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충남지역 전통건축 답사기
출강하는 학교에서 전통건축 답사에 학생들을 인솔해 다녀왔다. 시기는 항상 10월 중순의 중간고사를 치룬 다음주에 시행하기 때문에 10월 4째주가 될 때가 많은데, 이맘때는 한창 가을이 무르익는 계절이어서 답사에 안성맞춤인 날씨가 된다.
그동안 경남권, 경북권, 전라도권, 충청도권으로 나눠 매해 다른 지역을 선택해서 시행했는데, 올해는 충남지역을 1박 2일 돌아보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경남이나 전남지역을 갈 때는 2박 3일로 시행하기도 했었다. 퍽 오랫동안 답사 인솔을 맡아왔는데 나는 같던 곳을 반복하는 편이지만 새로 가는 학생들은 늘 첫걸음이니 빼놓을 수 없다.
10월 23일 학교 분수대 앞에서 당초 출발 예정시각인 8시를 조금 8시 10분 출발했다. 구리톨게이트를 지나 하남분기점에서 판교로 가서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안성-평택 고속도로로 진입하여 서해안 고속도로로 접어든 다음 10시 23분 서산 톨게이트를 지나가니 주변의 농촌 풍광에서 평온한 느낌이 들었다.
서산 톨게이트를 지나 조금 가다보면 너른 민둥산이 펼쳐지는 이색적인 풍광을 만난다. 그곳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너른 삼화목장인데 가다보면 소떼가 유유히 풀을 뜯는 모습이나 씨숫소 사육장 같은 팻말이 보인다. 그 곳을 지나 개심사 가까이 접어들면서 만나는 저수지의 청량감도 기분을 좋게 한다. 그 인근을 지나다 보면 ‘개심사’라는 사찰 이름의 뜻과 같이 마음이 열릴 듯 했다.
제1일
○ 개심사
10시 40분 개심사에 도착해 답사를 시작했다. 서산 개심사는 서울에서 당일로 다녀 올 수 있는 인기 있는 답사지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가 서울에서 당일 코스로 추천할 만한 코스여서 그의 가족이 “우리도 한번 가자”고 할 때 다녀온 코스였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내려 일주문으로 들어서 숲길을 가다보면 산길로 접어드는 입구에 한자로 ‘세심동’, ‘개심사입구’라고 새긴 표지석이 좌우로 서 있다. 그 위로 올라서 키 큰 소나무가 우거진 굽은 산길을 한가히 걷다보면 마음을 씻고 마음이 열리는 곳이라는 말 뜻대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하다.
연못 가운데 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너 개심사 경내로 들어서면 크지 않지만 짜임새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꾸밈없는 느낌과 일상의 체취가 배어난다. 주 영역인 대웅전 앞마당은 전후좌우로 대웅보전과 심검당, 요사체, 그리고 전면의 루 등, 각기 쓰임이 다른 4채의 건물이 둘러쳐져 있는데, 마당의 넓이와 건물 높이와의 비례가 적당하여 편안한 느낌을 준다. 다른 사찰들도 대게 주불전 앞마당 전후좌우에 건물들이 둘러친 곳이 많지만 큰 사찰들은 불전도 크고 마당의 넓이도 넓어서 여기 같은 아늑한 느낌을 느끼기 어렵다.
개심사가 편안한 인상을 풍기는 것은 사찰의 규모가 과도하지 않고 사찰로서의 품격과 수행자의 생활공간으로서의 일상적 체취가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불과 수행 생활이 일체로 조화되어 있다. 대웅전 마당 우측 공양간에서도 살림의 체취가 풍기는 굴뚝이 솟아 있고 주변에는 채소밭과 우물, 창고 등이 여기 저기 산재해 있다. 높지 않으면서 경내를 편안히 감싸는 지형과 꾸밈없이 자태를 드러내는 나무들도 사찰과 함께 조화를 이룬다. 봄철에는 산 벚꽃 등 조경으로 꾸며지지 않은 자연의 초목에서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 산자수명한 느낌을 띤다.
개심사 경내는 입지 조건에 따라 당우들이 옆으로 늘어서 있다. 정면에서 볼 때 좌측의 심검당 뒤로는 선방이 있고 우측으로는 요사체에 이어 삼성각, 명부전, 그리고 맨 우측 야트막한 능선에 산신각이 놓여 있는데 각각이 독자적인 영역을 이루고 있어서 전체적인 절의 깊이감을 형성한다.
