게 되는 수가 많고 사람의 살아가는 처지가 인간적 선입견을 씌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슬픈 일은 각자 스스로가 그런 삶들을 자신의 모습으로 굳혀가는 것이다.

 

  나의 사유는 간혹 속세를 떠나 자유를 누릴지언정 삶은 속세를 벗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속세에는 사람들의 허위, 치기, 위선, 가식 등 볼썽사나운 일들이 득실거리고 투박한 삶이 고스란히 투영되기도 한다. 인간은 고귀한 존재이지만 타인을 어떤 존재로 쉽게 규정하고 아무렇게나 대하기도 한다. 그리고 쉽게 어울리다 조금 친해지면 천박한 말투로 대화를 하면서 욕설이 난무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해, 우주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세상을 재고 판단하고 그로 인해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하지만 어떠한 대항의 여력도 없이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도 한 몸이 되어 뒹굴지 못한 채 끼어 있는 상황이 될 때가 많다.

 

  세상은 꾸밈없는 진실함으로 소통되는 모습을 대하기 어려웠고 점차 순수함이 제대로 소통될 거란 생각을 아예 하지 않게 되었다. 수더분한 인간사와 세상의 일상을 저만치 떨어져 관조하며 지켜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자발적인 소외의 길을 택할 때가 많았고 세상에 속했어도 속해 있지 않을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어렸을 적엔 마음의 상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머뭇거렸고 나이가 들어서는 맑지 못한 세상에 가까이 가지 않고 스스로 변방에 서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세상에서 값지게 여기는 갖가지 일들과 수더분한 삶에 내 인생은 깊게 공존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지 않았다. 어디든 주인으로 있지 않았고 단지 때때로 수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을 것 같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하는 일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차라리 침묵을 할 때도 많았고 내 안의 강인함을 눈치 채지 못하게 바보스럽게 보이고 싶을 때도 있었다. 늘 고요함 속에 진실을 찾아 헤매듯 시선을 허공에 둘 때가 많았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외로움을 키웠다. 단지 마음만 조용히 내 뜰에 머물 곤 하면서 순간순간 사유하며 살아온 샘이다.

 

  내가 세상을 견디는 방법은 고독이었다. 그렇게 맷집 강한 고독의 삶이 쌓여갔다. 그것이 쌓이며 내 안 어디엔가 슬픔의 상처가 되어갔다. 호소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그리움이 가득 고여 갔다. 하지만 세상 안에서 진실한 마음을 편히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 같다.

 

  나는 때때로 시를 썼다. 세상을 관조하듯 멀리 보면서, 세상과 온갖 사물과 교감하며 글을 썼다. 시집을 내면서 지난날을 회고하는 기회가 되었다. 세상이 맑고 순수함만을 간직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대하기 어려움을 알면서 속세의 삶가운데 일어나는 갈등들을 그냥 몸으로 견뎌올 때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직업이 전문 직업인인 건축가로서 나 자신의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던 것이 다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책의 제목 삶 그리고 산책은 현실에서의 일상적 삶과 때때로 시를 쓸 때처럼 자유롭게 사유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자연에 대한 경이에 사로잡히고 근원적 고뇌에 빠질 때도 있지만, 삶 자체가 어디까지나 현실과 마주 부딪치면서도 충실히 일을 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그리고 나 또한 그 현실의 길에 늘 충실하려고 해 왔다. 그러면서 때때로 일어나는 상념들을 잠시 붙들며 느낌을 가록하는 시간도 놓치고 싶지 않다.

 

새해를 맞으며 살이 있는 시간에 감사하고 좀 더 삶에 충실해야겠다는 각오를 가져 본다.

 

  2020 1 29

一梅軒에서 김석환




  




   

추림


회 상

1988. 8. 16


눈을 감으면 떠오른다.

내가 살아온 계절은 내내

낙엽 같던 갈색 빛깔


나는 가끔 홀로 꿈을 꾸며

한 줄의 시를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내 마음 안에 갇혀 있기만 하던

나의 꿈은 그때

희망봉을 향해 출발하던

뱃전을 잡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고...

뒤늦은 배로 그곳에 닿았을 때는

지난날 꿈속의 풍경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은 무지개였나

그것은 무지개였나!


나는 그곳을 맥없이

지나쳐 왔다.


     

겨 울

1988. 2


들녘은 뱃가죽을 드리운 채로

무거운 침묵을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인생의 길목에서 또다시

이 길을 지나가야 합니다.


은수원사시 하얀 살갗이

싸늘한 바람에 움츠리며

여윈 가지에 밤새 내린 서리가

맑은 햇살에 이슬 되어 반짝이고

쉬지 않고 걸어 보아도

빈 들판만 보입니다.


