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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제목

96.02 내가 생각하는 페이퍼 아키텍춰

작성자
김석환
작성일
2009.09.25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640
내용





Paper Archtectur





나의 Paper Archtectur
내가 생각하는 Paper Archtecture
내가 감명받은 국내외 Paper Archtect와 건축




김 석 환


나의 페이퍼 아키텍춰
나는 페이퍼 아키텍트의 작업만을 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다.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나의 건물이 지상에 지어지는 것을 보고 싶은 욕심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건축가는 누구나 한편으로 페이퍼 아키텍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 설계를 하다보면 애착이 가는 계획안이 어떤 이유로 채택되지 않아서 버려지곤 한다. 하지만 건축가가 한 작업의 자취는 도상에 남아 그것이 표방했던 안의 가치로서 건축적 의미를 계속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나의 페이퍼 아키텍춰 작업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실현되지 않은 것 가운데 아쉬움이 남는 대전탄방동 성당과, 구리 교회, 그리고 실현될 것을 생각치 않고 계획한 미술관 등이 있다. 한편 내가 사무실을 운영하는 동안 두 번의 현상안 공모에 당선되었다. 그것들은 다른사람이 응모하고 나에게 안의 작성을 부탁하여 한 일들이다. 먼져 한 것은 김제 청소년 수련관 및 실내체육관이다. 그러나 실시상태는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못했다. 규모가 축소되고 재료의 변경으로 이미지도 많이 달라져 버렸다 한다. 94년 사무실을 열고 처음 한 일이어서 더욱 안타까웠지만 마음안에서 떠나보낼 수 밖에 없었던 기억이 있다.

구리교회
구리교회는 1992년에 계획한 작품이다. 시상식 목사님이 교회에서 확보한 부지에 장차 지을 새 교회의 계획안을 만들어 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현재까지는 자연녹지지역으로 되어 있어 용도지역의 변경을 기다려야 하고, 교회 재정상 아직 여력이 부족하여 당장 실시할 여건은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교회에 들어오면 흙이 깔린 조용한 마당에 이른다. 힌 벽에 부딪친 햇살이 은은히 그 마당에 산개되고 깊은 처마아래의 입구가 발길을 차분하게 인도한다. 그마당을 지나 단을 오르면 본당과 직각방향으로 놓인 교회 사무실 건물앞에 또다른 마당이 놓여 있다. 그 건물은 교회당과 외부의 경계를 이루며 외부의 소란 스러움으로부터 경건함을 지키는 울타리가 된다. 주차장은 교회 입구에서 분리된 경사로를 따라 지하 2층으로 연결되도록 보행동선과 분리되어 마당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깊은 처마밑을 지나 교회당 내부로 진입하는 현관문은 동굴의 입구를 막고 있는 헛간문처럼 소박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교회의 계획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언덕에 자유로이 앉게하고 설교하시던 곳과 같은 교회당의 이미지를 구상하였다. 예배당의 벽은 인공의 손길이 많이 가해지지 않은 거친 노출 콘크리트 마감으로 되어 있다. 흡사 초기 기독교에서 천연동굴과 지하무덤을 찾아 예배드리던 그 이미지이다. 예배당의 측면에서는 크고작은 창에서 창틀이 얹힌 개구부의 깊이와 각도에 의하여 다양한 빛이 들어온다. 공간은 빛에 의해 깨어나고 감성이 환기된다. 설교단은 언덕같은 오르막 경사위에 놓여있다. 신도들은 자연의 언덕처럼 경사진 바닥에 앉아 설교를 듣게 된다. 예배당의 우측에는 기도실이 있다. 천정에는 빛이 우물의 통로를 통해 내려오는 천창이 있다. 그 천창아래 기도단에 놓인 성경책에 깊숙히 번져 들어온 빛이 비친다. 지하1층은 교회의 각종 부속실로 쓰이도록 하고 지하 2층에는 주차장이 있다. 외부형태는 내부공간을 감싸고 있는 자연스런 벽과 예배당 내부의 천정의 부풀어 솟아난 공간의 볼륨이 그대로 표출되어 기본적인 조형의 매스를 이룬다. 빛이 건물에 부딪쳐 드리워져 둔탁한 매스에 따스한 감촉을 띠운다.