○ 보원사지
개심사를 나오면서 그 입구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몇 년 전 같은 목적으로 개심사를 왔을 때도 여기서 밥을 먹었는데 식사 후 카메라 가방을 두고 가다 다시 찾으러 오기도 했었다. 식당으로 쓰이는 건물은 실내 공간이 넓어서 우리 단체 일행이 앉고도 넉넉히 비워져 있었다. 지은 지가 200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천정을 올려다보면 연등천정에 가늘고 굽은 서까래가 넓은 간격으로 쓰여 있고 마감면은 황토흙을 발라 놓았다. 주인이 몇 일전 외국 대사가 와서 식사를 했는데 며칠 후 다시 오겠다고 했다며 뿌듯한 표정을 지어서, 다시 오면 사인을 받아두라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다음 답사지인 보원사지로 이동했다. 버스에서 내려 보원사지 쪽으로 다가가니 빈 벌판에 탑과 당간지주 등 석조물만 드러나 보여서 학생들이 이곳에 왜 왔을까 하고 생각할 것 같았다. 부지 안으로 들어서서 평평한 터에 수직으로 솟아 보이는 당간지주 앞으로 가서 보원사지에 대해 설명을 했다. 이곳은 통일신라시대 화엄종의 전파시기에 지어진 화엄십찰의 한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다.
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학생들에게 “아무 것도 없는 듯하지만 다 있다“ 는 말을 했었다. 즉 목조 건물은 다 없어졌지만 썩지 않고 불에 타지 않는 탑과, 부도, 당간지주, 커다란 석조 물확, 그리고 건물에 쓰인 여러 가지 돌들은 그 시대성과 사찰의 규모를 생생히 느낄 수 있게 한다.
화엄종은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로 귀결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화엄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조성한 화엄십찰은 신라가 통일을 이룬 후 삼국시대 적국이었던 백성들의 마음까지 하나로 아우르려고 전국적으로 보급하려 했던 국가적 사업이었다. 그래서 그 시대 중심이 되는 고을에 하나씩 지은 사찰이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다. 즉 그 사찰들이 들어선 곳들은 각기 지역의 중심지격인 의미를 갖고 있다. 보원사지는 전체 영역이 광활하여 그대로 남아 있었더라면 이 인근의 중심 사찰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한적한 곳이지만 당나라와 교역이 중요시 되었던 시대 상황에서는 이 지역이 활발한 교통로였다.
답사객들을 초급, 중급, 상급으로 나눈다면 상급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 여기 같은 폐사지라고 하는 말이 있다. 불타지 않은 석조 유물들은 연대를 생생히 들려준다. 비록 건물은 없지만 세월은 고스란히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폐사지에 가면 사찰을 처음 조성할 당시의 터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수 많은 사찰들이 있고 그 절들의 유래를 보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곳들이 많은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은 13세기를 넘지 않으니 건물들이 번듯이 남아 있는 사찰들도 처음에 지은 건물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지어진 것들이 많다. 하지만 석조물들은 절을 조성할 때 만든 것들이어서 그 시기의 시대성을 띠고 있다. 여기 남아 있는 법인국사 부도처럼 통일신라 말기는 승탑으로 불리는 부도의 조영이 최대로 활발했던 시기이다. 즉 단지 석조물로만 보면 초기 상황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건물이 있거나 없거나 마찬가지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폐사지에서는 터의 원형성과 장소성을 더 크게 느낄 수 있고 거기에 옛 사찰을 모습을 상상으로 떠올려볼수도 있으니 상급자들이 좋아하는 답사지라는 말도 일리가 있을 듯하다.
○ 서산마애삼존불
보원사지로 들어섰던 길을 뒤돌아 나와 소박한 휴게 시설들이 있는 건물 옆에서 개울에 걸쳐진 다리를 건너 산길을 조금 올라 서산매애삼존불 앞에 당도했다. 이 불상은 백제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커다란 바위에 석가모니불과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의 세 불상을 돋을새김 형식으로 조성한 것이다.