풀잎처럼 시들어간 추억들

흰 눈이 흩날리고

낙엽마저 묻혀 버리면

전설처럼 꿈이 되어 피어나겠지요.


바르게 살아간다면 아픔도 덜 하겠지만

가난했던 어린 시절 착한 마음 잃고서

어느새 추한 몸짓을 하고

흘러간 세월을 바라봅니다.


인적 드문 동네에는 겨울도 길어

사립문도 여러 날 닫혀있고

눈보라 몰아쳐 문풍지 떨려도

화롯불 가에 피어나는 온기같이

살랑 바람이 흙냄새 실어 올 때에

기도처럼 희망이 느껴지겠지요.



     

한 낮

1989. 6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

다만 구름이 흐르고 수박이 자라고

고추가 붉어지며 고구마 넝쿨이

이랑을 넘나드는 오후를

나는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다.


나는

꽃잎이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는 순간과

파란 하늘이 드넓게 보이는 때와

녹음이 짙어 가는 찰나의 표정을 보았다.


산 그림자 길게 늘어져

서늘한 기운이 몸에 걸쳐올때까지

내가 머문 흔적은 없었다.



   

운 명

1992. 7. 7


나는 마법에 걸렸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괴로울 수는 없다


모든 상식이

깨어지고

사람들의 행복한 느낌마저

나에게는 공허하다


누구냐

지금처럼

기나긴 투쟁의 평행선을

달리게 하는 자는


나는 마법의 굴레에 갇혀

인생의 수레를 밀 때마다

상처를 입고 있다



생의 마지막 계절에는

1992. 9


그 계절의 마지막 하루는

내내 사색에 잠기렵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의

이름을 천천히 부르면서

아침 이슬에 반짝이는 영롱한 햇살

활짝 피어나는 꽃송이

마당을 지나가는 처마 그림자

그리고 석양 노을을 바라보면서

나의 지나간 삶의 순간들을

떠올리렵니다.


내 생의 마지막 계절에는

나의 고독했던 슬픈 삶들을

밤하늘의 푸른 별빛을 따라

무궁한 창공 위로 벗어 던져 버리고

화해와 용서의 기도를

올리렵니다...


내생의 마지막 계절에는

마음의 편지를 쓰렵니다.

나에게 친구가 되어준 분들에게...

하지만 대화가 없던 가족들과 어머니께는

이런 마음이야 어떻게 전하겠습니까?


생의 마지막 계절에는

내가 알았던 모든 분들께

작별 인사 대신

축복의 기도를 올리렵니다.





평사리의 봄

1997. 3. 10


봄 햇볕은 요정처럼

신비롭다.


삭풍이 살갗 움츠를 때

불청객 올 것 모르고

돌담 너머 매화꽃 터트려서

촐랑이 놀고 있다.


들녘 땅 빛깔은 아직 겨울 그대론데

부시시한 보리는 한 움큼 솟아 있고

나물 캐는 아낙네 점점이 앉아

봄볕을 아우른다.


너른 들에 반사된 황금빛 따스함은

먼발치 검은 산에

연두 빛깔 묻혀 가는

봄의 정령인가 보다.






구인사 가는 길

1999. 12. 26

      

수북이 쌓인 너른 눈밭 가운데

미라처럼 열지어 서 있는

고추나무 그루터기 사이로

싸하이 스쳐가는 바람


멀리 탐미로운 자태를 뽐내는 능선위에서

차가운 빛깔을 띠고

수묵화의 필선처럼 서 있는 나무들


멀고 가파른 산사길

미끌리는 걸음에 늘여지는 시간 동안

내 몸에 배어오는 투명한 겨울 정취


길 끝에서

고향집처럼 살갑게 만난 절집


그 곳을 비추는

유독 따스한 햇살은

처마 끝에 달린 고드름을 감싸고

드문드문 맺히는 물방울이

구슬처럼 반짝인다.


그 순간

나의 감각은

다 사물로 달려가고

내 안은 가벼워진다...


산사를 나오는 길

오늘 중으로 분주히 왔다가는

도시인들의 삶의 얇음


한낮 햇살을 받으며 녹은

양지녘 눈길의 질척거림

그 흔적과 더불어 따라갔을

오늘 내 생의 순간...


