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김정호님의 묘소 참배를 다녀오며...
이틀 전 블루버드님이 카톡에 묘소 참배에 동참해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카페에 공지를 보았었지만 시간이 나질 않아 소식만 알고 있었다. 이번 주는 곡성에 출장을 다녀 올 예정이었는데 어제 곡성에 계신 분이 집안 일정이 생겨 출장을 미루기로 했다. 그 뿐 아니라 진행 중인 스케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 주말마다 도봉산을 오르고 있어 한가할 틈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의 큰 그림을 갖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해왔는데 바람이 불어 허탕 치기를 몇 번 하여 신경이 곤두서 있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소리개길 74-17(법흥리327) 기독교공원묘지에 있는 김정호님의 묘소는 처음 가지만 그쪽 지리를 잘 아는 편이라 대중교통으로 찾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묘지 인근의 헤이리 마을의 조성과정과 의미에 대해 쓴 나의 장문의 글을 건축가지에 게재한 적도 있었다.
9시 20분 합정역에서 2200번 버스를 타고 자유로를 달렸다. 좌측 차창 너머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하구 주변 풍경이 언듯언듯 보였다. 강 건너는 이북 지역이고, 오두산 통일전망대 앞쪽이 북한과 가장 가까운 거리로서 강 중앙부근에 군사분계선이 지나고, 강변에 설치된 철조망이 군사적으로 대치중인 긴장감을 자아낸다. 오두산을 지나 우측으로 접어들어 헤이리 예술인마을 옆으로 지나갔다. 가수도 예술인이니 김정호님이 살아계셨다면 이곳에 정착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보게 되었다.
카페에 게시된 약도와 실제 버스 운행 경로가 달라서 헤이리 마을을 북동쪽으로 한 바퀴 돌아 10시 25분 묘소 인근의 헤이리 마을 8번 게이트 정류소에 내렸다. 도로에서 민들레 병원이 바로 눈에 띠지 않아 길 가던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니 길을 건너가 우측으로 난 길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 길로 접어드니 멀리 민들레 병원이 보였다. 거기서 묘소 위치는 무난히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길을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지며 주변 풍광이 살갑게 다가왔다. 5월 막바지, 파란하늘 밝은 태양 볕이 신록을 더욱 무성하게 하고 있었다. 엊그제 비가 온 후 약간 신선해진 날씨에 대기도 맑은 날이어서 참배하러 가는 발길이 더 가볍게 느껴졌다. 길 우측에 완만하고 야트막한 산이 시선을 편안하게 했다. 잡초 사이에 있던 참새가 입에 벌레를 물고 의기양양한 몸짓으로 날아갔다. 하얀 찔레꽃과 개망초, 토끼풀이 모두 하얗게 피어 있었다. 오늘 참배 길은 묘소를 찾아가는 동안 혼자 걸으며 생각에 잠기고 싶어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이 지역은 군대시절의 추억도 베인 곳이라 그 시절의 초연하게 다가온 산과 들 풍경의 느낌도 애틋하게 기억되는 곳이다.
맑고 푸르른 날에 자연의 생기가 불러일으키는 갖가지 싱그런 느낌이 농사짓던 어릴 적 고향 산천에서 느끼던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김정호님의 노래에 배인 학창시절의 추억과 어려움을 겪으며 피어오르던 인생의 상념들도 함께 떠올려졌다.
그렇게 걷다보니 뒤에서 차를 몰고 오던 지기님이 나를 알아보고 차에 타라고 해서 인사를 하며 그냥 걸어가겠다고 했다. 다시 조금 걷다보니 태풍나비님도 차를 몰고 오다 인사를 나누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혼자 묘소까지 걸어가면서 참배길 마음을 경건하게 하고 그 분의 노래를 들으며 가졌던 느낌을 천천히 떠올리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민들레 병원을 지나 양양메탈 앞으로 가니 차를 갖고 온 회원들이 차를 대고 서 있었다. 묘소로 가는 길을 공사를 하고 있어서 차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그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좌측 길로 들어서 묘소를 찾아갔다. 우측에 연말 정모때 노래를 부른 푸른하늘님이 서 있었다. 그 쪽에 행사 천막이 쳐진 걸 보니 그 곳이 맞는 것 같았다. 처음 찾아온 산소로 가까이 다가가면서 마음을 여몄다. 잠시 묵념을 하고 가지고 간 낫으로 함께 벌초를 했다. 잠시 후 회원 분들이 하나둘 모여 들었다.
지기님이 핸드폰을 꺼내들고 묘소주변 이곳저곳을 비추듯 하고 있었다. 그리고 회원들에게 이영희 여사님이라며 손을 흔들어 드리라고 했다. 이 여사님이 편찮으셔서 이렇게 동영상으로 인사를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참석한 분들이 각자 감회에 젖어 묘소를 둘러보았다. 이상기 선생님이 그 때는 앞이 트여 있었는데 지금은 공장이 들어서서 앞을 막았다고 했다. 지기님이 핸드폰으로 하얀나비를 틀어 추모비 앞에 두었다. 추모비에 가사가 새겨 져 있어 의미가 더 명료하게 다가왔다. 지기님이 논란 듯 “저기 하얀나비가 있다”고 해서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과연 하얀나비 한 마리가 묘소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잠시 후 지기님이 시작하자고 했다. 사회를 맡은 어떤날님이 먼저 그 분의 약력 소개를 했다. 1952년 4월 21일(음력3월27일)에 광주 북동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사 온 후 가수와 작곡가로 활동하신 내력과 1985년 11월 29일 폐결핵으로 33세에 사망하여 이곳에 안장한 과정, 2002 펜키페 개설 후 임을 기리는 행사를 갖게 된 일등을 자세히 소개했다. 그는 소개를 마치며 “너무도 젊은 나이에 앗겨버린 그의 노래 세상은 온통 그리움, 고독, 슬픔, 이별 등으로 뒤범벅 된 삶의 반영이었으며 숨쉬기조차 힘들게 폐부 깊숙한 곳에서 요동쳤던 결핵균들은 오히려 숨이 끊어질듯 가숨 속에 한을 토해내게 한 것 같았습니다.” 라고 하는 말에 울컥해지는 심정이 되었다.