이 같은 부조 불상은 여기저기서 볼 수 있지만 그 우수성은 이 불상이 최고로 꼽힌다. 화강암을 다듬어 조성한 미소를 머금게 한 이 불상의 표정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미소처럼 생생하다. 석재에 부조한 형식으로서 그 완결성과 예술성은 조형예술의 극치라 할 만한데, 그래서 흔히 이 불상의 표정을 백제의 미소로 칭한다.
이 불상의 조성에는 자연 기후에서 오래 보존 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던 생각도 나타나 있다. 즉 불상 위쪽의 돌출된 자연 바위를 이용해 지붕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불상이 조성된 면이 80도로 기울어져 비를 바로 맞지 않게 했다. 이 불상이 놓인 위치는 백제에서 당나라로 가는 지름길 경로에 있는데, 당나라와의 교역이 활발할 때 그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안녕과 부처님의 가호를 빌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본다.
○ 해미읍성
서산마애삼존불을 보고 나와 이동해 2시 55분 해미 읍성에 도착했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서 조선시대 읍성 가운데 순천 낙안 읍성과 함께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다. 읍성은 전국의 고을 중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곽이다. 이순신 장군이 여기서 군관으로 복무를 하기도 했었다. 훗날 나라를 구한 그가 큰 역할로 나아가는데 중요한 경험을 쌓았던 곳이다.
해미읍성은 1491(성종22)년에 축조되었는데 성곽의 둘레가 1.8km고 높이는 5m인데 현재는 여장이 허물어지고 없는데 동, 서, 남쪽의 3개의 문이 있고 성곽 곳곳에 치가 설치되어 있다. 성 안 맨 뒤쪽은 야트막한 야산이 있는데, 그에 기대어 고을 수령이 마을을 다스리던 동헌과 객사가 있고 앞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옥사가 있다. 성 안에 민가도 들어차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관광객을 위해 지은 휴게시설과 당시 모습으로 재현해 놓은 몇 채의 초가가 있다.
해미 읍성에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있다. 1866(고종3)년에 발생한 병인양요의 영향으로 천주교인들이 혹독한 탄압을 받던 시기에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많은 희생을 당했다. 옥사 주위에 있는 큰 호야나무에는 목을 매달아 처형할 때 쓴 철사줄 등 그 흔적이 남아 있고 문 밖에는 자리개질을 했던 너른 판석이 남아 있다.
해미읍성 답사를 마치고 인근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한 다음 덕산의 숙소로 이동해 여장을 풀고 7시에 모여 토론을 했다. 학생들이 처음에는 하두마디 하고 지났는데 점차 조리 있게 그 날 답사한 곳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을 꼽아 소감을 예기했다. 학생들의 예기를 들은 다음 내가 짧게 보충 설명을 했다.
제2일
○ 수덕사
7시 40분 숙소를 출발해 수덕사 앞 관광시설이 몰려 있는 곳에서 된장찌개백반으로 아침을 먹었다. 건강식이라고 하는데 이 식당을 방송에서 소개했던 자료가 벽면에 부착되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수덕사 일주문에서 표를 사고 안으로 들어섰다. 전에는 그곳에서 한참 안으로 들어선 수덕여관 앞에서 입장표를 구했는데 그 사이 옮겨진 것 같았다. 조금 앞쪽으로 가다 우측의 부도전에 들러 부도형식의 변천에 대해 짧게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안쪽 일주문에서 단체 사진을 찍은 다음 이응노 화백이 머물렀던 수덕여관을 돌아보았다. 막 빗질을 한 흙마당에 청초한 아침 햇살이 닿아 더욱 정갈한 느낌을 띠었다. 입구 좌측의 그림을 새긴 바위 앞에서 이응노 화백과 수덕여관에 대해 설명한 다음 수덕사 경내로 들어섰다.
