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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제목

09 폐사지서 들려오는 역사의 숨결

작성자
김석환
작성일
2009.11.15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406
내용

폐사지서 들려오는 역사의 숨결
(양양 진전사지와 선림원지 답사기)

박물관회에서 답사 소식을 전해들을 때면 그 답사지의 정경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이번에 진전사지라고 적힌 문자 메세지를 보고는 마음이 자석에 이끌리 듯 했다. 그런 느낌은 이번에 함께 보게 될 선림원지도 마찬가지인데, 내게 가장 순수한 느낌을 지닌 장소로 기억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두 곳은 수행을 위해 속세를 벗어난 가장 먼 산중의 사찰터로서 출가자의 정신이 처음 그대로 늘 느껴질 듯하다.

7시 일행을 태운 두 대의 버스가 박물관을 출발했다. 대개 지방 나들이 길은 고속도로를 이용하는데 이번 답사지는 44번과 46번 국도가 지나는 양평, 홍천 인제 등을 거쳐 가게 되었다. 양평대교를 건너 우측으로 돌아들 때 앞 차창 너머로 한강 물줄기가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처럼 보였다. 그리고 조금 더 가자 양평 호반이 너른 호수처럼 넉넉히 펼쳐있고 두물머리를 지나 남한강 변을 따라가는 동안에는 강변의 들녘과 나무 가지에서 신록이 번져 풋풋한 봄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황태 덕장으로 유명한 설악산 길목의 용대리를 지나면서 자연의 품은 더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설악산에 들어서 12선녀탕이 있는 계곡길을 가다 1129분 미시령 옛길 표지를 보며 지나다 근래 새로 생긴 미시령 터널을 지나 외설악으로 나갔다. 그 길이 서울에서 진전사지로 가는 가장 빠른 코스일 것 같았다. 터널을 지나자 우측에 울산바위가 설악산의 산세를 배경으로 보였다. 속초로 나와 동해안 해변도로로 내려가다 다시 진전사지 방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석교리를 거쳐 계곡 옆 좁은 길로 올라가 진전사지 앞 공터에 도착했다. 설악산이 크고 험하여, 도의 선사가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않은 이들을 뒤로 하고 외로운 선각자가 정한 절터가 인적 닿기 어려운 막막한 외지일 것만 같은데 진전사지 가까이에 있는 마을을 지나오니 왠지 다행스런 느낌이 들었다.

앞 쪽에 놓인 계단을 올라가다 보니 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라서니 잔디가 정갈하게 깔린 빈 터에 탑이 홀로 서 있는 폐사지 특유의 장소감각이 느껴졌다.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하기 위해 계단길 양편에 걸어 놓은 등이 수를 놓고 있어 그 장소가 더욱 성스럽게 느껴지게 되었다. 그리고 봄기운이 가장 알맞게 느껴지는 철에, 탑 앞에 핀 한그루 라일락의 자연스런 줄기가 탑의 엄격한 조형감을 더 돋구워주고 있었다.

진전사지 탑은 통일신라시대 3층 탑의 전형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탑의 기단과 1층 탑신에 부조가 되어 있는 점이었다. 하층 기단에는 비천상, 상층 기단에는 팔부중상, 그리고 1층 탑신에는 사방불이 부조되어 있는데, 조각 솜씨가 매우 빼어나 보였다. 오늘 설명을 해주신 소재구 관장은 그 부조에 대해 설명하면서 뛰어난 부조는 그 도드라짐이 알맞고 숙련된 조각 솜씨로 되어야 하는데 진전사지 석탑은 바로 그러한 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고 했다. 부조는 조각상처럼 사면이 다 조각되지 않으면서도 입체감이 느껴지게 되는 것이 묘미인데,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부조를 너무 도드라지게 하면 부조의 신비한 맛을 잃게 된다고 했다.

그 곳을 나와 다시 윗쪽 부도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주차장에서 조금 오른 우측 능성이에 부도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좌측 조금 낮은 평평한 곳에 근래 지은 두어채의 불전과 요사체 등이 보였다. 부도는 스님의 묘탑인데, 진전사지 부도는 부도의 시원적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이것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우리나라에 부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부도는 처음 조성하려는 부도의 형상을 탑과 달리 어떻게 할 것인지 궁리한 듯한 느낌이 나타나 있다. 이 부도의 모습은 탑과 같은 기단부에 사리공을 둔 8각 몸돌을 올려 놓은 구조로 되어 있는대 결국 스님의 사리를 소중히 봉안하려는 의미를 담아 조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몸돌은 앙련 받침 위에 올려져 있고 몸돌 위에는 풍우로부터 보호하고자 옥개석을 올려 놓았으며 옥새석 위에는 보주가 얹혀 있다.

진전사 유물을 둘러보고 선림원지로 가는 도중 식사를 하기로 해서 150분 낙산사 주차장에 내려 인근 식당을 찾았다. 그리고 220분까지 삼삼오오 자유롭게 흩어져 즐거운 식사시간을 가졌다. 나는 뒷좌석에 앉으신 분들과 함께 식당으로 가 생선찌게로 맛있는 식사를 했다.

