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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제목

99.03 지어지는건축지어지지않는

작성자
김석환
작성일
2009.09.25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349
내용

건축사협회 회원노트에 기고한 글

지어지지 않는 꿈, 지어지는 건축

일없는 시절의 건축가
오늘 이 시대에 건축가와 일 그리고 직업으로서 건축을 생각하면 참으로 대책 없이 느껴진다. 오늘날 경제난 속에 가장 위축된 분야가 건축이다. 외환 위기가 닥친 이래 가정 살림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지경인데 집을 지을 엄두를 내기란 더우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건축가들은 어려움을 내색조차 하길 꺼리며 조용히 지내고 있는 듯 하다. 간혹 설계를 의뢰받은 일이 있어도 실시되지 못하고 계획으로만 그치기 일수여서 하고 있는 일조차 가상인지 현실인지 애매한 느낌이 든다. 공사를 착수한 후 중단되어 1년이 넘게 방치된 현장도 있고, 허가받은 후로부터 1년동안 착공을 못하여 허가가 취소된 프로젝트도 있으며, 실제 지어진 건물도 부도가 나고 사람이 살지 않아 금새 폐허화 되고 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경제 회생에 무책임할 만큼 능력없는 건축가가 지켜보며 지나야 하는 세월이다.
나는 주어진 일이 없어도 늘 설계를 한다. 현상설게에 참여하기도 하고 지인들이 장래 짖겠다고하여 계획안을 만들기도 한다. 꼭 실시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어도 단지 그냥 만드는 것이 좋아서 한다. 고정적인 수입이 확보되는 직업인이 아닌채 취미생활자처럼 가상의 건축을 만드는 것이다. 일이 없이 지내다 보면 문득 생존능력도 없이 세상에 서 있는 불안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오히려 이럴때 만드는 일은 설계기간에 쫒기지 않아서 좋다. 건축은 지어질 가망 없어도 즐거운 도취에 빠질 수 있는 작업이다. 나에게 실시될 프로젝트가 없다고 해도 막상 한가한 일상도 아니다. 일이 없더라도 나에게 주어진 인생의 한 순간으로서는 똑같이 소중하다는 생각으로 알뜰한 시간을 보내려고 생각한다. 그동안 가보지 않았던 국토의 이곳저곳에 있는 문화 유산을 답사도 하고, 특설 강좌도 듣고, 이런저런 전시와 세미나에도 제법 쫒아 다녔다.

문득 꿈을 꾸게한 정읍의 주택계획
작년초 정읍에서 건축을 하는 친구로부터 주택을 설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지역에서 유지로 알려진 사람의 집인데 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안을 만들어 보라고 하였다. 내 친구는 건축주의 처남과 친구 사이로서 그래도 나를 잘 보아서 하는 말인 듯 하였다. 친구에게서 들은바대로 내년에나 지을 것이라고 하니 시간에 쫒길 일도 아니어서 마음의 여유를 갖고 만들었다. 소식을 들으니 건축주는 현재 얼마전에 지은 건물의 건축법 위반 시비로 시달리는 중이어서 더욱 빨리 진행할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는 예기를 들었다.
사실 이 주택은 나에게 특별한 꿈을 꾸게 한 프로젝트이다. 도시내에 지어지는 건물을 설계하다보면 건폐율 한도내에서 빠듯이 법정 주차대수를 맞추려 고심하기 십상인데, 이 프로젝트는 그와 달리 600평이나 되는 너른 대지에 건물을 마음껏 배치하며 설계할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처음 건축을 시작하고 공부해 오는동안 나는 르 꼬르뷔제가 주창한 근대건축의 사고로 훈련되어 왔다. 그러다 그에 관한 답사이후 몇 년전부터 우리것을 알아야 하겠기에 한국 전통 건축의 답사를 다니면서 우리 전통 건축이 외부공간과 관계맺는 자연 친화적인 면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특히 영선암의 마당은 사람이 저절로 수행되게 할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전통건축은 목구조가 형성하는 간을 모듈로 하는질서의 간결하고 명쾌함과 외부공간의 융합되어 자연을 정취를 담아 끌어안는 형식에서 건축의 높은 격을 이루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집에서 그러한 우리 전통건축의 장점을 계승함과 아울러 근대건축이 추구한 편리함을 함께 성취한다는 생각으로 계획하였다. 우선 넓은 대지 여건을 살려 건물의 내부가 뜰을 둘러싸며, 건물과 외부와의 접촉이 많아지도록 하고 켜와 켜사이에 자연이 놓이도록 하였다. 이러한 내외부 공간이 교류되게 한 것은 이전에 설계한 곤지암 주택에서도 채용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넓은 대지를 이용하여 규모가 커진 상태로 풍성한 이야기를 꾸며 보고 싶었다. 내부공간은 부분적으로 1,2층을 오픈시켜 공간의 변화를 주고 위치구분에 따른 기능별 독립성을 높게 하였으며 내부공간과 연관된 다양한 성격의 외부 공간을 두었다. 건물의 외부 형태는 단순한 보울트 구조로 하여 단순하고 정직한 형태의 힘이 느껴지게하였다.
그러나 이 집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게 되었다. 작업을 시작한지 몇달이 지난후 나는 서울의 딸에게 올라온 집주인의 부인을 만나서 안을 보여주며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미 다른 사람과 설계계약을 하였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노력이 수포가 된데서 온몸의 힘이 쭉 빠져 나가는 느낌을 느꼈다. 작품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게 될지라도 안만은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너무도 아쉬워서 정읍에 내려가 실시 설계안을 허가난 설계도를 보았다. 사실 설계가 잘 되어졌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기대와는 멀어 보였다. 그 후 나는 건축주가 요구한 스타일에 다시 실용적인 설계안을 만들어 내려가 보여 주었다. 그러나 결과는 허사였다. 이미 허가가 난 것과, 안을 설명을 하여도 그 의미를 읽지 못하여 더 할 말이 없었다.