일주문부터 일직선으로 난 금강문 천왕문, 그리고 수덕박물관 누 밑을 지나 높다란 축대에 놓인 돌계단을 올라서니 대웅전 앞마당이 시원스레 열려보였다. 그리고 맑은 아침 공기를 쏘이며 뒤돌아보는 시선도 멀리 트여 보여서 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대웅전 앞 2개의 기단 위에는 건물이 있었을 법 한데 지금은 비워져 있고 가운데 탑이 중앙에 하나씩 놓여 있다. 앞쪽에 놓인 성보 박물관이 과도하게 세워져 있어 본래 가람의 체취와 단절된 감이 있는데 그나마 절벽 아래에 있어 대웅전 영역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건축적으로 수덕사는 한국전통건축 가운데 그 연대가 명확히 그러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 있는 곳으로 중요하게 다가온다. 즉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이 곳 대웅전을 해체 수리 할 때 나온 묵서명에서 1308(충렬왕34)년에 지어진 것이 밝혀졌다. 그렇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은 봉정사 극락전이고 그 다음이 부석사 무량수전, 그리고 수덕사 대웅전이 그 다음 오래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수덕사 대웅전은 오래 되었다는 것 이상으로, 건축적으로 볼 때 그 양식적 완결성과 구조적 빼어남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나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 가운데 목조건축 기술과 양식적 완결성이 가장 빼어난 곳으로 꼽고 있다. 연륜이 느껴지는 튼실한 기둥은 배흘림 이 되어 있고 대들보의 단면은 항아리 모양으로 가공되어 항아리 보로 불린다. 그리고 공포는 간결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이며 소 혀를 뜻하는 공포 끝 부분의 ‘쇠서’도 원만하고 기품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중도리 사이를 연결하듯 걸쳐 놓은 우미량은 자연목을 사용했건만 거기에 사용된 모든 것이 다 깥은 크기와 형태로 정교하게 가공해 사용되었는데, 그 자체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희귀한 양식이다. 그 외에도 창살과 문고리 하나에 이르기 까지 모든 부재가 건물 전체와 부분간의 적정한 비례와 맵시를 띠고 있어서, 이 대웅전은 그야말로 하나의 건축물로서 고상한 품격을 지나고 있다.
수덕사는 만공, 원담 스님 등의 근대 시기에 선풍을 날린 고승들이 수행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 분들이 수행했던 암자와 부도탑 등에 그 분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데 사찰의 건물들이 누구의 집이 아니라 머물다 간 곳이라는 의미를 새겨 볼 만 하다. 지금은 집이 경제성과 더불어 의미가 많이 변했고 이동이 잦아서 인간의 삶터로서의 의미가 약화된 듯하다.
수덕사는 만공과 원담 스님 등의 활약에 힘입어 한국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백양사와 함께 한국 불교의 5대 총림중 한 곳이 되었다. 총림은 불전과 선원, 강원, 율원, 염불원 등을 모두 갖추고 종단의 승인을 받은 곳이다.
수덕사는 창건 시기 수덕도령과 덕숭낭자에 얽힌 전설이 깃들어 있다. 수덕사 근처에 살던 수덕도령이 그 마을 덕숭낭자의 미모에 끌려 청혼을 하자 절을 다 지으면 승낙을 하겠다고 해서 질을 짓기 시작했는데 수덕도령이 덕숭낭자를 빨리 안고 싶은 망상 때문에 절이 다 지어질 무렵 화재로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그 후 도령의 간청으로 혼인은 했지만 낭자가 자신이 몸에 손을 못 대도록 했으나 억지로 안으려는 순간 갑자기 뇌성벽력이 일어나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간 곳이 없고 낭자의 한 쪽 버선만이 도령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한다.
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그 후 도령은 절을 완성하고 자신의 이름과 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수덕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또한 이 곳 암자인 견성암은 ‘청춘을 불사르고’ 라는 수필로 유명한 일엽스님이 머물던 곳으로, 그처럼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사찰이다.
○ 추사고택
수덕사를 나와 추사고택으로 이동하는 동안 이 지역의 명물로 꼽히는 사과 과수원이 드문드문 눈에 띠었다. 그리고 지형은 모두 야트막한 구릉지여서 시선이 멀리 트이며 여기저기 서 있는 집들과 대지에서 자라는 갖가지 작물들이 농촌의 삶내음을 풍겼다.
11시 34분 추사고택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추사고택으로 들어서면서 좌측에 너른 잔디가 깔린 추사 묘소가 보였다. 돌계단을 올라 솟을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앞에 보이는 사랑채가 밝은 햇살을 받고 있었다.
