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낙동정맥 1구간(1045봉-통리역) 산행기
낙동정맥 종주의 장정을 시작했다. 2008년 11월 1일 대간을 마친지 1년 반 만이다. 그 사이 나와 대간을 함께 했던 서울 강남건축사 동호회에서는 다른 정맥과 지맥들을 해했다. 하지만 나는 대간을 마치고 정맥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대간 산행을 하면서 보람도 컸지만 얽메임도 느껴져서 어느 기간동안 정기적으로 임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점차 세월이 더 빠르게 느껴지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에도 많은 시간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산도 좋지만 내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일이다. 심신을 맑게 한다는 것도 그 일의 연장에서 생각하는 일이다. 그렇게 여기며 지내던 차에 강남건축사 등산동호회 총무로부터 낙동정맥 종주 계획을 세우면서 연락이 왔다. 그리고 불현듯 마음이 동하여 참가하게 되었다.
내가 이 정맥길에 흥미를 갖는 것은 나름대로 그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낙동정맥은 태백산맥이라고 불린 적이 있다. 조선 후기 신경준이 작성한 산경표의 존재가 제대로 알려지기 전까지 그것을 국토의 등줄기라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그것이 일제시대 작성된 지리 인식에 바탕된 것으로 알고 있다. 낙동정맥은 태백 인근서부터 부산까지 대체로 직진하듯 곧바로 뻗쳐 있다. 백두대간이 예날 삼국시대 경계를 이룬 곳이 많은데 낙동정맥은 신라 영토 내에서 큰 산줄기를 이루며 동해안 내륙으로 구분되게 한다. 그리고 특유의 내륙문화를 이루게 한다. 내가 흥미롭게 여기는 것은 그 풍토와 문화적 바탕이 되는 지리적 조건이다. 그것이 대간과 낙동정맥, 두 개의 커다란 산불기에 바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낙동정맥은 국토를 순례하는 기분도 들것 같고 동해에 가까이 있어서 때로 훤출한 바다 조망도 만날 수 있을 듯하다.
삼성역에 내려 한전 사옥 앞으로 가니 저만치 골목입구에 서 있는 차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서 일행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간 산행 초기에는 여기서 주로 출발했었다. 내가 다가가니 먼저 온 일행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일행이 타고 갈 차는 25인승 미니버스였다. 차안에 타고 있으니 이대장이 임사장 친구가 거의 다 왔다면서 조금만 기다리자고 했다.
7시 8분 출발했다. 대간을 함께 했던 최진회장 부부, 오경진 회장, 이명철 대장 이번 낙동정맥 산행 회장을 맡은 박정호 사장, 대간길에 참가했던 임사장과 친구, 화가인 어화백, 최회장 사모님 친구, 그리고 백인철 건축사가 함께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주 금수산에 다녀 온 후 다시 한주 만에 떠나는 산행인데 차가 중부 고속도로를 빠져 나가는 사이 창밖을 보니 그 새 녹음이 더 짙어져 있었다.
중앙 고속도로 차악 휴게소에서 들르니 많은 인원이 북적거렸다. 거기서 식사를 하고 다시 출발했다. 길가에 보이는 이정표를 보니 사북을 지나고 있었다. 사북사태라는 불행한 일로 언론 매체의 조명을 받았던 때가 있었다. 이 인근은 과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지로 인식된 곳인데 그동안 고속도로 등 잘 잒인 도로들이 건설되어 교통이 활달해지고 있다.
낙동정맥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연결되는 피재에 닿았다. 삼수령으로 불리기도 한다. 차에서 내리며 대간 종주중 잠시 머물던 작은 공터 앞 가게를 대하니 비를 맞으며 걸었던 그 때가 생생히 떠올랐다. 신발이 물이 출렁거려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짜서 신었었다.
나는 그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말을 붙이듯 가게에서 막걸리를 한통 샀다. 일행은 출발에 앞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여성분들이 화장실을 찾는 사이 삼수령에 물방울 모양을 형상화하여 세운 조형물 사진을 찍었다. 전에도 찍었지만 그 때는 날씨기 흐려 잘 나오지 않았었다. 그 아래 표지석에서는 물방울 운명이라는 글이 보였다. 낙동강, 한강, 오십천의 세 강줄기가 나뉘는 곳이라 하여 삼수령으로 불리는데 내리는 빗방울이 떨어진 지점에 따라 각기 다른 강줄기의 물이 된다는 의미이다.