현대 미술관 계획
이것은 실현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닌 페이퍼 아키텍춰이다. 계획 부지는 구 서울고등학교의 터이다. 이 터의 선정은 미술관으로서 적합한 환경과 도시내의 기능적 관계를 고려한 가상의 선택이었다. 이 대지는 역사적 의의를 지닌 곳으로서 쾌적한 자연환경을 갖고 있고 도시내의 시민들의 접근이 쉬울 뿐 아니라 서울의 대표적인 화랑가 및 문화시설과 인접해 있다.
여기에서 시도한 것은 르 꼬르뷔제의 성장하는 미술관 개념의 실험이다. 그는 오랬동안 여러차례동일 개념의 미술관을 계획했고 그의 말년에 이르러 3곳에서 실현시켰다. 그의 성장하는 미술관이라는 제목은 매우 개념적이며 대단히 흥미가 있었다. 빈 중정으로 진입하여 달팽이 집의 구조처럼 와선으로 펼쳐지는 다이아그램의 프랜을 가진 인도의 아메다바드 미술관은 그 중에서도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이 계획은 와선의 동선이 내장된 르 꼬르뷔제의 무한 성장의 미술관 개념을 토대로 하였다. 그러나 내부 공간에서의 동선체계는 다르다. 여기서는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방과 여백의 공간과의 접촉을 중시한다. 그렇게 하여 인간이 행위가 건축형식에 구속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지상층은 모두 전시실로 꾸며져 있고 중앙의 오픈스페이스에 놓여진 경사로를 따라 산책하듯 오르 내리며 각층의 전시동선과 자연스럽게 연결 되도록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옥상정원으로도 나갈 수 있다. 지하1층은 사무실과 시청각실을 비롯한 각종 강의실과 자료실이 있으며 지하 2층에는 외부로부터 주차로로 연결된 로딩데크와 사무실 그리고 수장실이 갖춰져 있다.

전시를 위한 작품의 이동은 수송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전시 부속동은 특수조명장치가 필요한 작품이나 영상전시실로 계획했고 조각정원 앞에는 별동의 휴게실을 계획했다.

나는 건축에서 상자가 주는 경직성과 그 안에서 실현되는 자유로움을 통해 긴장과 이완에 의한 하모니를 지향한다. 그것은 일종의 해학의 미학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도 미술관의 단순한 윤곽안에 다양한 동선과 장소성이 나타나도록 하였다. 그리고 부속 건물은 부정형한 형태와 배치를 하여 미술관의 정형의 단순한 윤곽의 조화를 꾀했다. 외부공간에서도 중앙광장의 정형과 주변 정원 산책로의 자유스런 선이 조화되게 했다.

대전 탄방동성당
대전 탄방동 성당은 1996년 계획된 작품이다. 대전에서 설계사무실을 하고 있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분이 부탁하여 안을 만들었다. 성당은 평소 해보고 싶던 건물이어서 의욕을 갖고 열심히 만들었다.

