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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제목

08 지속가능한 건축

작성자
김석환
작성일
2009.11.15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315
내용

지속가능한 건축

지속가능한 건축에 대한 화두가 한창이다. 그런데 그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고 쓰일 때도 많은 듯 하다. 그래서 그것이 새로운 아이디어처럼 인식될 수도 있다. 정보화 사회로 불리는 현대는 아이디어를 가치 있게 여기는 경향이 크다. 무릇 인간의 행위는 생각이 낳는 것이므로 아이디어가 중요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지속 가능성의 본질은 아이디어의 의미가 될 수 없다.

오늘 날 지속 가능성의 가치를 인식하게 된 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은 것에 반성일 수 있다. 건축의 지속성의 의미는 특히 아파트 재건축을 목격하면서 실감해 왔다. 재건축의 이익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부수는 것을 환영한다. 그러나 이해 관계를 떠나 건축인으로서는 자괴감을 느끼게 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럴 때 건축에 대한 근본적인 가치를 되묻게 한다. 부수려는 그 건물 역시 처음 지을 때는 창작의 대상이요 그것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건축 설계자의 자부심에 따리 이루어졌을 것이다.

자연은 본래 지속 가능한 모습이다. 그것은 변화무쌍하지만 궁극적으로 유기적 통일성에 따른 온전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그 섭리 안에서 온전히 존재의 모습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래서 자연의 섭리안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지속 가능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 의식이다. 우주의 순행은 본질적으로 지속 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다. 해가 뜨고 짐, 그뭄달과 보름달의 변화, 일식과 월식, 해의 바뀜에서 우리는 신비한 우주의 순행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늘 새롭게 느껴질 수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종말을 예상하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해서 살고 있는 마음 상태로 스스로를 인식하며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인간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은 존재의 바탕에 관한 것이다. 태안 사고가 심각한 것은 존재의 터전으로써 위협당한 상태이기 때문이고 일시적으로 치유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속가능성이 위협받는 이유는 자연의 순리대로 존재되지 않는 상태 때문이다. 즉 지속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은 인위에 의존하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문명 생활로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을 것처럼 여겨왔다. 자연의 섭리에 따른 것은 자생적 생명력이 있으나 인위적 조건속에서의 존재는 그 조건이 변하면 무용화된다. 현대 사회에서 생태를 주창하면서 인공적인 설비 장치를 써서 해결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게 된다. 막대한 돈을 들여 인공적으로 자연을 살리려 하고 있다. 그렇게 생태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시 인공장치를 하고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정으로 가치를 얻는 일이 될 수 없다. 그보다는 삶의 태도를 바꾸고 환원하고 돌아보는 일이 훨씬 더 합리적이다.

건축이 중요한 것은 존재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종교학의 선구자 엘리아데는 건축에 대해 원점으로의 회귀 의미를 중시한다. 집은 돌아가는 곳, 돌아갈 수 있는 곳이다. 그 집은 존재의 장소이다. 그런 점에서 건축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짓기 그 자체이다. 집은 어느 장소에 에워 쌓여진 삶의 공간이다. 그렇게 존재된 집은 어떤 방식이던지 어떤 모습이던지 삶을 누리는 터전으로서 돌아갈 수 있는 곳으로서 위대한 가치를 띠게 된다.

건축은 존재의 바탕이자 삶의 결정체이다. 근대 건축은 새로운 삶에 맞게 건축을 맞춰 지을 것을 주창하였다. 기능주의가 그것이다. 그것은 삶이 달라지면 건축이 변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그렇지만 용도와 설비 인프라 등, 그 조건이 변하면 그 완벽의 의미도 잃고 불편한 것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그것을 건축의 사회적 수명이라고 한다. 근대 건축은 건축을 이념적으로 대해 왔다.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양식의 출현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이전 것은 쓸모없고 불편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근대 건축이 보편화된 이후 그에 대한 건조함이 지적되었다. 그리고 근대 이전의 평범한 건물들이 지닌 문화적 풍요로움을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근대 이전에 건축은 현대의 무수한 사조처럼 이념을 실천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단지 정성스러운 짓기였고 한번 짓는 것은 영속적인 것으로 알았다.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오래전에 지어진 건물을 때로 고쳐가며 계속해서 써 왔다. 오래 된 것은 세월이 베어 더 풍부하고 많은 표정이 있다. 그렇게 구조에 삶을 맞춰 살아도 별 문제 없이 잘 쓰고 있다. 결국 건축이 이루어 내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삶을 담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현대는 근대건축 같은 이념성에 대한 의미가 약화되고 있다. 그래서 부수기보다 고쳐서 쓰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일도 많아졌다. 역사와 문화적 복합성을 이루고 명소가 된 곳이 많다. 거기서 가치는 디자인이 잘 된 측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소중히 존재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한 지속 가능한 건축은 삶과의 일체감이 수반되어야 가능하다. 인간이 그 안에서 건강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건축적 의미이다.

우리 전통 건축은 가장 대표적인 지속가능한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지속 가능한 삶의 조건을 이루며 살아왔다. 일상에서 영위된 삶의 찌꺼기가 남지 않고 스스로 정화되도록 했다. 그것이 진정으로 지속 가능한 삶의 모습이다. 명옥헌 앞 마을 입구에는 미나리 깡이 있다. 각기 가옥의 부엌에서 쓰고 버린 오수가 그 곳에 모여들게 되어 거름이 된다. 음식 찌꺼기까지 기르는 식물의 자양분으로 모두 환원된다.

지속 가능한 건축은 건축에 삶을 적응하는 태도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 경주 양동 마을은 조선시대 초기에 형성된 오래된 마을이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변하지 않고 이어져 왔다. 그 가옥에서의 생활 방식은 우리가 시골 농가에서 살았던 집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인의 생활 양식으로 보면 불편한 점도 많을 것이지만 불편을 감수하고 집의 구조에 적응하며 산다. 그런데 현대식 가옥 구조에 비해 좋은 점도 많이 느끼게 된다. 아파트 평면을 고를 때 같은 가옥 구조상의 선호 의식과 다른 관점에서 찾아지는 의미이다. 거기서 대대로 살았던 선조의 삶을 소중히 느끼며 살고 있다. 현대 설비장치의 편리함을 누리기보다 역사와 문화, 전통, 자연에 대한 가치가 더 크다는 것을 인식하는 점이 있을 것이다.

서울의 북촌은 일제시대 개발업자의 손에 의해 형성되었으나 한옥으로 이루어진 마을 구조가 유지되어 특색을 띠고 있다. 그 곳은 도시가 현대화되는 가운데서도 그 마을의 구조와 가옥 구조에 맞춰 살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불평도 많았다. 그런데 근래는 오히려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그러한 태도의 변화는 문화적 가치를 인식한 사회적 트랜드의 영향이라 할 수 있지만 어쨌든 그곳에 줄곳 살아온 사람들이 스스로 가치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필자는 작년 건축사지에 소개했던 1966년도에 지어진 집을 고쳐서 사무실로 쓰고 있다. 나는 그것을 마련하면서 주차장이 없는 대신 작은 마당이라도 있는 집을 찾았다. 내가 쓰는 건물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 만나는 작은 마당이 있고 지붕에 매화를 심어 놓은 옥상 마당도 있다. 자랑할만한 것은 아니지만 빈 마당의 감나무 그늘, 옥상의 매화 감상 소박하고 살가운 집의 표정이 있다. 손님들이 오시면 그런 점을 공감한다. 그것이 내가 실천하고 있는 지속 가능성일 수 있다.

2008. 1(서초소식지)
울건축사사무소 김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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