38번 국도에서 좌측으로 난 임도를 거술러 오르다 대간길인 산길을 접어들었다. 그 길 좌측으로 삼수령 목장 울타리가 둘러 쳐 있었다. 울타리 옆을 걸으며 지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시 임도로 내려서 걷는데 앞쪽에 산불 감시원 같은 복장을 한 사람들이 서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인사를 하자 아무렇지 않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다시 산길을 걸었다. 야트막한 산길을 조금 걷다보니 표지석이 보였다. 그 곳이 대간과 낙동 정맥이 갈라지는 곳이었다.
낙동정맥은 낙동강의 동쪽을 지난다는 뜻으로 붙은 명칭이다. 백두다간 천의봉(1303M) 동쪽 1145봉에서 시작하여 경상도 울진 영해, 청송, 경주, 청도, 언양, 양산, 동래까지 이어지는 도상거리 351.2km 구간이다. 그 줄기에 솟은 백병산(1259), 통고산(1067), 백암산(1004), 주왕산(720), 단석산(829) 울산 가지산(1240), 신불산(1209)를 거쳐 부산 금정산(802), 백양산(642)를 넘어 부산 다대포 몰운대에서 마친다.
그리고 오늘 첫 구간은 1195봉에서 시작해 분수령 목장-작은피재-구봉산 (910m)-자작목이-키나무목이-묘지-유령산-느릅령(신당)-우보산-통리역까지이다. 보통 시작점에서 석개재까지를 한구간으로 나누는데 오늘은 산산제를 올리는 행사도 있어 짧게 마치기로 했다.
일행은 낙동정맥이 시작되는 지점에 선 표지석 앞에서 산신제를 지내기로 했다. 자리를 깔고 사과, 배, 떡, 전 그리고 대간길에 일행이 한줌씩 딴 것을 최회장 사모님이 담가온 마가목주와 아까 내가 피재에서 내리며 가게에서 샀던 막걸리를 올렸다. 모든 일행이 모두 돌아가면서 제례를 올리며 일정을 무사히 마치게 되길 기원했다. 그런 다음 차렸던 음식을 나눠 먹었다.
표지석에서 나아갈 방향으로 정맥길을 알리는 리본이 여러개 달려 있었다. 대간 길과 다른 낙동정맥의 표지이다. 그 표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내림길을 걸었다. 산세가 큰 줄기에서 가지 치듯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산길을 내려오다 보니 앞이 트여 보였다. 횡단 도로와 나타나 내려서 목장 관리인과 마주쳤다. 그는 거기의 분수령 목장은 30년 전에 설치된 곳으로서 그 때문에 정맥길을 둘러가야 하는 형편이었다. 관리인은 가급적 통과시켜주려 했는데 지금은 구제역이라 돌아가라고 했다.
임도를 조금 내려가다 보니 우측으로 다시 정맥길로 접어드는 산길이 보였다. 관리인에게 다시 허락을 구하니 가도 좋다고 했다. 조금 내려오다 보니 다시 오늘 피재로 들어올 때 지났던 길과 만났다. 우측으로 지날 때 보았던 상수도 사업소도 다시 보였다. 그 도로를 건너가니 표지판이 서 있었다. 거기에 오늘 낙동정맥 줄기가 표시되어 있었다.
피재에서 분기점을 돌아오는 동안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시작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상수도 사업소가 완만한 초지 너머로 한가롭게 보였다. 완만한 능선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조금 가다 뒤를 돌아보니 함백산과 천의령, 그리고 매봉 인근의 풍차가 보였다. 거기서 낙동정맥 분기점 앞으로 지나오던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안개도 끼어서 을씨년스러웠다. 매봉에서는 고랭지 채소밭을 지나 풍차 잇는 곳으로 가면서 길을 조금 헤메기도 했었다. 풍력발전기 앞을 지날 때 가까이 다가가도 보이지 않고 풍차 날개 돌아가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렸었다. 그리고 피재로 내려올 때는 신발에 물이 가득 차서 피재 가게 앞에 주차하고 있는 차에 올라 잠시 쉬며 양말을 벗어 물을 짜기도 했었다.