설계면제와 농촌주택
92년부터 농림수산부에서 주관한 농어촌 주택 개량 사업의 시행으로 많은 집이 새로 지어졌다. 과거에도 농어촌의 새마을 사업으로 초가지붕을 스레이트 지붕으로 개량한 일이 있었으나, 농림수산부에서 하는 사업은 집을 단순히 고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구를 대상으로 이주할 마을을 조성하고 집을 새로 지어 이사하게 하는 농촌의 모습이 탈바꿈되는 일이다. 해당 지역 관청에서는 자신들의 지역 사업이라고 생각하여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아, 농민들에게 자금을 융자해주고 표준도면을 이용하면 설계를 따로 할 필요도 없으며 건축허가를 받지 않고 시공업자만 선정하여 계약을 체결하면 되도록하여 계획기간내에 일사불란하게 추진되었다. 1993년에 나와 동문 사이인 공무원 중에 그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 있어 같이 새로 이룩된 마을을 둘러본 일이 있다. 그런데 그때 나는 그 일에 매우 큰 회의를 갖게 되었다. 새로 지어진 집이 한결같이 너무도 볼품 없는 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을 짓는데는 고급으로 짓건 낮은 단가로 짓건, 형성하는 재료와 인력의 투입에 따라 기본적으로 큰 돈이 드는 일이다. 그리고 건축이 잘되기 위해서는 투여될 자원을 전체 목적에 잘 부합되고 효과를 최대로 하기 위한 구상이 필요하며 그것이 설계 과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미쳐 알지 못하고 설계가 면제되는 일을 축복으로 여긴다. 농촌 주택을 짓는 건축주들은 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경제적으로 미쳐 준비되지 않은 어려운 여건하에 일을 시작하게 되니 가급적 건축비를 줄이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설계를 생략하고 설계비 지출을 않아도 되는 것이 집을 짓는 비용면에 있어서 이득을 가져오진 못한다. 건축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직접 투여되는 공사비이다. 그러므로 그 자원이 제대로 가치를 발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인 것일 것이며 그럴려면 합리적이고 계획에 의해야 한다. 설계를 한다는 것은 미리 대상을 인지하고 그 관계들을 가치있도록 적재적소로 관련시키는 일이며 영화 제작을 위한 시나리오와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건축이 만족 스럽지 못하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목표한 투자 성과도 거두지 못한 것이다. 시행자는 농촌주민에게 절차의 간소화를 강조하기에 앞서 설계를 제대로 하는 것이 좋은 가치 창출에 가장 기여되고 가장 경제적인 일이 된다는 사실을 홍보해야 할 일이었다.