본당으로의 진입은 전면 15M 도로에서 계단을 올라 들어가게 하고 주차장은 지하 2, 3층에 두고 후면 10M도로에서 진입이 이루어지게 하였다. 주 건물인 예배당은 2층에 위치한다. 주 현관에서 계단을 통해 걸어 오르도록 되어 있다. 그것은 예배당의 천정고를 자유로이 높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예배당의 내부공간은 직육면체의 단순한 구조로 꾸몄다. 건축은 공간의 부피로서 인간의 정서에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단순한 볼륨으로 된 공간은 건축적 힘을 발산하는 정수이다. 1층은 로비와 소성당과 교회 사무실 신부님과 수녀님의 사무실을 두었고 지하1층은 교실 및 식당과 기타 성당의 부속실로 꾸몇다. 좌측 사제관은 별동으로 사제관과 수녀실의 독립성을 갖게하고 성당과의 연계가 원활하도록 계획하였다. 1층에는 수녀실과 유치원을 두고 서로 연관되게 하였고 2층에는 신부님들의 공간으로 꾸몃다. 그리고 각각의 층으로 분리하여 본당과 연결되게 하였다. 사제관 앞 마당은 성당의 주된 외부 공간으로서 기능을 갖는다. 본단과 사제관 건물에 의해 위요되게하여 성당의 경건하고 조용한 친교의 장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여기에 보이는 계획안으로만 남게 되었다. 실제는 다른 변형된 형태로 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페이퍼 아키텍트
실현을 목표로 그려진 도면도 실제 지어지지 못하고 도면으로만 남을 수 있고 또 건축가가 의뢰자의 요청없이 가상으로 건축에 대한 구상을 내보일 수 있다. 건축의 지칭은 곧 사물화 되어진 상태를 의미하며 건축구상은 실현된 상태의 이미지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두가지 경우 모두 그 실현된 상태를 의식하고 상상하여 제안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나는 그 건축구상이 표현된 드로잉 작업 모두를 페이퍼 아키텍춰로 생각한다. 건축구상은 항상 미래에 대한 것으로서 그때까지의 경험을 활용하고 그 단계를 넘어서려는 의욕를 내포한 비젼 제시의 성격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페이퍼 아키텍춰는 일반적으로 가상의 계획으로서 후자의 의미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여기서는 나도 그런 의미로 사용하겠다. 페이퍼 아키텍춰는 실현 단계의 물리적 이행상에 나타나는 제 문제와 조건을 모두 해결된 것으로 전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광범위한 건축의 개념과 자유로운 가능성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페이퍼 아키텍춰가 추구할 수 있는 것도 결국은 건축의 본질의 범주를 넘지 못한다. 건축은 어떠한 경우도 쉘터의 구축에 있어서 구조에 의하고 그 구축된 공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그리고 건축의 상태가 나타낼 수 있는 것은 그 자연의 일부가 형상화 된 상태로서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정서적 감응의 차이일 뿐이다. 예를들면 더 침묵적이거나 역동적이거나 할 것이다.

페이퍼 아키텍춰는 한편으로 건축이론을 모색하는 의미에 더 큰 비중을 둘 수도 있다. 또 건축이론 작업에서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를 드로잉의 수단에 의해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려진 도면은 실시될 수도 있고 실시되지 않은채 남을 수도 있다. 실현된 것은 인간의 삶에 제공하는 의미로서, 실현되지 않은 것은 건축에 대한 사상과 의도된 작품성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니고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페이퍼 아키텍춰는 고유 영역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건축가는 시대속에 살면서 항상 과제를 안고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인간사회의 변화에 따른 그 시대의 올바른 건축상을 새로이 정립해야 할 책무가 항상 주어져 있다. 여기서 페이퍼 아키텍트는 미래의 상황에 대처하는 비젼을 제시하는 기획가의 역할을 맡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건축가들은 근대건축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이제 그 출발시의 이상보다는 그 안에 나타난 문제를 해결할 과제를 떠맡은 세대가 되었다. 그리고 근대건축을 넘어서는 새로운 비젼의 제시를 요청받고 있다. 비젼의 제시가 현실의 문제 해결로부터 출발하려 할 때 건축적 제안을 하는 페이퍼 아키텍트들의 작업에는 근대에 대한 반성이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포스트 모던과 해체주의의 경향이 그것이다.

페이퍼 아카텍트는 실험적이고 진취적이며 진정한 발전을 이루어내는 선구적인 작업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즉 현재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도달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건축은 실현된 것의 지칭이며 구체적으로 물성이 투영된 사물의 크기에 따른 미묘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도면은 건축을 완전하게 나타내지 못하며 그것은 기호에 의한 설명이 될 수 있을 뿐 실제의 작품성을 나타낼 수 없다. 즉 언어로 읽히는 것이며 언어에 대한 상상 너머로 보게되는 것이다.