완만한 산길 주변 숲에 진달래, 철쭉, 싸리순 등 신록이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잎이 먼저 피는 철쭉과 근래 막 꽃이 진 진달래가 교차하고 있었다. 떡갈나무 순은 피어날 때보다 얀한 갈록색을 띠고 있었다. 산길에서 신록이 무르 익어가는 늦봄의 숲내음이 느껴졌다. 12시 22분 동해가 보인다는 표지가 세워진 곳을 지났다. 도상에서 보면 동해까지 거리가 먼 곳이어서 육안으로 바다가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밤배의 물빛 등은 선명히 보일 것 같았다.
해바라기 동산에 닿으니 철근으로 해바라기를 형상화해 놓은 조형물이 놓여 있었다. 부드럽고 완만한 산세가 아늑한 곳이다. 계곡지점에 지어진 건물들도 딱딱한 형상과 달리 자리 잡음이 아늑해 보였다.
계속해서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졌다. 길가 철쭉나무에 걸린 죽마고우라는 리본이 눈에 띠었다. 그래도 오름길을 걷는 동안 점차 지대가 높아져 시야가 넓어졌다. 산 능성이에 올라 평평해진 길에 이르니 길가에 10년생쯤 보이는 떡갈나무들이 가로수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능선상의 작은 봉우리를 넘어서니 대박등이라고 쓰인 나무 표지판이 나무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숲길이 이어졌다.
숲속 내림길을 빠져나가니 다시 시야가 트여졌다. 저 앞쪽에 보이는 산자락이 깍여 있고 그 위로 채석 장비로 보이는 기계가 보였다. 그 곳까지 길을 내느라고 산기슭을 파헤쳐 놓은 듯 했다. 지나는 길에 세워진 철탑 아래를 지났다.
완만한 오름길을 오르다 좌측으로 갈림길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정맥길을 알리는 리본들이 매달려 있었다. 지도상에 자작목이로 나타난 지점이었다. 나아갈 방향을 보니 멀리 구비 구비 산줄기가 둘러 쳐 보였다. 세워진 표지에 오늘 마칠 통리역까지 5,1km로 쓰여 있었다. 거기서 잠시 후미를 기다리며 앞에 키가 큰 나무 뒤로 멀리 희멀건 산세를 보며 스케치했다.
선두의 이대장이 중간과 후미 일행에게 무전기로 연락을 했다. 잠시 후 일행이 다 도착해 다시 길을 나서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섰다. 자작나무는 하얀 줄기도 깨끗한 느낌이고 피어나는 연두빛 이파리도 유난히 더 생생해 보인다.
오르는 능선 길 주변에 철쭉꽃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먼저 나온 잎은 부드러운 연두색 빛깔을 발하였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아직 잎이 다 피어나지 않아서 시야가 막히지 않았다. 능선을 지나는 동안 연두빛 잎들로 덮인 능성이가 부르러운 곡선을 띠고 그 너머로 먼 산이 회청색 빛깔을 띠어 보였다. 푹신하게 낙옆이 깔린 길을 걷다 우측 경사지에 비스듬히 난 길로 접어들었다. 오름길에 작은 봉우리를 지났다. 참호 흙막이로 쓴 나무가 썩어 부석부석 해진 채 삭아 있었다
다시 능선길에 올라 뒤돌아보니 좌측으로 멀리 함백산이 보였다. 그리고 피재로 이어지는 산 능선이 보였다. 함백산 우측으로 은대봉 싸리재 금대봉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매봉 주변의 풍차가 보였다.
다시 봉우리를 넘어 1시 18분 묘지에 당도했다. 식사를 하기로 한 장소지만 적당치 않아서 더 가서 찾아보기로 했다. 여기저기서 발파 소리가 났다. 조금 나오니 앞쪽이 훤해졌다. 채석장처럼 돌을 파내고 남은 부스러기가 깔려있어서 호젓하던 산길의 분위기가 삭막해지고 말았다. 지도에 그 지점이 서미촌재, 예당골이라고 쓰여 있었다.