인간과 주택
지하철을 타고 가다 앞에 앉은 어른과 중년 둘이서 하는 대화를 듣게 되었는데, 어른이 하시는 말씀이, 사람들이 사는 집값에 대한 이자 비용을 계산해 보니 그 돈이면 매일매일 고급 호텔에서 좋은 서비스를 받으며 잘 수 있다는 예기를 듣으니 문득 정말로 우리가 일상에서 주거에 대해 막대한 돈을 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되었다. 따져보면 사람들이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가장 많은 지출을 하는 것이 주거비용이다.
인간이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쓰는 공간이라는 것은 결국 인위적인 쉘타의 부피를 뜻한다. 인간의 신체가 쾌적하고자 요구하는 조절된 기후공간의 필요에 의해 그 공간의 크기단위로 돈을 지불하는 꼴이다. 그런데 그 막대한 공간의 비용을 들이며 지은 집이 정작 쾌적하지 못하다면 큰 손해가 아닐 수 없다. 장농은 비싸다고 아끼면서도 그보다 훨씬 많은 비용을 들여 지어지는 집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한다면 잘못 지어진 집에 대해 새로 산 냉장고가 불량품을 눈속임한 물건이었을 때처럼 속아서 분한 마음을 갖듯이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집에 대해서 만큼은 잘못 지어져도 사리 분별을 못하는 사람들처럼 덤덤하게 생각하는듯 하다.
주택은 인간이 사회 활동을 통해 획득한 것들을 쓰며 가족과 함께 행복을 추구하는 곳으로서, 인간이 사회적 관계 이전에 본연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주택안에서 영위하는 먹고, 자는 것은 생명체의 기본적 생존 모습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위에 나타나기 이전에 자연위에 태어나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가치로도 여러가지 행복을 추구할 수 있지만 그 나열될 수 있는 의미들이란 시대와 사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고, 쾌적이야말로 인간에게 변함 없는 행복의 조건이다. 생태적 존재조건으로서 인간과 결부된 건축은 공간적 수요의 대응만이 이닌 건축자체가 보여지는 형상의 멋과, 빛의 투과 과정 그리고 조망되는 시선을 통해 각각이 독특한 이미지의 세계로 된다. 하나의 방은 우주의 일부로서 전체 우주와 대응의 관계를 맺게 된다. 인간과 건축의 관계를 다루는 것은 그 자체에 우주의 신비로움이 담겨 진다. 인간이 건축을 한다는 것, 좋은 건축안에서 삶을 누린다는 것은 좋은 자연의 축복을 누리는 것과 같은 행복한 일이다.
과거에 궁궐을 지을 때는 완벽한 양식을 이루며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 하였다. 각 개인이 원하는 공간을 쓸모에 맞게 선택되고 수요에 쉽게 충족지어지는 이 시대 사람들은 자본주의 가치관에젖어서, 과거 궁궐을 지을 때 지니던 고상한 가치를 각자의 집에 추구하는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궁궐을 짓는 일보다 각자의 집이 더 중요한 의미로 취급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궁궐은 통치 기능을 갖는 곳이지만 주택은 인간적 자아실현 장으로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한 환경을 갖추게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밝은 했살과 맑은 바람 주변의 자연을 향수하는 넓은 시야가 펼쳐지고 조용한 뜰에서 새소리를 들을 수 있음으로서 인간의 본성안에 있는 품성을 지녀갈 수 있어야 한다.

건축과 의뢰자
화가는 캔버스 위에 직접 물감을 칠하여 자신의 작품을 완성해 나간다. 문학가는 자신의 생각을 직접 글로 써서 발표한다. 그러나 건축은 건축가 혼자서 할 수 없다. 우선 의뢰자가 있어야 하고 여러분야 전문가들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 현대의 대부분 건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건축가가 직접 짖지 않고 별도의 시공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구도로 되어 있어서 건축가의 의도는 도면을 통해 의사를 전달케 된다. 하지만 시공자 스스로에 의해 건축가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는 일이 매우 적다. 또한 건전하지 못한 자본주의 속성에 의해 건축정신이 모질게 훼손되고 있다. 많은 경우에 건축가가 일을 할 때 의뢰자의 요구와 자신이 생각하는 사고의 차이에 의해 심적 괴로움을 격고 있다. 그처럼 건축가가 다른 순수한 예술인처럼 마음껕 창작을 하지 못하고 때로는 타의에 의해 작품을 망가뜨리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즉 건축예술은 사회의 불건전한 지향성에 의해 위기가 초래되고 있다. 그러한 환경에서 뜻있는 몇몇 건축가들만이 건축가로서 결코 포기할수 없는 선을 지키려 마치 민주화 운동을 하는 민주투사처럼 활동하고 있는 듯하다. 때로 건축가를 현실 물정을 모르는 환상가로 치부하는 일도 있다. 르 꼬르뷔제는 자신의 건축의 문제는 항상 의뢰자와의 문제였다고 하며반대하는 사람은 지옥까지 쫒아와 반대 할 것이다하며 비통해 하였다. 건축은 천재가 하기에는 너무 지루하고 사회적 관계가 많은 작업인가 싶다.

