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한양도성 당일 종주
한양도성 당일 종주를 마쳤다. 그동안 전시 준비 등을 하면서 한양도성을 구간구간 자주 찾았던 편인데 언젠가 꼭 하루에 돌아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 순성은 숭례문(남대문)에서 출발을 해서 시계방향으로 인왕산 백악산 낙산 그리고 남산을 돌아 출발지로 당도하는 코스를 택했다. 배부하는 한양도성 지도에 나타난 돈의문터와 숙정문, 흥인지문, 그리고 숭례문 스탬프를 찍고 다 완료한 후 보여주면 순성완주 배지를 준다.
한양도성은 대게 전 구간을 4코스로 나눠 북악산을 1코스(창의문- 혜화문) 낙산을 2코스(혜화문-광희문) 남산을 3코스(광희문-숭례문), 인왕산을 4코스(숭례문-창의문)로 부르기도 한다.
○ 숭례문 – 창의문 구간
11시 20분 숭례문에서 지도를 받아 스탬프를 찍은 다음 횡단보도를 건너 서소문 방향으로 바닥에 표시된 성곽 자취와 길가에 세운 안내표지를 보며 걸었다. 숭례문에서 돈의문 방향으로 들어서는 지점의 성벽 일부를 복원해 놓기도 하고 멸실 구간은 바닥에 성곽 표시를 해두기도 했다. 숭례문에서 돈의문 구간은 시가지 구간이어서 가는 도중 큰 길을 건너느라 신호등을 기다리고 예전의 성곽이 있던 인근 도로를 돌아가기도 해야 한다. 중앙일보 사옥 근처 서소문이 있던 곳에서는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 까지 내려갔다 다시 유턴해 돌아와서 평안교회 앞으로 들어서게 된다. 거기서 배제공원을 지나며 러시아 공사관을 돌아 정동교회 앞을 걸었다. 정동교회는 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설립한 교회인데 20년 전 내가 참여해 수리를 하기도 했었다. 그 옆 이화여고는 1986년 스크랜턴 여사가 지은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다. 이 구간은 옛 성곽에서 가장 크게 벗어 돌아가는 곳이기도 한데, 원래 성벽은 지금의 이화여고 교정 마루금을 지난다.
돈의문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전철을 내기 위해 헐었다. 지금은 그 옆 돈의문 박물관에서 근래 증강 현실로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그 이후 월암공원에 이르면 복원한 성벽이 보인다. 그리고 다시 다세대 주택이 많은 곳은 끊겨 있다. 일부 건물에서는 건물 지하 주차장 기둥 사이로 성벽이 보이기도 한다.
그 곳을 지나 도로를 가로질러 인왕산으로 접어들었다. 거기서부터 성곽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범바위, 기차바위를 지나 급경사 바위 길을 거쳐 12시 21분 인왕산 정상(338.2m)에 도착했다. 인왕산 구간은 비교적 가파른 구간이 많고 자연 지형의 기복도 심한 편이다.
인왕산에 오르면 서울 시내가 훤칠하게 보인다. 가장 앞쪽 가까이 보이는 경북궁은 옆으로 길게 질서 정연하게 늘어선 배치 구조가 한 눈에 파악된다. 그리고 너르게 펼쳐진 서울시내와 서울의 경계인 아차산, 그리고 검단산도 보인다. 인왕산에서 창의문으로 내려서는 구간에서는 성곽 너머로 빼어난 북한산 경관이 가까이 펼쳐 보인다.









○ 창의문 - 혜화문구간
윤동주 문학관앞 도로를 건너면 바로 창의문이 보인다. 횡단보도 옆에는 1968년 1. 21사태때 침투한 무장공비와 교전을 벌이다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 동상이 있고, “여기서 북동쪽 북악산 정상 쪽으로 약150m 떨어진 지점에 항상 물이 나는 약수터가 있으므로 이를 청계천 발원지로 정하였다” 는 청계천 발원지 표지석이 보인다.