페이퍼 아키텍트들의 작업은 실험적 추구의 성격이 강하다. 리벤스킨트의 작업을 보면 공간의 역동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충돌과 자극을 일으킬 수 있는 매체를 촉매로 끼워넣어 형태와 공간에 에너지를 일으킨다. 근대건축은 구조의 양식을 넘어섰고 이제 페이퍼 아키텍트들은 이시대의 아방가르드가 되어 마치 우주 탐험에 나선 것처럼 질서의 경계를 넘으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그것은 역사상 이어져온 인간의 어떤 시도 즉 현대까지 추구되온 인류의 지적 호기심의 탐험이 계속되는 의미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추구의 노력이 지구의 자연적 균형을 깨뜨리고 생명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일이라면 그 지적 호기심은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과 같이 위험한 결과를 초래 할 것이다. 건축은 건축이 형성되는 본질적 특성으로부터 두가지의 흐름이 전개된다. 하나는 구조로 부터의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것이며 다른 하나는 건축이 인간의 명상과 회복의 기능을 갖게 하는 일이다. 전자가 문명의 극치를 추구한다면 후자는 건축이 지은 원죄를 해소코자 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건축은 정서에 반향을 일으키는 장치의 상태로서 인간에게 영향을 끼친다. 건축은 사고로부터 사물에 이른다. 영감이 사물에 닿아 어떤 질서를 이루게 하면 감동을 낳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건축적 사고를 구체화 시켜 사물이 되게 하는 수단으로서 드로잉이 있다. 또한 건축은 중력에 승리하는 물리적 질서로 구축되어야 한다. 누구도 지어진 결과의 안전과 조합을 정확히 예측하지 않고서는 건축에 착수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예측을 위해서도 도면을 작성해야 한다. 과거 오랫동안 사용된 건축양식으로 도면 없이 지을때도 축적된 경험에 의한 결과의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도면은 음악의 연주를 위한 악보, 영화의 시나리오와 같다. 건축가의 구상의 감각은 체험으로부터 비롯된 지어진 상태를 정확히 지각한 후여야 한다. 포도주를 시음하는 사람처럼, 작곡가처럼, 지어진 건축의 상태를 정확히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흰 백지위에 무었인가 그려 넣으면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자신의 인격이 된다. Le Corbusier는 말한다. 악보를 연주하는 것처럼 도면에 표기된대로 시공을 하면 사고는 실체가 된다. 설계와 시공사이에는 시간의 여백이 있다. 그 여백에서 제대로 다듬어 지지 않고 태어난 건축은 재앙이 된다.

역사상 건축사에 큰 업적을 남긴 건축가들은 그의 작품 뿐만 아니라 글과 스케치 등을 통해 그들의 건축사상을 세상에 나타내어 영향을 주었다. 그 중에는 실현되지 않은 계획안 만으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것도 있다. 르 꼬르뷔제의 300만인을 위한 도시계획안은 그후 전개되는 도시계획이론에서 논의되는 출발이 되었다. 1922년 여름 파리의 샤롱 도톤누의 전람회 운영을 맡고 있던 마르세르 템포럴은 르 꼬르뷔제와 도시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중 300만을 위한 도시계획안을 한번 만들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르 꼬르뷔제가 그 말을 받아서좋습니다. 당신을 위해 샘을 하나 만들겠습니다. 그리하여 뒤에 300만명의 도시를 두기로 합시다.그리고 300만명의 현대도시에 의해 르 꼬르뷔제는 그후 수십년에 걸친 그의 활동의 골격이 될 도시계획의 원리를 개략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르 꼬르뷔제의 300만을 위한 도시계획은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그 연구가 그후 근대 도시계획 논의의 토대가 되고 또 근대도시의 문제에 대한 비난을 한몸에 받게 되기도 하였다. 도시내 토지의 효율적 이용 추구와 자연으로의 유기적 환원성을 위한 녹지 확보의 문제는 여전히 근대 도시계획의 핵심적 과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실현되지 않은 계획안도 역사적 의의를 갖게되며 실제된 것보다 더 큰 의의를 지닐 수 있음을 보았다. 그점이 바로 페이퍼 아키텍춰가 확보할 수 있는 영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페이퍼 아키텍춰의 또 다른 의의는 작가가 주장하고 싶은 개념만을 충실히 나타낼 수도 있다. 그것은 수학이 엄밀한 학으로서 하나의 완전한 식을 세우는 노력을 하는 것과 같다.