눈이 쌓여 더욱 깊어진

산사 어귀의 마을


비스듬한 언덕위에 선 초가 울타리에

겨울 햇살을 받은 대숲에서

연푸른 빛깔 푸르름이 빛나고


우리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 눈에 서린

다른 그리움


      


강화 선두리 갯벌

2000 년 1월 1일


바닷물에 풀려 곤죽된 흙이

세월을 채 가름하며

잿빛이 되고


침잠한 뻘 위로

시지포스 신화처럼

반복되온 밀물 썰물...


저 먼 창공을 가벼이

때론 설운 몸서리질치며

소슬바람 일으키듯

날아가는 기러기 떼의

꺄륵 까르륵…

울음소리


어느 샌가

도랑을 따라온 밀물에 지워진 갯벌


정박한 어선을 허리쯤 잠그고

이따금 흔드는

바닷물의 찰랑거림


너른 갯벌 위를 달려 온

바닷바람에

떨림으로 만나는

뭍과 바다


그 위로

어제처럼 내리쬐는

새천년 태양빛





직소폭포

2000. 8. 5


묵묵한 걸음 쌓아 가면

신선봉과 연화봉

양미간을 가로선 절벽에

하얀 비단 실타래

한 줄로 늘여 놓은 듯

직소폭포가 걸려 있다.


업장 털으라고 시킨 일이듯

늘 같은 꼴로 저렇게

실타래만 감던 세월

깊이를 잴 수 없는 소가 자리를 잡고

그 깊이만큼

푸른 물빛을 띨 때

용의 구담(口談)도 깃들어

함께 살았다.


세상 끝, 천상의 끝인가 시작인가 모를

그 막다른 절벽에

처음이나 지금이나

하늘과 속세를 잇고 있는

하얀 비단 실타래 타고

간혹 마음이 밝아 올

천상 이야기 한 자락씩 흘려 나와서


오늘 내가 처음 찾아들 때도

후련하도록

가슴 한 번 크게 쓸어 주었다.



 

밤바다

2000. 8. 5


밤바다는 연인들 가슴앓이이듯

언제나

그리움으로 일렁인다.


깜깜한 어둠속에서

젖은 자갈밭 밟으며

숨결 들리는 곁으로 다가가면

바다는 느릿하게

한번 뒤척이고는

이내 무겁게 침잠한다.


짙은 어둠 속에서

저 바다 언저리에 빛나는

아스라이 먼 뱃전 불빛은

처량히 멀어만 뵈고

별을 헤던 밤바다의

외로움도 깊어만 간다.


오랜 세월 적막을 참아 오다

목이 메여 버린 바다는

새벽까지는 그렇게 항상

밤새 뒤척인다.



      


아침바다

2000. 8. 6

바다로 난 길 따라 걸어가면

멀리 맞닿은 하늘로

항해 해 가듯, 배 한 척이

궤적(掛跡)을 그려 가고


몽돌들 사이로

파도 머리가 날숨을 쉬는

해변 가에서는

이곳에 와서 금세 친구가 된

젊은 남편들과

함께 온 엄마와 딸과

불뚝 배기 배를 드러내었어도

흉 볼 것 없는 연배끼리

도란도란 걷고 있다.


아침나절 한물 나갈 쯤

걸터앉기 좋은 바위로 가 앉으면

조그만 게가 굼실굼실

방해꾼인 나를 흘기며 기어가고,


아~하 어젯밤

야광을 흩뿌리며 튀던

저 물 사래기 떼

후닥닥 흩어 숨는다.


저 건너 절벽 위에서

밤새 낚시질 하고

아침 햇살에 눈부셔 하는 사람들

어젯밤 늦은 술로 쓰린 속에

백합죽으로 늦으막이 아침을 먹고

식당 마당 벤치에 않아 소나무 사이로

바다의 평화로움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 눈길이

한가롭다.




고교 동창생

2000. 8. 12


못나도 흉볼 것 없고

잘 났어도 폼 나지 않는

삶의 내력을 다 아는 처지


지금은 관광농원에

야유회도 갖지만

그 시절엔

이만큼 돈 드는 일이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었지...


그 친구들 장가들 때도

살림 처지랄 게 다 뻔 하였건만

지금쯤은 그나마 제법 자리가 잡혀

일 년에 한번 만나도 대충 살만해 뵈고


어떤 친구가 비싼 술만 시켜도

그런가보다 하고...


형수씨니 제수씨니 하면서

욕설이 난무하다가도

따라온 자식들 바라보면

어설피 연륜도 뵈네.


술 먹던 자리에

옛날마냥 모기장을 치고

술기운에 친구 배에 발을 걸치고

나란히 누웠는데


친구 마누라가

제 남편과 함께

이불을 덮어 주고 가네.




영선암

01, 11


생에 애착이 느껴질 무렵

두려움도 찾아왔다.