거기서부터 백악산 구간에 접어들었다. 창의문 위쪽으로 올라서면서 입구 안내소에서 표찰을 받고 성곽을 따라 올라섰다. 거기서 뒤돌아보면 저층 단독 주택이 많은 부암동 일대가 인왕산 산세의 품에 안겨 보인다. 창의문에서 백악산 정상까지는 한양도성 순성길 가운데 가장 험난한 코스이다. 성곽 내측 순성길은 나무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군데군데 경사가 가파르니 난간 손잡이를 잡으라는 안내 표지가 부착되어 있다.
1시 22분 백악산(342m) 백악마루에 도착했다. 정상을 지나 내림길로 접어드니 곡성까지 성곽이 지형을 따라 이어있고 성곽 너머로 북한산이 보였다. 백악마루를 지나 완만한 구간으로 변하는 곳에 1.21 사태 소나무가 있다. 옆에 설치된 안내문에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원 31명이 침투하려다 발각되어 우리 군경과 교전을 벌일 당시 교전중 소나무에 15발의 총탄이 박힌 자국”이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철 계단으로 성벽을 넘게 되어 있는 지점 우측에 청운대 표지석이 있는데, 거기에 서면 성북구 성북동 쪽과 멀리 불안산 등이 보인다.
다시 오르막길을 걸어 1시 34분 백악곡성에 도착했다. 근래 내가 거기서 바라보이는 서울 전경을 그린 곳인데 전망이 훤칠하다. 거기서 숙정문 구간으로 내려서는 길 주변은 조형미를 띤 소나무들이 많다. 그리고 성곽 너머로 과거 서울에서 가장 부자 동네로 꼽혔던 성북동이 펼쳐 보인다.
북대문인 숙정문은 현재 공사중이어서 그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는데, 한양도성의 8개 문 중 이 문만 유일하게 천정이 석재로 둥글게 아치를 틀어 궁륭으로 되어 있다. 숙정문은 풍수상 음기가 강한 곳으로 여겨져서 “그 문을 열어두면 도성 여자들이 바람이 난다”는 속설 때문에 평소에는 늘 닫아 두었다가 심한 가문이 들때면 음기가 강한 숙정문을 열어 비가 오기를 기원했다 한다.
말바위 안내소에서 표찰을 반납하고 오름길을 올라 철계단으로 성곽을 넘어 내려오면 와룡공원이 나온다. 그 반대편은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이 있는 북정마을이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오다 성북초교 앞 삼거리로 나오면 성곽이 다시 단절된다. 거기서 골목길을 가면서 석축 등을 유심히 보면 그 기초에 쓰인 성돌이 눈에 띤다.
그 구간의 한양도성 위치는 경신중고등학교담장 부분이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 내려오다 보면 도로 담장 너머로 교회쪽 축대에도 성돌이 보인다. 그 곳을 지나 서울시장 공관에 이르는 구간은 세종 때 쌓은 성곽 모습이 보인다. 그 인근에 있는 원래 혜화문로에 있었으나 도로를 내면서 높은 언덕 위로 옮겨 세웠다. 혜화문이 있는 한양도성 안쪽은 종로구, 바깥쪽은 성북구이다.











○ 혜화문 – 광희문 구간
혜화문에서 도로를 건너 철계단을 돌아 오르면 다시 성곽이 이어지고 뒤돌아보면 돌아온 북한산이 멀리 보인다.
한양도성을 돌아보다 보면 여러 시기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쌓은 성벽의 모습이 다양각색으로 보인다. 한양도성은 축조 방식에 따라 태조, 세종, 숙종, 순조시대로, 크게 4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태조때 쌓은 성곽은 평지를 토성으로 쌓고 산지 구간은 자연석을 얼추 가다듬은 석재로 쌓았다. 그리고 세종때는 무너진 토성 구간을 모두 석재로 다시 쌓았는데 돌의 크기가 작고 모서리가 둥글려져 있으며 숙종 때는 성돌을 가로세로 40~45cm 크기의 정방형으로 다듬어 사용했다. 그리고 순조 때는 가로세로 60cm의 돌들로 정교하게 맞춰지도록 쌓았다.