영국의 피터 쿡은 스스로 페이퍼 아키텍트라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실현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 자체의 영역을 깊이 탐구하는 건축가이다. 그는 실재 짓는 일은 안한다. 하지만 그는 그 자신의 작업에 확고한 의식을 갖고 건축가로서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의 작업은 실제 지어지는 건물에서 완성도를 추구하듯이 치열하게 작업한다. 그 치열함은 그 자신의 작업을 가상의 공허함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작업에서 모든 건축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해결하고 다듬는다.

철학가는 언어의 도구만으로 사상을 제대로 담을 수 있다. 건축은 말로 설명하기보다 그림으로 나타내야 할 부분이 더 많을 수 있다. 페이퍼 아키텍춰는 도면으로서 건축의 사상을 가다듬는 건축의 이론작업의 의미도 갖을 수 있다. 실제 건축이 실현을 위한 기술적 치밀성에 들이는 노력을 페이퍼 아키텍트는 개념적으로 완성된 건축을 다듬는 일에 기울이는 것이다.

그것은 건축의 참된 이론 작업이 될 수 있고 또 이론의 검증 작업의 의미일수도 있는 일이며 그러한 영역만을 다루는 건축가가 필요하기도 할 것이다. 건축가들은 개념만으로 이루어진 건축을 할 수 있다면 하고 바란다. 개념은 건축이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건축이 실현과정에서 부딧치는 제반 여건및 한계에 부딧쳐 본래 의도에서 후퇴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은 선이 구부러지지 않고 항상 곧게 펼칠 수 있다면 건축은 개념들로만 이루어진 시가 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페이퍼 아키텍춰는 실현된 건물이 갖는 하나의 인격과 같은 것은 획득하지 못한다. 도면 상에서 아무리 훌륭한 작품성을 띤다 해도 실제 이미지를 획득할 수는 없기 때문에 페이퍼 아키텍춰는 상상하게 할수 있지만 피부로 느끼게 할 수는 없다.

주제를 표현의 대상으로 하는 모든 예술이 좋은 주제 선정에 고심하듯이 건축은 좋은 건축이 되게 하고자 하는 희망에서 좋은 조건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페이퍼 아키텍춰는 조건을 가상으로 정할 수 있음으로 불리한 제약을 배제하려 할 것이다. 그리하여 제약이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면 마음 먹은대로 좋은 건축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 쉽지만, 실제상황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조건 없음은 자칫 계기를 갖지 못하여 공허해질 수도 있다. 화가는 빈 캔버스에 꽃 한송이를 그릴 수도 있고 드넓은 산야를 가득담아 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을 그리는 선택이 작품이 우열을 결정짓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수 없다. 예술성은 제작의 조건보다 각각의 작품의 완결성으로 평가된다. 건축의 힘은 형태, 재료, 공간, 등 모든 것에 의해 나타난다. 그 어떤 요소의 중시가 건축의 작품성을 결정짓는데 절대적으로 우월하거나 열등한 이유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건축은 건축가가 의도하지 않은데서도 스스로 사물이 갖는 힘을 발산하고 있다. 건축은 본질적으로 존재에 대한 물성이 사물의 크기에 관계하여 발산되는 경외의 성질을 띠고 있다. 사물이 질서를 이루면 느낌이 커지듯이 건축의 힘은 자신이 갖는 질서에 의해 증폭된다. 인간은 질서에의 경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질서에의 노력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며 노동에의 경외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가가 그리는 설계도면의 선은 회화의 선과달리 상상 속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선이다. 건축가의 선이 회화의 선처럼 되어선 안된다. 도면의 선은 함축된 세계를 기호로서 표현하는 선이다. 건축물은 그 내부를 들어가보지 않고서는 그 건물을 제대로 지각할 수 없다. 때문에 도면의 선은 외부와 내부를 통찰한 추상의 선이며 드로잉은 정신적인 작업이다.