추사고택은 조선시대 서예의 대가로 불리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추사 선생의 글씨는 ‘추사체’로 불리는 독자적인 글씨체로서 그 예술성을 높게 평가 받고 있다. 추사는 이 집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큰 아버지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가서 살았다. 추사는 어렸을 때부터 글씨를 잘 썼고 총명해서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가 이곳에 살았던 여섯 살 나이에 입춘대길을 써서 어른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를 본 박제가가 자청해서 스승이 되겠다고 했다 한다.
추사의 집안은 명문가였다. 그의 할아버지인 김한신은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의 남편으로 왕의 부마였고 추사의 아버지는 병조판서를 지냈다. 그런 까닭으로 추사가 24살 때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23살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을 다녀올 때 청나라의 석학 옹방강을 알게 되었으며 그 후 그를 스승으로 받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교류를 통해 중국인들에게 추사의 천재성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추사도 그 후 정치적 부침을 겪게 되고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추사체는 그 같은 시련을 겪은 과정에서 완성되었으니 고난의 세월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 집은 양반 가옥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현재는 사당과 안채, 사랑채만 있고 행랑채는 없다. 지을 당시 추사가 문과 급제한 것을 축하해 53개 고을에서 한 칸씩 지어주었다고 한다. 양반가옥은 예를 실천할 수 있도록, 성리학에 입각해 예를 가옥에 반영한 구조로서 사랑채는 남자들의 수행 공간이기도 했다.
추사고택 안채 전면에 놓인 사랑채는 동남향으로 꺾인 ‘ㄱ’자 집이다. 이 건물에서 특이한 점은 동남측 전면에 모두 툇간을 두고 툇마루를 달아 놓은 것이다. 그로 인해 건물의 인상이 안채와 달리 열린 느낌을 갖게 한다. 그리고 안쪽 대청의 외벽에는 일반적인 방처럼 창문을 달아 놓아서 추위를 막을 수 있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추운 겨울에도 기거하기에 편리하게 되었다.
추사고택의 안채는 가운데 마당을 사방에서 건물이 둘러친‘ㅁ’자 집이다. 건물의 외벽도 모두 벽으로 둘러쳐 있어 열린 구조로 된 사랑채와 달리 폐쇄적이다. 이 건물의 구조는 평면적으로 볼 때는 단순하지만 지형의 고저 차에 맞춰 각각의 높낮이가 달라서 단면적으로는 입체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지형 차에 의해 2층 구조가 형성된 부분들이 있어서 다채로운 공간의 감각이 느껴진다. 또한 이 곳 안채의 대청마루도 추운 계절을 대비해 툇마루 사이에 외벽을 설치해 놓았다.
추사고택을 나와 명제 고택으로 가는 길에 공주에 들러 메밀국수로 점심을 먹었다. 식사가 차려지는 동안 주인이 옆에서 메밀을 직접 갈아 만든다고 했다. 그리고 빻은 메밀가루를 보여주며 원래 메밀의 색이 하얀데 다른 데서는 색소를 첨가해 밤색이 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메밀 가루로만으로도 국수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뭐든지 만드는 기술이 좋았던 그는 메밀을 빻는 기계도 일본에서 견학을 한 다음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그런 설명을 듣고 나니 메밀 맛이 더 구수하게 느껴졌다.
○ 명제고택
오후 2시 10분 명제고택에 도착했다. 이 집은 소론의 영수인 명제 윤증 선생의 고택이다. 윤증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제자이지만 훗날 그의 아버지 윤선거 선생의 묘비명 사건 때문에 정치적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그 사건은 회덕의 송시열과 노산(니산)의 윤증 간에 오간 시비라는 뜻으로 역사에서 ‘회니시비’로 불린다.
이 집은 전국의 많은 양반가옥 중에서도 ‘양반가옥’의 구조를 매우 짜임새 있게 갖추고 있다.