혜화문에서 낙산 정상부로 가는 순성길은 성곽 외부 길이고 성벽 옆에 다시 축대를 쌓아 놓아서 성벽이 높다랗게 솟아 보인다. 그리고 곡성처럼 모서리가 크게 돌출 된 구간도 있다. 특히 장수마을 우측 구간은 오르막길을 성곽이 크게 굽어 올라가는 모습이어서 장중한 느낌을 풍긴다.
그 오르막길을 거의 올라 뒤돌아보면 담장 너머로 성북동과 북한산이 겹치며 펼쳐 보이는데 자연 경관과 성곽과 어우러진 특징이 두드러져 보여 스케치를 했던 곳이다. 이처럼 순성 길에 내가 그림을 그렸던 장소에 도착할 때마다 반갑고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이외도 남산에서 본 전경과 인왕산, 백악산, 낙산 구간을 몇 장씩 그렸으며, 그와 함께 사대문 사소문 궁굴 북촌 등 전통 가옥 등 내년 초 전시에 사용할 그림들이 거의 준비되었다. 순성의 체험이 전시에 임하는 마음 준비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2시 52분 낙산(125m) 정상을 지났다. 낙산 동쪽에는 문화 유적이 많다. 조선중기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이수광이 지은 집 비우당이란 비나 겨우 가릴만한 작은집의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비우당에서 올려다 보이는 봉우리가 지봉인데 ‘지봉’은 이수광의 아호이다. 비우당의 뒤뜰에는 지초로 염색을 하여 자줏빛 색깔이 난다는 뜻의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샘이 있는데, 지초는 우리나라 산과 들에서 나는 다년생 식물로서 약초로도 쓰고 자주색 염료로도 쓰인다.
단종비인 정순왕후(1440~1521)는 왕위에 오른 사람과 결혼(1454 단종2)을 했으나 기간은 매우 짧았다. 2년이 채 되지 않아 단종이 1456년 영월로 유배를 갔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단종을 낙산 청룡사에서 떠나보낸 뒤 비구니가 된다. 그녀는 마음을 달래려 불경을 읽는 한편 생계를 위해 옷감에 염색을 하여 내다 팔았다. 그 때 염색을 하고 빨래를 하던 장소가 자지동천이다. 정순왕후는 매일 낙산 동쪽끝자락의 동망봉에 가서 영월땅을 바라보며 눈물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단종은 1457년 세조가 보낸 사약을 마시고 생을 마쳤다. 정순왕후는 1521년 82세에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낙산공원’이라고 큰 글씨 간판이 설치된 낙산 정상부에는 마을버스가 들어오는 도로 쪽이 뚫려 있는데 거기서부터 흥인지문까지는 성곽이 쭉 이어져 있다. 그리고 거기서 창신동을 지나는 구간에는 콘크리트 및 석축을 보강해 쌓은 이중 삼중으로 된 축대가 많다.
폭이 넓은 종로를 건너 흥인지문 앞에서 스탬프를 찍고 DDP 쪽으로 다가서는 동안 차량과 많은 인파로 번잡한 느낌이 들었다. 온전한 한양도성이 남아 있던 시기와 크게 달라진 복잡한 도시 상황을 느끼게 된다. DDP가 세워진 구간에는 발굴로 드러난 이간수문이 지하 레벨에 드러나 있다. 그리고 거기서 광희문 쪽으로 성곽 위치를 바닥에 표시해 놓았다.