건축은 아무리 디테일을 잘 만들고 모든 부분을 정확히 설계한다고 해도 지어진후 측정할 수 없는 불가사의 한 힘이 있으며, 아무리 멋진 개념도 실제되지 않으면 공허할 뿐이다. 그래서 건축은 추상과 실제 모두에서 갈등한다. 건축에서 이론은 쉽고 실시는 어렵다. 수 많은 이론이 있으나 그에 따른 좋은 건축은 드물다. 건축은 모든 부분의 제 관계를 통해 인간의 정서에 반응하는 예술이다. 결국 좋은 건축이 되는 것은 실제상의 좋은 균형을 이루는 문제가 된다. 건축의 피막은 사물로서의 형상을 띤다. 인간은 모든 지각되는 대상에서 미적 질서의 안정감을 보고자 하며 건축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건축이야 말로 인간이 의식하는 질서의 심볼이었다. 건축의 형상에 질서를 갖게하는 것은 쉘타의 구축에 이어 건축가에게 맡겨진 두 번째 책무이다.

건축에는 미래에 대한 꿈과 인간이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이 담겨진다. 인간은 꿈을 꾸면서 그 꿈에 실제 이르리라는 기대는 크게 가지지 못하지만 건축가는 인간의 꿈을 현실로 이룰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건축을 꿈꾸는 것은 인간의 행위중 가장 설레이는 일의 하나이다. 건축은 존엄한 인간에 관한 일이므로 기본 전제로서 그에 걸맞는 환경으로 창조되어야 한다. 건축적 상태는 그 안에서 생활하는 인간을 존귀한 상태로 또는 열등한 상태로 대접하는 결과가 된다. 국가가 추상적으로 설정한 주거의 지표를 인간으로서 품위를 갖출 수 있는 곳으로 실현하는 것은 건축가의 임무이며 건축가만이 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공헌이다. 건축가는 인간을 향한 애정으로부터 발로된 인간의 이상적인 세개의 꿈을 항상 마음에 담고 있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꿈이 실현되기를 항상 갈망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발주자가 없이도 건축은 종이위에서 추구되고 있다.

내가 감명받은 국내외 페이퍼 아키텍트와 건축
앞에서 말한대로 내가 생각하는 페이퍼 아키텍춰의 의미는 건축의 이미지의 추구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서 얘기하는 사람들은 건축의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추구하는 여러가지 성격의 예를 든 것이다.

리벤스킨트는 정말로 엄청난 사람이다. 그가 건축에서 시도하는 것들은 자극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실현과 비실현의 경계를 두지 않고 모든 열정을 쏟아붓는다. 그가 건축가로서 실제 실현한 작품은 베틀린 박물관 뿐이지만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그것은 그가 그 작품을 완성하기 까지 오랜기간동안 페이퍼 아키텍트로서 실현과 동떨어진것처럼보이는 작업을 인내심 있고 성실하게 해왔기 때문이다.

그가 그동안 페이퍼 아키텍트로서 닥아온 생각을 실현해 보임으로서 페이퍼 아키텍트들의 작업이 허구라는 오해를 불식시키고 그 분야의 작업을 하는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작업이 건축의 중요한 실제적으로 확실한 탐구과정으로서 의의를 지닐 수 있겠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의 건축영역의 확보는 중력과의 대응에 얽메이지 않고 사고를 그 이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페이퍼 아키텍트들은 건축의 자연과의 유기성만을 고집하지 않고 건축에서 힘의 세기를 최대한 확장하려 한다. 그들의 건축은 자연과 공간의 대응관계에 촉매가 되는 어떤 의미를 끌어들여 요소를 늘리고 그들을 충돌시켜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다. 또한 그의 추구방향은 현실까지 이룩된 사상의 범주, 도시구조의 범주, 삶의 태도에 대한 인식의 범주, 문화에 대한 범주등 모든 범주를 뛰어넘으려는 것이다. 근대건축이 새로운 구조해석에 의해 스타일을 붕괴시켰다면 다시 리벤스킨트와 같은 이 시대의 아방가르드들은 중력의 체계마져 붕괴시켜 4차원적 공간을 만들려 한다.