대중과 건축작품
뜻있는 분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건축에 대한 인식은 크게 개선되어 보이지 않는다. 나는 건축의 질이 향상되려면 무었보다도 대중의 인식속에 건축이 인간의 삶에 정신적 풍요로운 환경의 선물을 가져다 주는 일이라 본질적인 이해속에 고상하게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사회의 여러 분야 가운데 어찌보면 유독 건축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우리보다 소득이 적은 나라보다도 낮아 보인다. 나는 그 주된 이유가 과거 정부가 추진한 팽창지향적 경제개발 정책의 물결을 타며, 건축이 재산증식의 수단이라는 인식으로 자리 잡아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80년대 중반까지 당시의 중년 이후 연배들은 이사를 재산 증식 수단의 하나로 다녔던 세대이다. 그리고 이른바 복부인 붐에 의한 부동산 열풍으로 건축은 그 자체의 고유 의미보다는 일확천금을 획득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그리하여 대중이 건축을 대하는 태도는 작품성은 고사하고 건축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에 관련하여 지켜져야 할 건전한 준법성과 윤리의식을 져버리면서까지 마구 지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이 사회에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갖는 준법 정신에 비춰볼때 상대적으로 건축에 관해서 법을 잘 지키지 않는 풍토였다. 그리고 그러한 좋지 않은 풍토는 우리 사회내에서 건축에 대한 올바른 가치를 형성하는데 큰 지장을 초래해 왔다. 태초에 생존을 위해 인간이 자연과 관계맺는 방식으로부터, 인간과 건축 그리고 인간사회 형성과 결부된 도시는 상호 유기적 관계를 맺어 왔다. 그러나 인간사회가 양적인 건설에 치중하여 생태와 정서에 관한 중대한 의미를 간과해온 사이, 인간 스스로가 자신들이 사는 환경을 점차 척박하게 만들어가는 꼴이 되었다.
우리가 금강산을 찾아가는 것은 금강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며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줄수 있는 감동을 따로 재현할 수 없다. 하나의 건축은 경관좋은 자연이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것과 마친가지로 개개가 독특한 감동을 유발하는 심미적 대상이 될 수 있다. 건축은 기후에 대응하는 쉘타로 일차적인 기능이 충족될 수 있겠지만 그보다 실제로 인간에게 기여하는 것은 좋은 균형을 갖춘 사물이 되었을 경우에 나타나는 정서 작용이다. 그것은 흔한 자연 사물이 보석과 같은 축복스런 상태로 되는 일로서 회화나 음악 조각과 같은 예술적 힘을 발산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결과는 건축의 가치를 올바로 진추구할 경우에만 얻어질 수 있다. 사실 과거 오랜 역사동안 건축은 고귀한 이미지로 인식되어온 전통이 있었으나 근대이후 자본주의 속성에 의해 점차 희석되어지는 경향이다.
좋지 않은 자연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은 좋은 자연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러워 할 것처럼 좋지 않은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좋은 집에서 사는 사람을 부러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작 자신의 집에 대해 똑같은 투자를 통해 비교적으로 좋은 상태로 되게 하려는 인식을 잘 갖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좀더 나은 삶의 가치를 추구해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채 평생을 살아가는 것과 같다. 생명체인 인간이 원초적으로 생존과 결부된 자연의 기후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과 마친가지로 건축 또한 그렇게 의식해야 할 중대한 인간 환경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가치를 제대로 알려 하지 않아서 설계자와도 많은 대화를 원치 않는다. 정부의 표준 설계도면을 적용할 때 설계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되게 되기라도 하면 그것을 공짜로 득을 보게 된다하여 신나는 일로만 생각하지 설계를 꼼꼼히 함에 의하여, 투여된 자원이 보석처럼 될 수도 있고 쓰레기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막대한 돈을 들인 집이 아무런 쓸모나 볼품도 없게 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사회에서 건축을 제대로 하지 않음으로 인한 피해는 의외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건축잡지에 관계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집을 지은 경험을 나에게 예기하며 농촌주택도 좋은 건축가를 만나서 잘자을 수 있는 캠페인을 벌려 나아가고 싶다고 하였다. 참으로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
앞으로 건축의 가치가 올바로 인식되어 그 가치를 공유하려는 사회적 공감대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건축을 제대로 실현하기가 너무도 힘겨운 처지이다. 건축가의 아이디어와 자본의 투자의 상승적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는한 건축은 오늘과 같은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고상한 가치가 물질적 이기에 의해 자주 배척되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건축은 다양한 가치를 지니는 까닭에 물질적 가치를 우선시하려는 유혹이 뒤따르며 그 욕망에 함몰될 위험이 큰 분야이다. 사회는 건축가를 가급적 현실문제에 억메이게 하지 말고 꿈을 키우고 보다 나은 인간사회를 위해 그 꿈을 그리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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