양반가옥의 개념은 한 가옥 내에서 생활하는 남성과 여성의 성별 차이와 주인과 노비의 신분적 차이, 그리고 조상을 모시는 사당의 의미를 고려해 조선시대 국시로 신봉했던 성리학의 이념에 따라 예법을 실천하기 알맞게 형성한 가옥 구조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집은 안주인과 바깥주인의 독립성과 연계성을 고려한 공간구조와 동선처리, 그리고 계층 간의 프라이버시 등 성리학적 관념을 건축적으로 매우 잘 구현해 놓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외부인 출입 시 주인과의 간접적인 소통의 장치 등이 마련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중문간은 외부 손님이 안채로 들어설 때 시선을 가려서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시간적 말미를 가질 수 있게 꺾여 들어가는 구조를 갖추었다. 그리고 중문간 벽 하부를 바닥에서 한자 정도 띄워 놓아서 안에서 그 틈으로 손님의 발걸음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사랑채의 구조를 보면 세대에 따른 큰사랑, 중간사랑, 작은사랑의 위치와 동선이 고려되어 있다. 아직 어린 나이의 손자는 안채와 바로 연결되어 있게 해서 어머니의 보살핌의 손길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게 했다.
또한 이 집은 기능적인 구성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즐겼던 풍류의식도 여기저기 녹아 있다. 모든 방마다 창문을 열어젖히면 건물 주변의 살가운 외부 경관이 펼쳐 보이는 차경의 원리가 적용되어 있다. 그리고 사랑채 누마루 아래 기단에 수석으로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상징적으로 석가산을 조성해 놓고 도원인가(桃源人家)라는 편액을 달아서 이곳이 무릉도원임을 암시해 놓았다. 그렇게 명산을 축조해 놓고 관념적으로 신선처럼 이상향에 머무르는 세계를 이루고자 했다. 그리고 이곳의 터는 옥녀탄금형의 명당자리이다. 집 앞에는 그 명당을 완성하는 의미로 조성한 연못이 있다. 그처럼 명재고택은 건축적으로 공간 구성의 짜임새가 치밀하고 건물 외부의 자연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으며 관념적 이상향까지 두루 구현해 놓은 집이다.
옆쪽에 위치한 노성향교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심할 때 노론 측에서 윤증을 감시할 의도로 이곳으로 옮겨 놓았는데, 그러자 윤증은 아예 담장을 헐어버렸다고 한다.
○ 돈암서원
3시 20분 윤증고택을 출발해 4시 20분 마지막 답사지인 돈암서원에 도착했다. 올해 우리나라의 소수서원, 도동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등 7개의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돈암서원은 그 곳 중 하나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물이다. 돈암서원은 조선시대 노론과 맥이 닿아 있는데, 이 곳 사당에는 예학의 대가로 불리는 사계 김장생과 송준길, 송시열, 김장생의 아들 독신재 김집이 배향되어 있다.
서원은 중국에서 처음 등장하였지만 조선이 성리학을 국시로 삼으면서 선비들이 학문을 읽히고 심신을 수양하는 장소로 자리를 잡으면서 조선에 서원문화가 꽃을 피우게 되었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이 안향을 배향한 소수서원을 처음 건립하고 그 후 이황이 선조의 친필로 된 편액을 하사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서원의 기틀이 잡혀졌다. 그리고 그 후 김굉필을 배향한 도동서원에 세워질 때부터 서원의 배치 형식이 반듯하게 갖춰지게 되었는데, 사당을 맨 후면에 두고 중심부분에 강학을 하는 강학당과 그 좌우에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 서재를 두었다. 그리고 그 전면에 루와 외삼문을 두는 구조로 정립되었다.
그런데 이 곳 돈암서원은 중심부의 강학당이 왜소해 보인다. 강당 위치에 서원의 강당을 새로 짓지 않고 사계 김장생이 가르치던 서당 건물인 양성당을 옮겨 놓았다. 서당의 격과 서원의 격이 다른데 서당의 건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그리고 그로서 강당이 외소한 상황이 되어 전체적인 균형이 잘 갖춰지지 않은 듯 보이게 되었다. 산앙루는 외삼문 바깥에 별도로 놓여 있어 전체와의 관계성이 깨져 있다. 현재는 동서재 앞쪽 서편에 놓인 응도당이 별도의 강당 역할을 하고 있다.
돈암서원을 끝으로 답사를 마치고 학교로 향했다. 천안휴게소를 지나면서 깜깜한 밤이 되었다. 길이 막혀 시간이 더 걸렸다. 구리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마무리를 했다. 8시 55분 버스가 학교에 도착해 해산 인사를 하고 깜깜한 밤에 각자 집으로 향했다.
(20191024)















게시물수정
게시물 수정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삭제게시물삭제
게시물 삭제를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