다시 도로를 건너 3시 37분 광희문에 도착했다. 광희문은 1960년대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었던 것을 1975년 남쪽으로 15m쯤 옮겨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웠다. 광희문 북쪽은 성곽이 철거된 채 시가지화 되어 있고 그 남쪽으로 300m가량 성벽이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 위쪽의 도로로 단절된 지점에 광희문교회가 보이는데, 그것은 1896년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에서 서울에 가장 먼저 세운 교회당이라고 한다. 거기서 장충체육관 방향으로는 다시 성곽이 없는 주택 가로를 지나게 된다. 그처럼 성곽이 없는 구간에서는 그냥 평범한 도시 골목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그 순성로에서 장충 체육관 쪽으로 가까이 다가선 장충동 쪽은 부촌으로 이름을 날렸던 곳이다. 그런데 그 지역에서도 유심히 보면 성곽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 주변 건물들이 뿌리만 남은 축대 위에 서 있기도 하다.


○ 광희문 – 숭례문 구간
장충 체육관을 지나면 다시 성벽이 이어진다. 신라호텔에서 반얀트리호텔 구간은 사유지라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주간에만 개방을 하고 있다. 성고가 너머로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성고가 근처에는 단독 주택이 많다. 그리고 경사지를 오르며 뒤돌아보면 북한산이 아름답게 펼쳐 보인다. 성곽은 정자에서 끝나고 테니스장과 반얀트리호텔을 지나 국립극장 입구까지 성곽이 단절된다. 그 곳도 원래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는 지역이다.
국립극장에서 남쪽으로 조금 오른 곳, 길이 죄로 휘어지는 지점에 남소문 터가 있다. 국립극장입구 남산 차량 통제소를 지나 순환도로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너머로 성곽이 이어진다. 우측 나무 계단을 오르게 된다. 그 곳도 경사가 가파를 구간이다. 이 구간에는 태조 때의 성곽이 많은데 자연석을 쌓아 거칠게 보인다. 여장의 축조 방식도 다르다. 다듬돌이 아닌 자연석을 일정한 형상으로 쌓았다.
철계단을 올라 성벽을 넘다 보면 아래로 국립 극장과 반얀트리호텔등이 보인다. 그리고 멀리 북한산도 보인다. 거기서 내측 산책로를 따라 오르면 관광버스가 다니는 차로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조금 위쪽이 정상이다.
오후 4시 48분 남산(265.2M) 정상에 도착했다. 거기서는 주변 산세와 어우러진 서울 전경이 그림처럼 펼쳐보여서 조망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곳에서 보면 자연 지형과 어우러진 서울 특유의 진면목이 느껴진다. 정상의 봉수대는 태조때 세운 봉수대를 다시 복원해 놓은 것이다.
봉수대를 지나 내리막 계단 길을 내려가다 우측에 가설 담장이 쳐진 공사구간을 지났다. 거기가 바로 조선신궁 터였다. 2014년에 60번째 내(柰)자 구간 189.3m 발굴 확인 되었는데, 그 때 조선 신궁터가 확인되었다. 그 가설 담장에는 한양도성이 훼손 과정과 복원 현황에 관한 여러 가지 글씨와 사진이 부착되어 있었다.
그 아래 어린이 회관과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지나 백범광장 앞쪽으로 내려서면서 다시 성벽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 내려서 숭례문 가까운 지점의 도로가에 도로 난간처럼 성벽의 여장이 보였다. 오래전에부터 보아본 모습인데 지금 같은 관심을 갖기 전에는 그저 평범한 도로 안전시설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그 완만한 내리막길 끝 지점에 출발했던 숭례문이 새로 쌓은 성곽과 어우러져 보였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고층 빌딩이 늘어선 번화한 도시 가로가 보였다.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돌면서 과거와 현실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5시 18분 숭례문에 도착했다. 아직 해가 남아 있었다. 완주에 5시간 58분이 걸렸다. 지도상에서 10시간 50분으로 나타나 있었다. 어느 글에는 강철체력의 소유자라면 하루에 돌 수도 있겠지만, 보통 4번이나 6번에 걸쳐 나눠 걷는 것을 추천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 동안 한양도성을 부분적으로 많이 돌아보았지만 하루에 걷고 보니 서울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앞으로도 틈틈이 순성의 시간을 갖고 싶다.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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