내가 칸을 페이퍼 아키텍트라고 하는 것은 그가 건축을 결정짓기까지 인간과 사물에 대한 근원적인 사색으로 개념을 형성한 후 그 개념을 표상하는 과정으로 그의 건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의 건축은 인간 및 사물의 존재와 세계내의 상호 관계에 대한 철저한 철학적 사색으로부터 비롯된 산물이다. 건축에 대해 한 유명한 그의 말들은 그가 얼마나 인간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있는가를 나타내 준다. 그는 건축에서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느끼는 것과 같은 경이를 만날 수 있게 하려 한다. 그가 건축에 대해서 한 빛과 침묵, 질서, 오더, 방에 관한 말들은 존재에 대한 본질을 통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서 건축은 인간의 바라봄을 통해 정신을 고양시킬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의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인간이 건축을 어떤 상태로 만드는 것은 곧 인간의 정신적 존재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칸이 인간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있음으로서 그의 건축은 그 경외감을 추구한다.

건축의 본질적 개념을 담고있는 칸의 글은 인간에 대한 사상으로서 감명을 준다.그래서 때로 그의 글은 진리의 상태로서 그의 건축보다 위대해 보인다. 그의 건축은 인간과 우주에 대한 성찰을 통한 바른 존재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다. 그는 건축이 인간의 감각에 닿아 심금을 울리는 사물이 되게 하려 한다. 그가 종이위에 그리는 선은 이데아를 찾는 것처럼 건축을 통해 인간을 이상향으로 인도해가려는 갈망이 느껴진다. 칸이 건축에서 추구하는 것은 도()와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

피터 아이젠만은 나에게 또다른 페이퍼 아키텍트로 인식된다. 그것은 그의 건축의 질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다. 그는 자신의 작품마다 엄밀한 이론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설계작품에 일련번호를 매겨가면서 그의 건축적 입장, 작가로서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이라든가 전개과정을 꼼꼼히 설명한다. 그의 건축에서 읽혀지는 것은 건축언어 정립에 대한 의욕이다. 그는 근대건축이 보여준 탈 양식에 대해 그것을 코드 상실의 문제로 인식하고 건축의 질서를 위한 언어적 법칙성을 찾으려 한다. 근대건축이 추구한 것은 그 이전에 건축이 걸어온 구조에 복종했던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것이었다. 이 자유를 가능케 한것은 테크롤로지였다. 과학은 그동안 인류가 직관적으로 발견하여 오랬동안 존중했던 구조방법보다 훨씬 효율적인 새로운 가능성을 알려주었다. 구조를 기초로 정형화 돤 건축양식의 체계가 깨어고 건축의 주체가 구조에서 공간으로 바뀌었다. 구조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도구로서 공간에 봉사하는 임무만이 주어졌다. 과거 구조를 따르던 형태는 이제 기능을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 형태는 자의적이며 완결된 형식체계를 갖고 있지 못하다. 피터 아이젠만은 바로 건축의 그 점을 문제시한다. 그는 기능의 절대성을 의심한다. 가장좋은 미술관이 처음부터 미술관으로 계획된 건물이 아니고 개조한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중시한다. 즉 내용이 형태에 적응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여 건축에서 다시 형태를 중시한다. 그는 형태의 언어를 코드화하고 그 문법으로 자신의 건축을 한다. 아이젠만의 형태 언어는 기능을 따르지 않고 관념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건축을 할 때마다 그 자신의 이론 정립을 함께 고뇌해야 한다. 그의 건축은 이론적 탐구의 성과물인 것처럼 인식된다. 그러한 점이 그를 페이퍼 아키텍트로 여겨지게 한다. 그는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자기의 생각을 검증하며 보완해나간다. 마치 실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작업하는 사람처럼 그 자신의 작품에 논리적 탐구를 계속한다.

움베르토 깜뽀빠에자의 건축에는 시가 있다. 그의 스케치에 나타난 흔적과 실제지어진 건물의 이미지는 일치한다. 그 일치야 말로 그가 건축을 순수한 시적 개념의 추구로서 만들어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개념은 공상적인 것이 아니며 그의 스케치에 나타난 개념은 항상 그의 건축에 이룩되어 있다. 건축에 나타나는 공간의 부피, 빛의 드나듬, 출입의 위치나 진행 방향에 따른 장면의 인식은 인간에게 정서적 반향을 일으킨다. 건축가는 이러한 물리적 요소들의 배열을 통해서 인간의 감동을 자아낼 수 있다. 그 감동의 극치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 건축가가 자신의 장르를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꿈일 것이며 페이퍼 아키텍트들은 그 꿈을 종이위에 그리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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