약력 소개에 이어 헌화 순서를 진행했다. 카페지기인 예사모님과 김정호님의 매니저셨던 이상기님이 먼저 한 다음 블루버드, 제비꽃, 태풍나비, 어떤날, 리안 님 등 운영자님들이 헌화와 참배를 했다. 그리고 이어서 제다이, 리슈, 레드레인, 블루베리, 백산, 푸른하늘. 정승, 단지, 눈빛, 리슈님 등의 참가자들이 돌아가며 헌화와 참배를 했다. 이상기님이 혼자말처럼 "그래도 우리 정호는 이렇게 펜들이 찾아주니 행복한 사람이다.” 고 했다.
묘소에 올린 제수 음식을 나눠 먹으며 한담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박이 꿀맛이었다. 지기님은 이제밤 1시까지 오늘 가져온 쑥 개떡을 만들었다고 했다. 점차 기온이 오르고 주변에 퍼져 있던 일행들이 점차 천막 그늘로 좁혀 들어왔다. 녹음의 시원한 느낌과 더운 공기가 섞여들고 있었다.
묘역 풍경을 보려고 능선길로 올라가 걸으며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야트막한 구릉이 멀리 펼쳐지고 있었다. 그 공원묘지가 산사람들의 세상보다 평온해 보였다. 김정호님이 그런 곳에서 쉬고 계신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된 추억을 떠올려보았다. 그분의 노래는 삶과 영혼이 온통 바쳐진 느낌이 들었었다.
잠시 후 묘소를 떠나 파주시 탄현면 새오리로에 위치한 전망대 누룽지 삼계탕 식당으로 이동했다. 주변에도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주변은 논과 밭이 널려 있는 농촌이었다. 안내를 받으며 들어서니 2층 전체를 독차지 하며 식탁이 준비되어 있었다. 맨 안쪽 테이블에 앉으니 앞쪽 창 너머로 자연 풍경이 보였다. 그리고 좌측 모서리 너머로는 임진강이 보였다. 우측 식탁 모서리에 자리를 잡은 보헤미안님이 내 좌측에 앉은 태풍나비님에게 지나해 연말 정모때 “태풍나비님이 부른 등대는 김정호님 다음으로 가장 잘 부른 노래였다”고 극찬을 했다. “그 노래는 박자 맞추기가 매우 어려운 노래”인데 어려운 노래를 정말 잘 불렀다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이상기님이 앞자리로 오셨다. 아까 묘소에서부터 매니저로서 활동을 함께 했던, 그리고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던 김정호님을 생각하며 홀로 한없는 감회에 젖어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대마초 사건과 요양원 입원 등에 관한 일화를 생생히 들려주셨다. “2년간 병원에 있어야 되는데 한 달 만에 몰래 나와서 음악에 몰두하다 건강을 회복할 수 없었다. 요양원에서 못나오게 하고 병을 고쳤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한 게 정호에게 미안하고 가슴 아리다”고 했다.
또 “그 시기 김정호 다큐를 만들려고 했는데 정호가 펄쩍 뛰었다. 상대방 전화 바꿔 달래서 내가 금방 죽는답니까? 하고 화를 내며 팍 끊어버렸다.” 고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참석한 분들 가운데 김정호님 생전에 교감한 분은 이 분 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분이 펜카페 회원들의 묘소 참배 행사에 함께 하시니 그 의미가 귀하고 생생해진 느낌이었다. 다른 식탁에서도 늦게 온 몇 분의 일행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한가히 예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표정이 모두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식당을 나와 고양시 일산동구 강송로에 위치한 연가하우스로 갔다. 거기서 정호님 노래 부르기 행사를 갖기로 되어 있었다. 김정호님의 노래를 참가자마다 돌아가며 부르는 시간이 지난 연말 정모때 그랫듯이 님의 정서가 공감되는 분위기가 될 것 같았다. 차가 도착해 안으로 들어서니 먼저 온 태풍나비님이 무대에서 등대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예정한데로 한 곡만 듣고 산으로 향했다.
5시 6분, 전부터 그림을 그리던 장소에 도착해 스케치를 하다 7시 40분경 해가 지는 것을 보고 내려왔다. 다시 송추 입구로 내려오니 날이 어둑해졌다. 어쩌면 오늘 참배객으로 오신 회원분들은 아직 김정호님을 그리워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마음 아프게 생을 마감한 분이지만, 이상기님의 말대로 행복한 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집으로 향하면서 일 년 중 노래방 한번 가지 않고 노래도 잘 부르지 않는 나 자신이 오늘 묘소까지 찾아가게 된 사연을 꼽아 보았다. 우선 학창시절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온 내게 절절하게 폐부를 짜르듯 다가오는 님의 노래가 공감과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아니 그보다 진실하고 삶을 다 바쳐 예술혼을 불태운 한 인간에 대한 경의이자 그리움일 것 같았다. 2011년 카페 가입인사에서 “안녕하세요?… 제 기억으로 김정호님의 노래는 님의 생명을 모두 불사른 삶 자체였습니다. 그의 예술은 단 한점의 기교나 상업적 의식이 없는 순수한 영혼 그 자체였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썼었다. 김정호 님을 생각하며 더불어 내 삶을 추억한 파란 하늘이 눈부신 날이었다.
(2017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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