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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제목

조계산산행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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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62
내용


 

조계산 산행기

 

 

조계산을 가기 위해 교대역으로 나갔다. 남도끝자락 순천까지 가야 하는 먼 거리이다. 오늘은 조계산에서 전국건축사 등산동호회 행사가 있다. 해가 긴 여름철이라 벌써 아침해가 밝아 있었다.

 

그 사이 오늘 행사에서 만나자는 인사를 몇 몇 회원들과 나눴었다. 작년 하반기 경주 남산 행사를 다녀와 쓴 글이 건축사 신문에 실렸었는데, 그를 본 석종구 회장이 이번 행사에서 다시 보자고 해서 참석하겠다고 화답을 했었고 며칠 전 카페에서도 충북의 최동철 건축사와 만나자는 인사를 나누었었다.

 

교대역에 도착해 출구로 나가며 일행들을 만났다. 박기호 건축사는 함께 왔다며 딸에게 인사를 시켰다. 1번 출구 앞에 타고 갈 버스가 서 있었다. 가게 앞에 일찍 온 회원들이 모여 즐겁게 예기를 나누고 있었다.

 

예정시간보다 늦은 7시 교대역을 출발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서울건축사등산동호회 손회장 등이 인사말을 한 후 박총무가 카페에 공지된 코스를 변경해 선암사를 들른 후 버스를 타고 송광사로 이동한다고 하면서 산을 종주할 사람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가만히 손을 들고 보니 손을 든 사람은 나 혼자였다. 홀로 산행을 대비해 지도를 보며 걸릴 시간을 어림해 보았다. 전에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넘어온 적은 있지만 답사길 이어서 정상을 지나지는 않았었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너른 들이 보였다. 막 뿌리를 내린 벼가 포기를 벌이고 있었다. 아직 키가 작고 왜소해 보이지만 두 달 후면 논을 가득 메우고 이삭이 팰 것이다. 안개가 끼어 들녘 너머로 길게 이어진 산세가 그윽하게 보였다. 830분 정안 휴게소에 들렀다. 밤으로 유명한 공주 지역이라 그런지 특유의 밤꽃 향기가 진동 했다.

 

오늘 가는 조계산은 내게 특별히 다가온다. 조계산 하면 선암사가 먼저 떠오른다. 전국의 전통 건축 가운데 건축적 감각이 가장 빼어난 아홉 곳을 꼽아 쓴 나의 졸저 한국전통건축의 좋은 느낌에서 썼던 곳으로, 전국 사찰 가운데 고찰의 느낌이 잘 간직된 곳이다. 그동안 이 곳을 많이 찾았었다. 글을 쓸 무렵 이른 새벽에 올라와 추위에 떨면서 기다리다 도량석을 참관하기도 했었고 학교 행사로 학생들을 인솔해 들르기도 했었다.
 

115분 조계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처럼 입구에 동네 어른들이 산에서 채취한 나물 등 소박한 장거리를 펼쳐놓고 있었다. 매표소에 명찰을 보여주니 사전에 예기가 되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암사 경내를 향해 걸어가는 길 주변 풍경이 익숙하게 다가왔다. 부도전을 지나 승선교에 가까이 이르니 길 좌우에 석장승이 새로 조성되어 있었다. 예전부터 있던 목장승이 퇴락해 사라질 것을 대비해 조성해 놓은 것 같았다.

 

잠시 후 승선교에 닿았다. 다리로서는 드물게 보물(400)로 지정되어 있는데 전통 다리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계곡 아래로 내려가 승선교를 스케치 하며 그 빼어난 조형미에 다시금 감탄을 하였다. “승선교는 신선이 오르는 다리라는 뜻의 이름이다. 그러나 승선교는 그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조형적 아름다움에 의해 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선계에 들어서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 멋에 취해 걷다 보면 아무리 고달픈 길을 걸어온 나그네의 무거운 발걸음이라도 일시에 가뿐해질 듯하다.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본바탕과 상관없이 선량해질 듯하다고 책에 썼었다.

 

 

승선교

2018. 6. 9

 

 

조계산 골짜기를 돌아 나오는

푸른 계곡에

걸쳐진 튼실한 돌다리

 

계곡물 걸리지 말라고

허공에 넉넉한 원호를 두르고

성벽처럼 쌓은 돌을

사뿐히 들쳐 매었다.