예고된 시간에 맞춰 차에 타고 선림원지로 향했다. 홍천방향 56번 국도를 가다 한계령이 24km 남은 지점에서 길이 나뉘었다. 거기서 선림원지까지는 20km 거리인데 가는 도중 송어 생태 시험지 등을 알리는 표지가 보여 청정지대임을 느끼게 했다. 선림원지 가는 길은 산마루를 넘을 때까지 길게 이어지는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형국이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주변 산세가 크게 높아지는 곳이기도 해서 선림원지는 크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와 있는 지점이다. 작년에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 맞은편 능선에서 선림원지 쪽을 가늠하며 지났었다.

전에는 지리적 조건을 잘 인식하지 못했었지만 처음 이 곳을 찾았을 때는 높은 지대에 그윽한 절터가 있다는 것이 특별하게 다가왔었다. 마치 상상만 할 수 있는 선계(仙界)가 실재하고 있는 듯 했다. 산길은 높게 오를수록 힘겹고 삶의 조건으로서도 오지의 척박한 조건을 갖게 되지만 이곳에 오면 척박함보다 그윽함이 느껴진다. 지나는 길은 구비구비 새롭게 나타나는 산봉우리와 맑게 흐르는 계곡이 정취를 띠며 어우러져 있다.

점차 좁아진 길을 걷다 모퉁이를 돌아가니 선림원지 표지가 나타났다. 거기서 좌측으로 난 경사길을 올라 우측으로 꺽어 게단을 오르니 바로 앞에 탑이 보였다. 그리고 뒤로 전체의 절터가 보였는데, 지반이 더 정돈되어 보이는 것 외에 폐사지의 빈 느낌은 전에 본 그대로였다. 변하지 않은 것에 안도감을 느끼며 전경을 담으려고 멀리 떨어져 사진을 찍고 다사 석탑 앞에 서서 천천히 바라보았다.

이 탑의 전체적인 생김은 2층 기단 그리고 3층의 몸체를 한 진전사지 탑처럼 통일신라 시대 양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상층 기단부의 부조가 새겨진 것도 진전사지 탑과 비슷한데 이 곳 탑을 만들때 진전사지 탑을 본떠 만들었다는 것을 짐작케 했다. 이 곳에 터를 닦은 염거화상이 진전사지의 도의선사 제자인 인연으로 볼 때 그것은 자연스럽게 연관지울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진전사지 탑에 비해 격이 낮은 모습으로 되어 있다. 즉 부조는 상층 기단부에만 있고 진전사지 탑에 있는 하층부와 1층 탑신의 부조는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탑신의 체감비도 그에 못 미치고 있었다. 그것은 창작성보다 단지 하나의 탑을 모방해 세우려는 의식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탑을 보고 왼쪽 뒤편에 있는 부도 앞으로 이동했다. 부도의 몸돌과 상륜부는 없는 상태인데 조각 솜씨가 빼어나다. 기단 중앙부에 새겨진 용의 용틀임하는 형상이 생생히 느껴졌다. 부도는 그 시기가 절정기이다. 부도가 조성되기 시작한 아직 초기임에도 이 시기 석조물로는 부도가 대표적이라 할 만큼 뛰어난 유물들이 남겨져 있다. 다시 자리를 옮겨 석등을 불러 보았다. 이 곳 석등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보림사 석등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는 5개의 석등 중 하나로 꼽힌다. 다시 석등 가까이 자리 잡은 부도비로 걸음을 옯겨 바라보았다. 역시 잘 다듬어져 있었다. 거기서 뒤돌아보니 앞에 보이는 산이 절터를 둘러치고 있어 더 그윽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일행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이 없는 느낌을 담으려고 기다려 사진을 찍고 뒤따라 내려갔다. 선림원지를 뒤로 하고 나오는 길옆으로 계곡물이 맑게 흐르고 있었다. 나 자신도 선림원지를 다녀오는 동안 그처럼 맑아진 듯 기분이 상쾌해져 있었다. 도로로 건너는 다리 위에서 다시 그 정경을 그립게 올려다보고 귀경길에 올랐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오늘 다녀온 두 폐사지의 느낌을 되뇌이고 있었다.
(090417)박물관 신문




선림원지
2009. 4. 17


아스라이 높은 산중
빽빽한 산봉오리에 둘러친
안온한 터에
처음 닿았던
구도자의 발걸음

산이 깊을수록
속세의 왕래가 끊기고
생활은 더 모질어지건만
구도를 향한 마음엔
그윽한 기쁨만이
찾아들었나보다.

건물은
세월에 스러지고
불탑 하나
스님의 묘탑하나 달랑
빈 터에 남아 있건만

천년도 더 전에
수행자의 마음 밝히던
석등은 아직
빈 터의 자취를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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