세상 사람들 모두 즐거운 표정 짓건만

까닭 없는 슬픔이 휘감아옴을 느낄 때

홀로 떠나왔다...


숲 내음 고여 드는 암자

마루턱에 앉아 머물 때

문득 세상 인연 그리움이 밀려오면

황급히 떠 밀쳐 내고


수많은 날 기다려 왔건만

아직 찾아오지 않은 느낌

기다리는 이의 눈길에 닿는

마당을 조용이 비추어가는 햇살


산천은 산짐승처럼 늘 깨어 있고

다시 찾아온 봄날

신록이 번져가는 기운이 반가워도

아직 다 덜어내지 못한 번뇌에

충만한 아름다움이 부끄러운 수도승






아우라지

02. 6. 2



돌아갈 길은 멀고

빽빽이 산굽이 둘러쳐

모든 이야기는 다만

물길로 오간다.


멀어서 그리움이 일고

멀어서 슬픔이 일고

조양강 강물도

더 푸른 빛깔이 되었네.


돌아갈 길 아득해

머물러온 땅

그리움 접고 돌아보면

흰 구름 한가히 산등성이 위로 떠가고


동박꽃 피는 소식

강바람 타고 올 때

구절리 처녀 볼엔 살포시

수즙은 미소 인다.





김오성


2002. 김석환



비단 옷자락에

겨자씨 묻혀 내듯이


금강석 같은 바윗돌에

수없이 부딪쳐 튀는 정뿌리

대어 쪼고 또 쪼고...


삭풍이 봄바람으로 변하여

겨우내 쌓인 눈을 녹이듯

예인(藝人)은 인고의 세월로

제 육신을 쪼았다.


그리고 마침내

정성된 기도에 감동하여

현현하는 관음보살처럼


핏줄이 흐르듯이

체온 머금고 나타난

육감(肉感)과 표정을

대하노라면


예인(藝人)은 감정을 주체할 길 없어

자리를 떨치고 나서듯


허허로운 어께위로

긴 낙시대를 걸치고

위도 밖 왕등도

섬기슭으로

낚시질을 가곤 했다.






삼년산성

02. 9. 13


무엇이 두려웠을까

그래서 저렇게 높다랗게 쌓았을까...


사람 무서워 쌓은 성

살아남고자 쌓은 성

천오백년의 세월로

쇠락한 성을 찾고 보니

먼저 슬픔이 인다.


살려면 더 높게 쌓아야 한다고

더 튼튼하게 쌓아야 한다고

얼마나 무서운 독려를 해댔을까


살아남아야겠다고

아니면 후손을 살려야 한다고

모진마음 먹고

채찍을 견디었을까...


한 번인가 적을 막아내고

세월이 강처럼 흐르다가

사람들은 삶터를 옮겨가고

제 홀로 남은 성은 품값도 못하고

세월 매를 맞으며

시나브로 스러져 갔다


지금은 살만한 곳도 아니고

막을 이유도 없어진 그 안에

언제부턴가 작은 암자가 들어서고

이제 그만이 주인처럼 사는 곳


그 암자 옆 양지녘에

묵은 화해의 기도처럼

돌무덤 하나 세워 놓았다.






라일락 꽃

03. 4. 18


목련꽃 후드득 져서 슬픈 날

아파트 단지를 걷다가

문득 맑은 꽃향기를 느꼈다.


처음엔 새순만 피워

무심코 지나쳤더니

등잔 심지가 돋워지듯

빠금히 따라 나와

솜사탕처럼 커진 꽃송이로

향기를 피워낸다.


아! 그 향기


라일락 꽃향기는

그냥 꽃향기가 아니다.


거기에는

영화 라마간의 마지막장면처럼

슬픔이 배어 있다.


라일락 꽃잎마저 저버리면

세상은 온통 녹음으로 무성해 가고


공중에 흩어진

기억 속의 라일락 꽃향기는

가버린 봄날의

진혼곡처럼


사무친 그리움의

향기를 피운다.






봄들녘 4

04. 4. 26


4월

앞 산 종달새

봄철 나른한 때

하늘로 한 번

솟구쳐 날아오른다.


항아리에 내린 청주처럼

맑은 논물에

한 조각 흰 구름이

제 얼굴을 들여다보다

지나쳐간다.


어디선가 날아온 학이

가느다란 긴 다리로

덤벙덤벙 걸음을 옮기며

먹잇감을 찾을 때


바람결에 실려 온

산벗꽃 한 닢이

그 발끝에 살며시 내려 않는다.