산거죽이 벗겨지고 파헤쳐진 모습이 아름다우 산세를 느끼던 기분을 일시에 망가뜨렸다. 후미에서 배가 고프니 빨리 식사 장소를 잡으라고 했다. 그러나 삭막해 보이는 그곳을 지나 앞에 보이는 산을 오를 수 밖에 없었다. 건조한 분위기를 빨리 벗어나고 싶어 서둘러 산길을 올라갔다.
1시 30분 앞에 놓인 봉우리에 닿았다. 능선에 오르니 시야가 트였다. 길가에 핀 야생화가 갈색 낙옆 위로 새 생명의 환희를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당한 식사 장소가 눈에 띠지 않아 조금 더 걸어가면서 장소를 찾았다. 가다가 좌측 안쪽에 공터를 발견하고 자리를 잡았다.
일행이 모두 도착해 1시 42분 식사를 시작했다. 일행이 각자 배낭에서 준비해온 음식을 꺼냈다. 밥과 김치, 야채, 두릅 등 먹거리가 푸짐해 보였다. 산행에서 먹는 밥은 언제나 맛이 좋다. 일행은 첫 구간에 나선 것을 기념하는 마음으로 막걸리 잔을 돌리며 건배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2시 42분 다시 길을 나섰다. 오늘 계획한 구간이 짧아 마칠때까지 남은 거리가 3km 채 안 될 것 같았다. 날씨가 좋고 걸어온 길도 험한 곳이 없어 일찍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식사 후 걷는 길은 능선에서 조금 더 오르는 지점이었다. 그 능선에서 뒤돌아보니 지나온 산 봉우리가 꽤 높게 보였다. 걸을 때는 그 지점의 표고를 잘 느끼지 못하지만 멀리서 보면 높은 지대임을 알 수 있다.
2시 51분 봉우리에서 출발지로부터 이어진 능선이 보였다.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다시 길을 나섰다. 길가에 선 철탑에 메모장처럼 노란 보드가 걸려 있고 그 위에 이 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메모장처럼 써 놓은 글씨들이 보였다. 맨 앞에 가던 이 대장도 “강남건축사 정맥, 대간팀 가다. 2010. 5. 15” 라고 작게 글씨를 썼다. 지난번 대간 종주 때는 아무 표식도 남기지 않았었는데 다음 구간부터는 리본도 달 거라고 했다.
3시3분 유령산(楡嶺山 932.4m)을 지났다. 지나온 능선이 길게 이어 보여 그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안부로 내려서다 보니 앞이 트여 보였다. 도로가 옆으로 가로 질러가고 있었다. 3시 17분 도로에 내려서면서 보니 좌측에 산신각 같은 건물 한 채가 보였다. 편액에 유령산령당(楡嶺山靈堂)이라 쓰여 있다. 그 건물 앞으로 다가가니 표지석에 유래가 쓰여 있었다. 길가에는 노란 꽃이 핀 민들레가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이 곳 느릅령은 영동과 영서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신라때 임금이 태백산 천제를 올리기 위해 넘던 고개라고 했다. 죽령처럼 지금 지나는 포장도로가 나기 전 사람들이 다닌 옛길이었다. 대간 길에서도 길목에 지나는 사람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이런 산신각들이 세워진 모습을 보았었다.
거기에 다른 유래도 쓰여 있었다. 황지에 살고 있던 효자가 소달장에 부친 제사 장보러 갔다가 늦게 고개를 넘다 산령인 호랑이에게 무려 죽게 된 판에 그가 아버지 제사 봉행을 해야 하니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산령이 내 청을 들어주면 살려 주겠다고 했다. 매년 황소를 잡아 제사를 올려 주면 무사하리라 하였다. 그리고 그 말대로 매년 음력 4월 16일에 황소를 제물로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 후 태백과 삼척 주민들이 산당을 복원하고 봉제사를 거행해 왔다고 쓰여 있었다.
3시 25분 일행이 출발했다. 나는 그리던 스케치를 마저 하고 뒤따라갔다. 그 사이 앞의 일행과 간격이 벌어졌는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앞에 놓였던 봉우리에 올랐다. 지도상에 우보산으로 나타나 있었다. 사방이 훤히 트여 보였다. 그리고 다시 출발지점까지 시선이 이어져 보여 빨리 스케치를 하고 일행을 쫓아갔다.