 

피안의 경내로

들어서다가

그 맵시에 취한 이의

발걸음이

어느덧

 

 

선계로 가는 구름에

올라서 있다.

 

 

 

 

스케치를 마치고 강선루를 지나다 보니 오래전 새벽에 들러 도량석을 기다리며 끄적거리던 때가 떠올랐다.

 

 

 

 

강선루의 밤

00. 7. 16

 

달은 잡아먹히고

없는 날

 

신선들도

지리한 듯

루 위로 내려오던

어둔 밤하늘에는

 

총총한 별들이

푸르게 빛나며

어릴적, 아직 심성 곱던 시절을

그립게 하는데

 

바윗돌에 부딪치는

여름 계곡 물은

사나운 소릴 내며

하늴 없이 흘러서

 

추억 같은 밤 !

 

회상에 잠기고픈 나그네의

상념마저

잠기게 하네...

 

 

 

 

삼인당을 지나며 연못 안을 보니 이른 봄 피어나는 신록처럼 연두색 연잎이 가득 피어나고 있었다. 삼인당은 불교의 중심 사상을 나타낸 것으로,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을 일컫는다. 이 삼인당은 862년 도선이 축조했다고 하는데 한국의 고대 조경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삼인당 좌측으로 등산로가 이어지지만 선암사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보고 갈 요량으로 일주문으로 들어갔다. 의미 있게 여기는 곳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범종루 루하를 지나 대웅전을 바라보면서 스케치를 했다. 오늘은 일행과 떨어져 정상을 지나 송광사에서 합류키로 한 만큼, 촉박한 시간이 의식되어 더 빠르게 했다. 대웅전 마당에 좌우로 삼층 석탑이 있고 건물들도 마당을 감싸며 좌우 대칭으로 놓여 있어 반듯한 감각이 풍긴다. 스케치를 마치고 400년 된 매화가 있는 쪽으로 갔다. 커다란 고목에서 피어나는 매화가 장관인데 지금은 녹음이 우거져 평범해 보였다.

 

팔상전 등, 대웅전 뒤쪽을 돌아보는 동안 커다란 산세가 둘러쳐 경내를 감싸보였다. 마치 조계산의 산세가 이곳 하나만을 품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선암사의 특별함은 빼어난 입지에 바탕한다. 사찰을 둘러친 주변의 산자락들은 선암사에 너르고 호방한 기운을 감돌게 한다. 그리고 선암사의 특별한 감각은 그처럼 넉넉한 품 안에서 수행도량의 엄정한 질서와 자유로움이 조화를 이루는 데 있다
 

천량수각 선원 앞에서 등산로를 들어서 대각암을 향해 올라갔다. 길 가에 우리 일행처럼 명찰을 단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다가가보니 청주산수화산악회 일행이 단란하게 둘러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일행 중 한 분이 내게 뭘 좀 먹고 가라고 해서 갈 길이 바쁘다고 하자 다시 조금만 먹고 가라고 했다. 예전에 고향에서 느꼈던 시골인심이었다.

 

대각암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위를 바라보니 정상부가 높다랗게 보였다. 산의 높이가 있으니 오름길도 그만큼 멀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정상까지 계속해 오름길로 이어진 것 같았다. 시간을 의식해 쉬지 않고 올라가는 동안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한참을 오르다 보니 향로암 터가 나타났다. 옆에 세워 놓은 표지판에 선암사와 거리가 2km인데, 적멸암에 이어 선암사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곳에 있는 암자라고 쓰여 있었다. 거기서 하늘이 트여 보였다. 정상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1253분 조계산(884) 정상에 올랐다. 광주의 무등산, 영암의 월출산과 함께 호남의 3대 명산으로 불린다. 산세는 그다지 험준하지 않다. 주로 토질로 이루어진 육산이어서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조계산의 명칭은 본래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당나라 남종선의 시조로 불리는 대감선사 혜능(638~713)이 육조를 제수 받고 돌아가던 중에 소조부(광동성 곡광현)에 이르렀을 때 그 고을에 살던 조숙량이 선사를 흠모하여 쌍계원을 짓고 선사를 모셨다. 혜능선사는 그 때 머무른 산의 이름을, 조숙량의 성과 쌍계원의 을 택하여 조계산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입구 도착시간으부터 1시간 58분이 지나 있었다. 내려갈 거리가 더 멀었다. 5km 정도 될 것 같았다. 2시를 목표로 했는데 아무리 빨리 걸어도 1시간 반은 걸릴 것 같았다. 주변에 있던 다른 일행에게 사진을 부탁하니 선한 표정이 밝은 한 여자 분이 정상석으로 올라와 찍어주었다. 내림길로 접어들다 정상에서 쉬고 있던 전남의 회원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걸었다.