꺼칠게 선 갈대 옆에

노랑 애기똥풀이

선명히 수를 놓은

논둑엔


개망초 옆에서

송글송글

흰 꽃송이를 피운 조팝나무가


정갈한 미소로

후후

들내음을 맡는다.





해 저물 무렵

2007.11.23         



다시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갔다.


강물이

때론 소용돌이 치고

때론 고요히 달그림자를 비추었듯이

매순간 우리의 삶은

치렁거렸다.


언 땅을 녹이던 햇살의 따스함

마른가지에서 돋아난 새싹의 신비함

푸른 그늘에 부는 상큼한 바람결

영롱한 단풍을 추억으로 남기고

떠나간 세월의 말미에

나무가 마지막 잎새를 떨구며 젖는 감회처럼

지나간 세월의 영상이 마음에 아로새겨진다.


갑자기 닥친 초겨울 추위에 앓은 몸살로

외로운 모습 같은

앙상한 풍경 사이로

비치는 맑은 햇살이 따사롭다.


낙엽에 쪼인 햇살의 온기마저

살갑게 느껴지는 세모(歲暮)엔

삭막한 도시 가로에도 낭만이 쌓이고

메말랐던 마음에도 정감이 되살아난다.


한 해가 저무는 무렵

모임에 나가는 도시인의 발길엔

허전함을 달래고픈 정의 목마름이 있다.


그 마음 감춘 채

실없는 몸짓으로 위하여!를 외치며

술잔을 부딪다

마음을 다잡고

다가올 새해의 희망을 품는다.





홍매

2009. 3. 15


더는 막을 길 없다.


이른 봄 나절

첫 월경처럼 붉게

생명의 포만감을 누르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꽃망울들을...


더 미련 가질 수 없다.


꽃샘 다투어 열어젖힌 후

곧 져야 할 그 황홀한

생의 절명을...


그 귀한 모습 오래 지키려 해도

나른한 햇살은 조급히 피어나는 심장을 벌떡여

종말을 부추기고


한 순간 일다간 호흡인 것을

쓸쓸히 깨닫게 한다.






북한산


김석환

2009. 6. 27


오르기 전엔 알 수 없었다.


장엄한 바위산의 기운이

용트림하듯 엉기어

때론 생명을 거둘 만큼 험준하고

이마의 땀을 훔치는 바람결 지날 때

멀리 구비쳐 보이는 능선 자락이

때론 비단결처럼

감미로운 것을...


오르기 전엔 느낄 수 없었다.


새 왕조의 터전이 되어

역사의 이야기로만 들어오고

산기슭까지 좀벌레처럼 파고든

도시에 가려

얼굴도 볼 수 없던 곳에 서려진

영롱한 산 기운의 서기를...


거대한 정상 암봉의 기세는

천하 으뜸


곳곳에 솟은 봉우리들은

그 기세를 북돋우며

늠름하게 서 있고


봉우리를 이으며

갈래 뻗은 능선은

그 품을

넉넉하게 하고


큰 바위에 미끌려 흐르는

맑은 계곡은

온통

청아함으로 가득하다.





국화

2009. 10. 11


어떤 기다림인가


들녘은 온통 다 비어가고

이제 태양빛도 더 강렬한 정염을 보이지 않고

초목은 잎을 떨구며

이별의 사념에 잠기려 할 적에

꽃망울을 맺으려 하는 까닭은


찬이슬이 밤새 내려앉은 날

피어난 국화 꽃송이의

수려한 자태


하지만 그 표정엔

봄 꽃 같은 들뜸도 없이

맑디맑은 옹달샘의 고요함과

긴 세월을 기다린 의연함 뿐


이제 모두가 이별의 말만을

꺼내려는 시기에

봄날을 잠시 되돌아보게 하다

차가움 견디는 결연함으로

허전해진 세월을 위로하려고

은근히 피어난 꽃이여




개화(開花)

20160819


꽃이 피었다.


이 기막힌 현상


부드러운 꽃잎

형형한 색상

형상의 자태


우주가 새로 태어났다.



  


  


겨울 숲

20191214

 

맑고 시린 공기가

오감을 깨우며 폐부에 닿을 때

초목이 산화된 산천의

겨울나무 성긴 가지 사이로

능성이를 넘어온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질주를 한다.

 


그 품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서면

산그늘 짙게 진 숲 속이

태곳적 어둠처럼 심원해지고

하늘 위로 비치는 역광의 햇살이

안개처럼 뿌옇게 숲을 감싼다.

 

계곡물에 적셔진 단풍잎은

더 이상 눈길 바라지 않은 채

산화해가고

응달에 꽁꽁 언

얼음장 밑에서는

물고기가 수런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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