능선길을 지나다 보니 길에 가슴 아래가 땅에 묻혀 있는 석상이 놓여 있었다. 길이 완만한 그 곳을 지나 좌측으로 꺽여진 내림길로 들어섰다. 길이 갑자기 급경사길이 되었다. 그 길을 내려가다 최진 회장과 만났다. 뭔가 가득 담긴 검은 비닐 봉지가 배낭 옆에 매달려 있어 물어보니 아까 지난 영당 주변 도로가에 널러 있던 민들레를 캔 것이라고 했다. 맑은 숲길을 걷다보니 새삼스레 산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늘 산에 있으면 그도 잘 모르게 될 것 같았다. 늘 산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이렇게 가끔 그립게 찾아드는 것이 더 살갑게 느껴지게 될 것 같았다.
4시 9분 산길을 빠져 나가니 맞은편 산기슭에 탄광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이 지역의 체취를 발하고 있었다. 4시 12분 통리역에 도착했다. 산행을 마치기로 한 지점이다. 표지에 산행 지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지나온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태백시가 대간과 낙동 정맥에 둘러쌓여 있었다. 통리역은 고지대 가운데 38번국도와 423지방도로, 철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그래서인지 잠시 산의 자취가 끊겨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버스에 다가가다 보니 멀리서 흥겨운 노래 가락이 들렸다. 오늘이 통리에 장이 서는 날이라고 했다. 최회장 사모님과 그 친구분이 장 구경을 가고 최회장이 따라갔다. 나도 스케치를 마치고 구경 갔다가 여성분들이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올라왔다. 차가 출발하는데 최회장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차가 가면서 태우기로 하고 출발했다. 길가에 나와 있을 것 같았는데 보이지 않아 시내쪽까지 내려가다 멈춰 기다리니 바삐 걸어오고 있었다. 거기까지 장이 크게 서 있었다. 봄 햇살에 거리가 퍽 활기로웠다.
일행은 태백역 앞에 전에 들렀던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하기로 하고 출발했다. 식당에 도착하기 전 먼저 황지 연못을 들렀다. 낙동강 발원지로 알려진 곳이다. 전에 개인적으로 왔을 때는 도로 로타리 안에 연못이 놓인 모습이었는데 그 주변이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보다 그 때가 더 신비스럽게 다가왔었다.
태백시는 북측과 동측은 삼척시 서측은 정선, 영월군 그리고 남측은 경상북도 봉화면에 접한 고원분지형 도시이다. 태백시의 이름은 태백산에서 따 왔다. 태백산은 “크게 밝은 뫼”이며 한밝달 또는 한배달로 부르는데 이는 단군신화와 연관이 있다. 태초에 천제의 아들 환웅천왕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열어 우리 민족이 터전을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환웅천왕이 내려온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지내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고 그 성스러운 산을 태백산이라 이름 하여 성역으로 지켜왔다.
5시 7분 식당에 도착했다. 비를 흠뻑 맞으며 백두대간 피재 구간을 마친 날 태백시로 내려와 숙박을 했었다. 숙소에서 목욕을 하고 이 식당으로 걸어와 식사를 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바로 앞에 보이는 태백 역사(驛舍)를 보니 외관이 본래보다 꾸며진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태백시의 옛스런 체취를 흐려놓은 것 같았다. 과거 탄광 산업이 유명했으나 근래는 레저스포츠 고원 휴양도시로 변모해 가고 있는데 그런 분위기가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기도 했다.
전에 그 앞에서 나이가 드신 분에게 아파트도 들어서고 있고, 발전이 많이 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더니 손사래를 치며 좋은 시절 다 지나갔다고 했다. 폐광 된 곳이 많아지면서 경제가 어려워지고 인구는 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1986년에 12만이던 인구가 지금은 5만을 조금 넘기는 정도가 되었다.
6시 50분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앞으로 점차 더 먼 거리를 오가야 할 것 같았다. 점차 해가 기울어 산의 실루엣이 어두워졌지만 지나는 길 옆 산에는 아직도 녹음 빛깔이 보였다.
(2010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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