 

12분 전설이 깃든 배바위를 지났다. 배바위는 선암(船岩)과 선암(仙巖)으로 구분되는 전설이 있는데, 첫 번째는 아득한 옛날 세상 전부가 물에 잠기는 홍수가 발생하자 사람들이 커다란 배를 이 바위에 묶어 견딘 끝에 살아났다.“ 는 예기이고 두 번째는 신선바위와 관련된 유래로서 옛날 신선들이 이 바위 위에서 바둑을 두었다하여 신선바위로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앞 부분은 성경의 내용과 유사한 면이 있는데 어쨌든 선암사의 이름과 연관이 있을 듯 했다.

 

내려가다 보니 앞쪽에서 아이스크림 장사가 내려가고 있었다. 커다란 박스에 광고판처럼 바닐라, 딸기, 메론, 팥 등 상품 이름을 적어 놓았다. 그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보리밥집에서 올라오는 사람 따먹어야 한다고 했다. 지나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려는 그 말이 묘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작은굴목재에 도착했다. 안내 지도를 보니 길이 여러 갈래로 되어 있었다. 자칫 길을 잘 못 들면 낭패가 될 것 같아 송광사 가는 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옆에서 쉬고 있던 분이 우선 보리밥집을 목표로 가라고 했다.

 

124분 보리밥집 전 삼거리에 도착했다. 산중에 웬 지명이 식당 이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리밥집을 지나 배도사 대피소를 지났다. 거기서 선암사와 송광사가 각각3.3km로 반반이었다. 양측 거리가 6.6km이니 장군봉에서 선암사 2.5km 송광사 4.1km인 샘이다. 그런데 구간 거리는 장군봉에서 송광사까지 6.6km나 되었다. 다시 송광굴목재를 향해 걸었다. 그 곳으로 오르는 길에 경남회원일행을 만났다. 함께 온 아이들이 소풍 나온 듯 즐거운 표정이었다. 잠시 후 굴목재사거리를 지나 고개에 오르니 옆 공터에서 부산 회원 몇 분이 쉬고 있어 인사를 했다. 고개 넘어 가파른 내리막길을 지나니 다시 완만한 길이 이어졌다.

 

완만한 내림 길을 가다가 충북회원들을 만났다. 엇그제 댓글로 인사한 최동철 건축사도 앞쪽에 걷고 있어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다리를 건너 26분 남도삼백리길 토다리 이정표에 도착했다. 그 이정표에는 장군봉에서 5.2km, 송광사 1.2km로 나타나 있어서 거리를 종잡을 수 없었다. 수량이 불어난 개울을 건너가는 곳에 보소의 전설이라는 표지가 보였다. 보소는 깊은 소의 이름이다. 보소의 한자의 뜻은 대들보 늪()인데 전설 속에는 조선시대 탄압 받던 스님들의 절절한 애환과 항변의 단면이 서려 있었다. 승려들의 신분은 팔천(8가지 천민)에 해당되어 노예나 다름없는 공역을 해야 했었는데 특히 송광사 승려들의 조계산 산중 노역은 하루도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보소는 노역에 시달림을 당하던 스님들이 산에서 밴 나무를 여기에 빠뜨린데 서 생겨난 일화였다.

 

개울을 건너다보니 우측으로 개울에 큰 가림막같은 발을 걸쳐 놓은 모습이 보였다그것이 마치 대지 예술을 연상케했다송광사 가까이 다가온 것 같았다. 잠시후 건물이 보였다. 안에는 장작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거기서부터 경내인 것 같았다. 총무에게 전화를 걸어 도착을  위치를 물으니 행사장에 있다고 했다.

 

224분 송광사 정문에 해당하는 우화루에 도착했다. 조계산의 두 명찰 가운데 건축적 감각으로는 선암사를 꼽아왔지만 한국 불교사적 의미로서는 송광사가 더 크다 할 수 있다. 한국 불교 조계종의 뿌리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송광사는 보조 지눌국사의 정혜결사의 현장이고, 그의 실천에 의해 선교 양종이 조계종으로 통합된 계기가 된 만큼 한국 불교사의 핵심적인 장소이다. 그를 계기로 조계종 종헌에는 도의선사를 종조로 그리고 지눌국사를 중천조로, 태고 보우를 중흥조로 규정하고 있다.

 

이곳도 여러 번 와본터라 중요 시설들이 어디에 있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대웅전 마당에서 경내를 돌아본 다음 관음전 뒤를 돌아 부도비를 찾았다. 송광사 16국사 가운데 제1세인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부도탑이다. 그 탑은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로 되어 있지만 역사적 의미로는 더 격이 높아야 할 것 같았다. 보조국사가 1210(희종6) 열반하자 희종이 불일보조국사란 시호와 감로탑이란 탑호를 내렸고 3년 후에 탑이 세워졌다.

 

  다시 대웅전 앞으로 나와 국사전을 앞을 지나며 안을 기웃 바라보았다. 국보인 국사전은 승보사찰 송광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개방은 하지 않고 있다. 그 앞을 지나 2층 요사채를 찾았다. 내가 건축적으로 관심이 가는 곳이어서 스케치를 하고 다시 우화루를 통해 나와 개울 중간으로 가서 송광사에서 대표적인 경치라 할 수 있는 우화루를 바라보며 스케치 했다.

 

스케치를 마치고 나눠준 산행 지도에 표시된 무소유 길을 찾아 들어섰다. 이정표를 보며 커다란 성보박물관 옆을 지나 혜감 선사 부도가 있는 감로암에 들어섰다. 이 곳 감로암은 16국사 중 제6대 원감국사(1226~1293)가 창건하였다. 원감선사는 장원급제를 한 수제였는데 시문에도 능했다고 한다.

 

다시 불일암을 찾아 숲길을 걸어 올라갔다. 조금 전 젊은 부부가 말한 대로 뒤쪽으로 높이 한참을 오르게 되어 있었다. 가다보니 담백한 느낌의 대문이 나왔다. 거기가 불일암일것 같았다. 대문을 지나니 정갈한 대숲 길이 이어졌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법정 스님이 쓴 책에서 읽었던 글이 생각났다. 역시 그 분의 성품답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안쪽에 불일암이 보였다. 안내문에 불일암은 제7대 자정국사가 창건한 자정암이 있던 곳인데 법정 스님이 1975년 중건하여 불일암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스님은 이곳에 주석하면서 무소유, 선가귀감, 서 있는 사람들, 영혼의 모음, 불타석가모니, 말과 침묵, 산방한담, 진리의 말씀, 물소리 바람소리, 서역화엄경, 텅 빈 충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숫타니타파, 인도기행, 버리고 떠나기, 의 수필집과 역서들을 집필하고 2010311일 열반했다.” 고 쓰여 있었다

 

분위기가 글에서 상상했던 것과 일치되는 느낌이었다. 그 분이 이 곳 불일암에 대해 쓴 글을 떠올리면서 스케치를 했다. 오늘은 조계산을 종주하며 산의 진면목을 알게 되고 두 명찰을 제대로 답사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늦어져 총무에게 다시 전화를 하니 행사장이 아래로 옮겨졌다고 했다. 매표소를 나와 그 곳으로 들어서니 신종복 건축사가 반갑게 마중을 해 주었다. 경남 회원들 자리로 가서 황팔수 건축사와도 인사를 나누니 막걸리를 연거푸 권했다. 5시간 정도 쉬지 않고 걸은 상태라 갈증이 나서 뭐든지 시원하게 들이키고 싶었다.

 

서울 회원들 자리로 이동해 자리를 잡은 다음 국밥을 한 그릇 떠 왔다. 다행히 아직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대한건축사등산동호회 석종구 회장이 갑자기 내 이름을 꺼내어 일어서 인사를 했다. 내가 이 행사 때마다 참가해 산행기를 써서 홍보에 도움을 주었다며 고마워했다. 차기 전국등산동호회 회장을 맡은 전북의 유기천 회장이 앞으로 나와 인사말을 한 다음 행사를 마치고 모두 주차장으로 이동해 모여든 각지로 출발했다. 긴 여름해가 아직 하루의 여유로움을 느끼게 했다.

(2018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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